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44
44화. 탄로
“그러니까···”
이노에게 생긴 ‘문제’라는 것이,
“얘가 달라붙잖아!”
“오이노네 님, 절 기억하지 못하시는지요?”
“기억이야 하지! 근데 파리스가 부르잖아!!”
별 거 없었군.
마침 저 멀리서 안키세스와 다른 일행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내가 칼을 집어넣자 아이네이아스 역시 얼떨떨한 얼굴로 칼을 치웠다.
아이네이아스의 눈동자는 여전히 막 시작되려던 전투의 흥분으로 조금씩 확장되고 떨리기를 반복했다.
“···굉장하더군.”
약간 새침한 얼굴이 된 아이네이아스는 내게 그렇게 한 마디를 던지고는 아버지 곁으로 걸어간다.
···내가 할 소리다.
내 입으로 얘기하기는 그렇지만, 내가 아이네이아스에게 가한 일격은 깔끔하고 신속했다.
소리를 지르면서 접근해 상대의 얼을 빼놓은 상태에서, 준비되지 않은 상대의 다리 하나 정도를 못 쓰게 하는 재빠른 기습.
실패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성공했다면 정말 큰일이었겠지만, 아이네이아스는 놀랍게도 내 습격을 막아냈다.
칼을 뽑아, 고개를 돌려, 내 공격 목적을 파악하고 바로 방어 자세로 전환하기까지.
순발력, 수 읽기, 그리고 전투에 대한 감각이 두루 갖춰지지 않았다면 아이네이아스는 오른다리를 보전하기 어려웠으리라.
그건 그렇고.
“아이네이아스.”
“···뭐야.”
내가 존칭 없이 이름으로만 부르자, 당황한 아이네이아스가 고개를 돌린다.
나는 칼을 집어넣었지만, 여전히 칼자루에서 손을 치우지는 않았다.
가볍게 아이네이아스를 노려보며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이노에게 무슨 짓이었던 거지?”
“그냥, 오랜만에 오이노네 님을 뵈어서 반가웠을 뿐이야. 아주 어린 시절의 친구니까. 잠시 대화나 나누려는데 갑자기 떠나시기에···”
“그리고 이노는 싫어했지. ‘아주 어린 시절의 친구’일 뿐이니까.
상대가 싫어했으면 사과를 해야 하지 않나?”
“···.”
노예가 주는 모욕에 아이네이아스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굳어졌지만, 내 곁에 바짝 붙어선 이노의 노려보는 눈빛을 보고는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인다.
아이네이아스는 곧 귀족다운 양식 있는 몸짓으로 이노에게 몸을 굽혔다.
“···죄송합니다, 오이노네 님.”
“다음부턴 그러지 마!”
“그럴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는 안키세스는···
“파리스.”
시체처럼 굳은 표정이었다.
어느새 테오 형도 내 근처로 달려왔고, 안키세스가 부리는 사람들도 모두 모였다.
조금 이상하게 일이 꼬이기는 했다만 사절단을 따라잡는다는 목표도 달성했으니, 할 말을 꺼내도 괜찮을 시점이었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다르다노스의 군주이자 카피스의 아들 안키세스.”
사람이 사람을 부를 때 쓰는 호칭은 많은 의미를 담기 마련이지만, 지금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정보값은 이것이었다.
화자와 청자 사이의 위계 관계.
아이네이아스의 동공이 저렇게 흔들리는 것도, 모두 노예 파리스가 한 도시의 군주인 안키세스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면 안키세스의 시선 처리에는 조금의 요동도 없는 이유는
“나도 반갑네. ···프리아모스의 아들 파리스.”
그 새로운 위계관계를 빠르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리라.
아이네이아스의 눈이 크게 떠진다.
“···너, 뭐야? 왕자님이야?”
오이노네 역시 그랬고.
***
밤이 짙어진 터라, 안키세스는 군말을 더 붙이기보다는 우리를 빠르게 모닥불 주위로 데려오는 쪽을 택했다.
요정인 이노는 밤의 추위를 피할 필요 따위 없었지만, 역시 우리를 따라 모닥불 주위에 함께 둘러 앉았다.
이노의 요청에 나무들은 시들어가던 마른 가지들을 떨구어 우리에게 살생 없이 땔감을 구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흔들리는 광원이 근처의 마른 풀을 태우며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
“···.”
“···.”
그리고 그 타닥거리는 소리가 이 애매한 침묵을 더욱 깊어지게 만들고 있었다.
여기서 태평한 건 단검을 기름칠한 천으로 소중히 닦아내고 있는 테오 형과 그 근처에서 나방을 쫓으며 뛰어다니는 이노뿐이었다.
···하여튼 간에 참 이노는 사람됨이, 아니 요정됨이 밝다. 적응도 빠르고.
그러지 못한 나와 안키세스, 아이네이아스의 세 사람은 한동안 모닥불을 조용히 바라보며, 스마트폰 없던 시절 층수 오르내리는 것만 어색하게 지켜보던 엘리베이터 탑승자의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어··· 별이 밝다.
“자네가 올 줄은 알고 있었지. 우리가 안내인이 필요하다 하지 않았나? 역시 아름답고 선량한 이는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군.”
여기서 어색한 분위기를 깬 것은 여기서 이노 다음으로 밝고 쾌활한 사람인 안키세스였다.
마침 꼬치에 꿰어놓은 멧돼지 고기가 다 익자 안키세스는 두 꼬챙이를 집어 하나는 내게, 하나는 아이네이아스에게 내밀었다. 나머지 하나는 자기가 입에 물고 우걱거렸고.
나도 대강 칼로 고기조각을 썰고 입으로 뜯어먹으며 안키세스의 말에 답했다.
“대강 사정은 짐작하고 있으시리라 믿습니다.”
“물론이지. 저쪽으로 비둘기 떼가 줄줄이 지나가는데 불길하기가 짝이 없어서 말일세. 그게 아마···”
안키세스는 말하다 말고 경의를 표한다.
“‘왕명’을 싣고 온 전령조들이었겠지.”
“맞습니다. 저를 왕도로 소환한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합류하기를 잘했네. 무리를 지어 다니지 않는다면, 반드시 도적이나 괴물에게 산산조각날 테니.
아, 자네 실력을 생각해보면 그렇지는 않겠군. 왕의 무사도 곁에 있고.”
나는 아이네이아스와 단 한 합을 나누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나의 실력을 충분히 가늠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무리를 지어야 안전을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으니 안탄드로스에서 트로이아까지 가려면 반드시 수십의 인원을 대동하기는 해야 했을 터이네.
그리고 이렇게 늦은 밤, 왕명을 받자마자 출발했다는 건 아마 그 수십의 인원을 챙겨가면서 소란을 일으키기 싫었다는 것이겠고.”
안키세스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테오 형과 나를 번갈아 향한다.
“결과적으로는, 정체를 들키기 싫었던 거겠지?”
“안타깝게도 정확합니다.”
나는 고기를 다시 한번 뜯다가, 고기에는 입 한번 대지 않는 아이네이아스를 보고 왠지 머쓱해진다.
“어, 뭐, 조용할수록 좋으니까요.”
“조용할수록 좋다··· 맞는 말이야. 나도 백 번은 동감할 수 있네.”
그리 말하며 안키세스는 아들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다르다노스에서는 이렇게 아들이랑 한가롭게 사냥하고 고기 뜯을 시간도 나지 않으니. 그렇지 않니, 아들아?”
“···.”
아이네이아스는 여전히 말없이 고기를 쳐다만 보고 있다. 안키세스가 채근하자 겨우 깨작깨작 멧돼지의 기름기 쭉 빠진 다리살을 잘근거린다.
“그래도.”
일순간 안키세스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한다.
“그 조용함이 오래 가지는 못할걸세. 알고는 있지?”
“···.”
이번에는 내 쪽에서 말문이 막힌다.
테오 형 쪽을 돌아보자, 고개를 끄덕인다.
이노는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와 정말로 왕자님이 맞냐며 재잘거리고 있다.
···그러고 보면,
안탄드로스는 지금 어떻게 되고 있을까?
***
“총독님, 이건 단순히 권고가 아닙니다.”
니키스 총독은 지금 몹시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스클레오스에게 하수인을 보내 파리스 왕자를 데려올 때도 신원을 숨겼고, 마차로 왕자를 안탄드로스 바깥으로 내보낼 때도 역시 최대한 준비시간을 줄이려 애썼다.
그 뒤로는 다음날 아침, 스클레오스와 안탄드로스의 다른 시민들에게 파리스의 트로이아행에 대해 둘러댈 변명거리를 어떻게든 짜내고 있었고.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저희 인부들이 모두 안탄드로스를 빠져나가는 파리스와 테오를 봤다고 증언했습니다.”
바로 스클레오스와 파리스가 심어놓은 정보망이 이미 안탄드로스 전역에 뻗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스클레오스는 수상쩍은 이들로부터 손님으로 불려간다더니 한참동안이나 파리스가 돌아오지 않자 바로 주위에 수소문하였을 뿐이었다.
그랬더니 총독 관저로부터 급히 뛰쳐나온 파리스가 마차를 타고 테오와 함께 북쪽으로 달아났다는 기상천외한 사실이 드러날 줄은 몰랐던 것이고.
파리스는 이제 단순히 있으나마나 한 양치기도, 일개 노예 소년도, 곁에 있으면 편한 조수나 제자도 아니었다.
파리스는 못해도 이 지역 모든 장로들과 상인들과 대장장이의 ‘동업자’였고··· 정직하게 말하자면 안탄드로스의 지휘자였다.
한순간에 파리스를 잃은 스클레오스는 급히 아노이토스와 도시의 주요 귀족들을 불러모아 총독 관저로 쳐들어왔다.
당장 해명하지 않으면 들고 있는 망치로 이 관저랑 네놈 모가지도 부숴버리겠다는 은근한 압박과 함께.
물론, 아노이토스와 다른 시민들도 칼 한 자루씩은 차고 왔으니 이들이 합심하면 총독을 ‘실종’이나 ‘자연사’시켜버릴 수도 있으리라.
즉,
“여, 여러분들, 일단 진정들 하십시오. 여러분은 이 도시를 이끄는 고명하고 고결하신 분들이 아닙니까?”
필리포스의 아들 니키스는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놓여 있었다.
파리스를 따라 왕도로 진출하기는커녕, 돌아가신 아버지를 따라 스틱스 강 건너기 직전이었다.
“···니키스 총독.”
스클레오스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연다.
“방금도 말했듯 이것은 권고가 아닙니다. 우리는 파리스의 위치와, 상태에 대해 알고 싶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아겔라오스의 아들 파리스가 안탄드로스를 빠져나가다니요!”
“총독, 도로 완공을 축하하는 연회날이 지났다고 정말 파리스가 필요 없어졌다 생각하는 건 아닐 것이오.
아직 대장간의 확장은 멈추어선 안 되고, 그 설계를 외우고 있는 건 그 소년뿐이오!”
이렇게 채근할 거라면, 변명거리를 마련할 틈이라도 주던가.
한창 하인들과 말을 맞추고 있을 그 시점에 대뜸 대문을 부숴버릴 듯 몰려와 놓고서는···
“설마, 자기 혼자 파리스를 빼돌려 다른 도시에 대장간을 새로 건설하려 드는 건 아니겠지!”
“헤파이스토스의 총애를 받는 소년을 빼돌리다니! 죽어 마땅한 신성모독이다!!”
슬슬 칼날들이 뽑히기 시작한다.
침묵을 유지할 수 있는 한계선을 넘었다.
니키스 총독은 눈을 꽉 감았다. 어차피 파리스와 수 년을 지지고 볶아 온 이 도시의 터줏대감들이다. 어설픈 거짓말로는 속일 수 없다.
“파리스··· 님은 트로이아로 가셨습니다.”
“···뭐?”
“맙소사, 반역 혐의를 받은 게 분명해!”
“결국 트로이아에서 사절을 보내더니 납치까지 한 건가?”
“그렇다면, 되찾아야지! 우리의 병력이 얼마나 되는···.”
“···아니오.”
젠장. 이대로 가다가는 이들이 안키세스를 죽이고 어디 땅에 묻은 뒤, 파리스만 다시 납치해오게 생겼다.
“···파리스 님께서 불려간 이유는 따로 있소.”
젠장. 젠장. 젠장.
“아까부터 왜 그 소년의 이름에 꼬박꼬박 ‘님’ 자를 붙이시는지···”
“그러니까!!”
총독은 외쳤다.
“프리아모스의 아들이신 파리스 님을 트로이아에서 호출해간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지 않았소!!!”
···될 대로 되라지.
***
-‘늘 충성심과 경애로서 주군을 섬기는 안키세스가 올립니다.’
프리아모스는 그 첫 줄을 보고 싱긋 웃었다. 전령조에 묶어보내는, 짧고 간결해야 할 서신의 서두로서는 부적절한 문장이었다.
그 누구보다 안키세스답기도 한 문장이었고.
안키세스는 섬세하고 낭만적인 사촌이었다. 이렇게 작은 천쪼가리에도 빼곡히 글월을 써내어 이런 거창한 안부 인사와 상투어구도 놓치지 않는, 그런 사람.
그러나 프리아모스는 그렇게 낭만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빠르게 초반의 미사여구들을 넘기고 중요한 본론으로 넘어갔다.
-‘···왕자와 합류한 뒤 저희는 트로이아로 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열흘도 되지 않아 왕도에 도착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줄.
-‘그때까지 기다려주시면, 저희는 다시 주군의 그리운 얼굴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운 얼굴이라.”
솔직히 말하자면, 프리아모스는 그들의 얼굴이 그립지 않았다.
기껏해야 보름 조금 전에도 만났던 이들이다.
그리 오래 떨어져 있던 것도 아니고, 안키세스가 알 수 없는 어딘가로 기약 없는 여정을 떠난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가 환송했던 안키세스와 아이네이아스, 그 밑에 딸린 식솔들 하나하나까지 세세히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얼굴만큼은 예외였다.
“···파리스.”
아들의 이름, 그가 붙이지 않은.
그 얼굴 역시 그립지는 않았다. 더 정확히는, 알 수가 없는 것에 가까웠다.
아주 잠깐, 그 어린아이의 펄떡이는 몸을 안아본 것이 그가 그의 둘째 아들과 나눠본 교류의 전부였다.
그 작다란 손, 동그란 머리, 아직 이 세상이 낯설고 두렵다는 듯 울음을 그치지 않는 얼굴.
맑은 눈.
부인을 닮은.
그가 그때 보았을 모든 것이 달라졌을 터였다.
그가 마음속으로 골라두었던 이름도, ‘파리스’라는 낯설고도 입에 감기지 않는 다른 이름으로 대체되었으니 말이다.
도자기 장난감 같던 손에는 이제 궂은 노동으로 굳은살이 배겼을 것이며,
은을 씌운 솥발처럼 반짝이고 매끄럽던 발 역시 두텁게 자라났을 테다.
오직, 그 눈만이 변하지 않았으리라.
맑고, 깊고, 생각에 잠길 때면 그 안에서 영혼의 소용돌이가 폭발하는 별처럼 아름답게 튀어오르는 그런 눈.
프리아모스는 아내의 그 눈을 사랑했다.
그리고, 아들의 것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내 아들을, 만날 준비를 해야겠지.’
프리아모스는 수십 년 동안 그를 섬겨온 환관들을, 그의 호위병들을 불렀다.
그리고 이것저것을 속삭이며 작업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10여 년만에 만나는 둘째 아들을 위한 준비 작업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