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Guard RAW novel - Chapter 7
6. 열녀문
잠시 소강상태였던 비가 다시 시작되었다.
민영과 세종이 타고 표류되었던 작은 고속단정보다도 훨씬 큰 10미터급 고속단정을 타고 온 김 경장과 이재섭은 몇 번이나 돌섬에 정박하려다가 포기하고 두 사람에게 헤엄쳐 오라고 소리쳤다. 그래서 그녀와 세종은 이미 젖은 옷차림으로 몇 미터를 헤엄쳐야 했다.
해변에 도착했올 때까지는 그런대로 조용했던 하늘이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다시 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민영은 재섭이 건네준 모포를 감싸고 있다가 다시 젖어 버렸다.
“빨리 뛰어야겠는데요.”
보트를 고정시키고 김 경장이 소리치자 민영도 뛰기 시작했다. 몇 가지 장비를 챙겨 오는 이재섭이 제일 뒤에서 오고 있었고 그녀의 바로 뒤에는 세종이 있었다. 민영은 이왕 젖은 몸이라 비를 피할 생각도 없이 뛰었다. 그런데 갑자기 몸에 빗물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어!
그녀보다 훨씬 큰 세종이 우비를 우산처럼 펼쳐 들고 비를 막아 주고 있었다. 활짝 펼친 우비는 두 사람이 동시에 비를 피할 수 있을 만큼 넉넉했다.
“잡아.”
민영은 그가 우비 한쪽을 눈짓으로 가리키자 얼떨결에 손을 뻗어 한 귀퉁이를 잡았다. 그 순간, 다른 손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서 쳐다보는데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그녀의 손이 그의 커다란 손에 감싸여 있었다. 민영은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가 다시 끌었다. 그녀의 손을 확 쥐고 앞으로 계속 전진 할 것을 종용했다.
“어, 어……”
손을 빼려고 힘을 주었지만 어림도 없다는 듯 다시 힘이 가해졌다. 그녀는 정말 뭐가 뭔지 모르는 채 멍한 얼굴로 그와 손을 잡고 뛰었다. 우비 하나를 둘이서 뒤어쓴 채.
마치 영화 속 연인들 처럼.
자동차 안에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경찰서에 들러 최 경사에게 사고 보고를 한 후 민영과 세종은 오늘은 쉬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래서 김 경장의 자동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운전석에 않은 김 경장과 조수석에 않은 세종은 차에 탄 이후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민영도 마찬가지였다. 뒷좌석을 홀로 차지하고 않아 비가 내리는 창밖만 응시했다. 무겁게 가라앉은 실내 공기가 무척이나 의식되었지만 그걸 깨뜨릴 엄두도 나지 않았다.
복잡했다. 돌섬에서부터 지금까지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느낌이다. 해변에서 그가 자신의 손을 잡은 일은 정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그가 왜 내 손을 잡았지?
돌섬에서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라 좀 더 가까워진 느낌은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손을 잡울 만큼은 아니었다. 어떤 남자가 여자의 개인사에 대해 좀 알게 되었다고 손까지 잡느냔 말이다.
혹시 또 그런 일이 자연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쳐도 그녀에게는 아니었다. 그건 강세종도 마찬가지였다. 둘이 그동안 얼마나 피 터지게 싸웠데 그깟 개인 이야기를 좀 나눴다고 손까지 잡느냔 말이다. 이건 너무 갑작스러웠다.
민영은 슬쩍 눈길을 돌려 세종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짧은 머리칼이 비에 젖어 윤이 나고 있었다.
이상해진 건 어제부터다.
어제 그녀가 미친 여자처럼 뛰어노는 것을 세종이 본 순간부터 무언가 이상한 기류가 생성되었다. 오토바이를 태워 주겠다던 그와 나란히 오토바이를 타고 신나게 달린 것도 그렇고 돌섬에서 나누었던 진지한 한 때도 그렇고 해변에서 잡은 손까지. 민영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혹시?
순간, 그녀는 다시 고개를 홱홱 저었다.
혼자 착각하는 건지도 몰라. 박민영 정신 차려. 괜히 혼자 삽질하다가 창피라도 당하면 어쩔 거야? 기대하지도 마. 생각도 하지 마!
“어, 박 순경, 왜 그래……요?”
에?
민영은 자신의 머리를 마구 흔들다가 김 경장이 슬쩍 말을 높이자 놀라서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깃 보더니 다시 묻는다.
“어디 안 좋아요?”
이젠 대놓고 존대한다. 이상하다. 이거, 왜 이렇게 이상한 것들이 많아!
“왜 갑자기 말은 높이고 그래요?”
그 순간, 민영은 보았다. 당황한 김 경장이 세종과 눈짓을 주고받는 걸. 뭐야? 이것들! 지금 니들 뭐하는거야!
“뭐예요? 왜 강 경사님 눈치를 봐요?”
민영이 더욱 의심스러운 듯 눈을 치뜨자 김 경장이 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실은 최 경사님께 들었어요.”
“뭘요?”
“박순경이 강 경사님과 동갑이라고…….“
헛! 그럼 동창인 것도? 아니, 최 경사님은 내가 장한고 다닌 걸 모르시는데……
“흠, 흠. 그 얘길 듣고 내 입장이 좀……하하, 박 순경보다 내가 나이가 한 살 어리더라고요. 그래서 예전처럼 말을 막 놓기가……“
진정으로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민영은 아무런 기척도 없는 세종을 흘깃 살핀 후 김 경장을 바라보았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경장님이시잖아요. 전 일개 순경인데 …….“
“그래도……“
“그게 뭐 경장님 탓인가요? 제가 늦은 탓이죠. 괜찮으니까 그냥 예전처럼 대하세요. 경장님이 그러시면 저까지 어려워져요. 나이 많이 먹은 게 뭐 자랑이라고. 또 이런 일 하루 이틀 겪는 것도 아닌데요 뭘. 이젠 이력이 붙어서 아무렇지도 않아요. 경장님이 절 어렵게 대하시면 다른 사람도 어색해 지고 힘들어져요.“
그러면서 민영은 세종을 다시 흘깃거렸다. 그는 여전히 돌상처럼 앉아 있다.
“하하, 그래요. 그래. 어쨌든 나도 모르면 몰랐지, 알게 된 마당에 예전처럼 막 대할 수는 없으니까 극존칭은 아니라도 대충 대우는 할게요. 그러니까 박 순경도 마음 쓰지 말아요.”
민영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고집을 부리자니 점점 자신만 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솔직히 기분이 가히 나쁘지는 않았다. 그녀의 나이를 알고도 무시하는 사람을 하도 많이 봐서 김 경장 이 자신을 대우해 주자 꽤 기분이 좋았다.
가만, 그러고 보니 세종도 내가 자기랑 동갑인 걸 안다는 거잖아. 그래서 그랬나? 그래서 어제부터 그렇게 이상하게 굴었나? 그럼 손은? 동갑이라고 손까지 잡을 건 없잖아?
아! 젠장 모르겠다. 더 생각했다가는 머리에 쥐가 날 것 같다!
“아, 진짜!”
민영은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인상을 썼다. 좁은 방을 오락가락하며 이유 없는 신경질을 부린 게 벌써 20분째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그쪽으로 머리가 움직일 때는 도대체 뭔 짓을 해야 하는가? 다 잊고 잠을 자고 싶은데 잠도 안 온다. 이렇게 더 있다가는 미칠 것 같았다.
민영은 눈을 부라리며 아무것도 없는 벽을 노려보았다.
강세종!
그 자식 때문에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놈이 변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자, 마셔.”
“어이, 전협. 아까 내가 냉장고에 넣어뒀던 수박, 박 순경 갖다줘.”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시죠. 박 순경은 어제도 야간순찰 돌았는데.”
“박 순경 밥 먹으러 가자.”
지난 며칠 동안 그가 이상하게 굴었던 혼적들이 마구 떠오른다. 대놓고 괴롭히기라도 한거라면 차라리 낫다. ‘나쁜 새끼’, ‘재수 없는 놈’ 등등의 욕 몇 마디하고 무시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이건 욕도 못하겠고, 원망도 못하겠다.
민영은 그가 왜 그러는지 확실히 알 수 없어서 돌 것 같았다. 자꾸만 엉뚱한 생각만 들어서 더 힘이 들었다. 음료수를 가져다주고, 먹을 걸 챙겨 두는 건 예사였다. 또 어쩌다 야간순찰을 연속으로 돌게 되기라도 하면 최 경사한테 대놓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리고 요즘은 거의 매일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손을 덥석덥석 잡는다.
서른한 살이나 돼 가지고 남자가 손 좀 잡는다고 화를 내자니 나잇값도 못하는 것 같고, 또 그냥 그렇게 끌려 다니자니 속이 터졌다.
그가 왜 그러는지 속 시원히 알면 나을 것이다. 하지만 다짜고짜 변한 그의 행동에 그녀는 그저 속으로 물음표만 그려 댔다. 매 순간, ‘혹시’ 하는 마음으로 작은 기대라도 걸까봐 마음 단속하느라 바빴다.
‘대놓고 물어볼까?’
문득 민영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 요즘 나한테 왜 그래? 그리고 왜 툭하면 손은 잡고 그래?‘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너, 혹시 나 좋아해?’
정말 묻고 싶은 건 이거다. 자꾸만 그런 쪽으로 머리가 굴러간다.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생각이 그쪽으로 뻗친다. 그래서 짜증이 나고 답답했다. 괜히 김칫국을 마시는 거라면, 아니, 이미 김칫국은 마시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벌써 그쪽으로 기울지 않았는가.
“후”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니다, 아니다’고 하면서 그녀는 이미 강세종에게 향하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그새 미운 정이 든 건지, 아니면 짝사랑했던 상대라서 그 잔금이 남아서인지도……어쨌든 그녀는 지금 강세종에게 가는 신경을 막을 수 없었다. 그의 작은 친절에도 기대를 품고 설렌다. ‘혹시‘했던 마음이 쭉쭉 가지를 쳐서 그녀의 마음까지 가져가 버렸다.
“휴우……“
이번에는 더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농담처럼, 14년 전 짝사랑했던 상대를 또 좋아하게 되면 열녀문 세워야겠다고 했더니 이번엔 진짜 열녀문 세워야 할 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민영은 우두커니 서서 아득하고 처량 맞게 벽만 보고 있다가 갑자기 방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
철컥.
자전거를 세우고 와이어를 채웠다. 민영은 운동화를 벗고 양말까지 벗은 후 모래사장으로 훌쩍 뛰어들었다. 어두운 밤이라도 해변은 밝았다. 검은 바닷물이 모래사장까지 올라와 하얗게 부서지는 모양을 보며 그녀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달도 밝았다. 장마가 지나간 해수욕장은 다시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 멀리 경찰서 불빛이 아련히 보였다. 오늘 야간 당직은 강세종과 전협이었다. 해경과 전경이 2인 1조로 조를 짜서 야간 당직을 선다. 내일은 민영과 이재섭이 당직을 설 차례다.
민영은 야간 당직표가 나왔을 때 세종의 얼굴을 봤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아유, 말도 마세요. 강경사님 얼굴이 완전 굳는데 사무실 기운이 영하로 내려갔다니까요. 뭐가 불안인지 말씀도 안 하시고 목소리를 착 깔더니 당직표 누가 만들었냐고 물으시는데 최 경사님도 쫄아서 선뜻 대답을 못했다니까요. 최 경사님이 왜 그러냐고 하니까 강경사님이 재섭이 형을 쫘악 노려보는 겁니다. 금방이라도 뭔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니까요. 둘이 서로 노려보는데 불꽃이 파바박 튀었어요. 그런데 얼마 후에 강 경사님이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데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더라, 이겁니다.”
몇 주간 전협을 겪어본 후 내린 결론은 저 자식 말은 액면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민영은 전협이 한 말을 모두 믿지는 않았다. 그런데 또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전협이 과장되게 말을 하는 경향은 있었지만 없는 일을 만들어 내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분명 뭔가 분위기는 이상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실, 그 당직표는 재섭이 형이 만들었거든요. 최 경사님이 재섭이 형한테 경찰하고 전경하고 2인 1조 되게 짜라고 하는 걸 제가 직접 들었어요.”
그랬을 것이다. 그랬으니까 재섭과 그녀가 한 조가 되었겠지. 그게 우연의 일치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뭐가 문제였을까? 민영은 자꾸만 떠오르는 하나의 예상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자꾸 그쪽으로 생각이 간다.
강세종은 재섭과 그녀가 한 조가 된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민영은 머리를 홱홱 저었다.
아, 내가 자꾸 왜 이러지? 이러지 말자. 박민영. 너 자꾸 이러면 실수할지도 몰라. 강세종은 아닌데 자꾸 그쪽으로 생각하면 진짜 그렇다고 믿게 된단 말이야. 그러다가 아니면 너, 어쩔 거야!
또 한숨이 푹 나온다. ‘에잇‘ 하며 애꿎은 모래를 툭툭 찼다. 그러 다 문득 민영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고성에 고개를 들었다. 저기 멀리서 여러 명의 사람이 보였다. 대층 보니 세 명은 되어 보인다. 그런데!
“이런 씨!”
민영은 다짜고짜 뛰었다. 뭐라고 고함을 지르던 그들 중 한 명이 주먹을 날리자 순식간에 싸움이 일어났다. 가까이 갈수록 심각한 난타전으로 변하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가슴 언저리를 더듬었다. 하지만 그녀가 찾는 호루라기는 없었다. 근무 중이 아니어서 호루라기는 책상 서랍에 고이 들어 있을 것이다. 지원을 요청할 휴대폰이나 무전기도 없었다.
민영은 아주 잠깐, 자신이 저 무리를 제어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상대는 척 보기에도 술에 잔뜩 취한 성인 남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혼자다. 그것도 여자다. 태권도에 유도, 합기도까지 섭렵한 그녀지만 이성을 잃은 장정 세 명을 혼자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로서의 사명감이 더 앞섰다. 싸움이 일어났는데 경찰로서 그들을 막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당장 그만두지 못해요! 지금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모두 경찰서로 연행하겠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남자의 팔을 잡고 뒤로 홱 꺽었다. 그러자 남자가 죽는소리를 냈다. 민영은 남자를 모래밭으로 홱 밀어 버리고 주먹을 휘두르는 다른 남자의 팔을 낚아챘다.
“그만두라고요!”
“이건 또 뭐야!”
그녀가 경찰이라고 소리치려는데 다른 남자가 툭 끼어들었다.
“새끼야! 너 아까 뭐라고 했어! 뭐? 나더러 사기꾼이라고? 그래, 새끼야. 나, 땅 팔아서 돈 좀 벌었다. 그래서 뭐? 네가 나 땅 팔아서 돈 버는데 보태준거 있어!”
“이 새끼가 말이면 단 줄 아나? 뭐? 새끼? 개자식아! 내가 너보다 세 살 이나 많은데 이게 뻑 하면 야, 자, 까네! 엉!”
“야! 나잇값을 해야 대접을 하지! 말끝마다 저 잘났다고 잘난 척하면서 재는데 누가 널 형 대접을 해“
“뭐야! 이 새끼가 진짜 죽고 싶어!”
“그래! 죽여 봐!”
민영은 죽자고 덤비는 두 남자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 쫌!”
픽!
“악!”
그 순간, 민영은 아픈 비명을 질렀다. 눈가에 아찔한 고통이 느껴지고 머리가 핑 돌며 눈앞에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느꼈다. 잠시 휘청거리던 그녀는 다시 이를 악물고 남자들을 말리기 시작했다. 주먹이 난무 하는 중간에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면서 싸움을 말리려고 기를 썼다. 그때였다.
삐이익! 삐익!
어두운 해변에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제야 남자들의 주먹질이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누군가 소리를 지르고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경찰이다!”
이씨! 경찰은 벌써써 와 있었거든!
민영은 우르르 도망을 치기 시작하는 남자들을 뒤?기 시작했다. 술에 취했든 아니든 어쨌든 폭력죄는 성립된다. 당장 나부터 맞지 않았는가!
삐익! 삐이익!
그녀는 호투라기 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것을 들으며 몸을 휙 날려 한 남자를 덮쳤다. 그 순간, 누군가 그녀를 지나쳐 다른 남자를 덮치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들자 전경이 맨 앞에 달아나던 남자를 덮치고 있었다.
민영은 옆을 보았다. 그 순간, 이글거리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처음 보았다. 이렇듯 화가 난 표정의 세종은.
“너 미쳤어!”
왜? 내가 뭐?
민영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가 또 소리를 질렸다.
“죽고 싶어 환장했어! 지원을 요청했어야 할 것 아니야! 누구 미치는 꼴 보고 싶어!”
민영은 입을 딱 벌렸다. 그 ‘누구’가 설마 너?
강세종이 나를 걱정한다고? 미칠 만큼?
“아!”
터진 입술에 약이 발라지자 민영은 아픈 신음을 내었다. 그래 놓고 또 웃었다. 의사가 이상한 여자 보듯 쳐다본다. 그래도 그녀는 계속 웃었다. 자꾸 웃음이 났다. 눈은 맞아서 푸르죽죽하고 터진 입은 두 배로 부풀어 올랐다. 거기다가 언제 맞았는지 턱도 벌써 멍이 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팔 여기저기에 손톱자국이 나 있었고 목에도 긴 줄이 두 개 그어져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싸움을 말린 게 아니라 사움을 한 것 같은 꼴이었다.
그녀를 치료하는 의사도 그렇게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의사는 그녀의 몸 상태보다 정신 상태를 더 의심하는 눈치였다. 자꾸만 히죽거리는 그녀는 누가 보기에도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랴. 자꾸만 웃음이 나는걸.
‘누구 미치는 꼴 보고 싶어!‘
머리끝까지 화가 난 얼굴로 소리치던 세종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웃음이 났다.
그가 날 걱정했어. 날 미칠 듯이 걱정했어.
벌써 몇 시간째 그 의미를 음미하는 중이었다. 그냥 부하가 걱정되어서 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냉정하게 그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 보고 또 떠올려 봐도 부하를 걱정하는 따위의 감정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확신이 들었다. 그 순간, 그가 그녀를 향해 불같이 화를 내는 그때 그녀는 강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강세종도 날 좋아 하는지도 모른다고.
“다 됐습니다.”
“네.”
민영은 터진 입술을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또 실실 웃었다. 그러자 의사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자꾸 웃으면 터진 곳이 벌어집니다.”
“네.”
대답은 넙죽 해놓고 또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광녀 갈다.
“상처, 벌어진다니까요.”
“네. 죄소하미다.”
터진 입술로 말하려니 발음이 샌다, 의사가 인상을 쓰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머리는 괜찮으세요? 어디 단단한 곳에 부딪쳤다던지…… 혹시 모르니까 CT 한번 찍어 볼까요?”
민영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괘차아여.”
“그래도……”
“끝났어?”
의사와 민영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왔는지, 세종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고 서 있었다. 그녀는 침상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겨사님.”
어눌하게 말하는 그녀의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가 의사를 향해 물었다.
“괜찮습니까? 뭐 주의해야 할 것은 없습니까?”
“다행히 눈 속까지 상하지는 않아서 괜찮습니다. 눈두덩의 멍은 수일 내로 옅어질 테고 상처난 입술도 응급처치를 했으니 약만 바르시면 아물 겁니다.”
그리고 의사가 잠시 갈등하는 것이 보였다. 그놈의 CT에 대한 의견을 피력할까 말까 고민하는 태세였다. 민영은 재빨리 인사를 했다.
“가사하미다, 서새임.”
얼떨결에 마주 인사를 하는 의사를 외면하고 민영은 재빨리 응급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세종이 그녀를 뒤쫓아 왔다. 그가 그녀의 팔을 잡고 세웠다.
“뭐가 그렇게 급해?”
어, 난 급해. 의사가 내 멀쩡한 머리 사진을 찍자고 덤빌지도 모르거든.
“아니요.”
그가 더욱 인상을 썼다. 그러더니.
“밖으로 나가자.”
그녀의 팔을 잡고 성큼성큼 앞서 가는 세종을 따라 민영도 잰걸음을 놀렸다.
“무슨 여자가! 앞뒤 가리는 게 없어! 그렇게 겁대가리가 없나고! 넌 목숨이 두 개야? 교육받을 때 그따위로 받았어? 패싸움이 일어났는데 순경이 겁도 없이 홀로 뛰어들다니! 내가 보다보다 너처럼 생각 없는 여자는 본 적이 없다, 본 적이 없어! 패싸움이 벌어진 걸 발견했으면 제일 처음 해야 할 일이 뭐야! 지원 요청을 해야 할 것 아니냐고! 네가 무슨 마징가 제트라고 술 취한 놈을 셋이나 상대하느냔 말이야! 그러다가 흉기라도 있었으면 어쩔 뻔했냐고!”
푸른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올 만큼 핏대를 세우는 세종을 민영은 입을 헤벌리고 쳐다보았다.
사람이 저렇게 화를 낼 수도 있구나. 저러다 목울대 찢어지는 거 아냐?
퍽!
헉!
민영은 그가 스스로의 성질을 못 이겨 건물 외벽에 주먹을 꽂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날 듯이 다가가 그의 손을 퍽 잡아챘다.
“야! 너, 미쳐어? 왜 애꾸은 손하테 화푸이야!”
너무 당황해서 반말이 마구 쏟아졌다. 발음도 안 좋은데 바락바락 잘도 대들었다.
“지금 이따위 손이 문제야!”
“무제지! 무제 아냐? 이거 봐! 빨갛자아!”
“사돈 남 말 하시네!”
“빠리 벼워으로 다시 들어가!”
“됐어!”
“되긴 뭐가 돼! 이 꼬토아!”
팍.
순간, 민영은 차가운 벽에 사납게 밀쳐졌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깨를 잡고 벽에 밀친 그가 씩씩거리며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민영은 그에 못지않게 눈을 세모꼴로 치뜨며 따지듯이 입을 열었다.
“지금 뭐…… “
“너 뭐냐?”
목소리가 음침하고 나직했다. 때는 자정이 가까워지는 깊은 밤이었다. 시내 한복판이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오고 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고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시골 종합병원의 뒤뜰은 아예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가로등조차 없는 후미진 뒷담을 끼고 두 개의 인영이 겹쳐져 있었다.
민영은 무섭게 쳐다보는 그의 시퍼런 서슬에 눌려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는 것이 다였다.
“너 도대체 뭐 하는 여자야?”
이건 또 무슨? 야, 나 박 순경이야. 뭐 하는 여자냐니? 네 눈엔 내가 뭐 하는 여자로 보이는데?
그의 눈이 이글거린다. 당장에라도 불똥이 마구 튀어나올 듯 뜨겁게 이글거렸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뭐?”
그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멍한 표정을 짓자 그가 잇새로 내뱉듯 다시 물었다.
“순진한 척, 맹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왜 이렇게 사람 속을 뒤집느냐고!”
뭐? 순진한 척? 맹한 척? 아니, 내가 언제 사람 속을 뒤집었다고 이 난리야?
민영은 다짜고짜 소리를 질러 대는 그에게 맞고함을 지르려고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소릴 ……?”
“네가 신경 쓰인다고! 빌어먹을, 네가 신경 쓰여서 미치겠다고!”
‘네가 신경 쓰인다고!’
민영은 헤벌쭉 웃다가 황급히 입술을 오므렸다. 자꾸 상처를 잊어버린다. 그녀는 슬쩍 고개를 돌려 운전대를잡고 있는 세종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면서 최소한 미안한 감정을 가져야 정상인데 그녀는 지금 그런 걸 느낄 상황이 아니었다.
‘신경 쓰인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때, 그 상황과 그의 표정만으로도 답은 나왔으니까.
“그만 봐.”
“어?”
민영은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그만 보라고. 운전에 집중해야 하니까.“
“어? 어.”
바보가 된 걸까? 어째 대꾸할 말이 ‘어’밖에 없을까?
민영은 그가 시키는 대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만. 뭐라고? 저 말이 무슨 뜻이지? 내가 보고 있으면 운전에 집중이 안 된다는 뜻?
그녀는 다시 그를 쳐다보려다가 흠칫 동작을 멈추었다.
보지 말랬지. 아, 궁금하다. 같이 있어도 얼굴이 보고 싶다니……나, 미친 걸까?
하지만 방법은 있었다. 민영은 창에 비치는 그의 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운전을 할 때 그는 참 믿음직스럽다. 구름이라도 타고 있는 듯 한 지금 상황에서 뭔들 안 멋있어 보이겠나마는 그래도 듬직하다. 표정은 좀 구리지만 생각의 깊이가 들여다보이는 눈빛은 마음에 든다.
뭘 생각하고 있을까?
민영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가 신경 쓰인다고 말한 후부는 그는 내내 무언가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차에 타라는 말을 한 후로는 별말이 없었다.
아, 자기를 보지 말라는 말도 했지.
사실은 그녀도 지금 상황에 대해 고민을 해야 했다. 그런데 고민이 되지 않는다. 짝사랑을 하는 동안 그 시간들이 얼마나 외롭고 서글픈지 알기에 그저 두려워만 했다. 그리고 그녀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세종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존재였었다. 그래서 시작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마음을 줘 봤자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기대한다. 그 기대감이 허황된 것이 아니라서 설렌다. 이 설렘이 너무나 분명하게 느껴져서 가슴이 뛴다.
‘그가 날 신경 쓰고 있어.’
그 사실이 그녀를 행복하게 했다. 그저 골치 아픈 부하직원이 아니라 이성으로, 여자로 그의 신경을 두드리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행복했다.
스르륵
숙소 앞에 차가 멈춰 서자 민영은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세종은 여전히 굳은 채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설렘 반, 기대 반이 섞인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뭘 기대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설레고 있었다.연애같은거 할 줄 모른다. 남자는 더 모른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에게 신경 쓰인다고 말했을 때는 그다음 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것쯤은 안다. 그래서 민영은 그 다음을 생각 하고 있었다.
그런데……
“먼저 들어가.”
푸시시. 빵빵하게 부풀어 있던 긴장감이 압력 밥솥에서 김이 빠지듯 푸시시 가라앉고 있었다.
어 ……이건 아니지 않나?
민영은 잔뜩 부풀었던 무언가가 빠지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할 대사가 이건가? 그냥 들어가라고?
그는 여전히 돌처럼 굳은 채 앉아 있었다. 하다못해 그녀에게 작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점점 앉은자리가 민망해지고 있었다.
민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그, 그래요. 그럼……“
그녀는 아직도 떨쳐지지 않는 미련을 잡은 채 문으로 손을 뻗었다.
“박 수경”
순간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가 어두운 차 안을 밝혔다, 민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네?”
그래. 이래야 정상이지. 너, 나 신경 쓰인다며? 내가 걱정돼서 미치겠다며? 그러면 지금 이렇게 날 들여보내는 건 아니지. 그럼, 아니고말고.
“근무 시간 외에는 그냥 말 놔.”
어? 아, 그래. 우린 동갑이니까. 너도 이젠 내가 너와 나이가 같은 걸 아니까. 그런데 ……그뿐이야?
“친구……처럼 지내도 되고.”
친구?
민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친구라니? 이게 웬 봉창이냐?
“친구? 야, 이성 간에 친구가 어딨어? 남자가 여자한테 친구로 지내자고 하는 건 연애하자는 게 아니야, 맹추야. 그건 남자가 여자에게 확실한 선을 그을 때나 써먹는 말이라고. 한마디로 말해서 떨쳐 버리기에는 아깝고, 애인으로 두기에는 꺼림칙한 여자한테 주로 쓰는 말이지.”
자칭 연애박사라고 주장하는 황지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미팅에서 만났던 남자가 세 번째 만남에서 민영에게 성격이 너무 마음에 든다며 친구 하자고 할 때 지연은 ‘이기적인 놈‘이라고 욕을 했다. 친구 사귀자고 미팅 나가는 연놈도 있느냐고 거품을 물며 당장 헤어지라고 홍분 했었다.
민영은 멍한 얼굴로 세종의 굳은 옆모습을 응시했다.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그녀는 헛물 켠 것이다. 멍청하게 김칫국을 마셔 버린 것이다.
친구. 그래. 친구였다. 그가 보낸 모든 신호가 바로 그 빌어먹을 친구였다.
민영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똑똑하게 말했다. 상처 난 입술이 다시 터지든지 말든지 또박또박 말했다.
“그럴 수야 있나요. 그래도 경사님이신데. 김 경장님께도 말했지만 저, 나이 많다고 신경 쓰지 마세요. 저도 힘들어지니까. 그냥 지내던 대로 지내죠.”
냉기가 뚝뚝 흘러내렸다. 얼음조각처럼 이가 딱딱 부딪칠 만큼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박 순경? 그래, 강세종이 ‘박 순경‘이라고 부르는 순간 알아챘어야 했는데!
민영은 밖으로 나가 문을 닫기 직전에 그가 들으란 듯이 중얼중얼 거렸다.
“친구 좋아하시네!”
민영은 그의 얼굴이 난처하게 굳고 다음엔 일그러지는 건 보지 못했다.
그냥 그대로 자동차 밖으로 나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한심한 박민영!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어라!
달칵.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일찌감치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마친 민영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섰다. 바로 옆방에 잠들어 있을 전경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히 문을 닫던 민영은 순간 적막한 복도에 울리는 인기척에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아!
아직 아침 해도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녘이었다. 어딘가에서 희미한 새소리가 맑게 들려오는 걸 보면 오늘 하루는 꽤 더울 것 같은 예감마저 들었다.
조용하기만 하던 복도에 어색한 기류가 흘렸다. 이재 막 씻었는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나오던 세종을 발견한 순간 민영은 그 자리에서 얼어 버렸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깜짝 등장에 놀라 어설프게 서 있었다. 그러다가
“어디 가려고?”
굳은 목소리로 그가 먼저 물었다. 민영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시선을 외면했다.
“일찍 나가 보려고요.”
“어딜? 경찰서?”
“네.”
세종의 얼굴이 조심스럽게 일그러졌다.
“이른 아침부터 ……“
“어제 일지 정리를 못했어요.”
“그건 나중에 해도 되잖아. 뭐 급한 일이라고…… “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민영은 세종의 이어지는 말을 싹뚝 잘라 버리고 무뚝뚝하게 말하고 그를 지나쳤다.
“박민영”
하지만 갑자기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씩씩하게 걷던 걸음을 일시에 멈추어 버렸다. 그녀는 깊게 심호흡을 한 후 뒤를 돌아보았다.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돌처럼 굳은 그의 얼굴이 보였다.
“얘기 좀 하자.”
민영은 살며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혼들리고 싶지 않았다. 두 번 다시는 저 자식에게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공적인 얘깁니까?”
그의 짙은 눈썹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아니.”
“그럼, 전 경사님과 할 말 없습니다.”
그리고 민영은 돌아섰다. 등에 꽂히는 그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기를 쓰며 걸었다. 복도를 벗어나 현관을 나갈 때까지 꼿꼿한 자세를 절대 풀지 않았다. 그가 턱을 경직시키며 노려보는 것도 알지 못했다. 입술을 움직이며 당장에라도 그녀를 부를 듯 달싹거리는 것도 보지 못했다. 박민영은 오직, 다시는 강세종 앞에서 자존심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앞세우며 앞으로 전진, 전진했다.
탁.
현관문을 당고 마당으로 나서는 순간, 민영은 비틀, 흔들렸다. 그제야 참았던 긴 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내내 고민을 한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열녀문도 둘이 뭔 일이라도 있었을 때 세울 수 있다.’
혼자 좋아하고 혼자 짝사랑해서는 열녀문 같은 것도 세울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짝사랑은 혼자만의 삽질이다.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혼자만 좋아하는 게 아무리 지극 정성인들 누가 열녀문 따위를 세워 주겠는 가. 고로! 그녀는 하등의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마음만 고된 그런 짓을!
백해무익!
짝사랑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만 두기로 했다. 오늘부터, 새 마음 새 뜻으로 강세종에 대한 마음은 다 떨쳐 버리고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열심히 임무에 충실하고 성실하게 임한다면 특진인들 자신을 비켜 갈 리가 없다. 지금까지 살면서 노력해서 얻지 못하는 건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사랑 빼고!
“이제 며칠 후면 해변의 축제가 시작되니까 다들 좀 긴장하고, 아 물론 평소에도 늘 긴장하겠지만 그래도 조금 더 타이트하게 움직이자고. 축제라고 한껏 들떠서 술 마시고 막 나가는 시민들 안전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니까. 시장님께서 특별히 당부하시는 말씀도 내렸고 경찰서장님 이하 경찰본부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으니까 모두들 주의하자. 알았나?”
“예써!”
전경들의 활기찬 대답이 사무실 공간을 가득 메우자 최 경사는 ‘하하’ 웃으며 힘이 넘치는 젊은이들을 둘러 보았다.
“좋아. 제군들, 힘내라고 오늘 저역은 내가 쓴다. 차로 한 30분 정도만 가면 스테미너 음식 잘하는 식당이 있는데 갈 사람?”
“저요!”
김동문 경장이 제일 먼저 손을 번적 들어 올렸다. 전경들이 그 빠른 속도에 놀라 눈을 휘동그레 뗬다.
진지한이 김 경장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김 경장님은 드셔 보셨어요?”
그러자 김 경장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물론!“
“어떤 건데요?”
전협이황급히 물었다
“보신탕.”
“예에?”
뭘 그런 걸 가지고 무슨 대단한 음식이라도 되는 듯 그러냐는 식으로 전경들이 실망한 얼굴을 하자 김 경장이 씨익 웃었다.
“뭘 모르는군, 짜식들. 그냥 보신탕이면 내가 이러겠나? 여기 계신 최순황 경사님 사모께서 직접 잡아서 요리하는 것은 물론이요, 그 집의 오랜 전통과 역사가 깃든 술! 그 술이 또 뭐나 하면 ……“
“최 경사님네 사모님께서 식당 하세요?”
놀라서 묻는 진지한에게 김 경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갑자기 목소리를 확 낮추었다. 그러자 전경들이 그 낮은 목소리를 듣기 위해 자동으로 김 경장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산을 마구 돌아다니는 생 노루를 숙련된 사람의 손으로 잡아 그 붉은 피를 받아내어 담근 술, 날카롭고 윤기 나는 사슴뿔을 오랜 세월 묵힌 산삼주와 환상적인 배합으로 혼합하여 담근 술, 산을 뒤흔들 만큼 뛰어난 정력을 자랑하는 곰의 거시기와 몇 백 년을 살았는지 알 수 없는 늙은 지네와 결합하여 담근 술, 그 밖에도 제군들이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술이 마련되어 있지. 사모님께서 그 모든 것을 오직 남편을 위해 일 년 삼백육십오일 정성들여 담근 술이라고 하더군.”
전경들의 뜨악한 시선이 최 경사를 향했다. 마른 못 약해 보이는 최 경사의 어디에서도 그런 약발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저 품속에서 흐르고 있는 피의 소용돌이는……?
“저 ……경사님, 혹시 어디서 그 약발이 나타나시는지 ……?”
진지한이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최 경사가 머쓱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약발은 무슨. 그냥 마누라가 해 주니까 그 정성을 생각해서 먹어 주는 거지. 음, 그래도 굳이 말해 보라면 ……밤일?”
허거걱.
전2들의 눈이 갑자기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윤이 났다.
“바, 밤일이라 하심은……?”
“인마! 뭘 그런걸 묻고 그래? 척하면 딱이지! 밤일 몰라? 부부가 방에 뭔 일을 하겠어?”
김 경사가 진지한의 이마를 콩 쥐어박으며 핀잔을 주었다. 남자들의 음흉한 대화를 들으며 인상을 쓰던 민영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회의 시간에 꼭 그런 말씀들을 하셔야겠어요? 이거, 제가 조금만 고깝게 생각하면 성희롱 죄에 들어가는 거 아시죠? 앞으로 조심들 해 주세요.”
차갑게 말하고 뒤돌아서는 민영을 보며 최 경사가 중얼거렸다.
“쟤, 오늘 왜 저래? 원래는 지가 더 밝히면서.””
“예?”
이재섭이 무슨 뜻이냐는 듯 묻자 최 경사가 하하 웃었다,
“아, 박 순경 말이야. 박 순경도 우리 집사람이 만든 보신탕하고 술 먹어 봤거든, 아주 좋아서 죽던데?”
“박 순경님이 보신탕도 드세요? 그 정력에 좋다는 술도?”
“그러엄. 얼마나 잘 먹는데! 아주 게 눈 감추듯이 먹는다니까. 오죽하면 우리 집사람이 박 순경은 좀 자제시키라고 하겠어? 시집도 안 간 처자가 스테미너만 키우면 어따 써먹느냐고.”
푹.
모두들 숨죽여 웃기 시작했다. 하긴, 쓸데도 없는 스테미너는 키워서 뭐 하냐고 저희들끼리 쑥덕거리면서 키득거렸다.
“그럼, 오늘 우리 집 가는 사람은 김 경장밖에 없는 거지?”
그 순간, 갑자기 손 하나가 불쑥 솟아 올랐다. 모두의 눈길이 진지한에게 향했다. 진지한이 쑥스럽게 웃으며 손을 더욱 곧게폈다. 그러자 뒤를 이어 전협이 들고 또 그 뒤로 이재섭도 손을 들었다. 그리고……
“어, 조용언. 너도 가려고?”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살포시 올라오는 손 하나를 보며 김 경장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선비같이 생긴 놈이 스테미너 음식?
“저도 남자인지라…….“
“크, 크하하하하. 그래. 너도 남자지. 하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리던 김 경장이 문득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경사님, 가실 거죠?”
아까부터 말 한마디 없이 앉아 있는 세종을 향해 김 경장이 물었다.
“됐어. 난 안 가.”
들고 있던 수첩을 탁 접고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곧장 사무실을 나가자 김 경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아무래도 힘쓸 일이 없는 총각이다 보니 ……”
그러다 문득 그곳에 앉은 남자들 중 최 경사만 빼고 모두 결혼 안한 총각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최 경사가 앞에 있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니들은 어디 쓸 데나 있냐?”
그러자 않아 있는 남자들의 얼굴에 음흉한 웃음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어라? 이놈들, 쓸 데가 있긴 있나 보구먼! 푸하하하하.”
“어! 어! 누가 좀 도와주세요! 저기! 우리 아기! 우리 아기!”
피서객들로 가득 찬 해변에 다급한 구조 요청이 울려 퍼졌다. 공포에 질린 어머니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터져 나오고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목소리가 뒤를 잇고 있었다. 저 멀리서 소방서에서 운영하는 119수상안전 대원이 뛰어오고 반대쪽에서는 민자대(민간자율구조대) 소속 안전대원이 호루라기를 빽빽거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민영은 근무 교대를 위해 해변 밖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일대 혼란이 일어난 장소가 그녀와 가까운 곳이라는 걸 알고 무작정 뛰었다. 그 순간만큼은 특진이니 공(功)이니,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가 물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사실만을 떠올리며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몸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사람들을 헤치고 물로 뛰어든 그녀는 있는 힘껏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얼마 뒤 그녀를 뒤이어 물로 뛰어드는 안전요원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민영은 앞뒤 생각 없이 무조건 아이를 향해 나아갔다.
물놀이용으로 만들어진 보트에 타고 울고 있는 아이에게 제일 먼저 도착한 민영은 보트의 한 귀퉁이를 잡고 아이를 달랬다.
“괜찮아, 아가야. 괜찮아, 언니가 구해 줄게. 엄마한테 가자. 움직이지 말고. 알았지?”
네 살이나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몸까지 떨면서 울고 있었다. 너무나 안쓰러워 가슴이 뜨끔거렸다.
민영은 아이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우리 뱃놀이할까? 이름이 뭐야?”
“수진이……왕수진“
“우와, 이름도 예쁘네. 수진아, 언니 봐. 언니가 지금 보트 끌지? 재있지 않아?”
민영은 보트를 끌고 헤엄을 쳤다. 그러자 아이가 물음을 차츰 그치고 민영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봐, 재밌지? 이렇게 엄마한테까지 갈 거니까 움직이지 말고 있어. 알았지?”
그때였다. 뒤늦게 도착한 수상안전요원이 갑자기 보트를 붙잡았다. 같은 목적을 가진 동료를 만난 반가움에 미소률 함빡 짓던 민영은 상대에게서 이유 모를 적대감이 느껴지자 인상을 썼다.
“여기서부턴 우리가 하죠.”
뒤이어 나타난 안전요원이 그녀를 밀쳤다. 일떨결에 보트에서 떨어진 민영은 이제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따졌다.
“뭐 하시는 겁니까?”
보트를 끌며 헤엄을 치려던 수상안전요원이 그녀를 돌아보며 아래위로 흘긴다.
“여기서 싸우지 맙시다. 얘가 겁내고 있는 거, 안 보입니까?”
하! 기가 막힌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민영은 어이가 없어서 멀뚱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아련하게 한 마디가 들려온다.
“특진에 눈이 멀어서 물불 안 가리는 것도 분수가 있지. 아주, 해수욕장을 제집 안방처럼 누비는구먼!”
뭐? 뭐라고?
정말로 황당한 듯 민영은 그대로 그 망망한 바다에 떠 있었다. 보트 위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쳐다보는 아이를 보며.
아이가 엄마에게 전해지고 연방 고맙다는 인사를 받으며 안전요원들이 자리를 뜨고 있었다. 그들이 인적이 드문 도로 쪽으로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민영은 황급히 다가가 묻고 싶었던 것을 따져 물었다.
“이야기 좀 하시죠. 아까 하신 말씀의 저의가 뭐죠?”
그러자 안전요원 중 하나가 인상을 팍 쓰더니 소리쳤다.
“해경은 구역 구분도 못합니까! 왜 하면 우리 구억을 침범 하나고요! 분초를 다투는 위급 상황도 아니고, 우리가 분명히 호각 불면서 출동했는데 그쪽에서 끼어들면 우리 대원들은 대처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 는지 분간이 안 간단 말입니다! 구역 구분을 했으면 그 구역 안에서 영웅 노릇을 하든지 말든지 할 것이지, 왜 다른 구역까지지 침범해서 대열을 흩뜨리느냐 이 말입니다.”
민영은 갑자기 화르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영웅 노릇이라뇨! 누가 영웅 노릇 따위를 한다고 그러세요? 제가 교대하려고 해변을 나가다가 마침 아이 엄마의 비명 소리를 들었고 댁들이 조금 떨어진 곳에 있기에 먼저 달려간 거 아닙니까. 그리고 애를 태운 보트가 바다 멀리 떠가는데 그게 왜 위급 상황이 아니에요!”
“애가 바다에 빠지기를 했어요?”
“뭐라고요!”
민영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고함을 질렸다. 아니. 네살짜리 애가 겁에 질려서 떨고 있는 걸 저 인간들은 보지도 못했나? 그게 위급 상황이지, 뭐가 위급 상항이야!
“우리가 전속력으로 출동 중이었고 아이는 그때까지 보트에서 안전했다 이겁니다. 그럼 우리 쪽 구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니까 우리가 해결하게 뒀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다. 아무리 소방서와 해경이 해변에서 약간의 경쟁의식을 가지고는 있다지만 아이가 위험한 상황에서 이 무슨 돼먹지 못 한 경쟁이냔 말이다! 긴급신고 번호 ‘119’가 홍보가 아주 잘되어 있어서 시민들은 무조건 위기 상황에서 ‘119’로 신고를 한다. 하지만 해난에 대한 해결은 ‘119’에 신고를 해도 다시 해경으로 접수가 되었다. 그런데 시민들은 그걸 잘 몰랐다. 그래서 해경에서도 얼마 전부터 ‘122’라는 해난 긴급신고번호를 홍보하고 있었고 해수욕장에 해경소속 안전요원을 대거 투입했다. 그 결과, 해수욕장 안전요원들끼리 보이지 않는 경쟁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바다와 관련된 안전에 대해서는 해경이 전면에 나서고자 했고, 기존에 활약을 하고 있었던 소방서 119대원들도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고자 은근한 경쟁이 생겨 버린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위험에 처한 시민의 안전이 먼저지, 그깟 경쟁이 뭐가 대수냔말이다.
민영은 안 그래도 기분이 우울한데 마침 잘됐다며 목소리를 한껏 높일 준비를 하며 입을 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들어 보니까 이번 여름해경에 파견온 어느 여순경이 특진에 눈이 멀어 공로를 세우는 데만 눈이 멀어서 앞뒤 가리는 거 없이 날뛰는 모양이 던데 그건 자기 사정이고 사람 목숨이 달린 이곳에서 개인의 욕심만 채 워서 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민영은 입을 딱 벌렸다. 소문이 이렇게까지 났을 줄은 몰랐다. 하, 세상이 무섭다. 강세종에게 말 한 번 실수한 일이 이렇게까지……
“심정은 이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협조하는 곳에서 너무 개인플레이는 하지 말잔 말입니다.”
그러더니 그녀를 두고 멀어져 갔다. 민영은 얼이 빠진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강세종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를 안다. 강세종은 그렇게 입이 싼 놈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전경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녀가 강세종에게 주접을 떨 때 그 자리에는 진지한도 있었다. 진지한은 처음 이름을 들었욺 때 느낀 것처럼 그렇게 진지한 놈은 아니었다. 진지한으로 인해 전경들 몇이 그녀의 사심(私.心)을 알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남자 새끼들이 입이 무겁다는 건 순 거짓말이다!
민영은 허허로운 웃음을 웃었다. 누구를 탓하랴. 다 제가 못나서 그런걸? 말실수를 한 건 자신이지 않은가. 저들의 말이 틀린 것도 없다. 해변 으로 오는 날부터 지금까지 그저 ‘특진‘을 향해 달려든 사람은 자신이니까.
“그래도 이번엔 아닌데……“
하지만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중얼거림이었다. 처음부터 음흉한 욕심을 앞세워서 일을 하니 이런 꼴을 당하는 것이다.
“열심히 해. 성질하게 묵묵히 최선을 다하면 그 대가는 자연히 따라오는 법이야.”
갑자기 처음 그녀가 순경으로 임용되던 날에 엄마가 하던 말씀이 떠올랐다. 잊고 살았다. 처음 파출소에출근하던 날 다짐했던 순수한 다짐을 잊어버리고 욕심만 과했다.
씁쓸하다. 사람이 욕심을 부리면 끝이 없다더니, 일에서나 개인사에서나 모든게 어그러지고 있지 않은가.
“박 순경님, 여기 계셨네요?”
어깨에 힘이 빠져 멍하니 서있는 그녀의 귀에 경쾌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영은 고개를 들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올려다보았다.
이재섭.
뭉클.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든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래도 나를 좋다고 하는 놈은 이놈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놈은 친구나 하자고 그러고, 동료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승진에만 눈이 먼 이기주의자 취급이나 당하는 마당에 그래도 이놈만큼은 자신의 편이 돼줄 것 같아서 가슴이 웅클했다.
“왜 여기서 이러고 계세요? 점심 드셨어요? 저, 지금 밥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솔직히 마음은 가고 싶었다. 아쉬운 대로 이 어린놈한테라도 위로라는 걸 좀 받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면안될 것 같았다. 정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만에 하나 나에 대한 이 녀석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괜한 기대를 가지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자신도 괜한 기대를 걸었다가 좌절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바로 어젯밤에.
“아니, 난……?“
순간, 해변에서 또 소란이 일어났다. 오늘 참 시끄럽다. 이놈의 해수욕장!
“어쩌죠, 박 순경님?”
민영도 어쩌지 못해 순간적으로 갈등하고 있었다. 너무 멀다. 여기서 수영해서 가더라도 중간에 힘이 빠질 것이다. 그러면 저 여자를 구하기는 커녕, 도리어 일만 커진다.
“본부에 연락해. 122에도 연락하고, 무전도 쳐.”
민영은 재섭에게 다짜고짜 명령하고 미친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빌어먹게도 지금같이 다급한 상황에 안전요원도 보이지 않고, 바다에는 순찰정 하나도 떠 있지 않았다. 민영은 다시 쌍안경을 눈에 대었다.
안전 경계선을 훌쩍 넘어 파도에 휩쓸려가는 윈드서핑이 보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정상적으로 서 있어야 할 사람이 없었다. 다만 보드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는 여자가 하나 보일 분이었다. 렌즈를 통해 여자의 공포 어린 얼굴이 고스란히 보였다.
민영은 옆에서 재섭이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가는 도중에 힘이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가까이 가야 할 것 갈았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뒤에서 재섭이 ‘빅 순경님!‘ 하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지만 귓등으로 흘렸다.
최대한 빠론 속도로 팔을 저었다. 벌써 힘이 삐진다. 아까 아이를 구하려고 무리를 한 직후라 그런지 더 힘이 없다.
그때였다.
민영은 갑자기 자신의 옆을 스치며 지나가는 강력한 물살을 느꼈다.
“해변으로 돌아가!”
힘 있는 목소리가 들린다 싶은 순간, 민영은 입을 딱 벌렸다.
강세종.
그였다. 어디서 났는지, 그가 서핑보드를 타고 재빨리 타도를 타고 있었다. 다가오는 파도를 타고 넘으며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빨랐다. 자세히 보니 모터가 달려 있었다. 보드의 뒤에 달린 모터가 빠르게 돌아가며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고 세종이 발을 움직여 방향을 조정하고 있었다.
동력을 이용한 서핑보드가 나왔다고 하더니 언제 또 저런 걸 구해 왔나,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아니, 감탄은 보드 때문이라기보다는 세종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무릎을 살짝 굽힌 채 파도를 가르는 모습은 정말이지 환상이었다. 반짝이는 햇살에 비친 모습이 마치 ……한 마리의 멋진 숭어 같다고나 할까?
몸채를 살짝 휘어 튀어 오르는 은빛 숭어를 보는 것 같았다. 아, 물론 숭어보다 멋있다.
그녀가 물어 떠서 멍청하게 있는 사이, 그는 보드를 타고 문제의 윈드서핑으로 접근했다. 그가 물로 뛰어들어 보드를 잡은 채 여자의 의식을 체크하고 있었다. 민영은 그가 여자에게 접근하는 걸 본 후 곧장 몸을 틀었다. 갑자기 추위가 엄습해 왔다. 천지 모를 좌절감과 열등감이 밀려 들었다.
해변으로 나온 민영은 곧바로 다가온 재섭이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살며시 웃었다.
“역시 기동대 출신다워. 강 경사 말이야. 경사는 그냥 다는 게 아니라니 까. 나처럼 대책 없이 헤엄부터 치는 것보다 저렇게 제대로 된 방법으로 구조에 나서잖아.”
풀즉은 민영의 목소리에 재섭이 인상을 썼다.
“운이 좋았겠죠. 우리도 저런 게 가까이 있었으면 저걸 이용 못 했겠어요? 강 경사님이 운 좋게 저런 걸 가진 사람을 발견했나 보죠.”
민영은 피식 웃으며 재섭의 어깨를 힘없이 쳤다.
“인마, 난 저런 탈 줄 몰라.”
그때,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사고 지점을 향해 환호를 보내 고 있었다. 민영도 뒤돌아서서 쌍안경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재섭의 신고가 접수되어서인지 122해양경찰이라고 적힌 순찰정이 도착해 있었고 그들에 의해 윈드서핑을 타던 여자가 구조되고 있었다. 그 뒤로 세종도 쾌속정에 올라타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가만 보니, 여자 얼굴이 익숙하다. 어디서 봤지?
고민하며 눈살을 찌푸리던 민영은 여자가 기침을 하며 얼굴을 이쪽으로 향하자 ‘아!’하고 기억 해 냈다.
그 여자다. 왕가슴! 술병 들고 바다로 들어가려다가 세종에게 잡혀서 나왔던 그 여자! 아니지, 어깨에 매달고 나왔지. 뭐야? 저 여잔. 도대체 무슨 인연이기에 두 번씩이나 강세종에게 구조되는 거야!
괜한 신경질이 난다. 여자가 힘없이 세종에게 기대는 걸 보자 더 짜증이 일었다. 터질 듯 풍만한 가슴을 내밀어 아예 세종의 가슴에 문질러 대고 있는 걸 보는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다.
‘저 여자가 진짜!’
그런 여자를 가만히 안고 있는 세종에게 더 화가 난다!
나쁜 자식! 비열한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