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Guard RAW novel - Chapter 6
5. 한 발 가까이
“나~ 나나나나나나~
그것은 누가 봐도 생쇼였다. 세종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지구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잠깐 했었고, 어쩌면 다른 차원에서 온 미스터리 걸(girl)일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했다. 그리고 지극히 정상적으로 살아온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도의 뇌를 가진 반사회적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아주 잠깐 했었다. 하지만 저렇게 정신 줄을 잠깐씩 놓는 광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루루루루루~ 루루루루루~”
아주 영화를 찍고 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인기척을 내기가 두렵다. 습기로 젖은 바닥을 마구 뛰어다니며 하늘로 두 팔을 벌린 채 그 누구도 절대 알아들을 수 없는 음을 흥얼거리는 저 여자는 진정 그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존재였다.
순간, 그녀가 발을 헛디디며 넘어졌다.
당연하지. 저렇게 하늘만 보고 마구 뛰어다니는데 땅인들 가만있겠는가. 이 여자야, 인간이 서 있으려면 중력에 집중해야 하거든?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래 놓고 웃는다. 바닥에 누워 별도 없는 시커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녀가 웃고 있었다.
“와아! 하늘 조오타.”
하늘이 좋아?
세종은 그녀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로등 빛에 비친 하늘은 시커먼 먹구름만 가득했다. 조만간 달마저 먹어 버릴 기세로 먹구름들이 악마의 손처럼 서서히 밀려들고 있었다. 저런 하늘이 좋다는 여자는 설마 사탄의 추종자?
세종은 갑자기 조영해진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입 꼬리를 늘이고 희미하게 웃는 여자의 옆모습이 보였다.
찌리릿
헛..
세종은 갑자기 자신의 가슴에 흐르는 전류를 느끼며 거친 숨을 들이켰다. 도대체 무슨……?
댕. 댕. 대엥.
어딘가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손을 들어 올려 멀쩡한 눈을 쓱쓱 비볐지만 여전히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눈부시게 빛나는 천사였다.
말도 안 돼……
파파파팍! 팍! 파팍!
허어억!
세종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폭죽을 보았다. 화려한 불꽃을 만들며 쏟아지는 무수한 불빛들. 마치 로맨틱 영화의 한 장면처럼 폭죽이 터지고 종이 울렸다. 그리고 가로등 빛 아래 퍼질러 누워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를 향해 그의 가슴이 뛴다.
세종은 이를 악물었다.
‘제길! 이건 공포 영화야!‘
민영은 젖은 땅에 드러누워 대지의 차가운 기운에 더위를 식혔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틀 쏟아 낼 듯 잔뜩 무거워 보였다. 그녀도 그랬다, 속에 먹구름이 끼어서 답답하고 어두웠다. 그런데 이젠 아니다. 일부러 노래도 부르고 머릿속도 맑게 하면서 뛰다 보니 어느새 답답했던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땅에 누워 있으니 대자연의 품속에 들어 온 듯 자유롭기만 하다.
사람은 때로 속박에서 풀어져 볼 필요가 있었다. 누구나 직장 문제를 비롯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책임과 규율에 얽매여 산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남들보다 늦은 시작을 만회해 보려고 남들보다 더 빨리 뛰려고 하다 보니 어느새 스스로를 속박하고 채근했다. 그러니 속에 먹구름만 낄 수밖에.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멀다. 특진을 포기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경이 된 걸 후회할 것도 아니다. 다만, 가끔은 이렇게 쉬어가야 했다. 그녀도 인간이니까. 때로는 마음 졸이지 않고, 뛰지 않고 느긋하게 걷고 싶은 인간이니까.
“오늘부터 박 순경 방은 여긴가?”
헉!
놀란 민영은 고개를 홱 돌려 소리 나는 쪽을 향했다.
오 마이 갓! 강세종!
휘리릭, 빛의 속도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일어서자마자 옷에 묻은 흙을 털어 내려고 부산을 떨었다. 하지만 젖은 흙은 말끔히 떨어지지 않았다. 지저분해진 옷을 포기하고 민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언제 왔어요?”
“바금 ”
거짓말은 아니다, ‘방금’이라는 말에는 아주 많은 시간이 포함되니까. 그 기준은 그때그때 다른 거니까.
어색한 침묵이 흘렸다. 오늘따라 매미도 울지 않았다.
아! 비 오는 날에는 매미도 안 울지. 당장 비는 안 오더라도 이렇게 습기가 많으니 매미도 모두 자나 보다.
“다른 사람들은요?”
“회식 중이야.”
‘그럼 너는?’
민영은 목 끝까지 나온 질문을 삼켰다. 요 근래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강세종이 눈앞에 보이면 이상하게심장이 빨리 뛴다. 아마, 그날 이후부턴가 보다. ‘할머니 김밥‘ 사건 이후로 괜히 그를 의식하고 있었다.
뭐야? 이건 꼭 고등학교 때로 둘아간 것 같잖3.
“아, 전 그럼 … … ”
공기가 점점 무거워지는 게, 할 말도 없고 기분만 이상해졌다. 그래서 민영은 어색한 미소를 매단 채 몸을 들렸다, 그런데 ……
“오토바이 타고 싶어?”
응? 이게 무슨?
민영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어째 ……불그스름하다. 희미한 가로등 빛에 반사되어서 그런가?
“흠. 싫으면 말고.”
어? 저거 헛기침인가? 쟤, 설마 무안해하는 거야? 천하의 강세종이 무안해 한다고? 에이, 설마.
“좋아요,”
허걱! 이게 무슨! 야! 박민영, 여기서 네가 좋다고 할 장면은 아니지!
하지만 늪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머리보다 행동이 더 빨랐고 그 결과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연출시켰다. 바로 강세종의 허리를 잡고 시골길을 질주하는 진풍경을!
미쳤어! 미쳤어!
바아아아앙!
오토바이는 한마디로 끝내 줬다. 보기에도 꽤 멋있어 보인다 했는데 자리에 착석하는 순간 느껴지는 안정감과 속도감은 오토바이에 무지한 그녀도 확연히 느낄 정도였다.
민영은 용기를 내어 손 하나를 내밀었다. 더 용기를 내어 팔을 허공으로 뻗었다. 바람이 팔을 스쳐 지난다. 온 세상을 가르고 박민영이 질주하고 있었다.
아! 강세종도 같이.
끼이익.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는 기분은 한마디로 최고였다. 속에 남아 있던 답답함의 마지막 남은 찌꺼기까지 한꺼번에 날릴 만큼 그 위력은 실로 놀라웠다.
민영은 오토바이에서 내려서며 세종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처음이지 싶다. 강세종을 향해 진심으로 웃어보는건.
“고맙습니다. 덕분에 좋은 경험 했습니다.”
너무 판에 박힌 인산가? 어째, 좀 어색하다. 남자 허리춤 잡고 좋다고 소리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좋은 경험 했습니다’라니. 그래도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들어가.”
저 인간도 별다를 것 없다. 잠깐이었지만 둘이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오토바이 타고 달린 사인데 저 돌같이 무뚝뚝한 표정 좀 보라.
후두두둑.
“어, 비 온다.”
민영은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세종의 머리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았다. 제법 굵게 내리는 빗방울이 소나기로 변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민영도, 그리고 세종도 단시간에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었다. 하지만 둘 다 상관하지 않았다.
시원하다.
그녀는 비를 맞으며 시원하다는 생각을 했다. 후텁지근했던 공기가 차가운 비를 맞으며 급속히 온도를 낮추고 있었다.
민영은 비를 맞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를 보았다. 순간, 비를 맞아 서늘하게 내려갔던 온도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눈길이 얽혔다. 곧게 내리는 빗물 사이로 반짝이는 두 쌍의 눈빛이 부딪치며 은일한 스파크률 튀겼다.
민영은 아무 무늬도 없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밖에서 비를 맞으며 마주쳤던 그의 눈길을 잊을 수가 없다. 시뻘건 불길로 낙인이라도 새긴 듯 강세종의 뜨거운 눈길이 머릿속을 떠나지가 않는다.
두 근.
세종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지고 설렌다. 민영은 이불을 홱 걷어차며 일어나 앉았다.
쏴아아아아.
비가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다소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민영은 창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박민영. 지금 형편에 짝사랑까지 하면 너 정말 추해진다‘.
짝사랑 했던 상대를 또 짝사랑하면 난 진정 열녀인가? 이러다가 해수욕장 한복판에 열녀문 세우겠다!
순찰정으로 이용되는 고속단정(RIB)를 타고 나가는 첫 순찰은 다소 어색하게 시작되었다. 지난밤, 야릇한 시선을 주고받은 사이인지라 민영은 세종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시선을 피했다. 세종도 굳이 그런 그녀와 시선을 맞추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키를 잡는 앞쪽에 앉고, 그녀는 그녀대로 묵묵히 바로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부르르르릉!
제트보트가 물살을 가르며 튀어나갔다. 잠시 몸이 흔들렸지만 무난하게 중짐을 잡은 민영은 온몸으로 덤뎌드는 바람을 맞으며 난간을 꽉 잡았다. 그리고 무심하게 보이는 세종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여러 가지 심정이 어지럽게 지나간다. 혹시 자신이 또 같은 상대를 짝사랑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직면하자 그녀는 무조건 ‘아니다‘라고 절규 했다. 지난밤 내내, 부인하고 또 부인했지만 오늘 이렇게 그를 다시 보니 그렇게 아니라고 다짐했던 각오가 썰물 빠져나가듯이 빠져나간다.
‘미쳤다, 박민영.’
정말 자신이 강세종을 또 짝사랑하기 시작한 거라면 이대로 바다에 퐁당 빠져죽어야지 싶었다. 여름 한철, 철새처럼 머물다 떠날 인간을 마음에 담는 것도 바보짓인데 14년 전의 맹꽁이 짓을 또 해야 한다고 생각 하니 인생 자체가 암담해졌다.
이건 특진보다 더 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괜한 감정놀음에 빠져서 잡히지도 않는 허황된 꿈을 꾸는 건 정말로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그녀는 연애 따위에 허비 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 그것만 기억하자. 오직 내 인생에는 특진만이 살길이다!
민영은 입술을 꽉 깨물고 새롭게 각오를 다졌다.
“안개가 너무 짙은데……“:
세종의 걱정스러운 말에 민영도 소리 없이 동조했다. 처음 출발할 때부터 안개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출발하던 때에는 이 정도로 짙지는 않았다. 아침 일찍부터 파도가 높아서 입수 금지령이 내려지고 사람들이 없는 해수욕장은 조용했다. 그래도 높은 파도를 즐기려는 서핑족 들과 보드족들이 무모한 위험을 즐길 수도 있기에 순찰을 나선 것이었다..
해안선 가까이 있을 때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런데 해안선에서 조금 멀어지자 어느새 안개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자욱해졌다.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할 수도 없었다. 해경에서 보유한 순찰정 중에서도 가장 작은 4.9M급의 소형 고속정이라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GPS조차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소 굳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민영도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파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바람도 심상치 않다. 혹시 이렇게 파도에 떠밀려 깊은 바다로 나간다면 일은 더 커진다. 원만한 파고를 견딜 수 있는 고속단정이지만 시간과 연료의 제한을 무한정 극욕할 수는 없었다.
세종이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배 아래로 고개를 내밀어 파도의 방향을 살폈다. 아마 육지에 가깝게 있는 것이라면 혹시 파도가 그들을 이끌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바다는 거칠게 아우성만 칠 뿐 그들이 원하는 방향 제시는 해 주지 않았다.
그가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세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민영도 덩달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쾅!
“악!”
풍덩!
배가 무언가에 부딪쳤다. 그 순간, 충격에 의한 비명 소리와 함께 민영이 바다로 떨어졌다. 갑자기 배가 심하게 요동치는 바람에 미처 대처하지 못한 그녀가 바다로 떨어진 것이다. 층격을 받기는 세종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키를 잡고 있었던 상황이라 민영처럼 바다로 튕겨져 나가지는 않았다.
세종은 몸을 낮추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렸다.
“박민영!”
민영은 그가 당장에라도 뛰어들 듯 몸을 내밀자 팔을 혼들었다.
“괜찮아요!”
물속에 처박혔기에 망정이지 단단한 돌에 가서 박혔다면 죽었을지도 ……아!
민영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입을 딱 벌렸다. 그 순간, 한 바닷물이 입 속으로 들이친다.
“켁. 콜록 콜록”
“자.”
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영은 그의 손을 잡으며 기쁜 듯 말했다.
“보트가 바위에 부딪쳤나 봐요. 바위섬이에요.”
바로 1미터 앞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짙은 안개 덕분에 그들의 바로 앞에 있는 바위점조차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봤어.”
배로 올라온 그녀에게 자신이 입었던 점퍼를 툭 던져 주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고 있다가 갈아입어.”
그러고는 배와 바위의 간격을 가늠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배의 상태를 살피려면 저쪽 바위로 건너가야 하는 건 필수지 싶었다. 게다가 이 안개가 걷히려면 시간이 좀 걸릴 태니 그동안 안전한 바위섬이 나을 것이다.
그가 갑자기 그녀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기다려.”
그러더니 그녀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건너편 바위로 훌쩍 건너뛰었다. 꽤 넓은 간격임에도 불구하고 날 듯이 안착한다.
괜히 기동대 출신이 아니네.
배는 무엇에 걸린 것인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배 바닥이 어딘가에 걸려 있는 듯 싶었다. 건너편으로 건너갔던 세종이 아래로 내려가서 배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 순간, 후두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성난 파도는 당장에라도 그녀가 탄 보트를 덮칠 듯 아우성치고 세찬 바람은 그 녀가 입고 있는 점퍼를 날려 버릴 듯 으르렁거렸다.
“이쪽으로 건너와!”
그가 소리쳤다. 민영은 배와 건너편 바위의 사이를 잠시 가늠한 후 뱃머리에 올라섰다. 그 순간 배가 심하게 요동쳤다. 그녀는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힘껏 뛰어. 내가 받을 테니까!”
그가 다시 소리를 지른다. 민영은 인상을 썼다.
아! 내가 이것도 못 뛸까 봐?
오기가 솟았다. 그녀의 많은 약점 중에 또 하나가 바로 이거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 거는 것.
좀 조심해서 뛰면 냈向弩?것을 그놈의 오기 때문에 사정없이 몸을 날렸다. 세종에게 지지 않으려고 어찌나 세게 뛰었던지 하마터면 하늘로 날아갈뻔했다. 그 덕분에 그녀는……강세종의 품에 안겨 버렸다. 아,젠장.
세종은 불의의 습격에 미처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본능이 앞섰다. 자신도 모르게 품에 안겨 드는 그녀를 꽉 잡았다. 으스러지게 껴안으며 품안의 그녀를 느꼈다. 심하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비가 쏟아지고 당장에라도 파도가 덮칠 듯한 이런 위험천만한 곳에서 그는 진정 짐승의 야욕을 느꼈다.
물컹하게 닿는 젖가슴의 부드러움, 나긋하게 안겨 드는 감미로운 여채. 아! 젠장!
놓아야 하는데 놓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놓아야 했다. 그에게서 이상 징후를 감지한 그녀가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빌어먹을 욕심을 들키지 않으려면 지금 놓아야 했다.
스르르, 다리에 힘이 풀린다. 민영은 그가 팔에서 힘을 빼자마자 무릎이 확꺽이는 경험을 했다. 비틀, 혼들리는 그녀의 팔을 황급히 잡는 그의 손에 의지해 민영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뭐지? 이 몽실몽실한기분은.
자신이 마치 구름 위에라도 있는 듯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민영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 주위가 조금 불그스름하다. 잘못 본 건가?
민영은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때문에 그의 얼굴을 살필 수가 없었다.
“움직여야 돼.”
말은 그러면서 세종도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에게I 눈을 맞춘 채 둘 중 누구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결국 그의 뜨거운 눈길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아, 홈. 배, 배는 어때요?”
잠시 그녀를 응시하던 그가 천천히 대답했다.
“… …바닥이 뾰족한 바위에 걸린 것 같아.”
민영은 인상을 썼다.
“그럼……“
“걱정할 것 없어. 구조 요청할 거니까.”
“어떻게요? 여긴 무인도 같은데.”
민영은 날카롭게 생긴 바위만 가득한 섬을 쓰윽 훑어보았다. 그리 넓지도 않은 작은 바위섬이다. 순찰 돌때 바위섬을 꽤 여렷 봤다. 그중 어느 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육지와는 그렇게 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수영을 해서 갈 거리는 아니었다. 보트가 움직일 수 없다면 구조 요청을 반드시 해야 했다. 그녀가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짓자 그가 부스럭거리며 점퍼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 휴대폰!
민영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가 휴대폰을 꺼내 보인 후 다시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왜요? 그냥 지금 구조 요청해요.”
“나중에.”
나중에? 왜?
민영은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바위섬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선 비부터 피해야지. 지금 구조 요청해 봤자 위치를 알도 수도 없어”
아, 난 또……그의 말이 맞다. 현재 자신들이 있는 위치를 모르는데 어떻게 구조 요청을 할 것이며 이 안개 속을 뚫고 구조를 하러 오지도 못할 것이다.
민영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박민영, 뭘 상상한 거냐?
“거기, 똑바로 잡아!”
어제, 아니, ‘할머니 김밥’ 사건 이후로 세종에게 가졌던 좋은 감정은 오늘 이후로 말짱꽝으로 되돌린다. 아까, 배에서 바위로 건너 뛸 때 느꼈던 야릇한 감정이 무색하게 그는 정말 구제불능, 앞뒤 막힌 벽창호였다.
인간이 어째 저럴까? 어찌나 변신을 자유자재로 하는지 ‘지킬박사와 하이드’ 저리 가라였다. 여하튼 하나는 확실하다. 강세종은 명령 내리기 좋아하는 ‘독재자’였다.
비를 피할 장소를 찾기 시작하면서부터 겨우 찾아낸 바위틈으로 그녀를 무지막지하게 밀어 넣는 것까지 어느 하나 마음대로 하지 않는 않는 없었다.
민영이 갑자게 거부하며 자신의 몸은 이 틈으로 들어올 수 없다고 버텼지만 그는 그녀의 거부에 굴하지 않았다. ‘안 되면 힘’ 이것이 저 무식한 강세종의 좌우명임이 분명했다. 버티는 그녀의 팔을 잡고 천으로 구멍 메우듯이 꾸깃꾸깃, 밀어 넣는 것도 모자라 틈에 엉덩이가 끼자 그 넓적한 손으로 마구 더듬기까지 했다.
비열한 새끼!
게다가 이젠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든 틈에서 겨우 자리를 잡고 있는 데 바람막이를 만든답시고 점퍼를 펼치더니 한쪽을 잡으란다.
아, 나더러 어쩌라고!
“어서!”
또 재촉이다. 부글부글, 화가 끓는다. 민영은 세종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런데 성질을 낼 수가 없다. 그래도 그녀는 좁은 틈에 끼어 있으면 서도 비는 피하고 있었지만 그는 내리는 비를 온전히 다 맞고 있었다. 거기다가 그녀가 있는 곳에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바람막이까지 설치 중이지 않는가.
민영은 화를 꾹 눌러 참으며 팔을 힘껏 뻗었다. 어찌어찌하니 또 되긴 된다. 그가 시키는 대로 이곳저곳을 잡고 있자니 세종이 여기저기를 고정 시켜서 제법 괜찮은 바람막이가 만들어졌다.
“어!”
민영은 겨우 한시름 놓고 다시 자리를 잡고 않으려는 순간, 갑자기 그가 그 큰 몸을 구기면서 들어오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뭐 하는 거예요?”
“보면 몰라?'”
허거걱! 아, 지금 여길 들어오시겠다고? 그 몸으로?
아, 여기서 그 몸이란 강세종의 근육질 몸을 말한다. 우락부락하고 단단한 몸이 진짜 거짓말처럼 그녀의 코앞으로 쑥 밀려들어 왔다. 그녀는 그렇게 힘들게 들어왔는데 세종은 정말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눈 깜짝 할 새에 안으로 들어왔다. 물론 그녀는 숨조차 쉴 공간이 없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미스터리하다. 어떻게 저 몸이 여길 들어오지? 기동대에서는 몸 구기는 방법도 가르치나?
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커다란 덩치가 들어오자 그녀는 더욱 답답해졌다. 안그래도 협소한 자리가 그에게 밀려 숨이 턱턱막힌다.
“헉, 헉, 미쳤어요? 아, 좁아!”
몸이 찌부러지는 것 같았다.
“성질 안내고 가만히 숨쉬면 괜찮아.”
“경사님이 나가면 훨씬 편할 것 같은데요?”
“내가 왜? 밖에 나가면 비 맞는데.”
그야, 넌 남자잖아. 고깟 비 좀 맞으면 어때? 기동대였다는 자식이 이깟 비가 대수야?
“여긴 둘이 있기에 너무 좁아요.”
“지금 둘이 있잖아.”
“그러니까 좁다고요.”
“그럼 네가 나가던가.”
헉! 이기적인 인간. 그래, 내가 나간다. 여기서 이렇게 숨 막혀 죽느니 나가서 비 맞아서 죽으련다.
“비켜요. 나갈 거니까.”
민영은 씩씩거리며 그를 밀쳤다.
“알아서 나가.”
우와!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냐?
민영은 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세종이 비켜 주지 않으면 그를 타고 넘어야 한다. 온몸을 겹치면서!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죠?”
“뭘?”
“일부러 나, 성질 돋우는 거 아니냐고요.”
갑자기 그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 하러?”
“난 모르죠. 처음 만났을 때부터 먼저 시작한 건 경사님이니까요!”
“내가? 네가 먼저 시작했지.”
아, 나 진짜. 하나하나 나열해서 따지고 싶지만 점점 구질구질해지는 것 같아서 참았다.
“됐어요!”
아예 안 보게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가 신경질이 났다. 비가 그칠 동안은 이렇게 그와 딱 붙어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 열이 난다.
그녀가 팩 토라진 이후로 두 사람은 침묵을 유지했다. 좁다 좁다 할 때는 미칠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니 또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민영은 화르르 솟았던 화가 다시 푸르르 가라앉자 괜스레 미안해졌다. 그래도 이만큼 비를 피하는 건 다 강세종 덕분이지 않는가.
그녀는 그를 흘깃 쳐다보았다. 밖을 응시하고 있는 옆모습이 보였다. 민영도 고개를 돌려 신나게 쏟아 붓는 비를 감상했다. 그러다가 다시 그를 훔쳐보았다.
“할말있으면 해.”
귀신같은 놈. 내가 할 말 있는 건 어떻게 알아가지고.
“할 말이라기보다는……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안 아프게 물어봐.“
헤에, 저게 언제 적 유머냐.
“형제 있어요?”
‘세진이 잘 있어?’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세종은 아직 그녀가 고교 동창인 줄 모른다. 민영도 그가 알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우회적으로 물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너무 강하게 쳐다봐서 괜히 찔린다. 왜 저렇게 쳐다보지?
“누나 하나.“
어, 웬일로 쉽게 대답하네. 그렇다면.
“누나? 누나는 지금 뭐 해요? 결혼했어요?”
정말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렇게 특별했던 강세진도 결혼 같은 평범한 걸 했을까? 궁금해서 물었다. 그런데 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어허,저건 무슨 의미냐? 마치 내 의중을 다 안다는 듯한 저 미소.
“결혼했고 나라를 위해 일해.”
“결혼을 했어요? 언제? 나라를 위해 일한다면 무슨 일? 설마 경찰? 그럴 리 없는데, 그 똑똑한……!”
너무 아는 체를 한 것 같아 민영은 흠칫 입을 다물었다. 혹시 그가 이상 하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하고 눈치를 살폈지만 다행히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결혼한 지는 좀 됐지. 세 살 된 아들도 있거든.”
“아들!”
민영은 또 흥분했다. 서른한 살에 아들 하나를 뒀다면 별로 놀랄 일도 아닌데 결혼은 커녕, 연예조차 변변히 해 보지 못한 그녀에게 흥분할 일이었다. 늘 궁금했었다. 고등학교 때도 천재로 인정받은 아이였다. 어찌나 觸管지게 잘났는지 고등학교 3년 과정을 1년 만에 마치고 대한민국 최고 대학을 거쳐 하버드대까지 진출한 아이였다. 물론 학교에서 워낙 세진을 치려 세우며 ‘장한고교가 배출한 인재’라며 광고를 해대서 알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똑똑한 친구였다. 한 번 들으면 다 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천재소녀였다. 그런 세진이 결혼을 했다니……
좀 의외였다. 세진인 남들처럼 살지 않을 줄 알았다. 평범한 사람들과 아주 다른 삶을 살 줄 알았다. 그런데 결혼해서 아들까지 뒀다니 ……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둘은 것처럼 민영이 다소 의아해하자 그가 마치그녀의 심정을 아는 것처럼 부연설명을 시작했다.
“나하고 달리 세진인, 아, 세진인 내 쌍둥이 누나야. 강세진은 좀 똑똑한 편이었지.”
좀?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자. 강세종. 그게 좀이었니? 네 누난 천재였어. 천재!
“뭐 그 애한테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긴 많았는데 다 마다하고 저 하고 싶은 걸 하더라고. 부모님도 그런 점에서는 관대하셨으니까. 어쨌든 그 앤 역사가 좋다면서 고고학에 뛰어들었지.”
고고학? 아, 또 의외다. 세진이한테 그런 면이 있었나? 고고학이리면 땅 파고 먼지 뒤집어쓰면서 고생하는 거, 아닌가? 동굴 같은데 막 탐험하러 다니고.
“고고학이라도 다 같은 건 아니야. 인디아나 존스처럼 그렇게 현장에서 유물 탐사를 하는 사람도 있고, 책상머리에 않아서 연구만 하는 사람도 있지.”
인디아나 존스가 유명하긴 유명한가 보다. 어떻게 ‘고고학‘ 하니까 딱 인디아나 존스가 더오르나?
민영은 세종이 점쟁이처럼 그녀의 생각을 잘 읽는 것에 의아해 하면서 다시 물었다.
“그럼 세진 아니, 경사님 누난 연구만 해요?”
“아니, 그것도 아냐. 나는 잘은 모르지만 연구만 하다가 현장으로 뛰어 든 모양이더라고. 보기보단 강단 있는 타입이거든. 그러다가 매형 만나서 결혼하고 지후 녀셕 가졌을 때부터 현장을 잠시 떠나 있었는데 또 요즘은 현장에 나가겠다고 하는 모양이야. 매형은 그걸 말리고 있고.”
지후가 조칸가 보다. 세 살이라던 그 아들.
민영은 세종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세진과 그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의 얼굴이 부드럽게 이완되었다. 그의 얼굴만 봐도 세진이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부럽다..
세진이 이룬 행복한 가정도 부럽지만 누나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웃어 주는 동생이 있는 것도 부러웠다. 하늘 아래 핏줄이라고는 엄마와 자신 밖에 없는 민영에게는 최고로 부러운 것들이었다.
“좋네요.”
그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민영은 슬쩍 시선을 피해 비가 오는 밖을 쳐다보았다.
“난 혼자거든요.”
분위기가 묘해서 그런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그 상대가 강세종이라는 사실도 망각했다. 비가 오는 무인도에 갇힌 상황이 자주 오는 건 아니지 않는가. 게다가 그가 이렇게 허물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그녀도 무언가 말하고 싶었다.
“중학교 때 아빠 돌아가시고 엄마하고 나, 둘뿐이에요. 지금까지.”
그가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언니나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많아요. 오빠면 더 좋고. 어릴때 형제 있는 애들이 제일 부러웠어요. 집에 안 좋은 일이 생겨도 형제들끼리 의지하면 좋을 것 같았거든요. 학교 때 공부는 잘 못했지만 남들처럼 대학은 가고 싶었죠. 그런데 엄두도 못냈어요. 엄마 혼자 살겠다고 아둥바둥 전쟁처럼 사는데 나 혼자 잘살겠다고 대학 간다는 말 못 했거든.그래도 엄만 전문대라도 가라고 성화셨는데 내가 싫다면서 취업 전선에 뒤어들었어. 작은 컨테이너 업체 경리였는데 꽤 성실히 다녔지. 그런데 나중엔 싫증나더라. 매일 아침 차 심부름도 짜증나고, 사장이 아침 안 먹었다고 나더러 라면 끓이라고 할 때도 신경질 나고, 이름 놔두고 박 양, 박 양 하는 것도 듣기 싫었어. 순 양아치같이 생긴 놈들이 수작 걸 때면 진짜 당장에라도 발길질 한 번 하고 싶었어. 그런데 그 쥐꼬리만 한 월급도 아쉬워서 참고 다녔어. 그러다가 어느 날, 빵!“
민영은 슬쩍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심각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 그녀는 다시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오늘 죽는 한이 있어도 하고 싶은 거, 한 번 해 보고 죽자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 거야. 그래서 다 집어치웠어. 그동안 머아뒀던 돈으로 학원 등록하고 죽어라 공부했지. 난 머리가 나빠서 진짜 죽어라 해야 전문대라도 간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 공부 한번 마음잡고 해 봤더니 잘되더라. 성적 잘 나와서 내친김에 4년제 갈까 했는데 돈 없어서 관뒀어. 대학 등록금, 그거 무시 못 하거든. 그래도 목표가 있었으니까 아무 상관 없었어. 내 꿈은 무조건 경찰이었으니까. 그래도 부둣가에 있는 회사에 다녀서 그런지 매일 보는 게 해경이어서 결국 제일 친근하게 느껴지는 해경 시험 준비를 했지. 그래서 순경이 된 거야. 진짜 해경에 합격한 순간 느꼈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거든. 우리 엄마 말로는 내가 태어나서 그렇게 미친년처럼 웃고 울고 하는 거 처음 봤대. 쿡쿡쿡.”
그때 일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민영은 엄마를 안고 빙글빙글 돌았었다. 두 번의 미끄러짐 뒤에 찾아온 값진 선물이었다. 그동안 마음고생 했던 거며, 돈 때문에 한참을 돌아야 했던 시간들이 전부 상쇄되 만큼 기뻤었다.
“너무 조급해 할 것 없어.”
옛날 일을 떠올리며 혼자 상념에 젖어 있던 민영은 갑자기 둘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렸다.
“어?”
아뿔사!
민영은 자신 그에게 반말을 한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내내 반말했네. 어? 그런데 저 자식, 왜 가만있지?
“조급해하지 말라고. 급할수록 돌아 가라잖아. 경장에서 경사되는게 어렵지 순경에서 경장 다는 게 뭐가 어려워? 경장 돼서 따라잡으면 돼. 경장 몇 년씩 달고 있는 사람 많잖아.”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런데 민영은 지금 그의 말을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내내 반말을 했는데도 그는 별다른 내색이 없다. 게다가 지금 이건 뭔가? 저 인간이 어쩐 일로 날 위로하는 말을 다 하지?
민영은 조심스럽게 그를 살폈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묻는다.
“왜?”
“아니, 좀 이상해서.”
“뭐가?”
저 봐. 또 반말했는데 아무 말 안 한다. 그럼 ……
“나 반말했는데 … …“
민영은 순간 자신이 매를 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잠시 멍하게 있더니 버럭 소리를 질렸다.
“그러니까! 너 죽고 싶어?”
깨갱. 민영은 즉시 찌그러졌다. 역시, 저놈은 몰랐던 거다. 곰탱이.
“후배 놈이 문서 유출은 안 된답니다. 그래서 제가 대충 들었는데요. 진짜 놀랐어요. 경사님하고 나이가 같던데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던데. 전 저보다는 아랜 줄 알고 막 대했는데 은근히 어려워지려고 하네요. 이력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무역 컨테이너 업체의 관리 부서에서 몇 년 근무하다가 뒤늦게 전문대에 입학했고요, 졸업은 정상적으로 했답니다. 그리고 한 2년 있다가 순경으로 임용된 게 작년이라는군요. 순경치고는 꽤 나이가 많은 거죠. 직장 다니다가 학교도 늦게 졸업했으니 당연하죠. 가족관계는 어머니 한 분뿐이고 집 주소는 인천으로 돼 있다네요 그런데 경사님도 장한고등학교 나왔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박 순경이 자신과 나이가 같다는 말을 들을 때 잠시 놀란 것 빼고는 세종은 김 경장이 읊어 대는 말들을 무심코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마지막 물음에 의아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김 경장의 말을 듣는 순간, 경악했다.
“후배 말로는 박 순경이 다닌 학교가 장한고등학교라는데요? 졸업은 다른 고등학교에서 했는데 1, 2학년은 장한고에 다녔었답니다. 그럼 경사 님과 동창이잖아요? 혹시 기억 안 나세요?”
전혀 안 났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도 박민영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한 번도 같은 반이 아니었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고교 시절을 뒤돌아보면 가까운 몇몇 친구 빼고는 관심도 가지지 않았던 상황을 감안할 때 박민영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은 당연했 비단, 친구!?이었겠는가. 학교 자체에 관심이 없었을 때가 아니었던가.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세종은 머리 좋은 세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보면 절대 잊어버리는 법이 없는 강세진이니 만약 박민영을 세진이 한번이라도 본적이있다면 분명히 기억 해 낼 것이라 생각했다.
‘어? 박민영? 글쎄…… 음…… 내가 다시 전화할게.’
그리고 얼마 후에 전화가 걸려왔다. 세진은 졸업 앨범을 뒤져 봤지만 박민영이라는 동창은 없다고 했다. 당연했다, 졸업은 장한고에서 하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세종은 그쯤에서 포기할 생각이었다. 갈은 고등학교를 다녔다지만 같은 반이 아니었다면 잘 모를 수도 있었다. 어쩌면 박민영은 자신을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확실히 안다는 예감이 들었다. 처음 만났을때 그녀가 보인 반응응 떠올려 보면 확실하다.
그런데……
‘아, 생각났다.’
전화를 끊을 참이었다. 집에 전화 한 번 안 한다고 투덜거리던 세진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얼른 전화를 참이었는데 ……
‘생각났어! 1학년 때 너랑 같은 반이었잖아! 조용한 박민영! 몰라? 기억 안 나?’
기억 안 난다. 조용한 박민영? 그런 애도 있었나? 나하고 같은 반이었다고?
‘어휴 돌 대리! 왜, 굉장히 조용한 얘였잖아. 있는 듯 없는 듯해서 네가 잘 기억이 안 나나 보다. 난 옆 반이었어도 기억나. 가끔 그 애가 벤치에 앉아있는 거 봤거든. 점심시간에 혼자 앉아서 빵먹는 걸 본적도 여러 번이야. 2학년 때 전학 갔었지? 아마. 그때 교무실에서 선생님하고 상담 하는 것도 봤는데. 아! 그러고 보니, 가정 형편 때문에 선생님하고 상담 하는 것도 봤다.’
많이도 기억한다. 같은 반도 아니었다는데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는 세진이 새삼 똑똑해 보였다. 하지만 세종은 세진이 그 후로 꽤 많은 정보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렇게 조용했던 아이라면 더더욱 기억할 수가 없었다.
아마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다고 해도 믿을 것이다.
세종은 얼마 전 있었던 세진과의 통화를 떠올리며 민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가 와서 기온도 많이 내려갔는데 젖은 옷을 입은 채로 졸고 있다. 고개를 까딱거리며 조는 그녀를 보며 세종은 가슴 한쪽이 시큰하게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쪼그려 앉아서 졸고 있는 모습이 애잔하고 안쓰럽다. 그녀의 과거사를 전부 알게 된 마당이라 그런지 그녀의 모습이 더욱 작아 보인다.
끝까지 모른 체할 셈이었다.
며칠 전에 이미 알았지만 그는 아는 체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척 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가 짐작되기 때문이다. 상대가 기억도 하지 못하는 동창인 것도 무안한데 상대가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상관이니 더욱 꺼려졌을 것이다. 어쩌면 좀 챙피하기도 했을 테고.
그래서 세종은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가끔 꼬박꼬박 존대를 하는 그녀에게 편하게 하라고 말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러면 그녀가 눈치를 챌 것 같아서 관두었다. 그리고 어차피 직장 안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설정이었다.
휘청.
세종은 재빨리 팔을 뻗었다. 심하게 고개를 흔들던 그녀가 몸까지 흔들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안아 자신의 품으로 당겼다. 많이 피곤했는지 순순히 기대 온다. 무언가 따뜻한 것이 심장을 두드려 댔다.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의 박자에 맞추어 심장에도 비가 내렸다. 힘차게 뻗은 핏줄들이 심하게 팔딱거린다.
세종은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젠장, 박민영. 너 왜 이렇게 날 신경 쓰이게 하는 거냐.’
민영은 부스스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정신이 돌아올수록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었다. 허리도 결리고, 엉덩이도 결린다. 내내 굽히고 있었던 다리는 아예 펴지지가 않았다.
“아으옥.”
억지로 다리를 펴자 우두둑 소리가 났다. 그녀는 가늘게 눈을 뜨며 자신이 누워 있는 공간을 살폈다.
에?
민영은 자신이 그 좁은 바위틈에서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경악했다.
않아 있기도 버거운 공간에서 어떻게 누웠지?
하지만 그녀는 곧 그 원리를 깨달았다. 누워 있는 게 앉아 있는 것보다 더 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녀의 하체였다. 그녀의 허리 아래쪽은 바위틈에 있지 않았다. 바깥으로 몸을 반 이상 뺏으니 당연히 눕는 것이 가능했다.
그녀는 그제야 다리가 펴진 이유도, 자신이 누울 수 있었던 상황도 파악했다.
그런데…그가 없다, 헉! 이 인간이 나만 두고 벌써 구조대 되어서 혼자 간 거 아냐?
놀라서 몸을 일으키던 민영은 자신이 세종의 티셔츠를 베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딱딱한 땅바닥에 머리를 대고 자면서도 왜 머리가 배기지 않았는지 그 이유도 알 것 갈다.
그녀는 엉거주춤 기다시피 밖으로 나왔다. 들어갈 때는 그렇게 힘들더니 나올 땐 그래도 제법 수월하다.
밖은 안개가 이미 걷혀서 환했다. 게다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해변이 있었다. 물론 헤엄쳐서 가기에는 무리가 있는 거리지만.
민영은 문득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궁금해졌다. 잠깐 존다는 것이 아예 발까지 뻗고 잤으니 시간 개념이 없어버렸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해의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어디가 동쪽인지, 서쪽인지 알 수가 없어 서 시간을 추측할 수는 없지만 많이 기운 것을 보니까 오후는 훌적 넘은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인간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맞은편 바위 쪽에서 세종의 머리가 쑤욱 올라오자 움찔 몸을 굳혔다.
절대 양반은 못 되는 놈이다.
그가 훌적 바위를 넘더니 이쪽으로 걸어온다. 민영은 문득 잠자기 전에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살짝 창피해진다. 그 누구한테도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는데 왜 하필 강세종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하물며 1년 가까이 함께 일한 최 경사한테도 한 적이 없는 말을.
괜히 세진이 안부가 궁금해서 말을 섞다 보니 어떻게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자연스러웠는데 맑은 하늘 아래서 되짚어 보니 많이 쪽팔린다.
“다 잤어?”
그가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물었다. 민영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게 과연 무슨 뜻일까? 이 와중에 잠까지 자는 나에게 비아냥거리는 걸까? 아니면 알고 보니 내가 불쌍한 여자인 것 같아서 마음 고쳐먹고 잘 해 주기로 한 뜻에서 저러는 걸까?
부디 후자이길 바란다. 강세종에게 동정을 받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해변 생활이 좀 편해진다면 까짓 동정 좀 받으면 어떤가.
“네.”
민영은 슬쩍 고개를 끄덕덕인 후 그의 안색을 살폈다. 혹시 이죽거리는 거였다면 재빨리 대처할 방안을 생각해야 했기에 잔뜩 긴장했다.
“곧 구조대가 도착할 거야.”
아, 그새 구조요청을 했나보다.
민영은 여전히 개운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만족하고 그에게 물었다.
“우리 보트는요?”
“못 움직일 것 같다. 바닥이 뭐에 걸렸는지 꼼짝도 하지 않아.”
“아, 네에.”
민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문득 손에 쥐고 있는 티셔츠에 눈길이 갔다.
“참, 이거요.’
그를 향해 티셔츠를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바람막이로 쓰던 점퍼만 걸치고 있었다. 열린 지퍼 사이로 구릿빛 가슴이 다 보인다. 역시 생각했던 것만큼, 아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탄탄해 보였다. 예전에 등목을 할 때는 등허리만 집중적으로 봐서 그런지 앞판은 또 새로웠다.
민영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괜한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기온은 낮은데 열이 확확 달아올랐다. 등판을 볼 때는 이렇게까지 이상한 기분은 들지 않았는데……
그가 그녀가 내민 티셔츠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보는 앞에서 점퍼를 홱 벗더니 티셔츠를 머리 위로 뒤집어 썼다.
아, 다 봤다. 정말 환상적이다. 그 어느 보디빌더 못지 않았다. 아니, 과한 근육을 과시하는 보디빌더들보다 훨씬 나았다. 자연광인 태양열에 그을려 건강하다 못해 섹시하기까지 한 피부색은 반들반들, 윤기가 흘렀고 부드럽게 굴곡진 근육은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며 울룩불룩 건강미를 과시했다.
정말, 강세종만 아니면 죽기 살기로 한번 덤벼 보고 싶은 몸이다. 그런데 강세종이라서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강세종이니까. 그녀가 가슴 깊이 묻었던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던 강세종이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강세종에게만은 그저 모르는 여자로 남고 싶었다. 아니면 좀 특이한 부하로 남아도 좋다.
민영은 괜한 자격지심에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13년 전 어느 여름에 있었던 한 장면이 문득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날, 피부 깊숙이 깨달았었다. 강세종과 자신은 속한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그때의 감정은 꽤 오래갔다. 그를 혼자 좋아했던 기간보다 훨씬 더 오래. 그래서 그녀는 안다. 강세종을 마음에 품으면 더 큰 아픔이 남는다는 것을.
“뭐, 해?”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민영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가 잠시 이상한 듯 바라보다가 바위 아래쪽을 가리켰다.
“구조대가 정박할 장소는 저기뿐인 것 같으니까 이동하자.”
“네.”
그리고 그가 앞장섰다. 그러다가 문뜩 세종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민영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그를 쳐다보았다.
“너 말이야.”
“예?”
멍하게 묻는 그녀에게 그가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너, 혹시 어린놈 좋아하냐?”
“예에?”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냐는 식으로 인상을 썼다. 그러자 그가 신경질 적으로 다시 물었다.
“취향이 어린놈이냐고.”
“아뇨. 제가 변녀도 아닌데 어린놈을 뭐 하러 좋아해요? 성가시기만하지.”
민영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식으로 툭툭 내뱉었다. 그런데 그 무성의 한 대답을 듣는 순간 그의 얼굴이 마술이라도 부린 듯 부드럽게 펴졌다. 마치 우중충한 먹구름이 가득했던 하늘이 밝아지는 것처럼.
“그건 왜 묻는데요?”
아무 말 없이 돌아서 가던 길을 가는 세종의 뒤통수에 대고 민영이 물었다. 하지만 대꾸가 없다. 그녀는 그의 뒤통수를 향해 입술을 삐죽이며 다시 물었다.
“왜 묻냐니까요?”
그래도 묵묵부답이다. 민영은 계속해서 물었지만 그는 묵묵히 걷기만 했다.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잔뜩 그린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