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culus of Joseon RAW novel - Chapter 226
226화 어쩔 수 없소
행정관리체제와 군제개편도 서둘렀다.
우선 행정직(行政職)과 군직(軍職)을 완전히 분리했다.
조선은 문과와 무과, 잡과로 구성된 과거시험을 통해 인재를 등용시킨다. 그런데 시험은 문과와 무과 등으로 나누어 치르게 하면서, 정작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문관과 무관의 구별이 점차 없어진다. 그러니까 문과를 치른 문관이 장군직을 맡기도 하고, 장군이었던 사람이 행정 관료가 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전문성이 결여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명원이다. 그는 문관 출신이다. 비록 고전 병법서를 다수 읽어 아는 바가 많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인 전투 수행능력이 떨어져 크게 패하고 말았다.
김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행정직이면서 군직까지 함께 수행해야 되기에, 난리가 일어나자 제대로 대응조차 못하고, 애써 모은 군졸들을 흩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반대로 문관이 군직을 맡아 의외의 능력을 발휘한 사람도 적잖긴 하다. 대표적으로는 권율이 그러했다. 권율은 늦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행정직을 수행하다가 이번 난리가 터지자 군사를 지휘하면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들에게 처음부터 적성에 맞는 직책이 주어졌다면 이 전쟁의 양상은 어찌되었을까? 왜 시험은 시험대로 따로 치르면서, 관직은 제멋대로 뒤섞여 있는 것일까?
“이 폐단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애초부터 나라에서 대놓고 문관과 무관을 차별하기 때문이오. 제가 무관 출신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오. 차별이 없었다면 이토록 과거시험에서 문과를 선호하지는 않았을 게요. 게다가 최종 군사지휘결정을 문관이 하는 경우가 허다하잖소? 그게 폐단이오.”
무관은 일정 품계 이상을 올라가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면 원칙적으로는 정3품으로 끝이다. 만약 그 이상으로 올라가려면, 가선대부(嘉善大夫)를 획득해야만 한다. 즉, 종2품 이상부터는 문과 승진 코스를 타야 한다는 말이다.
이에 아예 그런 폐단을 사그리 없애버리고, 행정직은 행정직대로, 군직은 군직대로 따로 체계를 만들었다. 또한 서로 교차하여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에 따라 군제개편도 다시 했다.
중앙군인 오위도총부는 그대로 놔두되 그들의 업무를 다소 조정했다. 일단 그들에게 종4품 이하의 군직 임명권을 줬다. 인사권을 그들에게 주었다는 것은 아주 큰 의미였다. 전문성을 살려 필요한 인재를 알아서 등용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오위도총부의 권한이 너무 비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도 마련했다. 정4품 이상의 관직과 오위도총부 수뇌부의 인사는 전적으로 종1품 이상의 대신들과 장군들의 심의를 거쳐 총리가 최종 결정하기로 한 것이 그것이었다.
차후 무과시험 자체도 오위도총부에서 주관한다. 군에 인적 자원이 얼마만큼 필요한지, 그들이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인재를 등용시키기로 한 것이다.
“문과시험처럼 몇 단계로 나누어 시험을 치르면 어떻겠소? 그러니까 1차 시험을 치러 인재를 뽑고, 그들을 전문적으로 육성한 다음에 다시 그 안에서 2차 시험을 보아 사관으로 임관시키면 어떻겠소?”
한마디로 초급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사관학교를 만들자는 제의였다. 그에 대해 다들 동의해줬다.
기존의 무과시험 과목 중에는 말을 타는 능력을 봤다. 그러면 시험을 치르기 위해 말을 타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말이 워낙 고가다보니 연습용 말을 구매하려면 어지간히 큰마음을 먹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무과시험을 볼 수 있는 자들은 어느 정도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는 자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번 기회에 모두에게 기회를 주는 쪽으로 바꾸기로 했다. 즉, 기초 체력과 학문적 기본 소양 등을 주요 과목으로 하여 사관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게 하고, 사관학교 내에서 말 타기와 활과 총 등을 훈련시키기로 한 것이다.
“비록 몸이 성치는 않지만, 형님의 기대를 저버리진 않겠소.”
초대 정2품 사관학교장에 김천남을 앉혔다. 비록 귀 한쪽이 날아갔고, 팔다리가 하나씩 불편해졌다지만, 전국적으로 김천남의 명성은 자자했다. 처음부터 나를 따라다니며 무훈을 쌓아 귀신사천왕이라 불렸으며, 소수의 인원으로 임금을 구하려한 무용담까지. 젊은 사관생도들의 가슴 속에 김천남은 살아있는 전설 그 자체였다.
오위도총부 산하에 전략과 전술, 전법을 연구할 ‘전략기획실’을 만들었다. 새로운 무기를 개발했고, 이전과 다른 전투를 경험했다면, 그에 맞게 전략과 전술, 전법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맡겨만 주시우. 내 씨름은 못하지만, 이런 건 자신 있수.”
황치원에게 전략기획실 운영의 총책임자인 정2품의 전략기획실장을 맡겼다. 황간과 추풍령에서 전투를 치를 때, 처음으로 투석기를 개발했었다. 그 당시에 황치원은 투석기 제작의 실무를 담당했었고, 이후로도 무기제작과 훈련에 다양한 경험을 쌓았었다. 그리하여 황치원을 높은 관직에 앉히는 데 이견을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시 형님은 뭘 좀 아시는구려. 저는 머리 쓰는 일은 영 안 내키는구려.”
정범례에게 전국의 군사훈련을 총괄할 정2품의 훈련원장을 맡겼다. 정범례는 눈 한쪽을 잃었고, 다리 한쪽을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륜의자(휠체어)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그의 눈과 얼굴은 형형한 빛이 이글거렸다.
정범례는 전투 경험을 기초로, 총포의 사격을 포함한 훈련을 주관했다. 김천남, 황치원과 마찬가지로 정범례도 전국적인 명성이 드높아졌다. 특히 다테 마사무네와의 일전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이 회자되는 이야기였다. 어린 아이들끼리 전쟁놀이를 할라치면, 서로 정범례 역할을 하겠다고 다툴 정도였으니까.
문과와 무과 시험에 필수 과목으로 수학과 과학 등의 이학 과목을 포함시켰다. 이학의 필요성은 이제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라가 어느 정도 더 안정화되면 이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할 기관도 만들 예정이다.
생산성 확보 문제로 병졸들 중에 일부를 돌려보냈다. 그러고도 농사를 비롯한 각종 생산 활동 인원이 불충분했다.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윤번제로 돌려가며 생산활동과 군사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어쩔 수 없소.”
나는 그렇게 말하며 양반들도 전부 생산 활동을 돕게 했다. 볼멘소리를 내긴 했지만, 일전에 김수 등이 앞장서서 염전에서 일한 사례가 있기에 다들 꾸역꾸역 따라주었다. 애당초 그렇게하여 김수는 큰 관직을 얻지 않았던가.
“어쩔 수 없소.”
주경야련(晝耕夜練). 장군에서부터 병졸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훈련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다만 일주일 중에 하루는 쉴 수 있도록 허락했다.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우리 민족은 의지력 하나만큼은 강한 민족이다. 다들 이 꽉 깨물고 빡빡한 일정을 강행했다.
그리고 행정체계 개편을 통해 불필요하거나 과도한 직책을 다 없애버리고, 최소한의 인원으로 감축했다.
“어쩔 수 없소.”
덕분에 인원이 감축된 만큼의 업무를 남은 행정 관료들이 처리해야만 했고, 그들은 매일같이 야근을 해야만 했다. 아니, 아예 내가 정하기를, 퇴근에서 다시 출근하기까지의 시간은 3시진, 그러니까 6시간으로 못 박았다.
불만을 갖거나 근무 태만, 업무시간 내 근무지이탈자들은 1차 경고로 ‘광장 토론’ 보름 형에 처했고, 그러고도 2차로 문제가 발생하면 해당 인원을 삭탈관직하고 그 자손들까지도 다시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도록 법을 제정했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오. 부모가 그리 강하지 못하다면, 자식도 그를 닮아 똑같이 강하지 못하오. 같은 논리로 부모가 게으르고, 요령만 부리고, 남을 속인다면, 자식도 똑같이 배워 그대로 따라하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식이 올바를 리가 없소. 그러니 처신들 잘하시오. 알겠소?”
자손 대대로 다시는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 잘하라는 소리였다. 서슬 퍼런 내 명에 다들 꼼짝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난 한 달에 한 번 퇴근하니까.
“죽도록 일하고 일주일 중에 하루를 쉬면, 그것이 얼마나 고맙고 달콤한지 깨닫게 될 거요.”
오늘도 모든 관청의 불은 대낮처럼 밝았다.
***
그렇게 나라 전체가 바쁘게 돌아갔고, 어느덧 1593년 8월 말이 되었다.
“어찌되었습니까?”
“누르하치가 총리님의 제안을 수락하겠다고 합니다.”
“잘 됐구려.”
누르하치가 자발적으로 돕겠다며 서신을 보냈고, 대신들과 한참을 논의한 끝에 여진과 손을 잡기로 합의했다. 그런 뒤에 허투알라로 육군 총사령관 신립을 보내 누르하치와 직접 대담을 하게 했다.
신립은 니탕개의 난을 평정했던 인물이었던 만큼 여진족의 습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번 일에 그 누구보다도 아주 적격이었던 것이다.
난 신립을 허투알라로 보내면서, 내 제안을 담은 서찰을 누르하치에게 전달하게 했다. 내 제안은 이러했다.
— 조선은 야인여진(野人女眞)을 정복하겠으니 그대들은 도와라.
— 부잔타이가 이끄는 해서여진(海西女眞)도 조선이 정복할 터이니, 그대들은 조선을 도와라.
— 만주 전체에 매장된 자원을 탐사하고 채굴할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
— 그대들의 건주여진과는 형제의 맹약을 맺을 것인즉, 대대손손 상호 불가침을 서약하라.
— 그대들을 호인(胡人, 오랑캐)이라 부르며 업신여기는 짓을 금하겠다. 그대들도 조선 변방의 약탈을 중지하라.
— 문화와 지식을 보급하도록 하겠다.
— 조선은 명과의 전쟁을 은밀하게 준비할 것인즉, 그대들도 드러나지 않게 준비하다가 조선이 먼저 전투를 시작하면 적절히 호응하도록 하라.
― 다만 명과의 전쟁 후, 그 성과는 서운하지 않게 적당히 분배하리라 약속하리니, 절대로 중간에 다른 마음을 먹지 말라.
— 누르하치, 그대의 원한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대가 왜 지금껏 섬겼던 명을 버리고 조선과 붙으려는지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그대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 아닌가?
— 조선은 그대의 부(父)와 조부(祖父)의 억울한 죽음을 인지하고 있으며, 그대의 복수를 도우리라 약속한다.
― 신의와 의리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누르하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여진족이었지만 이성량의 요동 정벌을 도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명군의 실수로 누르하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죽고 만다.
때문에 누르하치는 젊은 시절부터 명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있었다. 원 역사에서 누르하치는 임진왜란으로 그 기회를 잡고 만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명나라는 온통 조선으로 시선을 집중했고, 그에 따라 미처 여진족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누르하치는 만주에 흩어진 여진족을 모두 통일하여 군력을 쌓았고, 명나라가 불안정한 틈을 타 중국을 정복해나갔다.
내가 주목한 점은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시기적으로 누르하치가 아직 여진을 통일하기 전이란 점이었다. 이는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을 제외한 나머지 부족을 전부 조선에서 정복하면, 누르하치의 성장을 멈출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거기에 만주의 자원을 몽땅 가져오겠다는 사심 가득한 생각도 품고 있다.
두 번째로는 여진족이 은근히 자격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진족은 원체 사나웠고, 그래서인지 몰지각한 행동을 자주했다. 그 때문에 오랑캐라 불리며 별 놈의 무시와 멸시를 다 받고 사는 부족이다. 그들은 이에 대한 한(恨)이 있다. 그래서 난 그들에게 형제의 맹약을 맺자고 먼저 제안했고, 문화와 지식을 전파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세 번째, 어찌되었든 누르하치의 마음속엔 복수심이 가득하다. 이 복수심을 자극할 수만 있다면, 그를 이해해주는 척이라도 한다면, 어느 정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까. 그리 생각했다. 내 예상은 적중했고, 누르하치는 신립 앞에서 통곡을 했다고 한다.
“좋소. 먼저 신 장군께서는 박진, 정문부와 함께 야인여진부터 해서여진까지 전부 정복하도록 하시오. 기한은 올 겨울까지요.”
1593년 9월, 나는 명군 몰래 두만강 너머로 군사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