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96)
그렇게 막 단영이 벽태산의 지시를 이행하러 나가려는 순간, 다급히 채월이 들어왔다.
“공자님, 손님이 또 오셨습니다.”
“또? 이번엔 설마 흑련이냐?”
채월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예. 맞습니다. 어찌할까요?”
벽태산이 피식 웃었다. 왠지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접객실로 보내라.”
“예.”
채월이 고개를 숙이고 단영과 함께 얼른 벽태산의 방에서 나갔다.
벽태산은 나가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혹시 다른 곳에서 손님이 또 오거든 전부 접객실로 모아라.”
벽태산의 입가에 약간 짓궂은 미소가 맺혔다.
단영과 채월이 발을 멈추고 돌아서서 벽태산에게 대답했다.
“예.”
“그리고 화옥도 바로 접객실로 가라고 해라.”
두 사람은 고개를 숙여 대답하고는 얼른 물러갔다.
벽태산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재미있을 것 같구나.”
끝
진사홍은 살짝 불쾌한 눈으로 자신의 앞에 앉은 사람을 바라봤다.
벽태산을 만나기 위해 금벽장에 왔는데, 그가 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손님이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다.
한데 문제는 그 손님이 흑련에서 온 적결명이라는 점이었다.
적결명은 흑련의 무사대 중 하나를 이끄는 자였다. 여러모로 진사홍과는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적결명과 함께 벽태산을 기다리는 이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그건 적결명도 마찬가지였다.
접객실에 들어오자마자 눈살부터 찌푸리고는 지금까지 그 찌푸린 눈을 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접객실 문이 또 열렸다.
드디어 벽태산이 온 건가 하고 바라봤더니, 낯익은 사람 두 명이 함께 들어왔다.
남궁준과 제갈관이었다.
결국 남궁세가와 제갈세가에서 무한으로 들어온 자들까지 여기에 온 것이다.
남궁세가나 제갈세가는 사실 무림맹에 발끝 정도는 걸치고 있었다.
각 세가 출신 인재들이 무림맹에서 활약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림맹 소속이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남궁세가와 제갈세가는 다른 무가들과 달리 각각의 힘으로 충분히 일대를 장악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을 쌓았으니까.
무림맹이나 흑련과 직접적으로 비교를 하면 모자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가진 바 힘은 호무련을 넘어설 정도였다.
무림에는 이런 식으로 가문 하나의 힘이 거대한 연합을 능가할 정도로 힘을 쌓은 무가가 다섯 있었다.
흔히 오대세가라 불리는데, 그 중에서 남궁세가와 제갈세가가 가장 강성했다.
사실 나머지 셋은 남궁세가나 제갈세가에 비하면 많이 모자랐다.
아무튼 접객실로 들어온 남궁준과 제갈관은 눈을 빛내며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결국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반갑습니다.”
“저희가 무한에 들어오는 것이 좀 늦어서 이래저래 바쁘다보니 찾아뵙지도 못했습니다.”
진사홍과 적결명도 화답하듯 인사했다.
“나야말로 두 분이 무한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움직였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민망합니다. 아시다시피 사건이 좀 있어서······.”
“나 역시 안 그래도 조만간 인사를 드리러 갈까 했습니다. 한데 이리 뵙게 되어 기쁘군요.”
남궁준과 제갈관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그들 사이에 딱히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싸한 침묵이 접객실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누구도 이 침묵을 깨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 오늘 만나게 될 벽태산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여기에 오기 전에, 아니, 무한 진출을 타진할 때, 이미 벽태산에 대한 조사를 상당히 많이 했다.
계기는 호무련의 무한 진출이었지만, 호무련이 무한에 진출하게 된 이유가 벽태산이라는 것은 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금방 알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조사를 하면 할수록 벽태산에 대한 감탄과 궁금증, 호기심이 점점 더 커졌다.
“그나저나······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것 같은데······.”
적결명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보다 진사홍이 더 오래 기다렸지만, 흑련 출신답게 참을성이 훨씬 모자랐다.
물론 나머지 사람들도 현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계속 이렇게 말없이 있는 것도 고역이군.”
적결명이 그렇게 말하며 나머지 세 사람을 슥 둘러봤다.
그의 말을 받아준 사람은 제갈관이었다.
“하고 싶으신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까 들어올 때 보니 두 분을 안내한 시비의 미모가 상당하던데.”
제갈관과 남궁준은 속으로 살짝 욕을 했다. 누가 흑련 출신 아니랄까봐 고작 저런 말이라니.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두 사람을 안내한 시비의 외모가 정말 대단했으니까.
두 사람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적결명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까 날 안내한 시비도 진짜 끝내줬는데. 솔직히 그동안 내가 봐 왔던 그 어떤 여자보다 아름다웠소. 두 분은 안 그랬소?”
적결명의 노골적인 말에 진사홍이 인상을 썼다. 하지만 제갈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받아주었다.
“벽태산 공자의 시비들이 아름답다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게다가 수가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열 명이나 있다고 합니다.”
적결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열 명? 그 열 명이 전부 그런 미인이란 말이오?”
“그렇다고 합니다. 물론 소문이니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적결명이 은근한 시선으로 제갈관을 바라봤다.
“제갈 대협께서는 아는 것이 참으로 많군요. 아무튼······ 열 명이나 있다니 말만 잘 하면 한두 명쯤 얻을 수도 있지 않겠소이까? 어떻게 생각하시오?”
적결명의 마지막 물음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걸 물어보며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슥 둘러봤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적결명이 씨익 웃었다.
“다들 이렇게나 속마음을 감추고 계셔서야······ 대화가 안 되지 않습니까. 저부터 솔직히 말할까요? 절 안내한 그 아이의 자질이 범상치 않더군요.”
자질이라는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득였다.
그리고 다들 서로의 기색을 알아차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다들 그런 겁니까?”
적결명이 알기로 이곳에 있는 이들을 안내한 시비는 전부 달랐다.
물론 마지막에 들어온 남궁준과 제갈관은 함께 왔으니 한 명의 시비가 안내했지만.
어쨌든 총 세 명이나 되는 시비가 전부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건 굉장히 특이한 일이었다.
그리고 적결명은 솔직히 말해서 놀랐다.
누군가를 봤을 때, 그 사람의 자질이나 체질을 파악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주 뛰어난 의원쯤 되면 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인 중에는 그런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이건 무공이 뛰어나거나 경험이 많다고 해서 잘 하는 것이 아니다.
적결명은 그런 면에서 제법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누군가를 보고 그의 자질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는 데에 특별한 재능을 타고났으니까.
한데 지금 분위기를 보아하니 여기 모인 나머지 세 사람도 자신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희귀한 재능을 가진 자들이 넷이나 모여 있는 것이다. 그러니 놀랄 수밖에.
이곳에 있는 이들은 각각이 속한 조직이나 가문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자들이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자리도 잡았으니 슬슬 제자를 키워볼까 하는 생각들을 하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자질이 뛰어난 사람을 만난 것이다.
“나이가 많은 것이 좀 걸리긴 한데······.”
진사홍의 중얼거림에 적결명이 얼른 말했다.
“그럼 당신은 빠지시오. 난 그래도 상관없으니.”
“내가 언제 빠지겠다고 했소? 그냥 그렇다는 거지.”
사실 이들을 안내한 시비들은 나이를 고려하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로 자질이 뛰어났다.
물론 더 정확한 건 직접 가르치면서 시험해 봐야 알겠지만, 그 잠깐 동안 살펴본 것만으로도 솔직히 충분했다.
자질도 자질이지만, 체질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나이를 고려치 않는 것도 이들이 파악한 체질 때문이었다.
“어쨌든 벽태산이라는 자가 부디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갈관이 약간 우려스러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솔직히 우리를 따라가는 것이 그 아이들에게 훨씬 좋은 기회가 될 거라는 사실은 명약관화한데, 아집 때문에 그걸 막으려 한다면······ 좀 실망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곳에 있는 네 사람이 전부 순수한 마음인 건 아니었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넷 모두 삿된 마음이 조금씩 섞여 있었다.
그녀들은 그 정도로 아름다웠으니까.
그렇게 자신들을 안내한 시비들에 대한 얘기를 이리저리 나누고 있을 때, 벽태산이 도착했다.
문이 천천히 열리고 벽태산이 화옥을 대동한 채 접객실로 들어서자, 네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눈이 살짝 커졌다.
‘또 있어?’
그들의 시선은 온통 화옥에게 꽂혀 있었다.
화옥은 벽태산과의 하룻밤 이후 미모가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변화의 폭이 컸다.
반은 나이 때문이었고, 나머지 반은 그녀가 최근 익히고 있는 월영마공 때문이었다.
화옥은 원래 하오문의 의창지부장이었다.
당연히 나이가 어리지 않았다. 백화루주와 비슷한 또래였다.
한데 벽태산과의 하룻밤 이후 점점 어려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다른 시비들과 다들 비슷한 또래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월영마공은 밤에 달빛을 받으며 수련하는 마공이었다.
달빛을 받아들여 그 힘을 흡수하는 건데, 그것이 외모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아무튼 그런 화옥이 방에 들어서니, 주변이 환해지는 것 같아서 다들 눈을 떼지 못했다.
벽태산이 그걸 보고 피식 웃었다.
“날 보러 온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닌 모양이군.”
그 말에 네 사람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들의 눈에 살짝 민망함이 담겼다가 사라졌다.
다들 나이가 불혹을 훌쩍 넘겼다. 한데 고작 미모와 자질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니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제갈관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벽태산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제갈관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벽태산은 그런 제갈관의 모습에 살짝 이채를 발하다가 마주 포권을 취했다.
“벽태산입니다.”
그제야 나머지 세 사람이 분분히 포권을 취했고, 벽태산도 가볍게 그걸 받아주었다.
둥글고 커다란 탁자에 벽태산을 포함한 다섯 사람이 빙 둘러 앉았다.
그리고 화옥이 벽태산 뒤에 조용히 서서 눈을 반짝였다.
네 사람의 시선이 자꾸 화옥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벽태산은 가만히 이들이 하는 양을 지켜봤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이번에도 제갈관이었다.
“우리 제갈세가에서 조만간 무한에 자리를 잡으려 합니다.”
벽태산이 제갈관을 쳐다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아직 제대로 된 기반을 마련하지는 못했는데, 그 부분을 금벽상단과의 거래로 해결하고자 합니다. 물론 그에 대한 진행은 다른 사람이 하고 있습니다. 전 벽 공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이리 찾아왔습니다.”
제갈관의 태도는 상당히 정중했다.
나이나 지위로 찍어 누르지도 않았고, 말을 함부로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눈빛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제갈관을 시작으로 나머지 사람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금벽상단을 이용해 무한에 자리를 잡겠다는 것과 벽태산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것.
그렇게 대화를 물꼬를 튼 다음, 조금씩 신변잡기를 비롯해 무림의 정세, 이번에 무한에서 벌어진 일 등에 대한 얘기가 이어졌다.
벽태산은 주로 듣는 입장이었다. 네 사람이 보기에 벽태산은 지나칠 정도로 말을 아꼈다.
그래서 말을 끌어내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저 간단히 대꾸하는 게 전부인지라 좀처럼 대화가 원활하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뒤에서 지켜보는 화옥은 식은땀을 흘렸다.
벽태산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만, 지금 벽태산 앞에 있는 네 사람은 정말 대단한 자들이었다.
한데 지금 분위기가 왠지 저 네 사람이 벽태산의 마음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면 저들의 심기가 굉장히 불편해질 것이다.
그래도 시간이 약인지라, 그렇게라도 대화가 이어지니 점점 분위기 자체는 부드러워졌다.
가끔 자기들끼리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가 되자, 지금까지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던 적결명이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내 듣기로······ 벽 공자님의 시비들이 그렇게 유명하다고 하던데, 맞소이까?”
벽태산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적결명을 쳐다봤다.
적결명은 벽태산의 분위기를 슬쩍 살폈는데, 나쁘지 않아 보여 하던 말을 계속했다.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벽 공자의 시비들을 한 번 보여주실 수 있겠소이까? 내 중요한 걸 확인해 보고 싶어서 그러오.”
적결명은 그렇게 말한 다음 나머지 세 사람도 끌어들였다.
“나 혼자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오. 여기 있는 나머지 분들도 다들 같은 생각이오. 아마······ 벽 공자의 시비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오.”
벽태산은 적결명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저 담담히 보고 있을 뿐인데 이상하게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인상을 쓰거나 노려본 것도 아니고 그저 가만히 보기만 했는데도 다들 공기가 무겁게 등을 짓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벽태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화옥을 쳐다봤다.
“손님들 가신단다. 밖으로 안내해 드려라.”
벽태산은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접객실을 나가 버렸다.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뭐라고 한 마디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걸 보는 화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탁.
벽태산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그제야 다들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때까지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후우우우.”
다들 일제히 숨을 몰아쉬었다.
고수들인지라 호흡을 고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머릿속은 호흡처럼 평온해지지 않았다.
그런 그들의 귓가에 화옥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밖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어느새 화옥은 표정과 분위기를 수습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을 내린 것이다.
화옥의 정중한 말에 다들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잠시 고민하던 그들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 * *
진사홍과 적결명, 남궁준과 제갈관은 금벽장을 나서서 한동안 나란히 걸어갔다.
사실 금벽장 정문에서 헤어질 수도 있었는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말없이 걷기만 했다.
처음 입을 연 것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제갈관이었다.
“대체 뭐였을까요?”
다들 고개를 저었다.
“기세에 짓눌린 건 절대 아니고······.”
그랬다면 모를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