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92)
292화. 화로가 속삭이는 말 (4)
아이작은 울스텐을 돌아보았다. 그가 알려주지 않고선 알 수 없는 정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울스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간이라면 거짓말일 수도 있겠지만, 고지식한 드워프들은 뻔뻔하게 행동할지언정 굳이 거짓말을 하진 않는다.
“울스텐을 의심할 필요는 없네. 내가 천둥 장인께 여쭤보고 알아낸 일이니.”
“확인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아이작은 태연한 척하면서 대꾸했다. 명천사에게 들은 것이라면 타천사 조각 일부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 게 분명했다.
지하에 파묻혀 있는 수천 명의 타천사들, 그 전체를 아우르는 이야기일 것이다.
‘혹은 그보다 더 밑에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거나.’
아이작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천둥 장인은 세상의 화로에 속한 명천사 중 가장 오래된 천사다. 그가 만약 저 타천사들과 연관되어 있다면, 오히려 아이작이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더 많을 것이다. 타천사들에 대해 궁금한 것은 아이작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니 다른 사람들은 자리를 비워 주면 좋겠군. 엘릴의 왕에게도 정중히 부탁드리오.”
투할린은 에델레드에게도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자신보다 스무 배는 나이가 많은 드워프가 정중하게 부탁하자 에델레드도 황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이내 대장간에는 투할린과 아이작만이 남았다.
활활 타오르는 화덕에서 불씨가 튀어 오르는 소리만이 침묵을 메웠다.
투할린의 얼굴이 흔들리는 불꽃 속에 음영이 진 채 흔들렸다. 그가 천둥 장인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어떤 비밀을 엿들었는지 아이작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바닥에 꽂힌 수십 자루의 칼날들이 그의 고민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전쟁 준비를 의미한다는 것 정도는 아이작도 눈치챌 수 있었다.
불현듯 투할린이 입을 열었다.
“천둥 장인께서 듣고 계시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자네는 그게 뭔지 알고 있는가?”
아이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아는 것이라곤 울스텐이 아는 정도뿐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빛의 법전 타천사들이 이 땅 아래 파묻혀 있다는 것. 타천사 조각을 멋대로 떼어다 써먹기는 했어도 알고 뭘 하려던 것은 아닙니다.”
아이작의 말에 화덕 안의 불꽃이 쉭쉭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투할린이 입을 열었다.
“그건 빛의 법전 타천사가 아닐세.”
“예? 가장 기초적인 형태의 빛의 법전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여섯 장에서 여덟 장의 날개로 이루어진 몸통과 눈. 그게 빛의 법전의 기천사 아닙니까?”
“정확히는 ‘모든 신앙’의 기천사일세. 과거에는 모든 천사들이 그와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었지. 시간이 지나면서 개성이 두드러지고 목적이 달라지면서 각기 다른 형태를 취하게 되었을 뿐. 천둥 장인께서 바로 그 기천사의 원형을 잡으셨지.”
아이작은 놀란 얼굴로 화덕을 보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불꽃의 표정을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불꽃은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쉭쉭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천사가 천사의 외형을 잡는다구요? 뭔가…… 순서가 뒤바뀐 것 같습니다만.”
“이미 자네도 우르반수스를 여러 차례 들락거린 것으로 알고 있네. 그렇다면 시간의 순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 않나?”
“…….”
하긴, 천사들이 주로 활약하는 것은 현재가 아닌 우르반수스다. 지금도 우르반수스에서는 천사들의 항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현재의 역사를 고정하기 위해, 혹은 뒤바꾸기 위해 다투고 있다.
명천사들이 현재에만 계속 신경 쓸 수가 없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다.
아이작은 투할린이 하고 싶은 말을 알았다. 저 천사들은 빛의 법전 하나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신앙들이 힘을 합쳐 무언가를 가두려 한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최소한 세상의 화로는 개입한 것이 분명했다.
“저 아래 뭐가 있는 겁니까?”
이 시점에서 아이작은 답을 어느 정도 눈치챘다. 하지만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내가 자네의 대답에 따라 참전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한 것이네.”
투할린은 음울한 눈으로 아이작을 응시했다.
“자네는 신들께서 이름 없는 혼돈의 시체를 저 깊은 땅 밑에 가둔 이유를 아는가? 그의 유지를 유일하게 잇는 자네는, 혹시 저 땅 밑 깊은 곳에 잠든 혼돈의 부활을 꿈꾸는 건가?”
***
아이작 이사크레아는 빛의 법전 성기사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 그는 이름 없는 혼돈의 신도이자 사도이며 교황이자 대리인이다. 세상에 유일하게 이름 없는 혼돈의 권능을 나눠주고 뜻을 베풀 수 있도록 허락받은 존재이다.
그러나 더 정확한 진실을 말하자면, 아이작은 무신론자다. 멀쩡히 있는 신이 없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아뇨.”
아이작은 황당하다는 듯 투할린을 바라보았다.
“이름 없는 혼돈이 제게 권능을 나눠주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가끔 그 권능을 쓰는 저도 제 자신이 괴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하지만 혼돈의 괴물이 세상에 나도는 꼴은 저도 못 봐줍니다. 제가 빛의 법전 소속을 고집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아이작은 빛의 법전이 아무리 아니꼽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전쟁광이나 은둔자, 금권주의자, 해적 떼, 흡혈귀, 해골, 약탈광보다는 낫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빛의 법전도 최근 광기의 영역으로 치닫고 있긴 하다.
그래서 아이작도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독자적인 성지 정복을 시도하는 거고.
하지만 사람 잡아먹는 촉수 괴물이 나도는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앞서 말한 놈들이 낫다. 그건 변하지 않는 불변의 믿음이었다.
아이작의 답변에 투할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의심스러울 만도 했다. 아이작이 이름 없는 혼돈의 부활을 돕지 않는다면 대체 왜 혼돈이 그에게 힘을 보태준단 말인가? 죽어 있으니까 시간이 많아서? 아니면 그냥 혼돈이라서 이유 따윈 없는 건가?
‘흠, 좀 그럴듯하군.’
혼돈에게 이유가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이유 없이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듯, 이유 없이 신도들을 싫어해서 다 죽여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은 사랑받는 입장에서 뭔가 이유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저는 저 밑에 파묻혀 있는 게 이름 없는 혼돈인 줄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런 게 가능하긴 한 겁니까? 이름 없는 혼돈이 형체가 있는 무언가일 것이라곤 생각 못 했는데요. 신을 파묻어 봉인한다는 것도 그렇고”
“이름 없는 혼돈은 그런 게 아니라…….”
투할린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화덕에서 나는 쉭쉭거리는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이내 그는 입을 다무는 타이밍이 어색하다 여겼는지 다시 설명했다.
“타천사들은 뭔가를 무찌르기 위해 저기에 있는 게 아니라 일종의 뚜껑 역할을 하는걸세. 강력한 육체와 신성으로 저 밑에 있는 것을 ‘새어 나오지 않게’ 하는 땜질을 한 것이지.”
“그게 이름 없는 혼돈이구요?”
“살아있는 자들의 언어로는 정확한 표현을 찾을 수가 없군. 정확히 말하자면 이름 없는 혼돈의 시체에서 들끓는 구더기…… 비슷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지. 혼돈의 살점과 골수를 먹어 치우고 자란 벌레들.”
아이작은 갑작스레 어떤 이미지를 떠올렸다. 제물을 바치고 괴물들로 탈바꿈하거나 멸망을 노래하던 자들. 이름 없는 혼돈을 섬기던 신도들. 그리고 피라미드 위에 서 있는 노란 옷을 입은 남자.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이미지였다.
투할린이 ‘혼돈의 시체 위에 들끓어 오르는 벌레들’이라고 표현한 순간 그것이 다시 떠올랐다.
투할린은 아이작이 뭔가 떠올린 듯한 표정을 하자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자네라면 신성의 비의를 어느 정도 알았겠지. 앞으로 태어날 신을 모시고 돌보는 입장에서 말해 보지. 자네는 신이 인간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닙니까?”
비인격신들은 모르겠지만 인격신인 엘릴이나 무희, 올칸, 베셰크는 확실하게 신도들에게 의지를 전달한다. 아니, 비인격신들조차 누구를 천사로 임명하고 타천시키는 일을 통해 의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의 압도적인 권능 앞에 어떤 인간도 감히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투할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강한 힘에 그렇게 착각하고 있을 뿐이야. 신들은 다른 누구보다 신도들에게 휘말리는 존재들이네. 오히려 천사들이 함부로 끌려가는 일을 막기 위해 권위와 권능을 위장할 정도지.”
신들은 우르반수스의 질서 그 자체다. 그러나 우르반수스를 만들어 가는 것은 인간들 개개인이 그러모아 만들어 낸 신앙이다.
신은 통합 의지의 대변자이자, 인간들을 대신해서 힘을 투사할 수 있는 존재일 뿐이다.
“이름 없는 혼돈은 빛의 법전만큼이나 오래된, 아니, 어쩌면 빛의 법전보다 오래된 신앙일세. 불가해, 미지, 경외, 어둠, 지평선 너머…… 알 수 없는 모든 것에 이름 없는 혼돈의 이름이 붙었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빛의 법전의 섭리라 불렀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혼돈의 영역이라 여겼지.”
화덕이 쉭쉭거리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아이작은 투할린이 천둥 장인의 말을 그대로 옮기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상의 화로 최고의 전사가 일개 전령의 역할을 맡고 있었지만, 그는 겸손하게 직무를 수행할 뿐이었다.
“빛의 세기가 시작되고, 시간이 지나 외경을 제외한 모든 땅과 바다가 개척되었네. 빛의 법전 아래 모든 세상에 고정불변의 규칙이 새겨지려 했지. 하지만…… 어떤 자들은 그 ‘앞으로 도래할 천국’이 마음에 들지 않았네.”
“천국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말해보지. 나는 수천 명의 사람을 턱 끝으로 부리는 부자고, 자네는 내 변소 청소부야. 그 상태에서 영원히 세상이 고정된다고 가정해 보지. 자네는 납득할 수 있나?”
“……아, 기꺼이 집을 불태울 마음이 드는군요. 그래서요?”
“집을 불태우고 싶어진 사람들은 혼돈의 이름 속에서 미지의 공포를 찾아냈네. 미지의 공포만큼 강하고 한계를 알 수 없는 힘은 없어. 그들 스스로조차 어떻게 될지 모르고, 어떤 파멸을 불러올지도 모르는 힘이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낫다고 생각했겠지.”
아이작은 불현듯 투할린의 나이가 최소 400살쯤 됐을 것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아직 이름 없는 혼돈의 교단이 세상을 횡행하던 시절이다. 그는 혼돈의 신도들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혼돈은 강력하게 오염되기 시작했네.”
투할린은 단정하듯 말했지만 아이작은 곧바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신이 그렇게 쉽게 오염되는 것이 가능한가?’
투할린이 숨기는 부분이 있거나, 아니면 그 역시도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장 말을 끊을 생각은 없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그 과정을 마음에 들어했는지는 알 수 없네. 하지만 결국 신도들을 죄다 죽여 버린 것을 보면 썩 긍정적인 결과는 아니지. 죽음 또한 미지의 영역이니 그들이 바라는 바대로 된 걸지도 모르고.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지.”
투할린은 손가락을 들어 아이작을 가리키며 말했다.
“빛의 법전에 속해 있던 한 명천사가 그의 영적 자살을 도왔네. 왜, 무슨 사정으로 그랬는지는 몰라. 하지만 그 명천사는 등대지기의 명령까지 거역하면서 그 일을 해냈지.”
아이작은 투할린의 말에 한 명천사를 떠올렸다.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할 만한 광인을 여러 명 생각하기에는 후보가 애초부터 너무 좁았다.
“흰올빼미, 라는 이름이었지.”
투할린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은 그녀가 이름 없는 혼돈의 안락사를 도왔던 장소야. 이름 없는 혼돈의 신도들에게는 이만한 성지가 없겠지. 신들께서는 이곳에 뚫린 우르반수스 구멍을 통해 그 벌레들이 새어 나오지 못하게 틀어막았다네.”
***
옛날 옛적 이 땅이 헨드락 영지라고 불리던 시절.
이곳은 별 볼 일 없는 촌구석 시골에 불과했지만, 전전대 영주였던 리스헨 헨드락과 모종의 임무를 띠고 방문한 칼의 성자, 칼센 밀터는 대단한 야망을 품고 있었다.
신도 만들고 겸사겸사 제국으로부터 독립도 하자는, 광인의 망상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계획. 아니나 다를까 그 시도는 실패하고, 칼센은 허겁지겁 불사 교단으로 망명해서 앞잡이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아이작이 알아낸 공식 역사.
아이작이 새로 만든 역사에서 칼센은 실종, 정확히는 아이작의 뱃속에 장기체류하게 되었다. 칼센이 똥에서도 부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그가 다시 역사에 등장할 일은 없다.
참고로 ‘죽은 신의 내장’ 능력을 가진 아이작은 화장실에 가지 않는다. 그의 미모에 걸맞은 기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칼센이 변소에서 되살아날 일도 없다.
하지만 아이작은 오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터무니없는 상상은 아니었군.’
성지는 우르반수스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우르반수스와 현실의 경계가 옅은 곳이다.
칼센 밀터, 아니, 그를 사주한 것이 분명한 명천사는 아마도 이곳의 신성을 이용해서 그를 이름 없는 혼돈을 대체할 신으로 만들려고 했다.
보나 마나 이름 없는 혼돈을 싫어하는 등대지기가 꾸민 일이겠지만, 어쨌건 그 계획은 실패했다. 이번에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고.
여기까지 떠올리자 아이작은 투할린이 자신을 경계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투할린은 칼센을 알지 못하지만, 아이작이 칼센 같은 존재가 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연재] 죽은 신의 성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