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152
제 152 화
밤이 깊어질수록 파티의 분위기도 무르익었다.
은하는 알딸딸한 뺨을 비비적거렸다. 하민이가 맛있다며 음료를 하나 가져다줬는데 아무래도 제법 도수가 있는 술이었던 모양이다.
“으아~ 취한다, 취해~”
살짝 꼬인 발음으로 헤실헤실 웃자 레이먼이 걱정스럽다는 듯 쳐다봤다.
“깜둥, 괜찮아?”
“웅웅. 괜찮아.”
누가 봐도 전혀 안 괜찮아를 남발하는 은하의 모습에 그가 얼음물을 건네주었다.
유림이나 은하나 술은 좋아했지만, 주량이 센 편은 아니었다. 더욱이 은하는 얼굴이 쉽게 붉어져 늘 주변에서 먼저 말리곤 했다.
“방으로 돌아갈까?”
레이먼의 물음에 은하가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좀 있으면 폭죽 터트린다며. 그거 보고 갈 거야. 근데 뽀송, 다른 애들이 안 보여.”
“어? 그러고 보니 다들 어디 갔대?”
그제야 애들이 안 보이는 걸 안 레이먼이 주변을 둘러봤다. 리리아와 이야기를 하는 하민과 디하르를 제하곤 어째서인지 그 누구 하나 보이지 않았다.
유림과 데몽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사라졌고, 루아와 륜 또한 바람 쐬러 간다더니 감감무소식이다, 테오는 어딜 갔는지 아예 모르겠고.
뭐…… 어린애들도 아니고, 알아서 잘하겠지.
“우리도 밖에 나가서 바람이나 쐴까?”
“응응! 나가자!”
레이먼은 은하를 데리고 테라스로 나갔다. 문을 여는 동시에 찬 공기가 훅 하고 뺨을 두드렸다.
차가운 바람이 정신까지 맑게 하는 것 같았다.
은하가 기지개를 쭉 켜며 웃었다.
“으으~ 바람 좋다.”
“난 좀 추운데. 그보다 큰일이다. 이거 까딱하다간 한겨울에 여행가겠어.”
싫다는 듯한 투에 은하가 테라스 난간에 턱을 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좋지 않아? 난 눈 오는 거 좋은데. 거기다 소난은 눈 내리면 완전 예뻐. 근데 림은 그거 짱 싫어해. ‘으악! 또 눈이야?! 이런 쓰레기! 왜 자꾸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야?!’ 막 이러면서 비명 지른다?”
“……군인이냐. 걘 애가 왜 그렇게 된 건지…….”
“원래부터 그런 거 아니었어?”
맞다. 사혈의 가기 전에도 그랬다. 지금 생각해 보니 유림은 정말로 애답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레이먼은 옛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홀의 화사한 조명 때문에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별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요즘 하도 정신없어서 그런가. 이렇게 별 보는 것도 오래간만인 것 같네.
그리 생각하며 테라스에 몸을 기댈 때였다. 옆에 있던 은하가 갑자기 소리쳤다.
“루아다!!”
여동생의 이름에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교사 옆에 자리한 인공 정원. 그 중앙에 루아와 륜이 서 있었다.
레이먼과 은하는 그런 두 사람을 빤히 바라봤다.
저것들, 대체 뭐하는 거야?
***
테오는 느긋하게 정원을 거닐었다. 파티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고 이런 분위기를 마다할 만큼 재미없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밖을 거닐고 싶었다, 그것도 혼자.
결국, 그는 친구들 몰래 건물을 빠져나왔다.
밤공기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시원했고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때아닌 여유를 즐기며 천천히 걸을 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두드렸다.
테오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봤다.
정원의 중앙. 아담하게 꾸며진 작은 아치형의 터널 밑에 루아와 륜이 서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기 무섭게 루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륜, 이렇게 불러내서 미안해요.”
“아뇨, 괜찮아요. 그보다 무슨 일 있나요?”
륜이 걱정스럽다는 눈으로 루아를 바라봤다. 약간 붉어진 뺨과 자신감 없어 보이는 표정. 평소의 당찬 그녀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루아…… 혹시 어디 아픈가요?”
“아뇨…….”
“그럼……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요?”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친절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 친절이 조금 서운한 루아였다.
“……정말 모르는 거예요?”
“네?”
난처하게 되묻는 것이 오히려 루아를 당황케 하였다. 저건 100% 모른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런 그를 좋아하는 거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까지 이러니 왠지 눈물이 났다.
혹시 지금까지 보여줬던 애정의 의미를 모르는 건가? 자신이 그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건가?
루아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들어줄 건가요?”
“네. 말씀하세요.”
“사실 많이 고민했어요……. 이 이야기를 할까 말까. 어쩌면 우리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을까 하고요…….”
“……루아?”
루아는 크게 심호흡한 뒤,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평소였다면 이렇게 자각하지 못하는 상대에게 이런 말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가장 당당할 수 있는 모습이었고, 그 무엇보다 평생 이어진다는 학교의 전설을 믿고 싶었다.
“륜, 저는요…….”
루아가 수줍게 말했다.
“당신을 아주 많이 좋아해요. 저랑 사귀어줄래요?”
***
“당신을 아주 많이 좋아해요. 저랑 사귀어 줄래요?”
수줍은 고백이 테오의 귓가에서 맴돌았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님에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 정도였다.
테오는 저도 모르게 이를 꽉 깨물었다.
루아가 륜을 좋아하는 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의 고백이 의외이거나 뜻밖의 일인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왜 저 말을 들은 게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시커먼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한편으론 자신이 루아를 이 정도로 좋아하고 있었나, 싶었다.
가장 끔찍한 건 이 뒤였다.
륜은 뭐라 답할까. 고백에 응할까? 아니면 거절할까?
마치 심판을 받는 죄수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사실 특별히 언급하진 않았지만, 데몽이나 테오나 륜이 루아를 의식하고 있단 건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동료애나 우정이라기엔 유림과 은하를 대하는 것과는 너무 달랐으니 말이다.
여자에겐 관심이 없는 륜이 루아의 적극적인 행동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뿐인가. 아닌 척, 모른 척하기 위해 능청스럽게 넘겼다.
“…….”
속이 새카매지는 느낌이었다.
테오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귀로 륜의 대답이 들려왔다.
“루아…… 고마워요.”
륜이 루아를 향해 작게 말했다. 그러곤 쓰게 웃었다.
“그리고 미안해요. 난 루아의 마음을 받을 수 없어요.”
그 거절에 테오의 입꼬리가 절로 비틀렸다.
륜은 자신이 루아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착한 그는 이 고백에도 그걸 생각했을 것이다.
과연 저 대답은 날 위한 배려였을까, 아니면 륜의 진짜 마음이었을까.
답은 알 수 없었다. 다만 륜이 루아를 의식한단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의 거절에 안도하는 자신이 너무나 역겹게 느껴졌다.
테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자릴 떠났다.
참을 수 없는 비참함이 그를 엄습했다.
***
루아는 륜의 거절에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눈가가 뜨거운 게 조금만 방심하면 울컥하고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최대한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힘을 주며 말했다.
“확실하게 거절해 줘서 고마워요. 근데 륜…… 이유를 물어봐도 돼요……? 혹시…… 내가 부담스러워요?”
“……그런 건 아니에요. 단지…….”
“단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래서 누군가를 좋아할 수가 없어요.”
그래. 륜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몇 년에 걸친 복수. 모든 것을 끝낼 때까지 다른 걸 볼 여유는 없었다.
륜은 루아를 보며 옅게 웃었다.
“그뿐이에요.”
***
발소리가 들려왔다. 짙은 어둠에 가려 방문자의 얼굴은 볼 수 없었으나, 요한은 단박에 그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아챘다.
“……찾았어?”
요한의 질문에 방문자, 아니, 샨이 옅게 웃었다.
“응. 찾았어.”
“……그렇군.”
참으로 간결한 대답이었다.
“역시 예상대로 그 사람이 관리하고 있었어.”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샨이 다소 기쁜 목소리로 손가락을 두 개 펴 보였다.
“방법은 두 가지지. 내부의 적이 치기 전에 협상하거나, 아니면 먼저 처리하거나.”
“……대범한 발언이군.”
“어쩔 수 없잖아. 히야스 교수님 외엔 그 누구도 그곳의 위치를 알아선 안 돼.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고.”
“그럴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했겠지.”
“그건 그렇지…….”
샨은 요한의 말에 수긍했다. 확실히 그 사람이 그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진작 내부의 적 쪽에 붙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고 있다는 건, 히야스처럼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거나, 그만한 이유가 있단 거였다.
하지만 그래도 그냥 두는 건 좀 불안한데…….
샨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미간을 좁힐 때, 요한이 입을 열었다.
“유림과 데몽이 얼음 서고로 향했어.”
샨이 흠칫 떨며 고갤 돌렸다.
“……눈치챈 건가?”
“그렇겠지.”
“으~ 그건 너랑 나만이 알고 있는 정보길 바랐는데……. 그래도 그 사람이 관리자란 건 못 알아냈겠지?”
“그렇겠지. 우리도 이제야 안 걸 걔들이 뭔 수로 알아냈겠어.”
더욱이 히야스는 그들에게도 관리자가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런 그가 유림이에게 알려줬을 리 만무했다.
어쨌든 그거 하나 다행이라며 중얼거린 샨이 요한에게 다가가 등을 맞대고 앉았다.
요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얼마나 피곤한지 등을 타고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엄청 피곤하네. 역시 이틀 내내 날밤을 새우는 건 무리였나 봐.”
“그걸 묻는 게 아니야.”
“…….”
샨의 침묵에 요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 이제 슬슬 한계야. 알고 있지?”
“…….”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이 엄청난 무리를 하고 있단 것도, 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단 것도 말이다.
“……차라리 유림이한테 말을 해.”
“안 돼.”
‘어째서?’란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 대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요한 자신이었다.
그 때문에 여태까지 샨을 도와준 거 아니던가.
“너 짜증 나.”
“하하하하…… 좀 봐줘. 이제 곧 끝나니까.”
“……그 태도가 더 짜증 나.”
“하하하…….”
허탈한 웃음만이 흘러나왔다.
샨은 긴 한숨과 함께 몸에 힘을 뺐다. 그리고 셔츠 안쪽에 넣어두었던 목걸이를 꺼냈다. 태양 모양의 보라색 크리스털 펜던트가 어둠 속에서 작게 반짝였다. 샨은 그 끝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보고 싶다.”
“며칠 전에 봤잖아.”
“그래도 또 보고 싶어.”
“…….”
일평생을 그리워했던 존재. 샨에게 있어 태양과도 같은 존재.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요한에게 있어선 가장 원망스런 존재.
두 사람의 귀로 폭죽이 쏘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화사한 빛이 하늘에 박히더니 비가 되어 땅으로 쏟아졌다. 어둑했던 방에도 빛이 들어찼다.
“후야제가 끝나나 보다…….”
“드디어 징그러운 축제가 끝나는군.”
“하하.”
샨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마치 이명처럼 귓가를 울리는 폭죽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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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