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Rude RAW novel - Chapter 3
02
남자가 먼저 복도 한편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족을 덧붙이지 않고 말없이 돌아선 걸 보면 그도 내가 한강 다리를 핑계로 자길 붙잡았단 걸 아는 것 같았다.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아이라도 된 것 같아 민망하기도 했으나 애써 숨기거나 도망치고 싶진 않았다. 아무래도 이 남자에겐 처음부터 다 들키고 시작했기 때문인 걸까.
내가 곁에 앉았으나 그는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꼭 내가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정하길 기다려 주는 것처럼.
“고맙습니다.”
여전히 떨리고 있는 손을 있는 대로 꼭 부여잡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덜컥 나온 게 고맙단 말이었다.
“뭐가요.”
“도와준 거요.”
“…….”
“그 사람 쫓아 준 거.”
“의외네.”
“…….”
“그냥 가던 길 가라고 할 줄 알았는데. 지난번 옥상에서처럼.”
건조한 읊조림엔 여전히 감정이 없었다. 나를 불쌍히 여긴다거나 안타깝게 생각한다거나 하는, 아니 진부한 동정이나 조롱의 기미라도 좀 보였으면 싶을 만큼 무심했다. 꼭 내가 재미없단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감사가 아니라 사과를 했어야 했나. 관심도, 재미도 없는 여자와 자꾸 얽히게 되어 이 얼마나 유감이냐고.
평소와 달리 움츠러든 마음 어딘가에서 불티가 일었다. 둘둘 말린 채 겹겹이 쌓여 있던 감정이 들썩였다. 기제는 오로지 이 남자뿐이었다.
“그날은, 그쪽이 날 방해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
“도와주는 것 같아요?”
그가 나를 고요히 응시하며 물었다. 긴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선 새카만 눈동자를 천천히 깜빡이면서.
“그쪽 아니었으면 지금쯤 또 충동적으로 실수나 저지르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요.”
남자는 짧게 실소했다.
“이제 좀 괜찮아졌나 봅니다. 안 잡아 줘도 되겠네.”
한쪽 입꼬리를 픽, 끌어 올린 얼굴이 미묘하게 달라진 느낌이었다. 무감한 표정에 감정이라곤 한 자락도 느껴지질 않아서 살아 있는 사람이 맞긴 한 건가 싶기도 했었는데. 가슴이 서늘해지는 묘한 미소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찰나의 순간, 빗속에서 눈이 마주쳤던 그날처럼.
남자는 돌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허리를 숙여 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내 약통을 집어 들었다.
“죽을 자리 물어본 사람치곤 남은 약이 너무 많지 않나.”
얼결에 내 앞에 내미는 약통을 받아 들었다. 쏟아지다 만 약들이 아직 반쯤은 남아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조심히 먹어요. 정량 지키기가 쉽지 않은 약이니까.”
“…….”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양이 자꾸만 늘죠.”
“…….”
“조금씩, 조금씩.”
“무슨 약인지, 알고 하는 말이에요?”
“잘 알죠.”
“…….”
“꽤 오래 먹었던 약이니까.”
할 말을 잃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이 남자도 이 약을 먹은 적이 있다는 건가. 통을 쥔 손가락에 꼭 힘이 들어갔다.
“효과가 빠른 만큼 부작용도 좀 있어요. 무기력감, 우울감이 높아지고, 자살 충동 같은 게 일기도 하고.”
“그쪽 얘기예요?”
그는 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게도 그게 조금은 위로가 되는 기분이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 나와 비슷한 고통을 가진 이 하나쯤이 또 존재한다는 걸 확인받은 것 같아서였다.
“지금은요? 지금도 먹어요?”
“아뇨, 끊었습니다.”
“…….”
“나한텐 부작용이 더 컸어서.”
더 묻고 싶었다. 약을 오래 먹어야 했던 사정과 어떤 부작용을 얼마나 심하게 겪었는지. 그렇다면 지금은 약을 끊고도 버틸 만큼 괜찮은지까지. 그가 나의 비밀을 아는 만큼 나도 그에 대해 알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졸지에 내 바닥을 다 내보인 낯선 남자에 대한 주책없는 호기심이었다.
덕분에 제멋대로 울렁이는 속을 다독이느라 연방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이런 열렬한 감정은 아무래도 내겐 너무 낯선 것이라.
“오빠?”
때마침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어지러운 상념이 깨졌다.
“뭐 해, 여기서?”
보안 카드를 찍어야만 열리는 유리 자동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깜빡거리며 우리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환자복을 입은 채 링거대를 밀고 들어온 여자 뒤론, 일전에 봤던 그의 수행원과 비슷한 느낌의 남자 둘이 버티고 섰다.
그녀의 물음에 남자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너는 이 시간에 어딜 다녀오는데?”
“나? 난 유림이랑 잠깐 이 앞, 편의점에서 라면 먹고 왔지.”
“하지 말라는 짓만 자꾸 골라서 하지, 너.”
“죄송합니다.”
남자의 타박에 돌연 여자의 뒤에 서 있던 이들 둘이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괜찮다는 듯 그들에게 가볍게 눈짓을 했다.
“근데, 이 언니는 누구?”
그녀는 들어올 때부터 줄곧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앳되어 보이는 뽀얀 얼굴이 남자를 재차 추궁했다.
“이 병실 쓰는 분.”
날 무어라 설명해야 하나 조금 고민하던 찰나였는데, 남자는 꽤 간단히도 내 고민을 해결해 버렸다. 그리고 무심해 원망스럽기까지 한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빠 동생이에요.”
동생이라는 뜻밖의 말이 놀라워 반사적으로 남자의 얼굴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동생이라는 걸 알고 보니 꽤 닮은 얼굴이어서 더 놀라웠다.
쌍꺼풀은 없지만 둥글고 커다란 눈매에 새카맣고 또렷한 동공과 깨끗한 흰자위. 여백 없이 작은 얼굴 위에 시원스럽게 배치된 이목구비까지. 정확히 짚어 말하자면 이렇게나 닮았는데 서로 전혀 다른 분위기인 게 더 놀랍다고 해야 할까.
“닮았어요?”
“네. 근데….”
“안 닮았죠.”
나는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만 가만히 끄덕였다. 생긋, 그녀의 붉은 입꼬리가 동그랗게 말려 올라갔다.
“알아요. 그런 말 맨날 들어서.”
말갛게 웃는 얼굴이 하얀 꽃송이처럼 반짝거리는 사람이었다. 모든 일에 무감하고 초연해 다소 염세적으로까지 느껴졌던 남자와 닮았으나 퍽 다르게 느껴졌던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저는 저기, 복도 끝 병실에서 지내고 있어요.”
이곳 신관의 꼭대기 층 두 개가 VIP 병동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이 복도엔 총 세 개의 프라이빗 병실이 있었다. 병실 간 거리가 워낙 넓고 공간 분리가 잘되어 있어 특별히 누군가를 마주칠 일이 없다 보니 같은 층, 다른 병실에도 환자가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름은 백연우고요.”
남자의 이름보다 그의 동생 이름을 먼저 알게 된 것도 좀 어이가 없어 잠시 넋이 나가 있는데, 내 반응만 기다리고 선 그녀의 시선이 따가웠다.
“…신하경이에요. 반가워요.”
서둘러 내 이름을 밝히자 그녀가 반짝이며 웃었다. 고등학생쯤 되려나. 아직 어린 것 같은데, 무슨 일로 병원에 입원까지 한 걸까. 문득 오지랖 같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근데 우리 오빠랑은 무슨 일로?”
“아….”
며칠 전 옥상에서 있었던 일부터 사실대로 설명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조금 전 이 난동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도 모르게 대충 답을 뭉뚱그리기로 했다.
“작은 문제가 있었는데, 우연히 오빠분한테 도움을 받았어요.”
“아아, 그랬구나.”
무슨 도움이냐고 구체적으로 캐묻진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백연우는 그저 고개만 무던히 고개를 끄덕였다. 듣지 않아도 뻔히 알 만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이 남자의 호의가 내게만 베풀어진, 특별했던 일이 아니었음을 확인해서였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 누구에게나 무심하고, 또 다정한 성향인 모양이었다.
“그만 들어가자.”
대화를 그만 끊으려는 남자의 낮은 음성이 허공을 갈랐다. 그는 백연우의 링거대를 가로채 잡으며 내게 가볍게 눈짓을 하곤 돌아섰다.
동시에, 오래 나를 담고 있던 그의 눈이 차갑게 떨어져 나가는 감각이 선연해 왠지 손끝이 알알해졌다.
“갈게요, 언니. 또 봐요.”
백연우가 손을 살짝 흔들며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남자와 백연우 그리고 그들을 뒤따르는 수행원들이 모두 안쪽 복도 끝으로 사라져 버리기 전, 나는 서둘러 내 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손엔 그가 건넨 약통을 동아줄처럼 꽉 움켜쥐고는.
***
거울에 비친 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봤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죽은 풀처럼 시들거리는 희멀건 얼굴. 이렇게나 보기 싫은 얼굴로, 어젯밤 그 남자 앞에서 그 꼴을 보였다고 생각하니 다소 끔찍한 기분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다 돌연 치미는 수치심에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멍 색깔이 많이 빠졌네요.”
흘긋, 내 얼굴을 살핀 간호사가 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상처도 거의 다 아물었고요. 이 상처, 사모님께서 흉 지지 않겠냐고 걱정 많이 하셨잖아요.”
눈 밑 뺨, 꿰매기엔 애매한 크기로 찢어진 상처는 흥분한 이규현이 위스키 병을 던졌을 때 깨진 유리병 조각이 튀어 생긴 거였다. 간호사가 가져온 드레싱 키트를 내 앞에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반창고를 떼어 냈다. 소독도 민망한 작은 상처를 보이는 게 영 마뜩잖아 눈을 내리깔았다.
“이것만 예쁘게 아물면 퇴원하고, 이제 결혼 준비 시작하시면 되겠어요.”
딴에는 덕담이라고 하는 그녀의 말에 가슴에 돌덩이라도 얹은 듯이 갑갑해지는 기분이었다.
속으론 얼마나 날 비웃고 있을까. 누군가에게 맞은 게 분명한 상처를 교통사고라며 우기곤 VIP 병실에 들어앉아 시퍼런 멍 빼는 찜질 치료나 하고 있는 내가. 스스로도 이렇게나 비참한 기분인데, 이 꼴을 지켜보는 제삼자의 눈에는 얼마나 더 기가 차고 한심스러울지.
“나 같은 환자, 또 있어요?”
“네?”
반창고와 핀셋을 정리하던 그녀가 멈칫, 나를 돌아봤다.
“이 정도 상처로 호텔에 요양이라도 온 것처럼 며칠씩…. 이 비싼 병실에서 팔자 좋게 뒹굴대는 나이롱 환자가 또 있나…. 해서요.”
노골적인 말에 간호사는 그저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그녀를 곤란하게 하거나 내 신세 한탄이나 하자고 던진 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순수하게 궁금했을 뿐이었다. 이런 혐오스러운 삶을 사는 이가 또 있는지.
대답을 망설이던 간호사가 나가자 닫혀 있던 창문을 젖혀 열었다. 꾸물꾸물 내리던 비가 멈추고 하늘이 하얗게 개었다. 갑갑한 병실 안으로도 초여름의 향기가 물씬 풍겨 들었다.
이 여름이 시작되었다 곧 끝나고, 서늘한 가을을 지나 차가운 겨울이 시작될 때쯤. 그때의 나는 또 어떤 끔찍한 모습으로 삶을 연명하고 있게 될까. 결국 아무것도 결심하지 못한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까. 대책도 없이 부렸던 오기와 아집을 탓하게 될까. 아님, 또 그런대로 버티고 견디며 시간에 순응하게 될까.
여름이 오는 게 두렵고 설렜다. 이게 꼭 마지막 여름 같아서.
똑똑.
회색의 풍경 속, 곳곳에 짙어진 초록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문득 들려온 노크 소리가 병실의 정적을 깼다.
“언니.”
스르륵, 열리는 문틈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온 건 뜻밖에도 어젯밤에 본 백연우였다.
“들어가도 돼요?”
“아…. 네, 들어와요.”
내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웃으며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나 윤 실장 외에 병실에 다른 누군가가 온 게 처음이라, 나는 조금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어정쩡하게 서서 연우를 바라봤다. 반면 그녀는 퍽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소파에 툭,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뭐, 마실 거라도… 줄까요?”
나는 괜히 냉장고 앞을 서성이며 어색하게 물었다. 연우는 들고 온 봉지를 흔들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언니 것도 사 왔는데. 드실래요?”
봉지 속에서 꺼내 든 건 아이스크림이었다. 봉지에 박힌 로고를 보니 또 편의점이라도 다녀온 모양이었다. 내가 테이블 위에 쏟아 놓은 것들 중 가장 달지 않은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을 하나 골라 들자 그녀가 설핏 입꼬리를 올렸다.
“근데 무슨 일로….”
“심심해서요.”
용건이 없단 소리였다.
“맨날 보는 의사 쌤, 간호사 쌤들은 재미없고. 최근에 친하게 지냈던 동생은 엊그제 퇴원해 버렸거든요. 그렇다고 막 병원 밖으로 놀러 나갈 수도 없고.”
“…….”
“그랬다간 오빠한테 귀에 피 나도록 잔소리 들어야 해서.”
돌연 신세 한탄을 한 그녀는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거렸다.
“편의점에 이거 사러 나가다 언니 생각나서 왔어요. 언니랑 떠들면 좀 덜 심심할 것 같아서?”
천진하게 웃는 백연우의 얼굴에서 그 남자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도 활짝 웃으면 이런 얼굴이 될까, 문득 실없는 궁금증이 일었다.
“언니는 어디가 아파서 입원했어요?”
어쩐지 답을 하기 민망하고 수치스러워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교통사고… 가 나서요. 여기저기 조금 다친 것 때문에.”
아아.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며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아이스크림을 머금은 입을 오물거렸다.
“연우 씬 무슨 일로 왔어요? 여기 오래 있었어요?”
“네. 음, 아마 한 5년쯤 됐나?”
예상치 못한 답에 말문이 막혔다. 실수를 한 걸까. 5년이나 병원에서 지낼 일이 뭐가 있을까를 떠올리던 찰나, 그녀는 또다시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히 말을 이어 갔다.
“심장이 약해서요. 기능에 이상이 있다는데, 태어날 때부터 이랬대요. 엄마한테 유전된 병이라서. 딱히 치료할 약도 없나 봐요. 지금껏 큰 수술도 서너 번쯤 했고, 좋다는 건 이것저것 다 해 봤었는데요, 의사 쌤 말론 그냥 죽을 때까지 이렇게 병원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할 거래요. 지금은 심장이 문제가 아니라 심심해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긴 하지만.”
남의 일 말하듯 무덤덤하게 하는 말에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만 지키는데, 그녀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농담한 건데.”
“아….”
이런 식의 천진함과 해맑음은 퍽 낯설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건지를 잘 알 수가 없었다. 무심하고 무감해 나를 당황하게 한 남자와 해맑고 솔직해 나를 당황시키는 그의 동생이라니. 확실히 내가 있던 세계에선 보지 못한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근데 언니 몇 살이에요? 물어봐도 되죠?”
질문의 순서가 바뀐 듯했다. 무례가 걱정스러웠다면 먼저 양해를 구한 후 물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도 영 밉게 느껴지지가 않는 게 신기했다. 도리어 나도 모르게 순순히 입을 열고 그녀의 말에 답을 했을 뿐.
“스물여덟이에요.”
“아아, 우리 오빠보다 두 살 어리구나.”
희한하게도 자기 나이가 아니라, 남자와 내 나이를 비교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우 씨는요?”
“전 열여덟이에요. 고2.”
역시나 예상했던 만큼 어린 나이였다.
“오빠분이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죠? 열두 살. 딱 띠동갑이요.”
“아….”
“그래서 오빠가 저 업어 키웠어요. 아, 저희가 부모님이 없어서요. 아빤 원래 누군지 모르고, 엄만 어릴 때 돌아가셨거든요. 전 엄마 얼굴도 기억 안 나긴 해요. 너무 어릴 때라.”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묻지도 않은 정보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심심했다던 말이 퍽 진심인 모양이었다.
“암튼, 제가 어릴 때부터 아파서 우리 오빠가 고생 많이 했어요. 그래서 자꾸 저한테 오빠가 아니라 아빠처럼 구는 게 문제긴 하지만.”
갑작스레 알게 된 남자의 가정사가 당황스러웠다. 매끈하고 근사하기만 한 남자의 외양만으론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인 까닭이었다.
“근데, 어제 우리 오빠가 뭘 도와줬어요?”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먹은 그녀가 돌연 기습적으로 화제를 바꾸어 물어 왔다.
“…아, 그냥. 그냥, 별일은 아니에요.”
“무슨 별일인데요? 사실 어제부터 엄청 궁금했는데 옆에 오빠 있어서 못 물어보고 참았거든요. 무슨 일이었는지 말해 주면 안 돼요?”
“정말 별일 아니었는데….”
“오빠가 여자랑 그렇게 앉아서 얘기하는 거 처음 봐서요.”
“…….”
“심지어 이렇게 예쁜 언니랑.”
아마도 이곳에 온 목적이 이것인 듯싶었다. 하나뿐인 오빠와 낯선 여자가 함께 앉아 있던 사정이 궁금해서.
“찾아온 손님이랑 작은 다툼이 있었는데, 연우 씨 오빠가 도와줬어요. 덕분에 잘 해결됐고요.”
행여나 그녀의 불필요한 오해가 더 깊어지기 전에 막아야겠단 생각으로 답을 했다.
“아아, 그랬구나.”
다행히 의심쩍게 나를 보던 눈빛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하긴 그 인간이 겉은 찬바람 쌩쌩이어도 속은 완전 순두부예요. 누가 뭐 도와 달라면 꼭 그냥 못 지나치고, 순 물러 터져서는.”
“…….”
“아, 언니 도와준 걸 탓하는 건 아니구요. 울 오빠가 원래 좀 바보 같거든요. 나한테도 맨날 말로만 잔소리하지, 결국 다 받아 주기만 하고요. 아닌 건 딱 거절도 하고, 자기 것도 챙기고, 좀 이기적으로 살라고 해도 영 말을 안 들어요. 대체 나 없으면 어떡하려고 이러는지…. 암튼, 제가 그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우리 오빠 때문에.”
“그렇게까지 보이진 않던데.”
“그러니까요. 그나마 생긴 거라도 그렇게 싸가지 없어 보여서 얼마나 다행인지.”
돌연 훅 들어온 그녀의 말에 헛웃음이 터졌다. 남매답게, 칭찬 속에 섞인 오빠에 대한 비난이 어찌나 진심인지가 느껴져서였다.
연우도 나를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그녀의 대책 없는 천진함에 절로 무장 해제가 되는 것 같아 낯설면서도 그게 불쾌하진 않았다.
어느새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연우가 빈 막대기를 내려놓는데 지잉,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하더니 대뜸 미간을 구겼다.
“으, 이 스토커.”
“오빠예요?”
고개를 끄덕이고 긴 한숨을 내쉰 그녀가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 왜? 또 뭐?”
자꾸 웃음이 샜다.
문득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싶었다. 내가 사는 세계에선 가족이라 해도 제 몫의 밥그릇을 위해서 한쪽 숨통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그렇게 서로 물고, 뜯고, 할퀴면서 사는 게 당연한 일인 건데, 없는 부모님을 대신해 아픈 동생을 키우고 치료하고 애지중지 보듬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게 내게는 먼 우주의 일처럼 느껴져서였다. 꼭 이상한 세계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잠시 후, 짧은 전화를 끊고 난 그녀가 투덜투덜 불만을 터뜨렸다.
“괜히 할 말도 없으면서 꼭 이렇게 수시로 감시를 해요. 어차피 인남 오빠한테 내 일거수일투족 다 보고받으면서.”
“저분들이요?”
문밖을 지키고 선 남자들을 흘긋거리며 묻자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부터 그녀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이들이었다.
“제 병이 지랄 같아서 수시로 상태가 오락가락하거든요. 그래서 몇 번 놀라더니만 아예 이렇게 24시간 사람을 붙여 놨어요. 그래도 그렇지, 어차피 병원 안에 있는데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냐구요. 나도 엄연히 사생활이 있는데.”
“오빠가 연우 씨 걱정을 정말 많이 하나 봐요.”
“걱정은 무슨, 감시일걸요.”
“그래도요. 감시도 걱정을 해야 하는 거니까.”
“오빠랑 되게 똑같은 말을 하시네요.”
연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실은 어제 말고도 몇 번 마주쳤었어요. 오빠분하고. 연우 씨 보러 자주 오는 것 같던데.”
“그렇죠. 매일 오기야 오는데…. 근데요, 언니.”
돌연 말을 끊은 연우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혹시 우리 오빠 이름 아직 몰라요?”
“…네?”
그러고 보니 그는 내 이름을 알았지만 나는 아직 남자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로?”
“딱히 말을 안 해 줘서…. 나도 안 물어봤고요.”
연우는 기가 막힌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하여간, 이 바보가.”
내내 궁금했고 알고 싶었던 그의 이름이었다. 꼭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단 착각이 들었던 것도 다 그 때문일지 몰랐다. 강렬한 인상과는 별개로 이름을 모르니 그의 실체도 존재도 희미하게 느껴졌다.
“뭔데요? 오빠분 이름이.”
달큼한 아이스크림 덩어리를 입 안에서 굴리며, 슬쩍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돌연 씨익, 입꼬리를 길게 말아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언니가 직접 물어보세요.”
“…….”
“그냥, 그게 좋을 것 같아요.”
병실엔 어느새 완전히 갠 하늘에 쨍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
잠깐만 놀다 가겠다던 연우는 그 뒤로도 무려 여섯 시간을 내 병실에서 더 머물렀다.
수다는 끊임이 없었다. 대체론 그녀가 대화를 이끌고 내가 반응을 보이는 패턴이었지만.
어릴 때 보육원에서 오빠와 놀던 얘기부터 몇 번의 수술을 거치며 죽을 고비를 넘겼던 이야기, 병원에 오래 있으면 겪게 되는 일들 그리고 좋아하는 아이돌의 신곡 이야기까지…. 화제가 퍽 다양하기도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쉴 새 없이 조잘거리던 그녀는 배가 고팠는지 갑자기 치킨이 먹고 싶다며 배달까지 시켜 먹고 나서야 제 병실로 돌아갔다. 무려 밤 열 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연우가 돌아가고, 다시 적막해진 병실에 홀로 남아 있다 문득 헛웃음이 터졌다. 누군가와 이렇게까지 오래 웃고 떠들었던 적이 있었나 싶어서. 무엇보다 약을 먹는 것도 잊을 만큼 정신없이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냈다는 게 퍽 신기하기도, 고맙기도 했다.
아주 잠시였으나 정말로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라도 된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날, 그 옥상에서 잡은 남자의 손이 이 이상한 여행의 시작이었는지도.
어질러진 테이블을 치우다 소파 위에 떨어진 팔찌를 발견했다. 연우가 링거를 꽂지 않은 쪽 손목에 차고 있던 묵주 팔찌였다.
오래전 오빠에게서 선물 받은 팔찌라 했다.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보육원에서 자란 탓에 자연스럽게 천주교 신자가 되긴 했지만, 깊은 신앙심은 없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 팔찌를 붙잡고 기도하는 게 습관이 됐다고 했다. 어쩌면 신앙심이라기보다도 제게는 부적 같은 의미일지 모른다고.
아무래도 바로 가져다줘야겠단 생각이 들어 팔찌를 주워 들고 병실을 나섰다.
발걸음을 떼기가 무섭게 낯설지 않은 향이 코끝에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복도를 걷다 멈춘 남자의 시선이 내게 와 닿아 있었다.
그였다.
별안간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이 근사한 남자에겐 갑옷처럼 갖춰 입은 슈트가 가장 잘 어울리는 차림이 아닐까, 하는.
곧 오빠가 올 거라는 연우의 말대로 퇴근길에 잠시 들른 모양이었다. 그래서인 건지, 그는 눈이 마주친 내게 가볍게 묵례를 하곤 곧바로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저기요.”
행여나 금세 사라질까, 다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나는 돌아선 남자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거….”
손에 쥔 연우의 묵주를 내밀어 보이자, 팔찌를 알아본 남자가 순순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연우가 이걸 제 병실에 놓고 가서요. 전해 주세요.”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한쪽 눈썹이 미묘하게 위치를 달리했다.
“그새 말까지 놨네.”
“…….”
“하루 사이에 둘이 많이 친해졌나 봅니다.”
느직이 나를 훑는 눈빛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그가 동생을 얼마나 끔찍이 생각하는 오빠인지에 대해선 오늘 종일 듣고 또 들어 이미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연우 성격이 워낙 살갑고 붙임성이 좋아서요.”
“…….”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그쪽한테 들켰던 모습들, 연우한텐 보일 생각 없으니까.”
“…….”
“…한강 다리 얘기나 약 같은 거요. 그쪽한테나 들킨 거지, 어차피 내 상태 이런 거 아는 사람도 없고요.”
왜인지, 나도 모르게 자꾸 변명을 하게 됐다. 우습지만 당신이 본 내 부끄러운 순간들이 전부는 아니라고, 항변 아닌 항변을 하게 되는 거였다.
“그러게.”
“…네?”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네요, 그쪽 상태 안 좋은 거 내가 잘 아는데.”
“아…. 아니, 별일은 없었는데…. 그래도 뭐, 그렇게 동생이 걱정되는 거면, 네. 알겠어요. 앞으로는….”
“연우 말고 그쪽 말입니다, 신하경 씨. 당신.”
“…….”
“괜찮습니까?”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의 그를 바라봤다. 그의 말뜻을 해석하느라 나도 모르게 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연우가 얼마나 하루 종일 시끄럽고 귀찮게 했을까 싶어서요. 살갑고 붙임성이 좋은 게 장점이긴 한데 그게 과해서 문제인 애라.”
“아….”
그런 뜻이었던가.
“다 받아 주지 마요.”
“…….”
“귀찮으면 오지 말라고 말하고요. 그런 말 안 하면 아마 계속 더 귀찮게 할 겁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하나도 안 귀찮았어요.”
“…….”
“저도 연우 덕에 종일 즐겁게 시간 보냈어요. 재미있었고요.”
남자가 느긋이 눈동자를 깜빡이며 나를 본다. 그 찰나가 꼭 시간이 멈춘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와 나의 주변 모든 사물들이 온통 느릿하게 보여서.
“그럼 다행이고.”
그가 다시 나를 비껴 지났다. 왜인지, 조급해진 마음에 그를 따라 고개를 홱 돌렸다.
“저기…!”
그의 발끝이 다시 멈춰 서기도 전, 성급한 목소리가 충동적으로 튀어 나갔다.
“그, 이름이 뭐예요?”
돌아보는 매끈한 얼굴이 나를 올곧게 응시했다. 일순 호흡이 삼켜지고,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꾹 말아 쥐었다.
“생각해 보니 아직 그쪽 이름을 몰라서요.”
“…….”
“그쪽은 내 이름 알잖아요, 그러니까…. 이름이 뭐예요?”
확실히 이상한 일이긴 했다. 평소의 나라면 결코 그런 질문을 먼저 하진 않았을 테니까. 스스로 낯선 질문을 던져 놓고도 당황스러워 잠시 움찔거리는 사이, 그가 차분히 입술을 열었다.
“백강웁니다.”
그의 이름을 되새기듯 속으로 따라 읊조렸다. 고작 이름을 알았을 뿐인데, 낯설고 모호하던 남자의 형상이 조금 더 선명해진 것 같았다. 어쩐지 남자와 퍽 잘 어울리는 이름 같기도 했고.
백강우.
서늘하고 따뜻한 이름이었다.
그 밤, 나는 그가 나오는 꿈을 꿨다. 그렇게 빨리 잠이 든 것도, 중간에 깨지 않고 오래 잔 것도 참 오랜만의 일이었다.
꿈속의 백강우는 여전히 무감하고, 무표정했으며, 싸늘했다. 그럼에도, 이상하리만큼 따뜻한 그의 손을 쥐고 그렇게 한참을 마주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생생하게 전해지는 그 체온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아 가까스로 울음을 참으면서도 나는 웃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포근해진 마음으로.
약 없이는 하루도 버티지 못하던 불안정한 내가, 약 없이 온전히 평온한 하루를 보낸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