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76
우진도 알고는 있다.
앞으로 3개월 동안 함께 작품을 만들면서 동고동락할 사이이니,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가오는 사람이 있는 반면.
계산적으로 거리를 좁히려는 모습이 아예 대놓고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명세희였는데, 그녀는 이번 작품에서 젊은이의 누나 역을 맡은 30대 초반의 배우였다.
“우진 씨, 시간 괜찮을 때 술 한잔해요! 강식 선배랑 같이.”
명세희가 술 한 잔 곁들이며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
가만히 보면 항상 우진과 이강식, 둘 뿐이었다.
그마저도 대선배인 이강식에게 직접 다가가 말하기가 좀 그랬는지, 그녀는 늘 우진에게 자리를 한 번 마련해달라는 듯한 뉘앙스로 말해왔다.
명세희의 행동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전혀 불쾌하지도 않고.
전작에서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며 시청률 대박을 터트렸었던 두 배우의 차기작이다.
게다가.
우진에게는 ‘연극 데뷔작’, 이강식에게는 ‘연극 복귀작’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으니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함께 출연하는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질 수 있을 터.
얼마나 간절하겠는가.
그래서 더 친해지고 싶고, 편하게 대화도 나누면서 영상 연기 진출에 관한 얘기나 팁을 얻고 싶을 것이다.
그런 명세희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거침없이 다가오는 그녀에게 우진 역시 호의를 보였다.
이제 한 팀인데, 최대한 빨리 친해지면 좋지 뭐.
일상에서의 활기차고 힘이 넘치는 모습이 무대 위에서는 어떨지, 기대된다.
옆방 B팀 사람들과도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 노인장 역의 이강식.
– 젊은이 역의 백우진.
– 주치의 역의 최영도.
– (젊은이의) 누나 역의 명세희.
그리고, 앞의 네 배역보다는 비중이 낮은 환자 1•2역에 각각 배수정과 양효제까지.
A팀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 뒤로, 메인 스태프들이 자리했다.
“자, 첫 연습 시작하겠습니다.”
오태협이 손뼉을 치며 시작을 알렸고, 마설아가 예리한 눈빛으로 대본에 시선을 고정했다.
“간단하게 리딩 후, 서로 의논해보겠습니다. 일단 톤부터 보죠.”
“네!”
극의 포문을 여는 첫 타자, 노인장 이강식이 천천히 대사를 내뱉었다.
165화
첫 대본 리딩은 가볍게 드라이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힘을 뺀 목소리로, 특별한 감정이나 호흡을 담겨있지 않은 날 것의 대사들이 배우들의 입에서 툭툭 내뱉어졌다.
쉬는 시간 없이 전체 리딩 한 바퀴를 도는 데에 걸린 시간은 약 1시간 30분.
제대로 된 연기와 연출이 가미된다면, 러닝타임은 아마 2시간 가까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연습실 뒤쪽에 자리 잡고 있었던 오태협 연출은 리딩 내내 오직 여섯 배우가 차례대로 내뱉는 대사들에만 온 신경을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그는 머릿속에 대강 그려지는 연출 구도와 방향성에 대해 스태프들과 쉴 틈 없이 의논했고, 부분별 시간을 세세하게 체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역시 ‘배우 마당’의 총연출답게, 굉장히 꼼꼼한 사람이구나.
오태협의 프로페셔널한 눈빛이 번뜩일 때마다 단원들은 물론이요, 우진과 이강식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배우들의 리딩을 예리하게 지켜보는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설아 작가 또한, 리딩 내내 바쁘게 움직이기는 마찬가지.
작가에게 있어 수정 작업은 절대 뗄 수 없는 벗(?)과도 같다.
오죽하면, 새로 구상한 이야기를 글로 옮겨 초고를 완성하는 일련의 과정보다 훨씬 힘든 게 퇴고인 것 같다는 생각을 가끔…이 아니라 수시로 할 정도니까.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인 대본’이란 없다.
늘 ‘좀 더 완성도가 높은’ 대본이 있을 뿐이지.
그래서, 수정은 끝이 없다.
“연출님, 잠시만요!”
“어, 왜왜!”
구석에 앉은 마설아는 쫑긋 세운 두 귀에 배우들의 음성을 놓치지 않고 담으며 손에 든 펜을 쉬지 않고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오태협에게 내미는 대본에는 빈 곳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느새 글씨들로 빼곡했고, 몇몇 대사는 아예 새로 휘갈겨 쓴 정도였다.
배우들이 계속 리딩하는 동안 그녀는 연출과 머리를 수시로 맞대며 각 인물들의 대사 톤을 정했고, 실시간으로 수정사항들을 반영했다.
“드라이인데도 세희 선배 톤이 좀 튀는 것 같네요. 젊은이가 메인인데.”
“그치? 살짝 죽여야겠어.”
“강식 선배는 지금대로 가면 될 것 같아요. 대사만 약간 수정해야 될 것 같은데….”
텍스트는 배우의 입을 통해 소리로 발화되어야지만 정확한 톤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특히나 영상 연기에서보다 무대 연기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되는 부분.
그러니, 무엇보다도 소리의 질과 정도를 정하는 부분에서만큼은 마설아가 오태협보다 더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 맞게 집중하고 있는 ‘배우 마당’의 연습 현장.
그 분위기에서 흐르는 1분 1초는 전부 실전과도 같았다.
“한 바퀴만 더 돌아보겠습니다.”
“네!”
“대본 14페이지랑 17페이지에서 강식 선배님 대사 살짝 바꿔볼게요. 이렇게 쳐주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그리고 전체적으로 톤이 얼추 맞는데, 세희 선배님이랑 효제 씨만 살짝 다운시켜볼게요.”
“네, 작가님.”
“나머지 분들은 좋아요. 일단 이렇게 맞춰보고, 피드백 다시 드리겠습니다.”
연습 1주 차의 양상은, 대체로 분위기와 인물 간 앙상블에 적합한 톤을 찾는 것에 집중되었다.
오전 11시부터 저녁 7시까지, 주 6일 동안 똑같은 루틴이 이어졌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 * *
“야, 백우진!”
첫 주차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연습이 끝나고, 다음 날.
일요일 아침부터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우진의 귓가에 앙칼진 음성이 파고들었다.
“……?”
살인적인 연습 스케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늦게까지 대본을 보다가 잠든 터였다.
우진이 떠지지도 않는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가까스로 뜨인 눈에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우희였다.
누나가 허리에 양손을 댄 모습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뭐야?”
“얌마! 너 아직도 자고 있으면 어떡해?”
“어? 지금… 몇 신데?”
우진이 두리번거리며 핸드폰을 찾았다.
아직 제정신이 아니었다.
허겁지겁 소파 주변을 뒤적거리는 동생을 바라보며 우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아, 어디 갔어.”
“푸흡, 이거 찾니?”
우희가 우진의 핸드폰을 흔들며 얌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우진이 허무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었고, 우희는 대체 뭐가 그리 재밌었는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빨리 준비나 하셔! 지금 벌써 9시다. 늦었다고!”
“아, 미치겠네…. 후딱 씻고 온다.”
“옹야~”
우진이 어디론가 황급히 전화를 걸며 화장실로 들어섰다.
그가 다급하게 움직이는 이유는, 오늘 우희와 함께 봉사활동을 가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B-Motors사의 광고 출연료 전액을 기부했었을 때, 인천 소재의 한 국공립 장애아동 보육원에도 따로 기부를 했었다.
기부자의 정체가 본의 아니게 알려져서, 해당 보육원장님께서 소속사를 통해 몇 번이고 감사를 표하셨었다고.
촬영 준비 때문에 시간을 길게 뺄 수가 없어서 기부만 살짝 하고 돌아왔던 게 무척 아쉬워서, 조만간 꼭 다시 와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날이, 바로 오늘.
…연습 때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놨었는데, 다시 바꿔 놓는다는 걸 깜빡해서 알람이 안 울렸었나 보다.
30분 정도 늦을 것 같다는 우진의 말에, 보육원장은 웃으며 천천히 오셔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바쁜 와중에도 잊지 않고 들려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잠시 후.
준비를 마친 우진은 지각의 대가(?)로 양손에 선물을 가득 들고 가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집을 나섰다.
백우희 덕에 손이 두 개나 늘었으니, 마침 잘 되었다.
“중간에 마트 들렀다 가자.”
“그래.”
“혹시 모를까 봐 미리 말해주는 건데, 누나.”
“뭔데?”
“너님 먹을 거 사러 가는 거 아니야. 아이들 먹을 거 사러 가는 거야.”
우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어처구니가 없는 우희는 연신 실소를 내뱉었다.
“누나 막 다이어트 하네 마네 그럴 때마다, 정작 마트 가서 음식 싹 쓸어오잖아. 또 막 신나가지고 마트 거덜 내고 그러지 말고….”
– 짝!
“아오!”
등짝 한가운데가 급 얼얼했다.
찌릿한 고통에, 우진이 몸을 비비 꼬았다.
우희가 자신의 손바닥에 입바람을 불며 말했다.
“내 사랑하는 동생이 아직 잠이 덜 깬 거 같아서 말이야. 잠 좀 깨워줬다!”
“하아….”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얼른 출발이나 해.”
“…네네, 갑니다.”
우진이 시동을 걸었다.
남매는 보육원으로 향했다.
“예에에에에~!”
항상 서로 죽이네 마네 하느라 바쁘고, 틈만 나면 매운 손맛을 보여주지만.
2살 어린 동생에게 어렸을 때부터 늘 무한한 애정을 쏟아주었던 누나였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을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하는 우희는 출발 전부터 텐션이 높은 상태였다.
여담이지만, 우희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했었다.
첫 번째는 아버지 때문이고, 이어지는 두 번째 이유는 우진의 입장에서 좀 어이가 없는 부분이었는데.
“어렸을 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땐 네가 진짜 귀엽고 예뻤었거든. 이 누나가 널 얼마나 아꼈었으면, 잘 때도 안고 잤겠냐?”
“그래서?”
“뭘 그래서야? 지금은 180도, 아니 360도 바뀌어서 슬프다는 거지.”
“누나, 있잖아. 그거 알아?”
“뭐?”
“360도면, 원점이야.”
“…….”
우희가 머쓱한 듯, 코를 만지작거렸다.
피식한 웃음을 내뱉은 우진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내가 악몽을 꾸기 시작한 게 저 때부터였구먼?”
“등짝에 손바닥 자국 좀 새겨달라는 말을 정성스럽게 ‘빙-’ 둘러서 하네. 내 사랑하는 동생아.”
“어어, 하지 마! 운전 중인 사람 건드는 거 아니다.”
“…부들부들.”
정신없이 떠들다 보니, 어느새 보육원 근처 마트에 도착했다.
아이들에게 줄 간식과 선물을 사는 내내, 우희는 신이 난 듯 방방 뛰었다.
누가 보면 자기 거 사는 줄 알겠네.
“야야! 이거 하나만 더!”
“누나, 카트 두 개가 다 찼어. 더 사려고?”
“어, 어차피 네 돈이잖아!”
“…양아치세요?”
“거 쩨쩨하게 굴지 말고 하나 더 삽시다!”
“어휴.”
장난이 흘러넘치는 대화의 연속이었다.
우희는 우진의 카드를 긁으며 ‘플렉스’한 기분을 맘껏 누렸고, 누나의 신난 모습을 보는 동생은 남모르게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일주일 중에 단 하루지만, 오랜만에 누나랑 둘이서 힐링하는 시간을 보내는 거라 참 좋았다.
“가자!”
품에 안은 박스를 낑낑대며 옮기는 와중에도, 우희는 활기차게 외쳤다.
차 트렁크에 선물이 가득 찼다.
여름의 산타가 된 것만 같았다.
* * *
5분여를 달리자, 보육원이 눈에 들어왔다.
보육원장님이 입구에서 미리 나와 기다리고 계셨다.
차를 세우기가 무섭게, 우희가 뛰쳐나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오오!”
“아이고,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덥죠?”
“아니에요, 고생은요~ 어리석은 제 동생 놈이 늦잠을 자는 바람에 늦었는걸요.”
“하하하! 아닙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감사드려요.”
우진이 주차를 마칠 때까지, 우희와 보육원장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대화가 오고 가는지 알 턱이 없는 우진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내렸다.
뭔 얘기를 하길래 저렇게 즐거워하고 있나.
설마, ‘내’ 욕은 아니겠지.
“안녕하세요!”
“어머, 배우님. 어서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