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75
이 설정 때문에, 매일매일 가상 세계로 넘어가 펌프인 듯 펌프 아닌 펌프 같은 발놀림을 열심히 해야 했을 것이다.
그림으로써 세상과 소통하는 아이의 희로애락을 알려면, 직접 그려봐야 하니까.
남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보는 아이에게,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것인지를 몸소 깨달아야만 할 테니까.
그리고,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노인장의 전사(前史)로 포문을 연 작품의 초반이 중반으로 넘어가는 흐름을 타는 것은 바로 젊은이의 등장부터다.
작품의 전개가 시작되는 지점은 이미 노인장의 마지막 남은 병실 친구였던 김 씨 형님의 자리가 빈 이후.
그로부터, 최소 두 달 이상을 홀로 지냈던 노인장이었다.
그가 남들에게 어떻게 말할 수도 없거니와, 말을 한다 한들 달라질 게 없는 외로움과 싸우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던 찰나.
실로 오랜만에, 병실에 인기척이 드리운다.
새로 들어온 환자가 있으니, 그가 바로 팔에 깁스를 한 젊은이.
이것이, 젊은이 배역이 극에서 첫 등장하는 모습이다.
이 대목을 짚는 텍스트가 있기에, 우진은 이번 고난을 단순히 다이어리의 짓궂은 장난이라 치부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아이가 팔을 다쳐서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그 심정이 오죽할까?
얼마나 답답할까?
배우인 자신의 사지를 묶고 입을 막은 뒤, 카메라를 들이대며 연기해보라는 꼴과 다르지 않을 텐데.
다이어리를 통해 발현되는 가상 세계에는 여태껏, 캐릭터의 어떠한 의지가 분명 스며들어있었다.
– 가상 세계는 최규보의 과거 아픔을 씻어내려는 의지가 있었고.
– 은 몽중에서 본 말로를 겪지 않기 위해 원인을 찾으려던 이융의 의지가 있었으며.
– 와 에서는 각각 미시적으로는 소방관의 희생정신을 몸소 체험하는 것, 거시적으로는 평생 짊어지고 살 수도 있었을 ‘마음의 짐’을 덜어주고자 했던 의지가 있었고.
– 에서는 오직 ‘양아버지와 함께 평범한 삶을 살며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란 작은 염원을 이루기 위해 양아버지를 살리려 고군분투했었던 한 남자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처럼, 의 세계에도 어떠한 의지가 분명 담겼을 터다.
아직 젊은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아니한 상태에서, 발만 움직이면 저절로 그림이 그려지는 신비한 벽만이 우뚝 서 있는 곳.
과연, 어떤 ‘의지’일까.
젊은이의 세상은 보통 사람이 보는 세상과 분명 다르다.
보통 사람의 생각과 기준으로이 이해하려 들면 안 된다.
따라서, 존재하지도 않는 DDR이나 펌프를 며칠 내내 맨땅에다 하는 듯한 이 행위에 대해서도 더는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우진은 일말의 불평 없이 묵묵히 그림을 그렸고, 현실로 돌아와서는 끊임없이 대본을 분석·연구했다.
그렇게, 일주일 뒤.
“하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발을 굴리며 그림을 그리던 우진이 허리를 숙인 채, 양손을 무릎에 대고 호흡을 골랐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던 땀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내 그가 고개를 들어 거대한 벽을 바라보더니, 곧장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그림이.
정확하게는 밑바탕이 되는 스케치가 완성되어있었다.
예상대로, 어느 한 위성도시의 전경이 맞았다.
164화
캐스팅이 끝난 직후.
서번트 증후군과 관련된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는 과정에서 우진은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던 적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헬리콥터에서 고작 20분 정도 내려다본 대도시의 풍경을 그림으로 100프로 정확하게 구현하는 능력을 갖춘 서번트 증후군 환자.
바로, 영국의 천재 화가이자 아티스트인 ‘스티븐 윌셔(Stephen Wiltshire)’였다.
3살 때 자폐증 진단을 받은 그는 5살이 되던 해, 특수 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었는데, 당시 윌셔의 뛰어난 능력을 눈여겨봤었던 선생님이 그가 그린 작품들을 아트 경연대회에 출품하면서 능력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다큐멘터리 내용 중에서 우진이 특히 놀랐었던 점은, 8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도시의 전경을 그리기 시작했던 윌셔가 정작 말문이 트였던 것이 9살 때부터였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처음 배우는 게 ‘언어’인데, 그는 ‘그림’이었다는 소리였다.
인간은 소통의 동물이며, 특히 언어로 하는 소통은 인간의 본질과도 같다.
그 본질적인 행위를 말을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그림’으로 해왔었으니, 남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라 진작 생각했었다만.
겨우 이런 표현으로는 윌셔가 느꼈었던 희로애락을 전부 함축할 수 없겠지.
「작가님, 혹시 스티븐 윌셔라는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젊은이 캐릭터를 만드신 건가요?」
캐릭터 분석을 하면서 드는 궁금증을 절대 참을 수 없었던 우진은 곧장 마설아 작가에게 연락했었다.
「네, 맞습니다. 역시, 딱 알아보셨네요!」
마설아는 즉답해주었다.
더불어, 의 젊은이는 실존하는 윌셔의 모습에 정신 연령이 6~8세로 고정된 가상 설정을 덧씌운 인물이라는 말도 덧붙였었다.
의사소통 능력과 사회성이 통상적인 서번트 증후군 환자들보다 좀 더 떨어지는 설정이라는 것이다.
의학적인 관점으로 깊게 파고 들어간다면 디테일이 약간 떨어질 수 있는 부분이나, 이는 ‘극적 허용’의 범주 안에선 충분히 가능한 모습이라고 하였다.
우진은 마설아의 말에 수긍했다.
사실과 완전히 다르거나 틀린 정보를 주는 게 아니라면, 원활한 극의 전개를 위해서는 필요한 캐릭터 설정이라는 얘기에 당연히 동의하니까.
이러한 작가의 의도를 바탕으로, 캐릭터 분석의 방향을 잡았었다.
가상 세계에서 하는 작업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현실에서의 대본 분석, 그리고 다이어리 너머에서 밑그림 작업.
일주일이 눈코 뜰 새 없이 흘러갔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드디어, 눈앞의 거대한 벽면이 어느 도시의 전경을 그린 스케치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어느 도시인지는 모르겠으나 실존하는 광경이라면 분명 사진을 그대로 옮겨놨다고 해도 믿을 만큼의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일주일간의 고된 작업으로 인해 몸과 마음에 드리웠었던 지친 기색이 눈 녹듯 싹 사라지는 것 같았다.
뭐가 됐든, 땀 흘려 만든 결과물을 보고 나면 뿌듯한 법이라니까.
웅장한 그림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던 우진은,
‘이제, 뭐가 또 있으려나.’
절반은 설렘, 또 다른 절반은 약간의 걱정이 섞인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일주일 동안, 팔을 다쳐 소통하지 못하는 젊은이의 답답한 심정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던 고된 작업이 끝났으니.
드디어 젊은이 캐릭터와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란 기대에서 오는 감정이 설렘일 것이요.
절반의 걱정이라 함은,
‘설마, 이게 시작이려나….’
벽면의 밑그림이 100프로 완성되려면 아직 가야 할 길이 한참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
설마, 채색까지는 아니겠지.
다큐멘터리에서 봤었던 윌셔의 작품들도 거의 흑백이었는데.
늘 설마가 사람 잡는 형국의 가상 세계였지만, 우진은 이번 한 번만 더 설마를 믿어보기로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 툭툭.
“……?!”
뒤에서 누군가가 바짓단을 손가락으로 치는 느낌이 들었다.
우진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뒤돌아보았다.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 닿은 곳에서 고개를 들고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한 남자아이가 보였다.
잠깐만.
이거, 뭔가 낯익은 상황인데?
그러고 보니, 영국에서 윌리엄을 처음 만났을 때도 지금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아이는 딱 봐도 6살에서 많아 봐야 8살.
젊은이의 내면에 자리 잡은 연령대의 모습이었다.
“안녕?”
“…….”
우진은 허리를 숙여 아이를 안아 들었다.
어린 젊은이는 말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몇 살?”
“…….”
“이름이 뭐야?”
“…….”
아이는 말이 없었다.
그저 우진의 품에서, 손가락을 입에 문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아, 혹시라도 ‘내’가 던지는 질문 세례가 불편하려나.
우진은 아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거대한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이는 그때까지도, 그의 품에 머리를 파묻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고개를 살짝 든 아이의 두 눈이 벽면에 가득한 밑그림에 고정되었다.
아이의 눈빛이 새삼 초롱초롱해졌다.
아이가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다는 소리다.
마치 영국에서 윌리엄이 그가 사준 아이스크림을 건네받았을 때의 모습처럼.
“…….”
아이는 여전히 말없이 손가락을 ‘쭙쭙-’대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고, 우진도 조용히 아이의 시선을 따라 벽면을 훑었다.
그렇게, 적잖은 시간이 흘렀다.
아이는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우진은 묵묵히 기다렸다.
얼마나 흘렀을까.
“…….”
– 척!
느닷없이 아이가 정면을 향해 팔을 들었다.
꽤 오래 지속되고 있었던 적막을 한순간에 깨뜨리는 제스처였기에, 우진이 화들짝 놀라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품 안에 안긴 아이는, 벽면의 어느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뭐지?
“어디 말하는 거야?”
우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아이의 손끝이 살짝 흔들렸다.
힘이 들어간 듯했다.
우진이 대답 없는 아이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미안하다.
정확히 어느 지점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우진은 아이를 안은 채로 벽에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아이의 고개와 시선이 뻗은 손가락을 따라 점점 ‘쑤욱-’ 올라간다.
아이는 변함없이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전히 정확한 지점을 찾을 수 없던 우진은, 아이가 최대한 불편함을 느끼지 않은 선에서 살짝 종용해보기로 했다.
“어디를 말하는 거예요? 우리 꼬마 대장님?”
“…….”
“우리 같은 편인데, 이 삼촌한테도 알려주면 안 될까요?”
우진이 말끝을 계속 흐리듯 늘리며, 아이를 안은 두 팔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둥가둥가-
아이가 희미하게 웃기 시작했다.
비록 웃는 소리는 나지 않았으나, 어쨌든 아이가 처음으로 웃음을 보인 순간이었다.
‘예스!’
아이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을 본 우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이와 한층 친밀해지면서 좀 더 깊은 유대감이 생겼다는 기분이 들었다.
귀여운 아이의 목소리.
드디어 들을 수 있는 걸까!
기대감이 차올랐다.
그리고,
“…….”
실패했다.
끝내 아이의 음성을 들을 순 없었다.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한 모양이었다.
* * *
아이에게는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다가가기로 했다.
그와 반대로, 현실의 템포는 아주 빠를 수밖에 없었다.
6월 17일, 월요일.
의 공식적인 연습 스케줄이 시작되었다.
첫 연습.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이강식 선배를 태웠다.
준안이 형에게는 연습이 진행될 앞으로의 4주 동안만 개인적으로 움직이겠다고 말해둔 터라, 둘이서 움직였다.
이른 아침에 도착한 연습실.
불도 켜지지 않은 곳에, 우진과 이강식이 제일 먼저 발을 들였다.
두 사람이 콜 타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한 이유는 간단했다.
오랜만에 합숙 당시를 한번 떠올려보자는 서로의 제안 때문이랄까.
발성 및 발음 훈련부터 제대로 해보자는 열정의 발현이었다.
“가보자.”
“네, 선배님!”
두 배우의 공명이 곧 텅 비어있던 연습실을 빈틈없이 채우기 시작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앗!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오, 우진 후배. 잘 지냈어요?”
최영도 선배를 시작으로, 하나둘씩 ‘배우 마당’ 건물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연습실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인사를 나누며 마주친 배우들의 표정은 대부분 활짝 피어있었다.
‘시작’이 주는 힘이리라.
“우진 씨, 반갑습니다.”
“친하게 지내요, 우진 후배님.”
“잘 부탁드립니다, 우진 배우.”
이강식 선배와 함께 다닐 수밖에 없는 동선인지라,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오디션 때부터 지금까지 ‘배우 마당’ 단원들은 모두 호의적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