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8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어린아이 크기의 보따리였지.”
우진은 얼어붙은 표정으로 최규보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역시 천천히 시선을 우진에게 옮겼다.
“의문의 의사들, 어린아이를 담은 크기의 보따리. 딱 봐도 그림 그려지지 않냐?”
“설, 설마….”
“그래. 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두 사람이 이윽고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자, 추악한 음모의 진실이 드러나고 있었다.
보육원장이 종이에 사인을 하고 있었다.
그 종이의 이름은,
[인체실험 동의서]– 쿵.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 * *
“그날 처음 알았어. 아이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진은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최규보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정신과 상담을 받았었거든. 내 담당 선생님이 보육원으로 오셔서 날 상담해주셨지. 굉장히 선하신 분이었고, 나에게 엄청 잘해주셨어. 아버지 같은 분이었다.”
최규보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날, 나는 내가 본 것들을 선생님한테 얘기했어. 선생님은 지금 너랑 같은 반응을 보이셨고, 밖으로 나가서 이 일을 공론화하겠다고 하셨어. 절대로 좌시하지 않겠다고.”
최규보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그땐 몰랐지. 내 선택이 가져온 비극을 말야.”
“비극이라뇨? 해결된 거 아니에요?”
“내가 아까 한 말 기억나? 사랑 보육원 사건, 내가 제일 해결하고 싶은 장기미제사건이라고.”
아뿔싸.
“왜 미제겠냐?”
최규보의 물음에 우진은 답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뻔한 이야기의 결말이 보였으니까.
그 종장은, 권선징악이 아니었으니까..
“그게 선생님과의 마지막이었다. 나중에 시신으로 발견되셨어.”
아,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독방이라는 곳에 끌려가서 개 맞듯이 맞았어. 소문으로만 듣던 곳에 가보니까 가차없더만. 죽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맞아서 기억도 안 나.”
“하….”
“그리고 난 그제야 또 하나의 사실을 알았지.”
최규보는 얼굴을 감싸 쥐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의 눈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 방이 도청되고 있었다는 걸 말이야.”
최규보는 쓴웃음을 지었다.
“진짜 바보 같지. 외부인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컨택하는데, 감시장치가 없을 리가 없지. 그런 기본적인 생각조차 못 하고 섣부르게 움직였던 거야.”
“형….”
“주위에서 천재라고 치켜세워주니까, 진짜 천재인 줄 알고 오만했던 거야. 고작 13살짜리가 주제 파악 못 한 탓에….”
최규보는 울컥한 듯, 어깨를 들썩였다.
그의 소리 없는 울음이 잠시 백색의 공간을 가득 채웠다.
우진은 말없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해줄 수 있는 위로가 고작 이것밖에 없음에, 그에게 미안할 뿐이다.
잠시 감정을 추스른 최규보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후에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대적인 조사가 시작됐고, 나도 참고인 조사를 수십 번이나 받았어. 하지만, 결과는 뭐 보나 마나였지.”
“증거 없음이었겠네요.”
“어. 죽어 나간 아이들이 100명이 넘는데, 다 병사 아니면 자연사로 처리됐어.”
최규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이내 화면을 가리켰다.
우진은 그의 손끝을 따라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화면 속에서는,
– 슥슥.
의예과를 졸업 후, 국가고시를 통과하고 의사가 된 최규보가 있었다.
그는 이를 꽉 깨문 표정으로, 서류에 한 글자씩 적어나갔다.
[지원 분야 : 법의학부]그 모습을 끝으로 영상은 멈추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우진이 최규보를 향해 시선을 옮기자,
“이게 내가 법의학자가 된 이유야. 언더스탠드?”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가 미소를 머금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16화
프리 프로덕션 준비로 바쁜 아침부터 박민재 PD는 서민경 작가의 문자를 받고 방송국을 나섰다.
대본 리딩 이후, 한창 대본 집필에 열중하던 그녀의 갑작스러운 만남 요청.
무슨 일인가 싶어 단숨에 달려간 그녀의 작업실.
“감독님, 어서 오세요.”
서 작가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작가님. 무슨 일이에요?”
박 PD의 물음에 서 작가는 커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의논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박 PD는 차기 tvKR 국장 후보로 거론되는,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임에도 불구하고 신인인 서 작가를 깍듯하게 대했다.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라 불리는 영역이기에, 작가를 존중해야 한다.’라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으니까.
박 PD는 그녀의 의견을 항상 최우선으로 존중하고, 사소한 사항이라도 작품과 관련된 것들은 모두 그녀와 상의했다.
그만큼 서 작가도 그에게 편하게 고민 사항들을 얘기했고,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PD와 작가 간의 앙상블이 점점 완벽하게 맞춰지고 있었다.
“작품에 대한 건가요?”
“네. 일단 말씀드리기에 앞서서, 이 부분은 전적으로 감독님 의견에 따를게요. 감독님께서 듣고 결정을 내려주세요.”
“알겠습니다. 뭔지 들어보죠.”
서 작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현재 대본은 10부까지 최종본이 나온 상태에요.”
“네.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사항이죠.”
“문제는 11부부터 20부까지 이야기인데, 결말이 두 가지입니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인 동시에 상당히 흥미로운 얘기다.
“제가 이렇게 고민하는 이유, 감독님은 짐작 가시죠?”
박 PD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백우진, 그 친구 때문이죠?”
“네. 맞아요.”
난데없이 등장한, 캐릭터 그 자체가 되어 나타난 괴물 신인.
그의 연기력과 분석력은 서 작가에게 엄청난 고민을 던지고 있었다.
“감독님도 아시겠지만, 애초에 최규보라는 캐릭터는 조연에 불과했어요.”
“그렇죠.”
“서준모와 임은수가 사건을 추적하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었는데….”
서 작가는 커피를 연달아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최규보라는 캐릭터, 조연으로만 쓰기에는 너무 아까워요.”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워낙 난해한 캐릭터라서, 누구도 100프로의 최규보를 보여주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야기 구조를 조금 바꿨었는데….”
데뷔작을 조금이라도 완벽하게 쓰고 싶은 마음과 욕심.
이해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기에, 박 PD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
“120프로 이상의 최규보를 보여주는 배우가 나타날 줄은 몰랐네요. 그것도 스물다섯이.”
“그 부분은 저도 동의합니다.”
상상했던 캐릭터가 그 이상의 모습으로 튀어나왔을 때의 느껴지는 감동.
서 작가의 느낌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닌 것을 안다.
그 또한 그렇게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맨 처음에 구상했던 이야기로 돌아가고 싶어졌어요. 하지만….”
서 작가는 고민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고민을 이야기했다.
“그러기에는 너무 이른 판단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첫 방송을 해봐야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요.”
서 작가가 아무리 김수림 작가의 보조 경력이 있는 작가라 해도.
역시 ‘신인은 신인이구나’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자신이 만든 프렌차이즈를 직접 걸어본 경험이 아직 없으니,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불안함과 머뭇거림은 있을 수밖에.
그래서 박 PD에게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놓는 것이고.
“제 생각에는요.”
서 작가의 결정을 도와줄 그의 관록과 경험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박 PD는 자신의 생각을 그녀에게 털어놓았고,
– 번뜩.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서 작가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우진은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지난 만남에서, 최규보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누군가한테 내 얘기를 해본 거, 네가 처음이다. 영광인 줄 알아~」
역시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뭉클한 진심이 전해졌던 말과,
「나와는 또 다른 너만의 나를 기대할게. 잘 부탁한다.」
약간 취했는지, 최규보답지 않은 오글거리는 말과,
「그 미션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얘기해줄 수 없어. 언젠가는 네가 알게 될 부분이야. 다만 힌트를 주자면 말이지….」
미션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는 조그마한 힌트.
그것은,
「내 결말은 둘 중 하나야. 네 입장에선, 미션을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걸린 문제지. 그런데, 걱정하지 마. 네가 연기를 잘하면 돼. 그럼 다~ 해결돼.」
양자택일의 문제라는 이야기였다.
선택을 가능케 하는 열쇠는 우진의 연기력이고.
“당최 무슨 얘긴지….”
아무리 고민해봐도, 정확한 의미를 알 순 없었다.
하지만, 우진은 배우로서 연기에만 몰두하면 된다는 것.
이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 나는 내 할 일에만 집중하면 되지.”
배우는 연기로 말해야 한다.
우진의 신념이 다시 한번 굳건해졌다.
– 메시지 왔어요~
주먹을 불끈 쥐고 의지를 불태우고 있던 우진의 핸드폰이 울렸다.
내용을 확인해보니 조연출 우승현 PD의 문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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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출연진께 3, 4회 최종 대본을 메일로 발송 드렸으니 확인 바랍니다. 유출방지를 위해 확인 후 해당 메일은 삭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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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진은 즉시 노트북을 켜서 대본을 다운로드 받은 후, 메일을 삭제했다.
그리고 천천히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아….”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 화면에 집중하던 그는 조용히 탄식했다.
최규보의 유년 시절에 대한 회상 장면이 3회 대본에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 자신이 연기하는 장면은 아니지만, 그것과 별개로 안타까움과 분노의 감정이 한데 뒤섞여 나왔다.
특히 최규보가 보육원의 추악한 진실을 마주하는 장면을 읽을 때는 계속해서 감정이 북받치기까지 했다.
지난밤에 보았던 장면들과, 이를 털어놓는 최규보의 상처가 머릿속에 생생하게 연상되었으니까.
“…….”
배우는 대본이 주어지면 그것을 읽고, 분석하고, 상상하며 캐릭터의 감정과 상태를 체화한다.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자신이 체화한 것을 표출한다.
그것이 연기다.
이 과정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느냐, 즉 배우가 얼마나 노력했느냐가 연기의 완성도를 결정한다.
하지만 지금은, 우진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읽는 것만으로도 호흡과 감정이 자연스럽게 완성되고 있었다.
실제 인물이 그 상황을 겪는 것을 직접 목격한 것은 글을 읽고 분석한 것과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까.
‘슬프다. 슬퍼.’
우진의 눈가는 어느새 촉촉해졌다.
그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다음 장면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한순간도 시선을 뗄 수 없게 우진을 끌어당기는 이야기 전개.
그리고 갓 데뷔작을 쓰는 신인 작가의 필력이라고 믿기지 않는 문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을 정도로 대본은 재미있고 흥미진진했다.
– RRRRR.
그때, 우진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 백우진 씨 맞나요?
“네, 맞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수현입니다.
임은수 역의 배우 박수현이었다.
그녀와 회식 때 친해졌고, 번호를 교환했었지.
“선배님, 안녕하세요.”
– 아휴, 됐어요. 선배님이라니. 그냥 누나라고 불러요.
우진보다 2살이 많은 수현이었다.
“알겠습니다, 누나. 그런데 어쩐 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