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99
그러니까, 어느 이름 모를 위성 도시의 전경을 담았었던 스케치가 허공에 떠올라 ‘빙빙-’ 돌고 있는 현상이 벌어진 것은 그다음의 일이었다.
우진이 피식 웃었다.
문득, 어렸을 때 슈퍼에서 많이 사 먹던 불량식품 중에 포장지가 타투 스티커로 되어있었던 풍선껌이 떠올랐다.
팔이나 어깨에 공룡 등의 캐릭터가 그려진 스티커를 붙였다가 떼면, 신기하게도 스티커 그림이 몸에 새겨져서 신이 나곤 했었지.
어린시절 가지고 놀던 그 스티커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거대한 스케치가 허공에서 맴도는 현상을 보고 있자니.
소소한 즐거움이 녹아있는 유년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그가 웃음을 지은 의미는 바로 이것이었다.
아, 그나저나… 잠시 잊었다.
아이의 인사에 진즉 화답했었어야 했는데, 잠깐 넋을 놓았네.
“안녕, 형준아.”
우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안녕을 말했다.
그때였다.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던 스케치의 조각들이 한 점으로 모여들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스케치 조각들이 이윽고 하나씩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거대한 벽면이 사라지면서 공허한 분위기만이 남아있던 공간이,
– 스르르륵!
가상 세계 속 배경이 이름 모를 한 위성 도시로 바뀌었고, 우진의 두 발이 닿은 곳은 어느 고층 빌딩 앞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연스레 바뀐 주변.
그리고,
– 툭툭.
“…형아.”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 그대로, 어린 젊은이와 재회했다.
다리를 살며시 치는 느낌에 시선을 내리니, 고개를 든 아이가 말똥말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진은 아이를 안아 들었다.
자꾸 윌리엄이 떠올라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그래, 형아 여기 있어.”
“…여기, 어때?”
아이의 뚜렷한 목소리가 물었다.
우진이 미소 지으며 즉답했다.
“마음에 쏙 들어.”
“…진짜?”
“응. 형아가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형준이가 너무 잘 그렸어.”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우진이 아이의 머리를 헝클였다.
아이는 쑥쓰러운 듯, 그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었다.
아, 마음이… 정말 평안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칠 만큼.
“형준아, 여기야?”
“…뭐가?”
“너희 집.”
우진이 눈앞에 보이는 고층 건물을 가리켰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는 미완성이었던, 그러나 지금은 아이가 직접 그려서 채워 넣은 그 공간.
우진이 아이의 보금자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품에 안은 어린 젊은이의 심장이 ‘두근두근-’ 떨리는 게 맞닿은 가슴으로 느껴졌다.
이윽고,
– 달칵.
아이의 안내에 따라 고층 오피스텔 맨 꼭대기 층에 있는 집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아이의 그림과 동일하게 채워져 있었고, 창가에 달린 새장 안에는 한 마리의 카나리아가 날개를 움츠리고 있었다.
그것의 황금빛 아름다운 깃털들이 시선을 끌었다.
우진이 아이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형아.”
“응, 형준아.”
아이가 별안간 큰 도화지를 바닥에 깔았다.
만약 그 위에서 웅크린다면, 자기의 몸이 쏙 들어가고도 남을 크기였다.
“…기, 다려. 선물, 줄게, 있어.”
“선물?”
“…응.”
아이는 4B 연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선,
– 슥슥슥슥.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상 세계 속에서 아이를 직접 만날 때도, 현실로 돌아와 무대 위에서 내면에 잠든 젊은이를 일깨울 때도 늘 같았다.
아이와 보내는 시간 속에서 그가 취해야 할 자세의 가장 최우선의 가치는 바로, ‘기다림’.
그래서, 우진은 기다렸다.
말없이 집중한 아이의 손이 멈출 때까지, 우진은 시선을 한순간도 떼지 않았다.
지켜보았고, 시선으로서나마 아이의 움직임에 동참했다.
그가 그렸던, 아이가 그렸던.
그건 중요치 않았다.
이 과정 자체가, ‘함께’이며.
함께함으로써 탄생한 그림 작품들은 전부 ‘우리’의 합작품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자.”
단 1초도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설렘과 기대가 가득했던 시간이 지난 뒤, 아이가 완성한 그림을 건넸다.
“형아 주는 거야?”
“…응, 마지막, 선물.”
아이도 알고 있구나.
‘마지막’이 뜻하는 의미심장한 의미를.
우진은 묘한 감정을 느끼며, 아이가 주는 그림을 받아들었다.
이곳의 도시와는 정반대인, 어느 숲속의 전경이 담긴 그림이었다.
나무에는 잎사귀가 무성했으며, 날씨는 화창했다.
수많은 작은 나무들 사이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치듯 하는 웅장한 위용을 뽐내는 대목(大木).
그것의 두꺼운 잔가지에 달린 그네에, 한 꼬마 신사가 ‘꺄르르-’ 웃는 얼굴을 하고서 앉아있다.
“얘, 형준이지?”
“…응!”
뒤에서 그네를 밀어주는 한 남자의 표정도 웃고 있으니,
“이거는 형아고.”
“…맞아!”
마지막으로,
“이 사람은… 형준이 누나!”
“…어떻게, 알았어?!”
두 사람의 모습을 열 발자국쯤 떨어져서 카메라에 담고 있는 한 여자의 모습까지.
그림의 주인공은 셋이었다.
“형준이에 대해서, 형아는 모르는 게 없으니까.”
“…헤헷.”
문득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가상 세계에 홀로 남은 아이는,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그림을 남긴 것일 터.
실제로 이런 시간은 갖지 못하고, 돌아가게 생겼네.
그림으로써나마 간접적으로 체험을 했을 뿐이다.
이 아이와 조금 더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좋으련만.
아이부터가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마지막’ 선물이라고.
융통성 없는(?) 다이어리의 특성상, 이제 곧 작별의 인사를 나눠야겠지.
앞선 캐릭터들과 그랬던 것처럼.
“고마워, 형준아. 형아가 꼭, 평생 간직할게.”
“…고마웠어, 형아.”
아이의 나지막한 음성이 말을 더했다.
“…아니, 고마웠어요, 우진 형아.”
극의 끝을 장식했던, 노인장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던 젊은이의 대사가 떠오르는 한 마디였다.
아이가 남긴 선물을 손에 든 채로 우진은 환하게 웃음 지었고,
– 위이잉.
이내 감각이 희미해졌다.
* * *
【미션 완료. (6/10)】
【미션 진행도 : 60프로】
【보상 : 용량 추가 (+10)】
여전히 허공에 떠 있는 다이어리에서 튀어나온 문구가 그를 반기고 있었지만,
“…….”
우진은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우진은 우희에게 전화를 걸어 재촉했다.
‘주말인데, 좀 쉬자아!’
라며 어리광을 피우는 우희를 이끌고 발걸음을 옮긴 곳은,
“얘들아, 선생님 또 왔어!”
이전에 남매가 봉사활동을 했던 보육원이었다.
또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물론,
“승훈이, 잘 있었어?”
“…네.”
“선생님 안 보고 싶었어? 선생님은 승훈이가 너~무 보고 싶었는데.”
“…보고, 싶었어요.”
우진에게 있어서는 또 다른 ‘아이’였던 승훈이 눈앞에서 아른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진·우희 남매가 선물 보따리를 들고 재방문을 한 날.
보육원의 2층 놀이방이자 승훈이가 늘 그림을 그리는 장소의 한쪽 벽면에는,
[2013. 09. 01]대형 액자가 걸렸다.
그 속에 담긴, 오늘의 날짜가 하단에 적힌 한 그림은 어린 젊은이가 우진에게 남긴 선물이었다.
* * *
[제70회 베니스 영화제, 초청작 86편 라인업 공개… 라호찬 감독의 , 한국 영화 중 유일 선정!] [‘그을리다’ 후속작… 백우진 주연의 영화 ‘가려진 자국’, 베니스 영화제 오리종티 경쟁 부문 진출 쾌거]막강한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세계 3대 국제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 영화제의 진출작 전체 리스트가 공개된 것은 8월 초였다.
이전까지 이 베니스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라 감독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어떤 부문에 진출한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세계적인 국제영화제들은 보통 경쟁 부문과 비경쟁 부문으로 나뉘며, 베니스 영화제도 마찬가지다.
차이는 간단하다.
경쟁 부문은 영화제에서 상영과 함께 수상을 놓고 격돌하고, 비경쟁부문은 초청작으로서 상영만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경쟁 부문은 다시 두 가지 섹션으로 나뉘게 되는데, 베니스 영화제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공식 부문(경쟁)’.
칸 영화제로 치면, 최고의 상인 ‘황금종려상(Palme d’Or)’에 해당하는 ‘황금사자상(Leone d’Or)’을 비롯해 각종 영예로운 상의 주인을 가린다.
‘황금사자상’ 외에도,
– 은사자상
– 심사위원대상
– 불피컵 남·여우주연상
– 심사위원특별상
–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상 (신인배우상)
– 골든 오젤라상 (각본상, 기술공헌상)
등을 수여하는데, 참고로 현재까지 한국 영화 중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전력은 없다.
그래서일까.
라 감독이 최초 베를린 영화제에서 결국 베니스 영화제 출품으로 노선을 틀었을 때, 우진은 이 ‘공식 부문(경쟁)’에 진출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결과적으로는 조금 아쉽게 되었지만, ‘오리종티(Orizzonti)’ 부문에 진출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성과임은 틀림없었다.
또 하나의 경쟁 섹션인 ‘오리종티’는 마찬가지로 칸 영화제에 비교하자면, ‘주목할 만한 시선’에 해당한다.
‘오리종티’ 부문에서 수여하는 상 역시 작품상·감독상·심사위원특별상·각본상·남우주연상·여우주연상·단편상 등등 ‘공식 부문(경쟁)’과 일맥상통하지만, 각각 별도로 운영된다.
영화의 장르나 분량과 관계없이 실험적이거나 새로운 경향을 선보이는 참신한 영화들을 선정하는 섹션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비교적 생소한 장르의 영화인 데다가, 배우가 아닌 실존 인물들의 모습까지 담고 있다는 점.
게다가,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을 강조하는 촬영 기법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 등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한국 영화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오리종티’ 부문에 진출한 을 향한 관심도가 점점 뜨거워졌다.
“도착하면 피자랑 스파게티 먹자! 이탈리아 본고장에서 먹는 맛은 어떨지 궁금하다고!”
“그거 좋지! 디저트로 이태뤼~ 커피 한 잔 딱 마셔주면 완벽하겠는걸?”
“아, 오빠. 커피 하니까 갑자기 떠오르는 건데, 제가 어디서 들은 얘기가 있거든요?”
“뭔데?”
“이탈리아에 가면, 에스프레소를 꼭 먹어봐야 한대요.”
“에스프레소?”
“네! 우리나라에서는 쓰게 마시잖아요? 그런데, 원래 에스프레소는 설탕이나 꿀을 넣어 먹는 거래요. TV에서 봤음!”
“오오, 처음 알았다. 무조건 마셔! 두 번 마셔!”
“아싸, 신난다!”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길.
준안이 형과 고이 누나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