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76
그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사실 첫 번째 ‘외’랑 세 번째 ‘내’만 읽고서 유추한 건데.
이건 혼자만의 사소한 비밀로 남겨두자.
“되도록 작품하고 관련된 이름으로 하고 싶었거든요. 데뷔작, 게다가 우리 우진 배우랑 함께 하는 첫 작품! 당연히 기념해야죠~”
라 감독은 흐뭇한 표정으로 영화사 이름에 대한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소방관하고 잘 어울리면서, 어렵지 않은 사자성어가 뭐가 있을까 고민했죠.”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겉모습은 부드럽고 친절하지만, 속에는 굳건하고 강한 심성과 의지를 지닌 사람. 소방관하고 딱 어울리는 사자성어 아니겠어요? 그래서 질렀지요.”
의외로 평범한 이유였지만, 라 감독이 말해서 그런가.
그 의미가 상당히 멋있다고 느껴졌다.
“어울립니다. 입에도 착 감기고요.”
“하하, 쑥스럽네요. 뭔가 더 거창한 이유가 아니어서.”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이던 라 감독은,
“아, 맞다!”
이내 뒷주머니에 손을 넣어 꺼낸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빼내 우진에게 내밀었다.
“어제 나온 따끈한 명함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명함을 받자마자 살펴보니 상단에는 ‘㈜외유내강’이라는 글자와 함께 독특한 모양의 로고가 박혀있었다.
얼핏 보면 방패 모양 같기도 하고, 또 다르게 보면 소방 헬멧처럼 생긴 것 같기도….
그 밑에는 ‘대표 라호찬’이라고 적혀있었다.
이렇게나 작은 곳에서 출발한 ‘외유내강’은, 불과 10년이 채 안 되는 가까운 미래에 국내에서 제일가는 영화사로 성장할 예정이다.
원생에서 그랬듯, 대중들에게 가장 친숙하고 잘 알려진 영화사로 자리매김하겠지.
그 탄생을 함께하다니,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우진 씨, 점심 드셨어요?”
“아니요, 아직입니다.”
“오디션까지 2시간 정도 남았으니까, 식사하면서 천천히 얘기 나누실까요?”
“네, 좋습니다. 가시죠.”
라 감독이 식사를 제안했다.
그는 지난 두 달간 관련 스케줄을 바쁘게 소화한 배우의 건강이 염려된다면서, 사무실 근처 고급 한정식집으로 우진을 이끌었다.
간단하게 먹어도 정말 괜찮은데, ‘이젠 내 배웁니다!’라는 말을 함께 내세우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음식점에 도착해 주문을 마친 뒤, 본격적으로 일 얘기가 시작되었다.
라 감독은 가져온 파일철을 우진에게 건넸다.
그 안에는 오늘 오디션 대상자들의 프로필이 담겨있었다.
어림잡아 60~70장 정도?
“프로필이 무려 7천 장 넘게 왔었어요.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봤고, 그중에서 이미지가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이들만 간추린 겁니다. 한번 보시죠.”
입이 떡 벌어지고, 눈이 휘둥그레지게 만드는 숫자였다.
독립영화에 7천 장의 프로필이라니….
이건 웬만한 상업영화급이다.
“그렇게 많이요?”
“조감독을 제가 몇 년을 했는데, 그때 받은 프로필들 다 합쳐도 이번에 받은 것에 한참 못 미치더라고요.”
“어마어마하네요.”
“캐스팅 기사 나가고 나서부터 우리 영화에 대한 기대가 엄청 높아졌잖아요. 이게 다 우진 씨 덕입니다, 하하.”
라 감독이 호쾌하게 웃었다.
행복에 겨운 웃음이었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지만, 한편으로는 오묘한 감정을 떨칠 수 없었다.
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항상 느껴왔던 바이지만, 경쟁률 하나는 정말 이 바닥을 따라올 분야가 없는 것 같다.
하긴.
예전에는 비교적 쉽게 찍을 수 있었던 학생 단편영화조차도 지금은 경쟁률이 ‘몇백 대 1’인 시대니까.
독립영화는 오죽하겠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60~70명을 제외한 나머지 수천 장의 프로필이 안타까운 건 왜일까.
연기를 보여줄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하고 프로필 서류 심사 단계에서부터 탈락의 고배를 마신 그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누구보다 그 기분을 잘 아니까.
“…….”
우진이 잠시 프로필에 시선을 둔 채 말이 없자, 라 감독은 그의 마음을 눈치챈 듯 말을 덧붙였다.
“나머지 분들에게는 문자로 소식 전했습니다. 나중에 꼭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요. 형식적인 문자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진심을 담아 적었어요.”
“아, 죄송합니다. 감독님께서 제 눈치를 보실 일이 절대 아닌데, 제가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하하, 아닙니다. 이렇게 인간적이고 따뜻한 면이 있어서 제가 우진 씨를 더 좋아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고마운 말이었다.
왠지 모르게 무거워졌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
적절한 타이밍에 음식이 나왔고, 두 사람은 식사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두 명을 뽑을 예정입니다.”
단역 대부분은 이미 캐스팅이 완료된 상태였다.
남은 건 조연급 배역.
오늘은 그중 두 명을 뽑는 자리였다.
“신인으로요.”
“네, 알겠습니다.”
는 기본적으로 플롯 전체가 주인공 이건우, 한 사람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영화다.
때문에, 단 한 씬도 우진이 빠지는 장면이 없다.
그가 ‘단독 주연’이라는 의미다.
이러한 특성상, 에서 조연급 배역은 일반적인 영화들과 비교하면 비중이 현저히 낮은 편.
따라서 아무리 백우진이라는 이름값이 더해졌다고 해도, 유명한 배우를 조연으로 캐스팅하기엔 어려운 상황이었다.
물론, 우진의 이름값을 본 몇몇 기획사에서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다.
그들은 당사에 소속된, 경력이 오래되지 않고 갓 신인의 티를 벗은 기성 배우들을 어필하였다.
그러나, 제안 대부분은 당사가 키우는 뉴페이스를 함께 써달라는… 우진이 그토록 혐오하는 ‘배우 끼워팔기’에 불과했다.
뭐 그게 아니라 할지라도.
단독 주연인 우진이 자진해서 기본 출연료를 안 받겠다고 한 것처럼, 그들 스스로가 ‘독립영화 러닝 개린티만 받겠습니다.’라고 할 거란 기대도 없었고.
어차피 허울뿐인 제안이라 생각한 라 감독은 처음부터 맘 편히 모든 배역을 신인으로 채울 생각이었다.
공개 오디션 진행으로 투명한 과정을 거쳐 실력이 있는 배우를 발굴한다.
당연한 이치 아니겠는가.
배우 끼워팔기는 어림도 없지.
“오늘 뽑을 배역은 원종수, 문희연이겠네요.”
“그렇습니다. 이건우 다음으로 비중이 제일 높은 배역이죠.”
가상 세계에서 봤었던 둘의 모습이 아직 생생하다.
오디션에 대한 기대감이 벌써부터 차올랐다.
“냉철한 시선으로 참관해주십시오. 이건우의 동료를 발굴하는 자리니까요.”
라 감독은 다시 한번 우진에게 부탁했다.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첫 만남 때 말했던 것처럼, 감독의 고유권한을 침범할 생각은 없다.
다만, 가상 세계에서 만났던 원종수와 문희연의 모습이 아직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기에.
우진 역시 라 감독처럼 최대한 적합한 이미지를 가진 동시에, 평소 성격이 배역과 비슷한 배우를 만나길 바랄 뿐이다.
영화사 이름처럼, 정말 외유내강인 사람을 찾을 수 있기를.
점점 욕심이 난다.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왔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떨쳐낸 순간부터, 이 영화에 부여된 의미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더욱 커졌다.
배우 인생 시작을 성공적으로 이끈 데뷔작 보다도, 거장의 은퇴작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있는 보다도 더 특별하게 와 닿는 작품.
아마 살면서 이런 작품을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란 확신까지 들 정도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가진 모든 걸 이 작품에 내걸겠다는 각오.
우진은 그 어느 때보다 의지가 가득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 * *
식사를 마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별다른 대기 장소가 없어 1층 카페에 협조를 구했다.
그렇게 마련된 대기실에는 점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프린트된 오디션 대본을 들고 마지막까지 연습에 몰두한 젊은 배우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누군가는 붙고, 누군가는 떨어지겠지만.
부디, 모두가 후회 없는 오디션을 치르기를.
“오디션 시작하겠습니다!”
정확히 2시가 되자 직원의 안내에 따라 시작된 오디션.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을 뽑는 자리인 만큼 지원자들의 성비는 정확히 반반이었다.
오디션은 남녀 2인이 팀을 이뤄 그룹으로 진행되는 방식.
첫 조가 오디션장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배우 김예은….”
“배우 김민혁… 어!?”
그들은 이내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감독, 또는 중요한 스태프가 앉아있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백우진이 앉아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어머… 선배님, 팬입니다.”
“감사합니다.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해요.”
“네, 넵!”
“열심히 하겠습니다!”
처음엔 당황스러운 모습이 역력했던 지원자들이 이내 동경의 시선을 보내며 수줍게 말을 꺼냈다.
우진은 친절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자신이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신인들에게 긴장감을 주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혹여나 그들의 오디션을 망치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 때문에, 이렇게라도 짧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긴장을 풀어주려는 배려였다.
“지정 연기부터 볼게요. 민혁 배우님부터 시작할까요? 예은 배우님이 상대방 대사 쳐주세요. 끝나면 바꿔서 하고.”
“예!”
조금은 편안해진 분위기에서 그들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남녀 지정 연기, 자유 연기, 그리고 짧은 질문 순으로 이어졌다.
연기를 보는 동안, 우진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다.
단 한 번도, 지원자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연기가 끝난 뒤,
“감독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배우님들께 한 마디 드려도 될까요?”
“아, 네. 편하게 하세요.”
“감사합니다.”
제일 먼저 라 감독에게 정중히 허락을 구한 우진은 이어 지원자들을 향해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좋은 연기 보여주셔서 감사해요. 잘 봤습니다.”
시작은 격려의 메시지.
“예은 배우님은 표정과 대사 톤이 정말 좋네요. 민혁 배우님은 집중력이 정말 뛰어나고요. 두 분의 연기를 보면서 배울 점이 많다고 느꼈습니다.”
다음은 피드백.
우진은 지원자들에게 꼬박 ‘배우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
이런 사소한 배려가 받는 사람에게는 존중의 의미로 크게 다가오는 법.
수직적인 ‘갑’과 ‘을’ 관계가 될 수밖에 없는 오디션이 대부분인데, 업계 ‘동료’로서 서로 존중하는 오디션도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원생에서 500번 동안 단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사소한 배려를 후배님들에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서 참 다행이구나 싶다.
“두 배우님 모두 대사마다 말끝이 떨어져서 단조로운 느낌이 살짝 들었는데, 이 부분만 보완하시면 군더더기 없는 연기라고 생각합니다.”
우진의 피드백을 받은 첫 조는 환한 표정으로 오디션장을 나섰다.
합격 여부와 관계없이, 지금의 순간이 훗날에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기를.
라 감독도 오디션에 임하는 우진의 태도가 마음에 쏙 드는 듯, 흐뭇하게 웃으며 외쳤다.
“다음 조, 준비해주세요!”
오디션은 계속 진행되었다.
69화
연기에는 ‘정답’이 없다.
사람마다 외모, 성격, 타고난 목소리와 억양 등이 다 다르니까.
같은 대사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A가 했던 연기를 B가 똑같이 구현하는 건 불가능한 셈.
또한, 연기에 대한 평가 역시 사람마다 다르다.
아무리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라고 해도, 누군가에게는 별로라는 평가를 받는 법.
즉, ‘완벽한’ 연기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연기가 있을 뿐.
그렇다면, 훌륭한 연기는 어떤 연기일까?
우진은,
‘자의식이 없는 연기.’
라고 평소에 생각해왔다.
연기를 하는 순간에는 그 어떤 것도 의식하면 안 된다고 믿는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나?’
‘어? 여기서 톤이 이게 맞나?’
‘저 사람은 내 연기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이런 자의식이 들어오는 찰나, 자연스러움은 사라진다.
잘하고 싶다는 욕심, 최대한 진짜처럼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 등이 연기에 묻어나오니까.
그 순간, 가짜 연기가 된다.
진짜 대본 속 캐릭터가 되어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캐릭터처럼 보이려고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훌륭한 연기를 한 단어로 정리하자면, 결국 ‘몰입’이다.
어떠한 상황에 부닥친 캐릭터가 그 순간 느끼는 감정에 얼마나 공감하고 몰입했는지가 연기의 당락을 결정한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