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036
01039 1039화
아직 결혼전인 태수는 디아브의 깊은 속마음까진 몰랐다. 다만 눈빛이 드러난 감정 하나만 봐도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지 능히 짐작이 갔다.
그때, 병상을 밀며 온 의사 중에 신혜미가 보였다.
이 상황에 인사하고 자시고 할 정신은 없었다. 그저 아주 잠깐 시선을 마주한 게 끝이었다.
아크사가 누운 병상을 고정시키는 사이 닥터 하워드가 살짝 놀란 얼굴로 태수와 닥터 슈미트에게 다가왔다.
“저 환자가 딸이라고요?”
“그보다 저 아이, 아니 아크사의 상태는?”
“아, 이름이……. 일단 아크사는 현재 의식이 없습니다.”
“의식이 없어?”
닥터 슈미트가 강렬한 눈빛으로 묻자 닥터 하워드가 얼른 설명했다.
“네. 그리고 호흡하고 맥박이 좀 불안한 상태로 stridor(협착음, 쌕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게 obstructive pulmonary disease(폐쇄성 폐질환)이 의심됩니다.”
“폐쇄성 폐질환이라. 혹시 패혈증 증세는?”
“아직까지 비슷한 증세는 안 보입니다.”
“확실해?”
“아크사는 딱히 외적인 상처가 없었습니다. 몇 군데 둔상과 찰과상이 있었지만 크게 문제 될 정도도 아니고요.”
“음, 그나마 다행이야.”
닥터 슈미트의 말에 닥터 하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들이 의논하는 사이였다.
“쿨럭쿨럭! 흐으으.”
갑자기 기침 소리와 함께 얇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디아브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디아브의 시선은 의사들이 아니라 아크사에게로 향해 있었다.
의사들도 얼른 반대로 시선을 돌려 아크사를 바라봤다.
“아으으. 헉헉! 쿨럭!”
호흡이 빠르고 기침이 잦다.
점점 의식이 선명해지고 있는지 고운 미간이 잔뜩 좁아져 있었다. 더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깨어날 터였다.
의식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깨어나야 하는 건 맞지만 고통이 너무 심할 터였다.
로렌스 간호사가 아크사의 바이탈을 담당했는지 날카롭게 말했다.
“체온이 점점 올라가고 있어요.”
“antitussive(진해제), febricide(해열제) 부탁합니다.”
태수는 바로 로렌스 간호사에게 오더를 내렸다.
그때, 닥터 슈미트가 막아섰다.
“그러지 말고 코데인과 아세틸살리실산(acetylsalicylic acid)을 함께 투여하도록.”
“로렌스, 그대로 있어요. 내가 준비할게요.”
안젤리카 간호사가 한발 먼저 움직였다.
그때, 닥터 슈미트가 태수에게 말했다.
“약은 내과가 더 확실하잖아.”
“그러면 다시 잠들 거 같아서요.”
“아크사 상태도 그렇게 좋은 거 같진 않은데, 의식 확인보다는 잠들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게 좋겠습니다.”
태수와 닥터 슈미트가 의논하는 사이 오더를 내린 약들이 차례로 아크사에게 주입되었다.
코데인은 엄연히 마약성 진통제였지만, 100배 이상으로 희석한 거라 마약으로 취급되진 않는다.
그리고 마취, 진통 작용은 모르핀에 비해 비교도 할 수 없이 약하지만 호흡 안정 및 기침에는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거기에 아세틸살리실산은 아스피린을 액체화시킨 약으로 해열 작용이 무척이나 뛰어났다.
하지만 투여를 했다고 바로 효과가 나타나는 건 아니었다. 약이 작용할 때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으으으.”
아크사는 아직 고통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의식이 선명해지고 있는지 얼굴이 더욱 강하게 찌푸려졌다.
“콜록콜록. 헉헉.”
기침과 호흡 곤란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이대로 지켜만 봐야 하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때, 김혁권이 태수를 가볍게 건드렸다.
툭.
“네?”
“저기.”
김혁권의 시선을 따라가자 디아브가 보였다.
디아브는 이미 자신의 아픔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아크사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태수의 머리가 번뜩였다.
“아크사를 저쪽으로.”
“네?”
“일단 옮겨요.”
태수가 번개같이 다가가 아크사의 병상을 디아브 쪽으로 움직였다.
박성민과 김혁권도 부리나케 다가왔다.
이어서 다른 의료진들도 따라붙자 아크사의 병상이 디아브가 누운 수술대에 바짝 다가섰다.
디아브는 기다렸다는 듯이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억지로 들었다.
태수는 눈치를 채고 그 손을 아크사의 머리에 댔다.
디아브는 손가락만 까딱거리며 아직 의식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아크사에게 말했다.
“괜찮아……. 아빠 여기…… 있어.”
그 목소리는 힘겹지도, 떨리지도 않았다.
평안한 디아브의 목소리 때문인지 아크사의 찌푸려진 미간이 점점 펴지고 있었다.
깨어나려던 의식도 다시 점점 잠에 빠져들어 갔다.
약 기운이 그대로 몸에 흡수될 수 있게 긴장을 놓은 것 같았다.
안젤리카 간호사가 간이혈압측정기로 바이탈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혈압하고 맥박이 좋아지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까 호흡도 다시 평안해졌는데.”
“그건 약 때문은 아닌걸로 보여.”
“거 참.”
놀라움과 의아함이 공존했다.
그러나 의학적인 사례가 있는 경우였다.
아픈 환자일수록, 의식이 없는 환자일수록 자신과 가까운 사람의 목소리에 안정을 되찾는다.
그런 취지에서 간호라는 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아크사가 매몰돼 공포에 떨면서도 아버지인 디아브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단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태수 옆으로 다가온 닥터 슈미트가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알고 있었나?”
“어느 정도는요.”
“가끔 날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어.”
“…….”
태수는 대답 대신 가볍게 미소 지었다. 지금 장시간 웃으면서 떠들 상황이 아닌 탓이다. 그건 닥터 슈미트도 알고 있는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크사가 안정되자 디아브도 좀 더 몸 상태가 좋아졌다.
딸은 아버지의 목소리에 마음을 놓았고, 아버지도 딸이 좋아지는 걸 보며 자신도 변화가 온 것 같았다.
혈연의 신비로움.
세계 의학 뉴스에서 종종 일어나는 사례이기도 했다.
신경외과가 아니라 정확한 의학 용어나 현상을 규정짓진 못해도 좌우간 다행이었다.
이젠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을 것 같았다.
태수가 박성민에게 다가갔다.
“동시에 수술 들어가야 할 거 같습니다.”
“내가 봐도 그렇긴 한데, 좌우간 내가 딸이지?”
“네.”
“나도 그게 좋은데, 이거 뭐, 정보가 있어야 확신을 갖지. 후우! 그래. 일단 외상은 보이지 않으니까 다행이라 생각하자고.”
빠르게 의견을 조율한 태수와 박성민은 닥터 슈미트에게 다가갔다.
끄덕.
가볍게 고갯짓을 한 닥터 슈미트가 디아브에게 말했다.
“여기 두 의사가 두 분을 수술할 의사입니다.”
응급 상황이라 해도 환자가 의식이 있기에 수술할 의사를 보이는 건 당연했다.
디아브가 태수와 박성민을 한 번씩 바라보고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좌측에 계신 분께…… 제, 제 딸을 부탁…….”
“혹시 저 의사를 아십니까?”
“나이가 있으니까…… 실력도……. 푸우. 훅훅.”
고통으로 말은 끝까지 잇지 못했지만 뜻은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박성민은 눈을 끔뻑거리며 한국어로 속삭였다.
“이거 기뻐해야 돼, 슬퍼해야 돼?”
“좌우간 나쁜 일은 아니네요.”
“죽겠네.”
박성민의 잔뜩 긴장한 대답이 들렸다.
그러나 일일이 응대할 시간이 없던 태수가 시선을 돌려 디아브에게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아크사는 여기 제 선배님이 수술하실 겁니다. 바로 옆에서 수술하는 거니까 안심도 되실 거고요.”
“잘…… 부탁…….”
디아브의 말에 박성민이 차분하고 묵직하게 대답했다.
“꼭, 꼭 두 분이 웃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끄덕.
디아브의 고갯짓을 마지막으로 태수가 모두에게 말했다.
“여기서 동시에 수술 들어갈 테니까 빨리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일단 수술대하고 병상 사이부터 벌리고, 각자 포지션부터 잡아!”
“먼지 피우지 말고 조심해서 움직여!”
다들 낮게 울리는 오더에 맞춰 조심하면서도 신속하게 움직였다.
태수는 잠시 박성민을 관찰하곤 이내 시선을 돌렸다.
아직 어떤 징후도 안보인 탓이다.
역시 박성민의 병은 수술이 최고의 약일지도 모른다. 또 한편으로는 박성민의 상태로 볼 때 수술을 감당하기 충분하단 판단이 섰다.
‘힘내십시오. 선배님.’
태수는 마음으로 열렬한 응원을 보냈다.
수술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미 디아브를 수술할 준비는 되어 있었고, 의료진이 많기에 하나씩만 추가로 준비하니 아크사를 수술할 여건이 갖춰졌다.
그리고 닥터 슈미트가 중심을 잡고 의료진들을 전체적으로 조율했다.
수술 준비가 거의 끝나 갈 무렵이었다. 로렌스 간호사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다가와 닥터 슈미트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닥터 슈미트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뭐라고? 그게 사실이야?”
“……네.”
“이런!”
닥터 슈미트의 애통한 목소리에 다들 멈칫했다.
수술 준비에 문제가 발생한 모양이다.
태수와 박성민은 반사적으로 닥터 슈미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general anesthetic(전신마취제)이 하나밖에 없어.”
“…….”
순간 태수와 박성민의 눈빛이 흔들렸다.
둘 다 전신마취를 해야 하는 상황인데 하나밖에 없다니.
그때 박성민이 머리를 굴리며 말했다.
“그럼 local anesthetic(국소마취제)은요?”
“그것도 조금밖에.”
“미치겠네. 수술을 어떻게 하라고.”
박성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태수도 마찬가지였다.
충분히 마취를 해야 하는데.
한 사람만 마취하고 수술한다고 해도 다음 약이 언제 도착할지 기약이 없었다.
태수가 갑갑한 마음에 물었다.
“저희가 가져온 약들은요?”
“모든 걸 통틀어서 마지막이라는 거야. 리도카인은 아예 없어. 국소마취뿐만 아니라 부정맥 치료에도 사용되니까.”
“부피바카인도 있잖습니까.”
“두 개 남았다더군.”
전신마취제 하나, 국소마취제 둘.
수술은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데.
암담했다.
그때, 박성민이 머리를 쥐어짜 의견을 냈다.
“그럼 디아브에게 전신마취를 하고, 아크사는 부피바카인으로 흉부만 국소마취하는 건 어때?”
“그것도 방법이긴 한데, 상황상 아크사가 오래 버티기 힘들 거 같습니다.”
“미치겠네. 아크사 체격이 작으니까. 전신마취하면 마취제가 조금 남긴 하겠지. 그런데 그 쥐꼬리만큼 디아브에게 투여하면 그건 완전 마취가 아니잖아. 의식도 있을 거고, 고통도 있을 거라고.”
“부피바카인으로 통증을 죽여 가며 수술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요. 진통제도 어느 정도 이상의 고통은 잠재우기 힘듭니다.”
태수의 목소리도 영 달갑지 않았다.
온전히 수술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모두 온전히 마취가 돼야 하는 상황이기에 더더욱 암담했다.
그 후로도 계속 토의가 이어졌다. 하지만 의사들의 의견이 좀처럼 하나로 합쳐지지 않았다.
워낙 결정내리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해 각자 머리를 짜내 새로운 방법을 이야기했지만, 태수가 듣기에 그리 효율적이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점점 흐르고 있었다.
이젠 결론 없이 빙빙 맴도는 토의를 마치고 수술에 들어가야 했다.
닥터 슈미트가 고심 끝에 마지막 결단을 내리고 태수에게 말했다.
“닥터 최가 결정을 내리면 진행하는 걸로 하지.”
“하. 현재 더 위험한 건 디아브입니다. 자세히 상황을 이야기하고 마취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아크사의 경우 버티는 쪽으로 가죠.”
태수의 고뇌어린 대답에 닥터 슈미트가 즉각 나섰다.
“그건 내가 이야기하지.”
“아닙니다. 아무래도 집도할 제가 이야기하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태수는 닥터 슈미트의 호의를 마음으로만 받고 자신이 나섰다.
어차피 수술 집도의는 자신이기에 모든 상황을 스스로 책임져야 했다.
곧 태수가 다가가자 디아브가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왜 수술을…….”
“그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현재 상황은, 그러니까…….”
태수는 최대한 솔직하게 상황을 이야기했다.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디아브는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저는 괜찮……. 아크사를…….”
“이건 그렇게 쉽게 결정 내릴 문제가…….”
“부탁…… 끄으윽, 부디 우리 딸이 아프지 않게…….”
디아브는 시간이 갈수록 고통이 심해져 말도 제대로 못했다. 그 판국에도 자신보다 딸을 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