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070
01073 1073화
신혜미가 제대로 정신을 차리자 태수가 부드럽게 말문을 열었다.
“안 아프지?”
“견딜만 해요.”
“어, 아프단 이야기야?”
“수술한지 얼마나 됐다고요.”
신혜미가 가볍게 쏘아붙이자 태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네. 죽이게 수술했는데.”
“그래요. 하나도 안 아파요.”
“괜찮은 환자네. 집도의 위로할 줄도 알고.”
태수가 농담을 던지자 신혜미가 살짝 어이없단 표정으로 변했다.
“이제보니 실없어 보여요.”
“아직 사람 볼 줄을 모른다고 넘어갈게.”
태수는 넉살좋게 받아쳤다.
가만히 바라보던 신혜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첫눈에 반했다고 그랬죠?”
“맞아.”
“막상 보면 환상이 깨진다고 하잖아요.”
“더 심해지더라.”
태수는 흔들림없이 대답할뿐이다.
신혜미는 그런 태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나 이런 절박한 환경이 좋아하는 감정을 진하게 만들었다고 생각안하나요?”
“안해.”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몇 번이나 이야기 해봤나요?”
“글쎄.”
태수도 잘 기억이 나지않는지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신혜미가 다시 물었다.
“상식적으로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만난 시간이 너무 짧지않나요?”
“사랑이란 만난 회수대로 커지지 않아.”
“만약 우리가 건강하게 만났다면 잘 싸웠을거에요.”
“그럴지도. 성격상 하루가 멀다 하고 부딪쳤을지도 모르지.”
태수가 피식 웃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단 덧없는 생각도 든다.
어느새 신혜미가 말꼬리를 돌렸다.
“어떻게 사셨어요?”
“무슨 말이야?”
“실은…..”
“실은 뭐?”
태수가 살짝 다그치자 신혜미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미 알고있었어요. 어떤 분인지.”
“뭐?”
놀란 태수를 보고 신혜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땐 부담스러워서 일부러 모른척 했어요.”
“그랬군.”
태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신혜미가 눈을 빛냈다.
“들려줘요.”
“뭘?”
“카슈미르에서 어땠는지요.”
빛나는 신혜미의 눈망울을 바라보던 태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깐……”
여러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두 사람은 상당히 친해졌다.
그런 과정 속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신혜미의 마음이었다.
전과는 다르게 태수를 밀어내려고만 하지 않았다. 오히려 틈틈이 날카로운 질문으로 태수를 당황하게 했다.
“내가 아직도 좋아요?”
“뭐? 그러니까…….”
“당황했어요? 얼굴 빨개졌는데.”
“갑자기 물으니까 그렇지.”
태수가 핀잔을 줬지만 신혜미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밝은 미소와 달리 눈빛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삶의 끝에서 찾아온 남자.
누구라도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야 한다. 하지만 자신에겐 그 시간이 너무도 가까이 다가와 있단 걸 알고 있기에, 태수를 바라보는 눈빛이 안쓰럽고 또 서글프기도 했다.
그러나 태수 마음은 또 달랐다.
“혜미야.”
“네.”
“오늘부터 머리에 새겨놔.”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살짝 당황한 신혜미에게 태수가 다짐하듯이 말했다.
“하루를 십년처럼.”
“네?”
“오늘부터 하루는 십년이라고.”
태수 말에 신혜미 눈이 시큰해졌다.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르지 않았던 탓이다.
“얼마나 남았을까요?”
“뭐가?”
태수가 알면서도 시치미를 따자 신혜미가 집요하게 물었다.
“남은 날이요.”
“며느리도 모를걸. 집도의가 너무 잘해서 아무도 몰라.”
태수의 말.
진심이다.
언제까지나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서린 말이다.
한바탕 떠든 신혜미가 다시 잠든 오후 시간이었다.
태수는 여전히 잠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많이 수척해졌다. 중심정맥관을 연결해 고영양의 주사제를 투여하는 중이라 조금씩 체력을 올리고 있어서 이 정도였다.
태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갑자기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수술이 끝난 후로 박성민과 김혁권이 보이지 않았다. 한 번쯤은 찾아올 법도 한데.
내심 섭섭했다.
심심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신혜미에게 이렇게 멋진 사람들과 지내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그런데 찾아오지 않으니 말로만 떠드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가끔은 둘 사이에 어색한 시간이 찾아올 때도 있었다. 그 순간에는 박성민의 말도 안 되는 농담이 너무도 그리웠다.
생각난 김에 태수는 박성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캠프 안에는 무선 중계기가 있기에 전파가 곳곳에 닿았다.
뚜루루.
몇 번 신호음이 들린 후 박성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네?”
“왜 전화했냐고.”
박성민의 목소리가 살갑지 않고 딱딱했다.
오히려 당황한 태수가 눈을 굴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전화하면 안 되는 상황입니까?”
“그렇다면 어쩔래?”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태수가 말끝을 흐리자 박성민의 퉁명한 대답이 들려왔다.
“너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다. 신 선생의 병이 아무리 중하다고 해도 어떻게 이틀 동안 코빼기 한 번 안 비치냐?”
“…….”
“간호사가 없어, 아니면 의사가 없어? 그렇게 따지면 나도 환자야, 인마. 하긴 10년 본 선배보다 이제 몇 번 본 여자가 더 좋다는 배은망덕한 놈한테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죄송합니다. 제가…….”
태수가 대답을 이어 가기도 전에 박성민이 딱 잘랐다.
“아아, 됐어. 나야 어차피 한국 들어가면 다시 또 헤헤 웃으면서 너랑 대화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물론 그렇겠지. 그러니까 여기서는 그냥 모르는 척하자고.”
“아닙니다. 제가 잠깐 간호사를 데려다 놓고라도 가겠습니다.”
“아이고, 바쁘신 분이 어딜 오십니까? 오셔 봐야 지금 전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라 무지 까칠하고 재수 없게 굴 거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서 전담 환자 잘 간호하세요. 그럼 전 바빠서 이만 끊습니다.”
“선배, 선배!”
뚝.
크게 불렀지만 전화는 매정하게 끊어졌다.
태수는 휴대폰을 매만지며 복잡한 표정으로 변했다.
목소리가 진짜 장난이 아니었다.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태수가 만약 그 입장이었어도 화가 날 법도 했다.
“진작 전화라도 한 통 드릴 걸 그랬나.”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다고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생각하던 태수는 김혁권을 떠올렸다.
지금 캠프에서 스케줄이 없는 간호사는 김혁권이 유일했다. 제임스를 간호한다는 명목으로 하루 종일 같이 있을 건 분명했다.
슬슬 회복중인 제임스에게 꼭 김혁권이 곁에 없어도 될 터였다.
태수는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그런데 신호음이 울리기도 전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무슨 일이에요?”
“지금 시간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인지부터 들어 보고요.”
김혁권의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그에 안심한 태수는 앞서 박성민과 통화한 내용을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태수가 간단하게 설명하자 김혁권의 대답이 들려왔다.
“하여간 닥터 박 성격하고는. 안 그래도 어제 자려는데 계속 닥터 최 욕합디다. 상황 다 알면서 사람이 그러면 쓰나.”
“그래서 말인데, 잠깐 이쪽으로 와 주실 수 있습니까? 혁권 씨도 뵙고 싶고, 선배님도 잠깐 뵙고 오려고요.”
“나? 아, 이거 어쩌나?”
“왜 그러십니까?”
“사실은 제임스 상태가 조금 나빠졌어요.”
김혁권의 말에 태수의 눈빛이 굳어졌다.
“어디가 어떻게요?”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고. 이틀 전에 휠체어에 오래 앉아 있었던 게 조금 무리가 갔나 봐요.”
“그럼 제가…….”
“잠깐만. 네? 아아, 네. 닥터 최, 제임스가 오지 말래. 우리야 언제든지 얼굴 볼 수 있으니까 거기에 집중하라고 하네요.”
“그래도 제가 그 말을 듣고 어떻게 여기에만 있겠습니까?”
태수는 진심이었다.
신혜미와 보내는 시간이 지금은 가장 중요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잠깐이라도 잠든 틈을 타서 인사라도 하고 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김혁권은 여전히 거절했다.
“제임스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병간호나 잘하라고 했습니다. 진짜 오지 말아요. 그럼 끊습니다.”
뚝.
김혁권의 목소리는 거기서 끝났다.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은 태수는 갈팡질팡했다.
이거 어쩌지?
제임스는 태수에겐 의술에 있어 아버지와 같은 존재다. 그런 그를 힘들게 했다는 게 계속 마음을 무겁게 했다.
잠깐이라도 나갔다 올까?
태수는 강한 유혹을 느꼈다.
신혜미가 잠든 건 대략 1시간 전이었다. 그런데 자고 깨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체력도 조금씩 좋아지고 있어서 더더욱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당장 깨어날 수도 있고, 아니면 몇 시간을 더 잘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이라 태수의 몸이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태수는 손에 쥔 휴대폰을 거칠게 매만졌다.
잠든 신혜미를 보며 그렇게 20여 분을 더 고민했다.
그때까지 좌불안석으로 신혜미를 살펴보던 태수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잠깐 가서 제임스의 얼굴을 보고 오는 게 맞았다.
태수는 투약 상황 등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제임스의 텐트까지 거리가 조금 되고, 대화할 시간도 있어야 했기에 충분히 확인하는 건 필수였다.
꼼꼼하게 확인을 마친 태수는 이내 결심했다.
“지금부터 30분 정도는 괜찮을 거 같은데.”
그렇게 결심을 굳힌 태수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스윽.
회복 텐트의 막이 펄럭이며 걷혔다.
이틀 동안 저 막으로 들어온 건 식사를 가져다준 로렌스 간호사와 안젤리카 간호사뿐이었다.
마침 그녀들이 들어오는 걸까?
식사 시간은 아니었다.
지나는 길에 잠깐 들렀을지도 모른다.
태수는 잠시 자신을 대신해 자리를 지켜 줄 누군가가 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급해졌다.
그때 열린 막으로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
그 상대를 바라보던 태수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는 바로 제임스였다.
“제, 제임스.”
“왜 그렇게 놀란 얼굴로 보나? 내가 걸어 다니는 게 신기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되다니?”
제임스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태수가 얼른 말했다.
“조금 전에 김 간호사와 통화했는데, 지금 몸이 많이 안 좋으시다고…….”
“음…… 그랬지. 맞아. 김 간호사 말이 옳아.”
“…….”
“닥터 최가 걱정한다는 소리에 온 거야. 안심하라고 말이지.”
제임스가 평소처럼 대답했지만 무언가 앞뒤가 안 맞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태수는 지금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 없이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그때 너무 무리하셔서 회복이 늦어지셨다고요.”
“내가 그런 인사나 받자고 온 거라 생각하나?”
“아니 그게…….”
태수의 말에 제임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걱정 하지 말라고 온 거 아닌가. 자, 봐 봐. 이제 이렇게 걸어 다니지 않나.”
“다행입니다. 진짜 다행입니다.”
“이런, 이런. 지금 모습을 보면 수술실에서 모두를 휘어잡던 그 의사와 동일 인물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겠나?”
제임스가 핀잔을 줘도 태수는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 진짜 괜찮으신 겁니까? 그렇게 걸어 다니시면 아직 힘드신 거 아닙니까?”
“잊었나? 여긴 NGO야. 아마 세계 어떤 병원보다 신약이 많을 거야.”
“그건…… 그렇죠.”
“물론 약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순 없지. 그래서 아직은 오래 걸어 다니는 게 좀 힘들어. 아마 지금은 여기까지 오는 게 내 한계가 아닐까 싶네.”
그 말에 아차 한 태수가 얼른 간이 의자를 내밀었다.
“여기, 여기 일단 앉으시죠.”
“역시 눈치가 좋아. 그리고 차트 좀 가져오지.”
제임스의 요청에 태수가 멈칫했다.
“제임스, 아직은 진료를 보시기에 이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야.”
“…….”
“그 침묵 속에서 난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은 것 같은데. 언제까지 날 기다리게 할 셈이지?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이나?”
그 말에 태수는 아차 했다.
상대는 제임스였다.
암에 대해서도 전문 지식이 뛰어난 의사였다.
태수가 그동안 간호했다고 해도 세세하게 미흡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제임스라면 그 부족한 점도 척척 찾아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