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120
01123 1123화
의사의 무덤이라 평가받는 외과치곤 정말 많은 숫자였다.
그러나 태수는 아무런 감정 변화없이 레지던트들을 한 명, 한 명 둘러봤다.
다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였다.
태수의 성격을 알고 있는 황경석이 미리 코치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중에서 유일하게 태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레지던트가 있었다.
눈빛을 마주쳐도 정관영은 일부러 피할 뿐이었다.
그 옆에는 방금 정관영을 나무랐던 최송준도 서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태수를 향해 당당한 모습을 내보이고 있었다.
태수가 둘러보는 사이 황경석이 모두에게 소개했다.
“호출할 때 이미 얘기했지만 이분은…….”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네?”
“기다려.”
황경석의 소개가 이어지기 전에 태수가 걸음을 옮겼다.
뚜벅뚜벅.
조용한 의국에 태수의 발소리만이 울렸다.
레지던트들은 내심 태수의 모습에 서로 눈짓하며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고개를 세차게 흔드는 모습뿐이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도 태수는 개의치 않고 정확하게 정관영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앞에 섰다.
그 모습에 다른 레지던트들이 살짝 긴장했다.
정관영은 나이는 많지만 정말 열심히 한다. 그러나 썩 뛰어난 실력이 아니었고, 가끔 실수도 했다.
황경석은 혹시 정관영이 무슨 사고를 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얼른 다가왔다.
“아, 이쪽은…….”
“쉿.”
“네.”
황경석이 바로 입을 다문 순간이었다. 태수는 정관영을 향해 천천히, 그리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 왔습니다, 선배님.”
“…….”
정관영은 시선을 돌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태수는 그가 인사를 받아 줄 때까지 허리를 펴지 않으려고 작정한 모습이다.
그 상반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레지던트들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무, 무슨 일이야?”
“정 선생이 최 선생님 선배라니!”
“치프!”
모두의 시선이 향하자 황경석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처음 듣는 얘기라고.”
“도대체 이게…….”
이건 놀람을 넘어서 경악할 일이었다.
전문의가 레지던트에게 고개를 숙인다. 그것도 레지던트가 선배라는 이유라면 더더욱 놀라 자빠질 일이었다.
의국은 핵폭탄을 맞은 듯이 고요했다. 이 안에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듯 숨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때까지 태수는 여전히 정관영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려고 모질게 마음먹은 정관영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대답을 해야 할 상황이 돼 버렸다.
“선생님, 허리 좀 펴세요.”
“…….”
“최 선생님.”
“…….”
태수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이미 모두의 시선은 정관영에게로 향해 있었다.
궁금함으로 가득한 부담스런 눈빛들에 정관영은 진짜 난감한 표정으로 변했다.
“저기, 선생님, 알겠으니까……. 태수야, 너 끝까지 이럴래?”
정관영이 결국 앓는 소리를 하며 이름을 부르고야 태수가 허리를 폈다.
환하게 미소 지은 태수는 아무것도 모른단 목소리로 말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지금까진 그랬는데, 선생님이 오셔서 앞으로는 잘못 지낼 거 같습니다.”
“선생님이라고요? 선배님, 제 인사가 부족…….”
“알았…… 으니까 그만해.”
정관영은 눈치를 보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반말을 해야 했다.
그러나 태수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선배님을 여기서 다시 뵈니까 기분이 설명이 안 되네요.”
“나도 너 보니까 참 복잡하다. 모르는 척 좀 하지.”
“어떻게 그럽니까. 직속 선배한테요.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네가 전문의고, 내가 레지던트입니다. 이건 양보 못합니다.”
“글쎄요.”
태수가 두루뭉술하게 대답을 넘겼다.
그때 황경석이 슬쩍 끼어들어 물었다.
“말씀 중에 정말 죄송합니다만, 정 선생…… 님이 선생님의 선배님이시라고요?”
“민규한테도 선배지.”
“송민규 선생님이요? 그럼 동성의료원에서 레지던트를 하셨다는 건데.”
황경석의 말에 태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중간에 사정이 있으셔서 좀 일이 꼬였지만, 엄연히 내 선배님이셔.”
“그렇…… 군요.”
“한마디 더 한다면 내가 진짜 존경하는 선배님이야. 이분 덕에 환자에게 마음으로 다가가는 법을 배웠거든.”
“아…….”
황경석의 얼굴이 뭐라고 정의할 수 없이 복잡하게 변했다.
그건 황경석뿐 아니라 다른 레지던트들도 마찬가지였다.
정관영은 여전히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들에 난감할 뿐이었다.
태수는 그런 정관영에게 말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아, 진짜.”
“한 번 선배는 영원한 선배님이시죠. 황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나?”
태수가 묻자 황경석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래도 레지던트는 연차상 황 선생과 4년 차들이 선배겠지. 그건 알아서 할 거라고 믿고.”
“그, 그게…….”
“뭘 그렇게 긴장해. 똑같이 대해야지, 절대 편애하거나 그러지 마. 그럼 선배님이 얼마나 부담스러우시겠냐고.”
태수는 수더분하게 말했지만 그 뜻은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
레지던트들 중에 그걸 모르는 의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정관영은 태수에게 말도 못하고 난감할 뿐이었다.
그 뒤로 다른 레지던트들과 인사를 나눴다.
일일이 악수를 하며 이름과 연차를 듣던 중이었다.
단 한명이 도대체 시선 둘 곳을 못 찾아 방황했다. 조금전까지 정관영에게 말 화살을 쏘던 당사자.
최송준 레지던트였다.
‘봤나?’
태수가 절대 못 봤다고 믿고싶었다.
안절부절 못하던 최송준이 입술을 질끈 물고 당차게 소리쳤다.
“4년 차 최송준입니다. 선생님 같은, 남의 아픔을 진심을 담고 마음으로 이해하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는 태수가 ICU에서 지켜봤단 걸 모르는지 기세 좋게 포부를 얘기했다.
태수는 그런 그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남의 아픔을 마음으로 이해하는 의사가 되고 싶나?”
“네, 꼭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런 포부라면 내가 도움을 줘야지. 앞으로 잘해 보자고.”
태수가 유독 길게 대화하자 최송준은 자신과 뭔가 통했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 자세 좋아.”
태수는 거기까지만 하고 몸을 돌렸다.
‘그렇지. 남의 아픔이 내 아픔이 돼 봐야 제대로 알지.’
속으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잘 보이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최송준은 이미 태수에게 찍힌 상태였다.
아무리 의사라해도 나이는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이 태수의 소신이었다.
태수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다른 레지던트들과도 인사했다.
수더분하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 특이한 반응을 보이는 레지던트가 있었다.
입이 크고 광대뼈가 발달해 개구쟁이 같은 인상이었다.
그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1년 차 이성혁입니다. 외람되지만 질문 하나 드려도 됩니까?”
“질문이라. 얼마든지.”
태수가 받아 주려 하자 황경석이 얼른 다가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 다른 레지던트들도 남았는데.”
“궁금한 게 있다잖아.”
“그래도 시간상 저희도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안 될 거 같고.”
황경석이 태수에게 이러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약간의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다.
황경석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신기한 태수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정 그러면 다들 가 봐. 난 이 선생이 궁금한 걸 좀 들어 보고 싶으니까.”
“아니, 그게……. 이 선생.”
황경석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눈치를 줬지만 이성혁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다른 레지던트들도 난리였다.
‘안 돼. 노. 절대 안 돼요.’
‘강하게 좀 말려요.’
‘사단 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태수 앞이라서 말은 하지 못하고 뜯어 말려야 한다는 표정만이 가득했다.
그때 태수가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나지막이 말했다.
“치프가 되면 가끔 내가 왕이 된 거 같고 그래. 그렇지?”
“아닙니다!”
“그리고 연차가 낮다고 질문하지 말라는 법이 있었나?”
“없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한 태수의 말투에 식겁한 황경석이 얼른 뒤로 물러났다.
다른 레지던트들도 이젠 모르겠단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태수가 이성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방해꾼은 사라졌으니까 이제 질문을 들어 볼까?”
“어떤 병이라도 말씀드리면 바로 아신다는데, 맞습니까?”
“너무 특이한 병만 아니라면.”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성혁이 질문을 끝내자 오히려 태수가 맥 빠진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거 하나 물으려고 다들 이 난리를 치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질문할까? 왜 그걸 물었지?”
태수의 물음에 이성혁은 눈빛 한 번 흐트러뜨리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제 목표가 선생님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표?”
“제 의사로서 목표 말입니다. 안 그래도 요즘 해외 봉사 프로그램을 알아보고 있는데, 혹시 조언해 주실 부분이 있으면 부탁드려도 됩니까?”
이성혁의 당돌한 물음에 태수는 황당한 얼굴로 바라봤다.
“뭐야, 이 신선한 캐릭터는.”
“선생님께서 이맘때쯤 의료 봉사로 카슈미르에 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거야 그랬지.”
“제가 지금 1년 차고 때가 됐으니까 떠날 준비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성혁의 말에 태수의 시선이 황경석에게로 향했다.
“황 선생, 약간 설명이 필요한 상황 같지 않아?”
“흠흠! 그러니까 이 선생이 선생님의 전철을 모두 밟고 싶어 합니다.”
“뭐?”
“선생님 기사를 모두 스크랩해 놓고, 시간대별로 정리해 놓기도 했고요. 그런데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황경석은 어떻게든 태수가 기분 나쁘지 않게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태수는 그가 걱정할 만큼 불쾌하지 않았다.
다시 시선을 이성혁에게 돌린 태수가 잠시 옛일을 회상한 후 물었다.
“그런데 전문의한테 개기는 건 했어?”
“네? 아니요.”
“따라 한다며. 그럼 그게 빠졌잖아. 일단 전문의부터 한 명 보내 버리고 나서 얘기해.”
“알겠습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이성혁이 정말 가려고 하자 태수는 어이가 없었다.
“이 선생, 진짜 가나?”
“네.”
“잠깐 기다려 봐. 잠깐이면 돼.”
그렇게 만류한 태수가 황경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경석아, 내가 진만이 이후로 저런 캐릭터는 처음이라 적응이 안 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
“저희도 참 답이 없습니다.”
“저렇게 하면 문제 안 돼?”
“하석준 팀장님께서 웃으시던데요. 최 선생님 생각 많이 난다고 하시면서요. 과장님은 그러냐면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황경석이 난감한 미소를 짓자 태수는 머리를 한 번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리고 정관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선배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전 2년 차 때도 선생님과, 3년 차인 지금도 선생님과 생활하는 기분입니다.”
“골치 아프시겠네요.”
“말도 못하죠.”
정관영이 바로 응수하자 태수는 진짜 할 말이 없었다.
이내 태수가 이성혁에게 손짓했다.
“이 선생, 이쪽으로.”
“가서 전문의 선생님하고 싸우고 오라고 하셨는데요.”
“나도 전문의야. 생각해 보니까 그때 그 전문의랑 지금 나랑 연차도 딱 엇비슷하네.”
태수의 말에 이성혁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찾으셨습니까.”
“진짜 외국에 나가고 싶은 이유가 나 때문이야?”
“네.”
“총알, 포탄 날아다니는 곳에 갈 수 있다고? 환자들이 끊임없이 몰려오는 그곳에?”
태수가 진심으로 묻자 이성혁도 진심으로 대답했다.
“선생님이 할 수 있으면 저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나야?”
“‘의사란 이런 거다.’라고 지금까지 몸소 보여 주셨으니까요. 저도 그 뒤를 따라서 선생님이 말씀하신 참의사의 명맥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이성혁의 대답을 들은 태수는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란 판단이 섰다.
정말 진심이었다.
단순히 따라 하겠다는 게 아니라 태수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짚으며 답습하겠단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