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189
01192 1192화
엄수찬 아내는 슬쩍 병상에 누운 환자를 힐끔거렸다.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이다.
엄수찬도 그 눈빛을 봤지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이 눈치를 보자 태수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쁜 일 아닙니다. 몇 가지 따로 전달해 드릴 사항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
“가시죠.”
조금 더 강해진 태수의 목소리에 엄수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와요.”
“……알았어요.”
못내 엄수찬 아내가 나섰지만 태수는 정중하게 그녀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태수가 먼저 걸어가자 엄수찬 아내가 쭈뼛거리며 뒤를 따랐다.
신속대응센터 현관 앞에 도착한 두 사람 중 엄수찬 아내가 먼저 말했다.
“하고 싶으신 말씀이 뭔가요?”
“그쪽에서 당연히 잘해 주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엄수찬 아내가 조심스레 묻자 태수가 나지막이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 제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꼭 기억하세요. 먼저 호흡이 매우 거칠어지고, 헛소리라고 하죠. 이상한 소리를 하면 바로 주변에 있는 의사를 부르세요.”
“그, 그래야죠.”
“만약 그게 아니라도 입술과 피부가 파랗게 멍든 것처럼 변하거나 가슴을 쥐어짜며 고통스러워해도 꼭 의사를 찾아야 합니다.”
“왜요?”
엄수찬 아내의 눈빛에 걱정과 그럴 리가 없단 반발심이 동시에 느껴졌다.
태수는 그런 그녀에게 확실하게 말했다.
“바로 수술실에 들어가야 합니다. 절대 지체하면 안 됩니다.”
“그, 그, 그, 그래도 그쪽에서 잘해 주지 않을까요?”
“물론 잘해 줄 겁니다. 건성종합병원도 실력 좋은 병원이니까요. 하지만 보호자분께서 알고 계셔야 바로바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
그녀는 태수를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엄수찬 아내의 표정이 뭔지 모르게 복잡했다.
그녀가 혹시 오해를 할지도 모른단 생각에 태수가 차분히 말했다.
“혹시 제가 너무 주제넘었다면…….”
“고마워요.”
너무 작은 목소리라 태수는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네?”
“감사해요. 진심이에요. 그리고 계속 짜증내고 화낸 건 죄송해요.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랬어요.”
“…….”
“처음에는 계속 검사하자고 해서, 우리가 좀 사는 거 같으니까 돈 벌려고 하는 줄 알았어요. 그게 제일 화가 났었고요.”
그녀의 얘기에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셨어도 솔직히 할 말 없는 상황이긴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약을 더해야 한다, 갑자기 수술해야 한다, 그것도 급성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덜컥 겁도 났고요.”
“그것도 이해합니다.”
“저희가 건성종합병원으로 가려는 건…….”
엄수찬 아내가 뒷말을 잇기 전에 태수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말씀은 그냥 마음속에 담아 주십시오.”
“죄송해요.”
“아닙니다. 이렇게 먼저 고맙다고 얘기해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어디서 수술을 받으시든 그건 상관없습니다. 좋아지신다면요.”
“고마워요.”
“그렇게 인사받을 만큼 한 건 없습니다. 그리고 수술실에 들어가게 되면 전화 한 통은 해 주세요. 그래야 저도 안심이 될 거 같으니까요.”
태수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그게 전달되었는지 엄수찬 아내의 눈빛이 한 번 더 거칠게 흔들렸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구급차가 후진으로 현관 앞에 도착했다.
연락이 되었는지 때마침 성재경과 김혁권을 포함한 의료진들이 엄수찬이 누운 스트레쳐카를 끌고 나왔다.
그가 구급차에 오르기 직전 태수가 다가갔다.
“잠시만요. 한 번만 더 보겠습니다.”
태수가 청진기를 다시 귀에 꽂고 마지막 확인을 하는 사이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엄수찬이 나지막이 말했다.
“미안합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여기는 신경 쓰지 마시고 수술 잘 받고 쾌차하시면 됩니다.”
“…….”
엄수찬이 아무 말 못하고 바라보는 사이 태수는 계속 확인을 이어 갔다.
이내 확인을 마친 태수가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마침 화이트엔젤팀 소속 레지던트인 부경진이 눈에 들어왔다. 흉부외과 소속이었고, 최근에 추가된 레지던트였다.
태수는 부경진에게 말했다.
“부 선생, 같이 다녀와.”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가도록 하고, 혹시 중간에 상황 안 좋아지면 바로 전화해.”
“네! 다녀오겠습니다.”
부경진이 씩씩하게 대답하고 엄수찬과 함께 구급차에 올랐다. 그를 따라 파트너를 이룬 간호사도 함께했다.
이어서 엄수찬 아내가 같이 구급차에 타려다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김수진 간호사에게 말했다.
“아까 미안했어요.”
“인사는 나중에요. 얼른 가 보세요.”
김수진 간호사는 인사 한마디에 불쾌함이 녹았는지 미소를 지었다.
엄수찬 아내는 한 번 더 모두에게 고개를 숙이고 구급차에 올랐다.
곧 구급차가 떠나갔다.
태수가 그 모습을 바라보던 중 성재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쾌차하라는 말이 나와?”
“…….”
“젠장. 이거 자존심 상해서, 원.”
성재경의 목소리가 곱지 않았지만 태수에게 짜증을 내는 건 아니었다. 태수도 알고 있었기에 덤덤하게 대꾸했다.
“화가 나신다면 우리에게 내야 하는 겁니다.”
“왜,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그분들이 왜 먼 건성종합병원까지 간다고 했을까요?”
“우리 실력이 떨어진다는 거 아니야. 막말로 우리가 그쪽보다 못한 게 뭐가 있는데?”
“그게 전부일까요?”
태수의 물음에 성재경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럼 그게 다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 줘도 모르나. 우리가 그쪽보다 인지도가 없다는 거 아닙니까.”
갑갑했는지 김혁권이 한마디 하자 성재경이 뚱한 표정으로 변했다.
“의사에게 왔으면 실력을 봐야지.”
“인지도가 곧 실력이라고 생각하니까 그게 문제라고. 안 그래요?”
“…….”
“나도 기분 더러운데, 따져 봐야 내 얼굴에 침 뱉는 꼴입니다.”
김혁권이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위기가 축 가라앉자 태수가 모두에게 말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당장 급한 환자는 없는 거 같으니까 의국으로 가시죠. 제가 커피 한잔 타겠습니다. 어서요.”
태수가 모두를 다독이며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 기운 빠진 얼굴로 화이트엔젤팀 의국에 도착했다.
태수가 분위기도 바꿀 겸 일부러 밝게 말했다.
“제가 죽이는 커피 한잔 해드릴까요?”
“선생님, 저희가 할게요.”
김수진 간호사와 소연정 간호사가 눈치 빠르게 앞으로 나서며 말하자 태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야밤에 아주 향 좋고 맛 좋은 커피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저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팀장님인데.”
“왜 이러십니까? 커피는 바리스타에게란 말도 모르세요? 가서 앉아 계세요.”
태수가 유쾌한 목소리로 밀어내자 간호사들은 어쩔 수 없단 얼굴로 소파로 향했다.
이미 자리하고 있던 김혁권이 빈자리를 툭툭 두드리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캡틴 성격 알면서 굳이 가는 건 뭐야. 앉아. 소 간호사도 앉으라고.”
“그런데 팀장님이 커피 탈 줄 아세요?”
“먹어 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마.”
김혁권이 큰소리 탕탕 쳤다.
그사이 태수는 물을 올리고 커피를 내릴 준비까지 마무리 짓고서 커피포트를 바라보다가 이마를 쳤다.
“아차.”
아이들을 깜빡한 그는 얼른 휴대폰을 들었다.
곧 주영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삼촌.”
“그래, 잘 쉬고 있어?”
“집이 아주 난리예요. 이 정도면 완전히 개판이라고 해도 될 거 같아요.”
주영수의 말에 태수가 멈칫하고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누나들이요. 오이 갈아서 얼굴에 붙이고, 그걸 또 먹고 있고. 모델 하려면 피부가 좋아야 한다나 뭐라나. 그런데 왜 먹나 몰라요.”
“난 또 뭐라고. 영수, 너도 해봐.”
“전 오이는 오로지 먹는 거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모한테는 아까 미성이 누나가 전화드렸어요.”
주영수가 넉살 좋게 말하자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잘했어. 그보다 오이팩이 싫으면 밖에서 다른 팩 사다가 얼굴에 좀 붙여.”
“삼촌도 같이 하실래요?”
“물귀신도 아니고. 그리고 난 모델 아니야.”
“이상하다. 할아버지가 사진 찍을 때 삼촌도 같이 찍는다고 했잖아요.”
그 말에 태수가 멈칫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그러나 석정현 이사장 성격을 본다면 가능성이 농후한 일이다.
태수는 얼른 방어막부터 쳤다.
“그때 수술이 있을 거야.”
“에이, 삼촌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그보다 오늘도 늦게 들어오세요?”
“이미 늦긴 했는데, 좀 더 늦을 거 같아. 기다리지 말고 놀다가 자.”
“알았어요. 그럼 내일 봬요. 삼촌, 파이팅!”
주영수의 씩씩한 목소리가 통화의 마지막이었다.
확실히 집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고, 또 자신을 응원해 주는 소리가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잠시 후.
태수가 직접 내린 커피가 모두의 손에 쥐어졌다.
한 모금 가볍게 마신 성재경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거 적당히 진하고 향이 좋은데?”
“이 시간에 딱 좋은 커피 아닙니까?”
“그러게 말이야. 우리 팀장, 이런 재주도 있었어?”
“제가 못하는 게 좀 없습니다.”
“하여간 칭찬을 못한다니까.”
투덜거리는 목소리와 달리 성재경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향긋한 커피 한 잔이 불쾌한 마음을 많이 씻어 준 모양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커피를 마시던 태수가 김수진 간호사를 바라봤다.
한 눈치 하던 그녀가 먼저 물었다.
“왜요?”
“파트너가 없으시다는 얘기를 들은 거 같아서요.”
“있는데 없는 거고, 없는데 있는 거고. 좌우간 상황이 그래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태수가 의아하게 묻자 김수진 간호사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제 파트너가 딴 간호사랑 바람피우고 있거든요.”
“그 파트너가 누군데요.”
“박성민 선생님이요.”
“선배님이요? 그럼…….”
태수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때 김혁권이 나지막이 한마디 했다.
“송현미 간호사가 보조로 들어갔어요. 환자 병세가 심상치 않아서 자진해서 들어갔다고 하던데요.”
“송 간호사는 파트너 없습니까?”
“군복무 중이잖아.”
“누구…… 민수요?”
태수가 묻자 김혁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송현미 간호사와 호흡이 착착 맞을 사람은 그 인간밖에 없잖습니까?”
“하하.”
“그래서 브레드나 닥터 박 수술 보조로 들어간다고 하더라고. 닥터 정이 올 때까지 말입니다.”
김혁권의 얘기를 들으니 상황이 머릿속에 정리됐다. 다만 송현미 간호사가 그렇게 정민수를 생각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고개를 끄덕이던 태수가 김수진 간호사에게 물었다.
“섭섭하진 않으십니까?”
“전 오히려 팀장님한테 혼날 줄 알았는데요.”
“제가 왜 뭐라고 합니까? 서로 잘 대화가 된 건데요.”
“뒤끝 상당하신 분이잖아요. 호호.”
김수진 간호사의 말에 태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얘기는 아마 송 간호사님이나 김 간호사님에게 들으신 거 같고.”
“아닌데요. 이 간호사님이 말씀하셨는데요.”
“아니, 강원도에 있는 분이 왜 서울까지 소문을 내신답니까? 그리고 뒤끝으로 따지면 김 간호사님도 만만치 않아요.”
태수의 말에 김수진 간호사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제가 뭘 어쨌다고요?”
“아니요. 이건 실언이었습니다.”
“이미 들었는데요.”
김수진 간호사가 흘겨보며 태수를 압박할 때였다.
벌컥!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박성민이 급하게 들어오며 태수를 나무랐다.
“니가 팀장이면 팀장이지, 왜 내 파트너 욕하고 그래? 물론 성격 사납고, 잔소리 심하고, 토라지기도 잘하시지만, 네가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저기, 박 선생님, 누가 뭐가 어쨌다고요?”
“네?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건 말입니다, 제가 지금 태수를 혼내는 상황입니다. 피아 식별 잘해 주십시오.”
“그러는 선생님은 왜 은근히 저를 디스하시는데요?”
김수진 간호사의 화살이 박성민에게로 향했다.
“그게 그러니까…….”
당황한 박성민이 우물쭈물할 때였다.
“큭큭.”
“하하.”
다들 웃음을 터트리고, 태수 또한 내심 안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