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41
00142 142화
“나도 마음은 그런데, 이놈의 직업병이 평생을 괴롭히는군.”
“저도 옆에서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건 나중에 또 이야기하기로 하고, 강요는 아니야. 충분히 생각한 후에 결정을 내리면 그때 이야기해주게. 그럼 먼저 일어나지.”
툭툭.
닥터 제임스는 가볍게 태수의 어깨를 다독인 후 멀어졌다.
혼자가 된 태수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고민이 깊어진 태수의 시야에 닥터 제임스가 놓고 간 위스키 병이 보였다.
두어 모금이나 남았을까?
태수는 위스키 병을 들고 가볍게 좌우로 흔들었다.
출렁출렁.
병속에 흔들리는 위스키를 바라보며 태수의 눈빛 또한 좌우로 움직였다.
시선은 병에.
하지만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다.
가장 우선시 되는 건 현실이다.
이잠바크와 PKO베이스캠프에 이어 네팔까지.
벌써 반년이 넘는 외국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이제 레지던트 2년 차.
1년 차와 달라지는 건 별로 없다.
게다가 김정태 전문의와의 사건이 확실히 잊혔을까?
확신하진 못했다.
그리고 또 하나.
지금 자신의 실력은 어떨까.
또 환자를 대하는 마음은 성숙했을까.
태수는 그런 점들에 대한 고민을 계속 이어왔다.
닥터 제임스의 절묘한 수술 솜씨와 환자를 대하는 태도에 아직도 감탄할 때가 많다.
일전에 닥터 제임스가 말했다.
환자는 절대 실험 상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태수도 그 말에는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만이 치료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될까.
결국 미숙한 실력이나마 스스로 헤쳐나아가야 했다.
솔직히 이렇게 외국에서 언제까지 머물지는 태수도 기약이 없었다.
확실한 건 지금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히말라야로 떠나는 건 어떨까.
거기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무엇도 예측되지 않았다.
혼자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란 뜻이다. 이잠바크 때와 비슷하다고 해도 김혁권 같은 조력자도 없었다.
위기는 기회.
하지만 스스로를 위기로 내몰고 있는 느낌이 그렇게 좋진 않았다.
끊임없이 생각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태수는 자신이 처음 카슈미르행을 택한 이유를 떠올렸다.
머릿속에 있는 의술을 손으로 익히기 위해.
그로 인해 발전할 자신과 풍요로워질 가족들을 위해.
그 생각은 한 번도 변함이 없다.
거기에 또 하나.
환자.
그 누구라도 생명은 평등했다.
그리고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찾아가는 것이 옳았다.
돈은?
어차피 한국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해도 돈은 못 번다.
지금의 숙련이 미래에 얼마나 커다란 부로 돌아올지는 생각만 해도 벅찼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생각이 태수의 머릿속을 더욱 헝클였다.
하지만.
태수는 곧 결정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태수는 들고 있던 위스키를 바로 입으로 가져 갔다.
벌컥벌컥.
술을 한 번에 털어 넣은 뒤 빈 병을 내려다봤다.
“인생 뭐 있어?”
어느새 태수의 얼굴에는 쓴 미소가 걸려 있었다.
***
이튿날 아침.
닥터 조나단이 닥터 제임스의 텐트에 부리나케 들어왔다.
“제임스 박사님!”
“왜 이리 호들갑인가?”
“사, 사라졌습니다.”
닥터 조나단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닥터 제임스는 차분하게 타일렀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모르지. 천천히 이야기해 봐.”
“닥터 최말입니다! 커다란 가방 하나와 의약품들도 같이 가져간 거 같은데요. 다 물어봤는데 모두 모르겠답니다.”
“음, 그래?”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닥터 조나단이 여전히 안달복달했지만 닥터 제임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가 봐.”
“그래도.”
“나가보라니까.”
닥터 제임스의 축객령에 닥터 조나단은 황당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마치 수제자처럼 곁에 두고 있던 의사가 사라졌다는데 너무 태연한 모습 탓이다.
그래도 닥터 조나단은 감히 따지고 들지 못한 채 머뭇거리며 텐트를 나갔다.
이내 혼자가 된 닥터 제임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텐트 한쪽으로 향했다.
스윽.
텐트 한 곳을 걷자 창문같이 밖을 볼 수 있었다.
그 사이로 멀리 만년설이 뒤덮인 에베레스트를 응시했다.
그리고 닥터 제임스는 응급환자가 왔다는 소식을 들을 때까지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한편 태수는 긴팔을 입은 채 등산 중이었다.
포카라는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Annapurna BaseCamp)까지 트레킹 코스의 출발점으로 유명했다.
그만큼 여행자들을 위한 관광 상품이 많이 발달되어 있었다.
침낭이나 두툼한 등산복들도 쉽게 구매할 수 있다.
태수도 아침 일찍 의약품을 가방에 가득 담고, 또 등산용품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만 챙겨서 움직이는 중이다.
포카라는 대략적으로 해발 900미터에 위치한 마을이다.
반면 ABC는 대략 해발 4,130미터에 만들어진 베이스캠프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마을 또한 부지기수다.
이동하는 태수의 손에는 지도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등산용품점에서 서비스로 받은 등산용 지도였다.
그 지도의 장점은 ABC까지 향하는 길이 표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사이에 위치하는 마을들도 표시되어 있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그 주변에 있는 마을까지도 표시되어 있다.
태수는 단지 그 지도에 의지해 길을 떠나는 중이다.
오전 내내 화창한 날씨 속에 태수는 쉬지 않고 산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물론 지진의 여파로 군데군데 갈라진 일이라든지, 커다란 바위가 길을 막아 깎아지는 비탈길을 걸어가야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태수의 발길을 붙들 수 없었다.
산행을 시작한 지 벌써 여섯 시간째.
태수의 얼굴이 벌겋게 익었고 머릿속부터 양말 속까지 땀으로 가득했다.
“헉헉!”
지치다 못해 단내까지 풀풀 풍길 정도로 지쳐갔다.
장시간 수술을 연이어 펼칠 때도 견뎠던 몸이다. 그래서 체력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했지만 정말 이건 아니었다.
조금 더 걸어가자 마른 땅이 사라지고 나무가 군데군데 자란 지역에 들어섰다.
커다란 그림자가 만들어진 나무 아래 도착한 순간이다.
털썩.
결국 태수는 쓰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단 탈수 증세부터 해결하고자 물병부터 들었다.
덜덜덜.
팔이 너무 떨려 물병도 힘껏 쥘 수 없었다.
“이 새끼가.”
자기 팔에 신경질을 낸 태수가 간신히 물을 들이켰다.
단 한 모금.
그것도 바로 넘기지 않고 한참 머금고 천천히 삼켰다.
목이 마르고 땀이 많이 났다고 바로 많이 물을 들이켜면 오히려 좋지 않다. 최대한 느긋하게 물을 넘기는 게 훨씬 좋았다.
그 뒤로 고열량의 간식까지 먹은 후에야 태수가 옆에 내려놓은 지도를 다시 들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대략적으로 해발 1,200미터 가까이 되는 거 같았다.
포카라에 비해 기온이 조금 내려간 것만으로도 많이 올라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와 가.”
아직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을이었지만 태수는 그렇게 위안하며 다시 움직였다.
하루가 지났다.
반팔을 입고 있던 태수는 어느새 두툼한 옷을 걸친 상태였다.
그만큼 많이 올라왔다는 뜻이다.
지도상으로 보면 대략 해발 1,500미터 부근을 통과하고 있었다.
태수는 식사와 잠도 최소한으로 줄이며 이동을 거듭했다. 지도상으로 보면 이제 조금 있으면 경사길이 나온다.
해발 1,800미터까지 급속도로 올라가는 급경사길이다. 거기서 좀 더 올라가야 첫 번째 마을이다.
“다 왔어.”
스스로 같은 말만 반복했다.
계속 올라만 가야 한다면 이미 지쳤을 일이다.
여진이 발생한 지 대략 4일이 지났다.
마을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예측하기 힘들었다.
그런 생각이 마음을 바쁘게 했다.
하지만 태수도 사람이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쳤다. 잠깐 쉬며 땀에 전 양말이라도 좀 바꿔 신어야 할 거 같았다.
털썩.
바로 배낭을 내려놓은 태수는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크으윽.”
뻐근한 허리가 펴지자 눈살이 절로 일그러졌다.
그러던 태수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우중충했다.
“일어났을 때는 맑았는데.”
어느새 구름들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게다가 그 구름의 색들도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제야 태수는 산의 날씨는 한 시간 앞도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넘어진 김에 쉬어가랬다고, 아예 식사까지 챙겨 먹고 힘을 내 단번에 오를 결심을 굳혔다.
퍽퍽하지만 열량이 높은 야전식량으로 또 한 끼를 때운 태수가 소화를 시키던 중이다.
후두둑!
하늘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쑥 손을 내밀자 태수의 손 위에도 그 무언가가 떨어져내렸다.
“진눈깨비?”
태수는 황당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낀 날씨에 조금 시원해졌다 싶었지만 진눈깨비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터였다.
아무렴 어떤가.
기온이 더 내려가면 산행에는 좋기에 태수도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라나 보다.”
피식 미소를 지으며 커다란 배낭을 멨다.
묵직한 느낌이 아니라 정말 무거웠다.
각종 의약품과 식량까지 들어 있으니 무게가 엄청났다.
어느새 태수의 발바닥에 잡힌 물집이 터지면서 쓰라린 고통이 밀려왔다.
그래도 태수는 꿋꿋하게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10분이나 지났을까?
진눈깨비의 영향인지 주변 공기가 많이 내려갔다.
“시원하다!”
전보다 땀도 많이 나지 않기에 태수 얼굴에 미소가 점점 진해졌다.
그러나 그 미소도 얼마 가지 못했다.
경사는 가팔라지는 데다 떨어져 내리는 진눈깨비의 양이 점점 늘기 시작했다.
어느새 발목까지 차오른 적설량에 태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만 내려도 될 거 같은데.’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그건 하늘이 할 일이다.
조금 내리고 말 줄 알았던 진눈깨비가 점점 더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거의 소나기와 같은 수준이다.
불과 한 시간도 지나기 전, 태수의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더더욱 쏟아져 내렸다.
옅은 안개가 점점 짙어지는지 이제는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가시거리가 20미터나 될까?
진눈깨비도 서서히 함박눈으로 변해가기 시작하자 산행이 극히 어려워졌다.
잘못 길을 들었다가는 고립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게다가 통신장비가 전혀 없기에 어디에 도움을 구할 곳도 없다.
낯선 산길에 오갈 데 없이 갇힌 상황.
너무도 적막한 주변에 태수도 불쑥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
-아무…….
영어로 크게 소리쳐봤지만 돌아오는 건 메아리뿐이다.
한 번 더 목청이 터져라 소리쳐 봤다.
결과는 전혀 달라진 게 없다.
함박눈은 더욱 쏟아져 내려 슬슬 허리까지 차오르려 했다.
태수도 점점 불안해졌다.
눈을 피할 곳도 없어 그대로 모두 얻어맞고 있었다.
여러 번 소리친 태수의 목소리도 조금씩 힘이 빠져갈 때였다.
덜덜.
태수는 순간 몸이 떨려오는 걸 느꼈다.
저체온증.
눈 속에 너무 오래 묻혀 있어 체온이 많이 빼앗긴 모양이다.
태수는 얼른 배낭에서 다른 옷을 꺼내 입으려고 했지만 멈칫했다.
이곳은 이미 눈밭이다.
옷을 갈아입더라도 다시 젖는 건 시간문제다.
그렇다면 눈이 최대한 없는 곳으로 이동하는 게 옳았다.
사박. 사박.
태수는 허리까지 오는 눈을 밀어내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게 쉽진 않았다.
눈 속에 묻힌 다리가 너무도 무거웠다. 그렇다고 이대로 여기에서 눈이 멈추길 기다릴 수도 없다.
가만히 고립되어 있으면 체온이 더욱 빨리 내려간다.
움직이며 계속 몸을 데워야 했다.
어디로 가는지보다는 스스로 살아야겠다는 생존본능이 우선이다.
그렇게 걸어가던 중이었다.
멀쩡하던 길이 갑자기 푹 꺼졌다.
“억!”
단발마를 지른 태수가 그대로 넘어졌다.
다행이라면 산 밑으로 굴러떨어지거나 돌부리에 상처를 입진 않았다.
지진의 여파로 땅이 갈라진 틈에 다리가 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