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623
01626 1626화
늦은 밤.
태수는 엄수찬 차관과 조용한 포장마차에 자리했다.
“자, 받아.”
엄수찬 차관이 먼저 소주병을 들자 태수가 양손으로 공손히 잔을 들며 말했다.
“차관님이랑 포장마차에서 소주라. 이건 예상 밖입니다.”
“무슨 섭섭한 말을. 세종에서도 국장들과 수시로 들른다고.”
“그러십니까.”
태수가 술병을 받아 따르자 엄수찬 차관이 술을 받으며 말했다.
“이 분위기가 얼마나 좋으냔 말이야. 좋은 상대와 가슴을 탁 터놓고 마실 수 있는 분위기.”
“정말 좋죠. 저도 좋아합니다.”
“역시 최 팀장과는 통하는 부분이 있어.”
“하하.”
“일단 한 잔 마시자고.”
쨍.
엄수찬 차관이 술잔을 부딪치자 태수는 슬쩍 고개를 돌려 한 잔 마셨다. 그리고 다시 술잔을 채우는 사이 엄수찬 차관이 말했다.
“한 달 동안 쉬지 않고 비상 대기 하느라 수고했어.”
“많이 쉬었습니다.”
“그 말을 누가 믿을까? 출동하면 끝인가? 출동 후에 환자들을 수시로 찾아가 보고, 또 각종 보고서도 작성해야 하고 말이야.”
“…….”
태수가 가만히 듣고 있자 엄수찬 차관이 이어서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그 아이들은 어떤가?”
“이현지는 퇴원했고, 한송이는 이번 주 내로 인공호흡기 뗀다고 합니다.”
“무사히 회복하는 중이라니 다행이야. 확실히 119응급의료대가 필요한 이유를 몸소 보여 줬고.”
“기회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수의 인사에 머쓱해진 엄수찬 차관이 하던 말을 이어 갔다.
“좌우간 그렇게 수술한 환자들을 살피는 일도 시간이 부족할 텐데, 이번 협죽도와 독초에 대한 자료도 직접 다 만들어 주고 말이야.”
“필요한 일이었으니까요.”
“그거 때문에 상황실에서 며칠 밤을 새웠단 소리도 들리던데.”
“그건…….”
말끝을 흐리는 태수를 보며 엄수찬 차관이 미소 지었다.
“나야 정통한 소식통이 있으니까. 최 팀장의 24시간을 그대로 보고받을 수 있는 핫라인이지.”
“선배님도 참.”
“지금 내 사위에게 뭐라고 하는 건가?”
엄수찬 차관이 장난스럽게 윽박지르자 태수가 얼른 손을 저었다.
“그럴 리가요.”
“하하. 이렇게 웃으면서 한 잔 더 하자고.”
“감사합니다.”
그렇게 또 한 잔을 마신 후였다.
이번에는 태수가 먼저 입을 열어 물었다.
“결혼 얘기가 오간다고 들었는데요.”
“얘기야 예전부터 오갔지. 두 사람이 각자 바쁘니 지금까지 미뤄진 거고.”
“그럼 조만간……?”
“추운 겨울은 지나야 하지 않겠나.”
“따뜻한 봄이 좋겠죠.”
태수의 대답을 들은 엄수찬 차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최 팀장에게는 언제 봄이 찾아오려나?”
“네?”
“김은영 선생 말이야, 잠깐 말을 나눠 봤는데 상당히 괜찮은 여자로 보이던데.”
엄수찬 차관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은 태수는 손사래를 쳤다.
“전 여자의 탈을 쓴 남자보다 순수한 여자가 좋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는 사이…… 아니지, 화이트엔젤에서 같이 일했었다지?”
“정말 놀랐습니다. 어떻게 김 선생이 차관님에게 직접 연락을 드렸는지 말입니다.”
태수가 의아했던 점을 묻자 엄수찬 차관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김 선생이 직접 연락한 게 아니라 석 병원장에게 추천을 받은 거야.”
“병원장님이요?”
“그보다 추천 보증인이 더 빵빵했고.”
“설마 황 회장님은 아니시죠?”
태수가 넘겨짚어 묻자 엄수찬 차관이 오히려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어떻게 알았나?”
“황 회장님이 김 선생을 좀 마음에 들어 하셨거든요. 어떻게 그렇게 연결이 됐는진 모르겠지만요.”
“그건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 선생은 여자보다 의사가 더 어울리는 멋진 친구고요.”
먼저 선을 긋는 태수의 모습에 엄수찬 차관이 신기한 시선으로 물었다.
“최 팀장은 눈이 얼마나 높은 건가? 김 선생 같은 미인을 마다하고 말이야.”
“하하.”
“그래. 더 말해 봐야 소용없다면 그만해야지. 그보다 이기준 선생이 온 건 좀 놀라지 않았나?”
엄수찬 차관이 화제를 바꿔 묻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건 좀 놀랐습니다. 전혀 예상 밖이라서요.”
“유일하게 다른 병원 소속이기도 하고.”
“…….”
태수가 침묵하자 엄수찬 차관이 비교적 솔직하게 설명했다.
“여러 가지 이권이 개입된 문제라서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순 없을 거 같아. 단순하게 말하자면 연성이 가진 힘이 크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그 정도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그런 태수의 대답에 엄수찬 차관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관심이 없지?”
“사실 그렇습니다.”
“그래, 그게 좋은 거야. 괜히 머리 아프지 않고 말이야. 그보다 이기준 선생이 잘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보나?”
“이 선생 하기 나름이겠죠.”
“그렇겠지. 자자, 이제 우리 딱딱한 말은 그만하고 천천히 마셔 보자고.”
엄수찬 차관이 잔을 내밀자 태수가 가볍게 부딪치고 입으로 가져갔다.
이 술자리가 그냥 위로해 주는 자리는 아니란 예감도 들었다. 그러나 태수는 그것조차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떤 사정으로 이기준이 왔는지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건 이기준이 앞으로 얼마만큼 119응급의료대에 필요한 존재가 되느냐였다.
다음 날 아침.
출근길에 오른 태수는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걸어가는 발걸음도 구름에 뜬 듯이 가벼웠다.
좀 더 걷던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분이 왜 좋지?”
딱히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119응급의료대가 인정받고 있단 사실이 기분 좋은 건지, 아니면 예상치 못한 추가 인원들이 반가운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기분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아무렴 어떠냐.
그렇게 바지런히 움직인 태수가 곧 상황실에 들어서자 홍진만이 퀭한 얼굴로 다가왔다.
“기체후일향만강하시옵니까, 팀장님? 오늘 하늘도 맑고 해도 쨍쨍하니 밤새 아무런 사건,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홍 선생 얼굴이 왜 이렇게 늙었어?”
“하하. 원래 노안입니다. 평생 동안 소리는 못 듣고 살았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맛이 갔는데.”
태수가 의아하게 바라볼 때였다.
끼익.
상황실 문이 열리며 어제 오프였던 의료진들이 차례로 들어왔다.
그중에 단연 목소리가 높은 건 박성민이었다.
“크으. 이 얼마나 멋진 광경이냔 말이야. 나를 대신해서 이렇게 열정적으로 근무한 우리 멋진 후배님들, 알라뷰 쏘 마치 합니다.”
“오셨습니까?”
“이 배신자야, 너는 어제도 약속 있다고 쏙 사라지더니 아침에도 홀랑 혼자 가 버리더라? 그런데 뭐야, 너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해?”
박성민이 묻자 태수가 얼굴을 쓸며 반문했다.
“왜요, 별로 안 좋습니까?”
“별로 안 좋은 정도가 아닌 정도 같은데.”
“괜찮은데. 아,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가 봅니다.”
“너 혹시 어제 우리 장인어른이랑 어디 좋은 곳에 갔던 건 아니지?”
“어디요?”
태수가 눈을 끔뻑거리며 바라보자 박성민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순진한 눈망울로 물으면 내가 참 곤란하지.”
“그래서 어디를 말씀하시는 건데요?”
“……아침에 토의할 거 많다고 했잖아. 다들 출근했으니까 회의부터 하자. 자자, 회의합시다.”
박성민이 괜히 소리칠뿐이다.
회의 테이블로 걸어가는 사이 정민수가 다가와 말했다.
“그런데 너 진짜 안색이 안 좋아.”
“네 얼굴이나 보세요.”
“나야 원래 귀공자 스타일이라서 얼굴이 하얀 편이고.”
“……선배 같은 놈.”
태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어가자 정민수가 발끈했다.
“야, 너 그게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이냐니까? 빨리 말하라고…….”
“…….”
태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정민수는 계속 옆에서 귀찮을 정도로 말을 붙였다.
이내 회의 테이블에 팀원들 모두가 모였다. 오민석 대원을 포함해 새로 배치받은 헬리콥터 조종사도 포함된 인원이었다.
태수가 한 바퀴 쭉 둘러봤다.
새로 온 인원을 포함하니 널찍한 회의 테이블이 꽉 찼다.
어느새 이렇게 늘어났단 생각에 태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정민수와 이기준이 나란히 앉은 모습이 보였다.
다만 서로 없는 사람 취급하듯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태수는 그런가 보다 하며 옆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멈칫했다. 김은영이 해맑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태수가 말없이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김은영의 밝은 미소가 순식간에 와락 일그러졌다.
그 외에 송민규와 홍진만, 간호사들까지 쭉 둘러본 후에야 태수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다들 모이게 돼서 전 참 기분이 좋습니다.”
“…….”
“아직 서로가 서로를 전부 알진 못하겠지만 기회가 되는 틈틈이 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네.”
다들 한목소리로 대답하자 태수가 이어서 말했다.
“바로 회의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태수가 입을 열자 다들 경청하며 때때로 노트에 작성도 했다.
태수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상황실을 울렸다.
그때 박성민이 옆에 있던 김혁권에게 슬쩍 몸을 기울이며 조용히 물었다.
“태수 기분이 왜 저렇게 좋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침부터 아주 열정적이란 말이지. 안색은 안 좋은데 말이야.”
“썩 나쁜 거 같진 않은데.”
“내가 예민한가? 그런 거라면 다행이고.”
박성민이 어깨를 들썩이며 다시 회의에 집중했다.
그렇게 회의가 이어지던 중이었다. 태수의 안색이 점점 더 하얗게 변해 갈 무렵이기도 했다.
피잉!
순간 머릿속이 아찔한 느낌에 태수가 멈칫했다.
“…….”
뭐지?
태수가 눈을 좌우로 굴렸다.
그런데 세상이 느려지고 어지럽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몸이 허공에 붕 뜬 것 같은 느낌까지.
눈을 가늘게 뜬 태수가 옆을 바라봤다.
어느새 박성민이 바짝 다가와 눈을 크게 뜨고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선배, 뭐라고 하시는…….’
태수가 멈칫했다.
분명히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머릿속만 울리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일어나 있었던 몸은 어느새 의자에 앉은 상태였다.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움직이고 있는데도 한 박자 늦게 알아챘다.
그제야 태수도 뭔가 이상하단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당황하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된다.
그 생각으로 태수는 눈을 감았다.
“후우.”
억지로 숨을 내쉬고 또 내쉬었다.
몇 번 더 길게 숨을 쉬니 혼란스러움이 서서히 가라앉아 갔다.
그리고 주변의 소리도 들려왔다.
“태수야, 인마. 말을 좀 해 봐.”
“이 새끼 dizzy spell(어지럼발작)인 거 같은데.”
“그럼 일단 눕히고 셔츠 단추하고 허리띠부터 풀어요.”
사방에서 중구난방으로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억양으로 구분이 되자 태수가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송 간호사님, 전 괜찮으니까 성희롱하지 마시고요.”
“팀장님. 괜찮아요? 제 목소리 들려요?”
“잠시만요. 잠깐만 다들 조용히 해 주시겠습니까?”
태수가 부탁하자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잠시 동안 그대로 있던 태수는 천천히 눈을 떠 봤다. 시야가 약간 뿌옇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천장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자 태수가 낮게 탄성을 자아냈다.
“흐음.”
“태수야.”
박성민의 목소리에 태수가 고개를 들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다들 바짝 다가와 있었다.
그들을 한 명씩 바라보던 태수가 옅게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그 소리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 새끼.”
“사람 놀래키기는.”
“진짜 괜찮은 거 맞아?”
그래도 안도와 걱정이 동시에 다가왔다.
태수는 미소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괜찮습니다. 회의 계속하시죠.”
“회의 같은 소리 하네.”
“네?”
“너 아직 제정신 아니라고. 그러니까 그냥 좀 더 누워 있어.”
그 소리에 태수가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