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70
00171 171화
이동하는 사이 태수는 솔직히 놀랐다.
전에 없던 ICU(외과 중환자실)이 떡하니 마련되어 있던 탓이다.
정확한 크기는 알 수 없지만 꽤나 규모가 커 보였다.
‘상당한데.’
태수가 내심 감탄할 정도였다.
그렇게 ICU를 지나자 외과 의국이 보였고 그 뒤에 숙직실이 따로 존재했다.
쉴 땐 푹 쉬란 의미였다.
‘진짜 많이 좋아졌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규모에 눈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의국도 생각보다 컸다.
한쪽에는 침대가 마련되어 있고, 가운데는 커다란 회의탁자와 의자들이 마련되어 있다.
보아하니 낮에는 의국, 밤에는 당직실로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설렁설렁 살펴보는 듯해도 태수는 머릿속으로 모든 구조를 담아뒀다.
낯선 환경을 하도 많이 오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습관이다.
도착한 의국에는 모두 10명의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인원에 태수가 놀랄 정도였다. 하석준 과장의 말대로 외과가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건 숫자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송민규가 태연하게 다가오는 태수에게 빈자리를 권했다.
“선배님은 이쪽이십니다.”
송민규는 여러 말 하지 않았다.
필요한 말만 하는 성격으로 판단됐지만 태수는 아직 크게 관심을 두진 않았다.
인사차 마련된 자리였기에 태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회의탁자 상석에 서고 그 옆에 정민수가 섰다.
태수가 먼저 인사했다.
“우선 반갑습니다. 최태수입니다.”
“안녕하십니까!”
10명의 젊은 의사가 외치는 소리로 의국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허나 아직은 형식적인 인사라는 게 대번에 느껴졌다.
태수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오랜만에 병원에 돌아왔더니 너무 변한 게 많아서 얼떨떨합니다.”
“…….”
“모르는 게 많으니까 잘 알려주십시오. 그리고 첫 대면이니까 이 자리에서만큼은 존댓말 쓰겠습니다. 이후에는 편하게 대하지요.”
태수의 말에 레지던트들이 슬쩍슬쩍 서로를 쳐다봤다.
소문이 워낙 양분된터라 잔뜩 긴장한 눈치였다. 그런데 막상 마주하니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그때 태수가 이어서 말했다.
“이쪽은 정민수 선생이고, 오늘부터 2년차로 여러분들과 같이 생활할 겁니다.”
“안녕하십니다. 2년차 정민수입니다.”
“저랑 인턴 동기이긴 하지만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됐습니다. 나이보다 연차가 우선이니까 그에 맞게 대해 주시면 됩니다.”
“2년차인 만큼 열심히 뛰어다니겠습니다.”
정민수가 정중하게 한 번 더 인사했다.
그 모습이 또 한 번 레지던트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특히나 2년차들은 더했다.
치프와 인턴 동기인데, 레지던트 동기는 자신들이라.
뭔가 족보가 꼬여도 심하게 꼬이는 상황이라 선뜻 어떤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운 표정들이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사이 송민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도 차례로 소개하겠습니다. 우선 아까도 인사드렸지만 3년차 송민규입니다.”
“2년차 김지택입니다.”
뒤를 이어 레지던트들의 소개가 이어졌다.
3년차 1명, 2년차 3명. 1년차 2명.
끝으로 인턴 4명.
정민수까지 포함하면 총 11명이다.
갑자기 태수 휘하에 11명의 의사가 불어난 상황이다.
허나 태수는 덤덤한 얼굴로 그들의 소개를 들었다.
그리고 난 후였다.
송민규가 태수를 향해 말했다.
“한 말씀 해 주시죠.”
“어떤 말이요?”
“예를 들면 어떤 식으로 저희를 지도하겠다든지, 아니면 의국을 이끌어가겠다든지. 그런 거 말입니다.”
“아. 그런 거요.”
태수가 그제야 알아듣자 송민규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러나 태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레지던트들을 쭉 둘러봤다.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시던 대로 하십시오.”
“네?”
“이제 막 귀국해서 병원 시스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치프라고 나서는 것도 웃기는 거 같습니다. 차근차근 서로 알아갈 시간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 네.”
모두 얼떨떨한 얼굴로 눈만 끔뻑거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란 말인가.
자신들의 귀가 이상한지 의심하고 싶을 정도였다.
치프.
적어도 인턴 레지던트에겐 저승사자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그런 치프가 한 말이라곤 믿기힘들 정도였다.
허나 다들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눈치만 볼 뿐이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태수의 이야기가 살벌하니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양이다.
모두 침묵하자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더 할 이야기가 있나요?”
“아니요. 없는 거 같습니다.”
“그럼 각자 일 보세요. 전 짐부터 풀겠습니다.”
태수는 할 말을 마치고는 다시 가방을 메고 뒤에 있는 숙직실로 향했다.
“저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정민수는 2년차였기에 선배인 송민규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태수의 뒤를 따랐다.
쿵.
숙직실 문이 닫히자 의국에 남은 레지던트들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김지택이 송민규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물었다.
“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알아서 하라잖아.”
“그러니까 뭘 알아서 해요.”
“낸들 아냐고.”
송민규의 인상이 구겨졌다.
아무리 오랜만에 병원에 왔다고는 하나 수수방관하는 태수의 태도가 그렇게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반면 숙직실에 들어온 정민수는 배꼽을 잡고 억지로 웃음을 삼키기 바빴다.
“큭큭.”
“왜?”
“치프의 첫 마디가 알아서 하세요라니. 안 웃기냐?”
“나 말년이야. 좀 쉬엄쉬엄 가자.”
태수의 말에 정민수가 멈칫하더니 웃음기를 싹 지웠다.
“그냥 쉬겠다고? 응급 뜨면?”
“그때까지 쉬는 거지. 그래도 문 선배나 정 선배가 가르쳤으면 어느 정도는 할 거 아니야. 너도 있고.”
“너 너무 풀어졌다.”
“치프님한테 너라니.”
태수가 눈을 흘기자 정민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 알아 모십죠. 치프님. 네 꼴리는 대로 하소서.”
“난 그동안 너무 달렸으니까 좀 쉬어도 돼.”
“그럼 나는?”
“2년 더 달려야지.”
“젠장. 서러운 2년차는 짐도 풀기 전에 먼저 갑니다. 치프님.”
“수고.”
태수가 손을 흔들자 정민수는 대충 빈 침대에 가방을 던져 놓고 빠르게 숙직실을 나갔다.
2년차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던 탓이다.
그런 반면 태수는 천천히 숙직실을 둘러봤다.
2층 침대 4개.
총 8명의 인원이 한 번에 머물 수 있는 공간이다.
레지던트가 총 여섯 명이었고 태수와 정민수가 왔으니 이젠 빈자리가 없었다.
달랑 세 명만 지냈던 예전의 동성의료원을 생각하니 더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했던가?
문승현과 정관영이 입대했다는 건 하석준 과장을 통해 들었다.
‘뭔가 이상하네.’
석연치 않은 점이 있긴 했다.
어딘지 모르게 하석준 과장이 두 사람에 대해 뒷말을 얼버무린단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꼬치꼬치 물어볼 입장은 아니기에 이내 기억에서 지웠다.
마음을 바꿔 병원을 한 바퀴 둘러본 태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고향집을 찾아온 기분이 든 탓이다.
짐을 푼 태수는 다시 간호사실로 향했다.
다시 마주한 간호사들과 소소한 잡담을 나눈 후 태수는 한 가지부터 확인했다.
돌아왔으면 인사해야 할 또 한 사람이 떠오른 탓이었다.
확인해 보니 마침 자리에 있었다.곧장 간호사실을 벗어나 건물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바지런히 움직인 태수는 곧 응급실에 도착했다.
응급실도 전에 비하면 규모가 대략 세 배는 커진 모양이다.
지금은 외래가 이뤄지는 오후 진료시간이었기에 상대적으로 응급실은 한가했다.
태수가 천천히 둘러보며 걸어갈 때였다.
“어머, 혹시?”
놀라는 목소리에 돌아본 태수는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조현정 간호사님 아니십니까?”
“최 선생님! 진짜 최 선생님 맞아요?”
“돌아왔습니다.”
“어머머. 최태수 선생님 오셨어요!”
놀라고 놀라던 조현정 간호사가 응급실이 떠나가라 외쳤다.
그러자 몇몇 익숙한 얼굴들이 부리나케 다가왔다.
여자 간호사들뿐이 아니라 남자 간호사들, 또 몇몇 의사도 있었다.
혈우병 환자 처치할 때 같이 수혈팩을 짜고, 교통사고 환자가 숨넘어갈 때 같이 애를 태우던 바로 그들이다.
태수는 또 한 번 자신을 격하게 반겨 주는 모습에 마음이 찡하게 울렸다.
꽤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어제 만난 사람처럼 반겨 주니 고맙고, 또 고마웠다.
잠깐 해후를 나누자 조금씩 그리움이 해갈되는지 대화에 여유가 생겨갔다.
태수는 그 틈을 타 물었다.
“박완용 과장님도 회의 가셨나요?”
“아, 조금전에 과장 회의 들어가셨어요.”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좀 더 기다렸다가 올 걸 그랬나 봅니다.”
“어쩌죠? 언제 오실지 모르는데요.”
“나중에 다시 오던가 해야죠. 일단 이야기는 좀 더 하고요.”
태수가 찡긋 미소를 짓자 응급실 의료진들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한 대화들이었다.
그냥 그렇게 놔두면 태수와 응급실 의료진들은 밤새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런데 그 대화의 끝이 생각보다 일찍 다가왔다.
에에엥!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응급실 입구를 가득 울렸다.
아무리 외래 시간이지만 응급환자는 우선적으로 응급실로 들어온다.
그걸 증명하듯이 119구급대원이 쏜살같이 스트레쳐카를 밀고 들어오며 소리쳤다.
“여기요! 응급입니다!”
그 소리에 태수의 주변에서 대화하던 의료진이 바빠졌다.
스트레쳐카에 실린 환자를 쇼크 상태였다.
피부는 빨갛게 발진이 가득했고, 구토를 했는지 입 주변에 잔재가 가득했다.
게다가 호흡까지 곤란한지 숨소리가 거칠었다.
“커억, 커억!”
외적인 부분에서 커다란 문제가 없기에 의료진은 빠르게 구급대원에게 물었다.
“이쪽으로 옮기세요! 무슨 일이죠?”
“급성 알레르기(Allergy) 증상입니다. 땅콩 알레르기가 있는데 땅콩버터크림을 바른 빵을 몇 개나 집어 먹었답니다.”
“이런 미친. 제정신이랍니까? 세상 살기 싫데요?”
전문의가 버럭 소리칠 때였다.
뒤에서 눈물 콧물 다 쏟으며 다가온 또래의 여자가 빠르게 다가왔다.
여자 친구인 모양이다.
그녀는 전문의를 향해 애걸복걸했다.
“제가 모르고 먹였어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알겠으니까 일단 진정하시고, 이 분 좀 다른 곳으로 옮겨 주세요!”
전문의의 외침에 조현정 간호사가 얼른 보호자를 억지로 잡아끌었다.
“처치해야 하는데 여기 있으면 방해돼요.”
“제발요.”
“어서 이쪽으로 오시라니까요.”
조현정 간호사가 계속 잡아끌었지만 막무가내인 여자를 잡아당기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태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서서 지켜봤다.
상황이 안 좋기는 하지만 굳이 나설 필요까지 느끼지 못한 터였다.
의료진에게 빠르게 환자를 인계한 119구급대원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모자를 벗어 땀을 닦아내는 모습을 본 태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예종혁 대원님?”
“네, 어? 최 선생님?”
“이야. 오랜만입니다.”
태수가 얼른 다가가 반가운 예종혁 대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맞잡은 예종혁 대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도요. 다른 곳에 가신 줄 알았는데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잘 지내셨죠?”
“저희야 똑같죠.”
“그래도 다시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저야말로.”
오랜만의 만남이라 대화가 술술 이어졌다.
예종혁 대원은 환자를 인계한 후였기에 별달리 할 일이 없고, 태수도 응급실 소속은 아니기에 여유롭게 대화가 진행됐다.
반면 방금 실려 온 땅콩 알레르기 환자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커걱!”
커다란 소리를 끝으로 더 이상 호흡이 이어지지 않았다.
환자의 입을 헹구던 레지던트가 부리나케 소리쳤다.
“Respiratory obstruction(기도막힘)!”
“Intubation(기도삽관)!”
전문의의 오더에 레지던트가 재빨리 움직였다.
신속한 간호사의 도움으로 기도를 확보할 의료 도구가 도착했다. 레지던트도 얼른 받아들고 환자의 입을 벌려 기도를 확보하려 노력했다.
바로바로 이어지는 응급처치가 신속했다.
그러나 그 이상 진행이 되지 않았다.
“식도가 부어서 기도가 제대로 잡히지 않습니다!”
“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조건 호흡부터 잡아!”
전문의가 다그치자 레지던트가 삽관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