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877
01880 1880화
태수는 그들보다 진료 천막으로 향하는 이기준의 모습이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생각되면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을 보여줬다. 도대체 이기준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이젠 태수도 헷갈렸다.
이기준이 떠온 물은 상당히 유용하게 쓰였다.
정수를 한 후 식수로 사용했고, 또 꾀죄죄한 의료진들을 말끔하게 변신시키기도 했다.
그렇게 말끔해진 의료진들은 각자 휴식에 들어갔다.
공식적으로 쉬는 날인 만큼 누구도 눈치 보지 않았다.
늘어지게 자는 사람도 있었고, 그늘에 누워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태수도 그늘에서 좀 쉬던 중이었다.
시선이 무심코 진료 천막으로 향했다.
벌써 몇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이기준이 나오는 걸 보지 못했다.
시뻘갰던 얼굴과 흠뻑 흘린 땀이 계속 신경 쓰였다.
우기가 끝나고 건기 초입에 접어들어서 그런지 고온다습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아무리 그늘에서 쉬어도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났다.
태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워서 걱정하는 것보다 얼굴 한번 보고 오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았다.
곧 태수는 물통을 들고 진료 천막에 들어섰다.
“기준아, 자냐?”
“…….”
태수가 나지막이 불렀지만 대답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기준의 모습도 바로 보이지 않았다.
의아한 태수가 좀 더 자세히 둘러보다 옅게 미소 지었다.
환자들을 자세히 살피기 위해 설치한 진료 공간 뒤쪽 간이침대에 이기준이 누워 있었다.
팔을 얼굴에 올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태수는 의자를 끌어다 옆에 앉았다.
“야, 이기준.”
“……왜?”
“너 왜 목소리가 맛이 갔냐?”
“자는 사람 깨워 놓고…… 목소리가 왜 이상하냐고?”
꽉 막힌 목소리로 묻는 이기준의 질문에 태수가 머쓱해졌다.
“계속 자는 줄 몰랐지. 밤에 뭐 하고 지금 자냐?”
“쉬는 날이라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난 그 말대로 쉬는 중이고.”
“자식. 그러지 말고 일어나 봐.”
태수의 말에도 이기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좀 쉰다니까.”
“자식, 말 더럽게 안 듣네.”
“원래 이랬어.”
“그러지 말고, 너……. 뭐야, 왜 이렇게 팔이 뜨거워?”
태수가 이기준의 팔을 잡으며 깜짝 놀랐다. 그러나 정작 이기준은 목소리 하나 변하지 않았다.
“좀 걸어서 그래. 쉬면 나아.”
“그럴 정도가 아닌데.”
휙.
태수가 잡고 있던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이기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고, 식은땀이 가득했다.
“너 더위 먹은 거 아니야?”
“…….”
“야, 인마, 물이 없어도 그렇지. 생으로 병을 키우는 건 무슨 경우야? 기다려 봐.”
태수는 미안함에 괜스레 짜증을 내며 얼른 움직였다.
곧 다시 돌아온 태수의 손엔 냉찜질팩이 들려 있었다.
냉장고 냉동 칸에 넣어 둔 의료 용품 중 하나였다.
냉찜질팩을 이마에 얹고 해열제까지 바로 주사했다.
그러는 와중에 태수가 잔소리를 퍼부었다.
“왜 물을 혼자 뜨러 가냐고. 일어나서 같이 다녀오면 되지.”
“…….”
“물 조금 늦게 마신다고 우리가 죽는 것도 아니고.”
“그만해라.”
이기준이 듣다못해 한마디 하자 태수가 뚱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좋은 소리도 한두 번인데, 잔소리가 기분 좋을 사람은 없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엇갈려서 그런지 안타까움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가만히 바라보던 태수가 움찔하며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 혹시 오늘 쉬는 날이라고 해서 조용히 다녀온 거냐? 다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
“너 캐릭터 이상한데. 갑자기 변하고 그러면 안 돼.”
“시끄럽다고 했다.”
이기준의 쉰 목소리에 짜증이 서리자 태수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좀 쉬고 있어. 이따가 올게.”
“…….”
이기준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누가 본다면 고마움도 모른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태수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쑥스러울 터였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아 보지 않아서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런 모습이 한편으로는 안타깝게 느껴졌다.
태수가 숙소 텐트 쪽으로 다가가자 그늘에 자리 깔고 편하게 누워 쉬고 있던 유병태가 슬쩍 물었다.
“그래서 이 선생은 어때?”
“나아지겠지.”
“자식, 괜히 사람 걱정시키고 말이야.”
부스럭.
유병태는 투덜거리며 등을 보였다.
뒤에서 욕했던 게 미안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또 한 번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정민수가 풀썩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 대화를 들은 게 분명했다.
정민수의 뒷모습에서도 미안함이 느껴졌다.
‘평소에 좀 잘 지내라니까.’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태수는 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었다.
오늘 저녁 식사 담당은 태수였다.
태수는 의료진들의 식사를 준비해 준 후 이기준을 찾아갔다.
이기준은 낮과 똑같이 팔을 이마에 얹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가간 태수가 자그맣게 불렀다.
“야, 기준아, 아직도 별로 안 좋냐?”
“…….”
“일어나 봐. 자는 것도 좋은데 일단 뭘 좀 먹어야지.”
“…….”
이기준에게서 반응이 없었다.
뭔가 이상함을 직감한 순간 태수는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를 맡았다.
진료 천막에서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아니었다. 마치 구토한 듯 위산 냄새가 강하게 섞여 있었다.
눈빛을 굳힌 태수가 전투식량을 내려놓고 빠르게 둘러봤다. 그러다 이기준이 누운 반대쪽에서 구토한 흔적을 발견했다.
그 깔끔한 이기준이 구토를 하고 그냥 가만히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태수는 재빨리 이기준의 팔을 잡았다.
낮보다 더 뜨거웠다.
태수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야, 기준아! 이기준!”
태수가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러자 얼굴을 가리고 있던 이기준의 팔이 스르륵 옆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드러난 이기준의 얼굴을 본 태수는 깜짝 놀랐다. 입술이 허옇게 질려 있고, 땀이 코와 목에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 모습에 태수가 더욱 이기준을 다그쳤다.
“이기준, 눈 떠 봐! 야!”
“…….”
“이 자식…… 의사란 자식이 이게 뭐냐고!”
버럭 소리친 태수는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진료 탁자 위에 정리해 둔 의약품을 가지러 쏜살같이 달려갔다.
우당탕!
태수의 손길이 거칠고 우악스러웠다.
이렇게 열이 날 때는 포도당이라도 놓아야 했다.
다급하게 필요한 것들을 챙긴 태수는 얼른 이기준에게 다가갔다. IV를 연결하고 포도당을 높이 거는 일들이 순식간에 진행됐다.
거기에 해열제와 위산 억제제를 순차적으로 투여했다.
그런 응급처치를 끝내고 나서야 태수는 자동 혈압계로 이기준의 바이탈을 확인했다.
띡.
수치가 기계에 떠오르자 그걸 확인한 태수의 눈이 크게 떠졌다.
“39.8도? 맥박은 또 왜 이렇게 떨어졌어!”
이 정도면 응급 환자 취급을 받아야 할 판이었다.
아니, 이미 태수의 머릿속에선 이기준이 응급 환자로 분류되었다.
필요한 게 많았다.
혼자 준비하기에는 준비물들의 거리가 상당했다.
누군가는 이기준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생각은 짧고 행동은 빨랐다.
태수는 곧장 주변이 떠나가도록 크게 소리쳤다.
“김 간호사님! 민수야!”
태수의 외침으로 언제나 조용하던 의료진들이 머무는 장소가 갑자기 부산해졌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였다. 갑작스러운 이기준의 소식에 다들 정신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
“다 챙겼으면 빨리 달려!”
우당탕!
거친 움직임에 발끝에 물건들이 채였지만 지금은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아무리 미워도 이 먼 나라에서 함께 고생한 동료였다.
그 동료의 아픔을 모른 척할 만큼 모진 의료진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부산함이 지난 후였다.
태수만이 이기준의 옆에 자리해 있었다.
그런 태수에게 김혁권이 다가왔다.
“다들 숙소로 들어갔어요. 잠이 안 와도 알아서 자겠지.”
“내일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열도 완전히 내리지 않았습니다.”
“지켜봅시다.”
“…….”
태수가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기준을 바라보자 김혁권이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왜요, 뭐 이상해요?”
“더위를 먹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증상이 심해서요.”
“음.”
“역시 이 녀석이 정신을 차려야 뭔가 말을 들을 수 있을 거 같네요.”
“그렇겠죠.”
김혁권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 뒤로는 별다른 대화를 주고받지 않은 채 이기준을 간호했다.
다음 날, 해가 뜰 무렵이었다.
태수와 김혁권은 이기준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졸고 있었다.
꾸벅꾸벅 졸던 태수의 귀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그 소리에 태수가 귀를 쫑긋거리며 번쩍 눈을 떴다.
“뭐, 왜?”
“흐음, 무슨 일입니까?”
태수의 말에 김혁권도 같이 눈을 떴다.
그 두 사람의 시선은 곧장 이기준에게 향했다.
이기준은 가늘게 눈을 뜬 채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입술이 움직였다.
바로 다가간 태수가 귀를 가까이 댄 후 고개를 끄떡이며 김혁권에게 부탁했다.
“거기 물 좀요.”
“받아요!”
휙.
날아오는 물병을 바로 낚아챈 태수가 이기준의 입에 물을 조금씩 부어 줬다.
목울대가 움직이며 물을 받아 마신 후에야 이기준의 목소리가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어…… 얼마나 지났어?”
“지금 해 뜨고 있어.”
“흐음.”
이기준이 인상을 찡그리자 태수가 물었다.
“어디가 아픈데?”
“…….”
“인마, 말을 해야 알지. 더위 먹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상태가 좋지 않아. 너도 알잖아.”
“흐음.”
대답 대신 숨을 깊게 내쉬는 이기준의 모습이 태수를 갑갑하게 했다.
“니가 의사든, 쥐뿔이든 지금은 환자라고.”
“알…..아.”
“그런데 왜 말을 안 해? 어디가 아프냐니까?”
태수가 다그치자 이기준이 고개를 돌려 충혈된 눈으로 바라봤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눈빛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순간 이기준의 입이 열렸다.
“옴부르 부족에서 좀 떨어진…… 곳에 웅덩이가 있어.”
“……거기까지 갔다 왔냐?”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이기준의 목소리가 낮게 울리자 태수가 아차 했다.
“좌우간 그래서 거기를 갔는데.”
“애들이 물을 뜨고 있었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있는 애들……. 가끔 찾아가면 ‘학교 종이 땡땡땡’ 노래…… 부르는 애들 말이야.”
“그래, 그 애들이 왜?”
“웅덩이 물을 떠서 주더라……. 웃으며 주는데 마셔야지.”
“그거야 뭐.”
태수도 인정하면서 뭔가 찝찝했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의료진들은 정수된 물을 마셨다.
그게 아니면 꼭 끓여서 마셨다.
타 부족을 찾아다닐 때도 가급적이면 물과 식량을 가지고 다녔다.
그들에게 신세를 지지 않으려는 것도 있지만, 물갈이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특히나 이기준은 그런 위생에 철저했다.
무엇보다 이건 물갈이 증세가 절대 아니었다.
어제부터 지켜본 이기준의 모든 증상들을 머릿속으로 되뇌던 태수의 눈이 갑자기 크게 떠졌다.
“기준아, 혹시?”
“아마…… 맞을 거야. 사람만 이용하는 웅덩이가 아니니까.”
“장티…… 푸스?”
끄덕.
이기준이 고갯짓으로 동조했다.
순간 태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건 이기준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 웅덩이의 물을 마셨을 옴부르 부족 아이들과 어른들의 상태도 장담할 수 없었다.
같은 기후를 겪고 있는 다른 부족들도 안심할 수 없다.
태수가 잠시 생각하는 사이 김혁권이 옆으로 다가왔다.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닌데.”
“음.”
“우리가 돌아다녀 봤지만 여기는 이상할 정도로 배수가 빨라요. 우기 때도 고인 물이 많지 않았잖아요. 오죽하면 우리가 비닐에 빗물을 받았겠어.”
김혁권이 추가적으로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