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952
01955 1955화
누군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자신도 모르게 말을 흘렸다.
“말도 안 돼.”
“야, 쉿.”
“아, 쉿.”
“그런데…… 여전히 반응이 없으시네.”
“젠장.”
갑자기 퉁명하게 투덜거린 표진호가 의국 회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전문 서적을 펼쳤다.
비장, 신장.
장무용 환자의 증상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런 표진호 옆에 어느새 장문석이 자리했다.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시간적인 여유가 되는 모든 레지던트가 어느새 회의 테이블을 채우고 있었다.
사락사락.
오가는 말은 한 마디도 없이 책장 넘기는 소리만 가득했다.
태수를 본받기 위해?
그런 이유도 있지만, 사적인 욕심이 더욱 컸다.
아직 누가 어시스던트가 될지 모른다.
가슴 한편에 자신이 선택되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똑같았다.
그게 자진해서 공부할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태수는 자리에 앉은 지 6시간 만에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흐음.”
두둑.
가볍게 굳은 어깨를 펴는 사이 모니터 앞에 늘어진 종이컵을 발견했다.
“자식들. 좀 치우…….”
중얼거리던 태수가 멈칫했다.
분명 자신이 앉을 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 이건 뭔가?
태수 본인이 마신 빈 잔들이란 결론이 나왔다.
그걸 인지한 순간 태수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정신없이 집중한 모양이다.
탁탁.
태수는 빈 잔을 정리해 들고 일어나 뒤를 돌아봤다.
의국이 넓게 시야에 들어온 순간 태수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느새 모여든 레지던트들은 누구랄 거 없이 공부 삼매경이었다.
‘미래가 환하네.’
충선대학병원의 내일이 기대되는 대목이다.
그때 공부하던 레지던트들 중 누군가 태수의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태수 손에 들린 쓰레기가 눈에 거슬렸는지 얼른 일어났다.
그릉.
“선생님, 그거…….”
“이거? 됐으니까 공부해.”
“아닙니다. 제가 버리겠습니다.”
그가 얼른 다가왔다.
가까워지는 레지던트의 모습을 보며 태수는 이름부터 확인했다.
-추인성.
키도 훤칠하고 잘생겼다.
딱히 어디가 잘생겼다기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곱게 자란 느낌이었다.
게다가 나이도 어려 보였다.
추인성이 빈 종이컵을 받아 드는 사이 태수는 눈을 봤다.
어떤 생각도 없었다.
이걸 대신 버리는 걸로 잘 보여야겠단 계산이 없었다.
자신이 대신 받아 버리는 것 자체에 어떤 의미도 내포하고 있지 않았다.
몸에 배어 있는 순순한 호의였다.
그 순수한 눈빛이 태수는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 이유로 태수가 물었다.
“추 선생, 몇 년 차지?”
“2년 차입니다.”
“그래, 한창 고생할 때네.”
“아닙니다.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추인성의 대답을 들은 태수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내가 부탁 하나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네, 그럼요. 말씀하십시오.”
추인성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순수한 그의 눈빛에 처음으로 욕심과 갈망이 깃들었다.
태수는 그조차도 좋게 보였다.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태수가 차분하게 말했다.
“장무용 환자 말이야, 지금 부신 신티그래피(scintigraphy)하고 혈중 알도스테론 좀 측정해 줄 수 있을까?”
“네! 신티그래피, 혈중 알도스테론! 꼭 측정하겠습니다.”
“그리고 혈중 알도스테론은 아침에 한 번 더 부탁할게.”
태수 말이 끝나자마자 추인성의 대답이 곧장 들렸다.
“출근하시기 전까지 EMR에 올려놓겠습니다.”
“그래. 부탁해. 그럼 다들 내일 보자고.”
태수가 크게 인사하자 귀를 쫑긋거리던 레지던트들이 얼른 일어나 고개 숙였다.
그릉!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태수는 천천히 의국을 나섰다.
탁.
문이 닫힌 순간이었다.
“아오!”
“젠장.”
모두 아쉬움에 몸부림쳤다.
그 아쉬움은 결국 추인성을 향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변했다.
잡아먹을 듯한 눈빛에 추인성은 얼른 돌아섰다. 그러나 빈 종이컵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이틀이란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태수는 그동안 수술에 대한 연구를 이어 갔다.
추인성에게 부탁해 진행한 추가 검사 결과를 더하고 열정으로 분석해 좀 더 확실한 수술 가이드가 완성됐다.
그 문서가 지금 외과장의 손에 들려 있었다.
태수는 소파에 자리한 채 외과장의 집무실을 둘러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곧 외과장이 정리된 차트와 수술 계획서를 내리며 말했다.
“그래, 이런 진행이라면 수월하겠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수술 시기가 안 적혀 있던데.”
“이번 주 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태수가 말끝을 흐리자 외과장이 물었다.
“어시스던트를 아직 못 찾았나?”
“다들 열심이라 누굴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후배들이라고 금칠은.”
외과장이 한마디했으나 태수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후배라서라기 보다는 진심으로 마음에 든 탓이다.
“보고만 있어도 대견한 걸 어쩝니까.”
“얼씨구.”
외과장이 황당하게 바라보자 태수가 머쓱한 얼굴로 이어서 말했다.
“그래도 곧 결정될 겁니다.”
“눈에 차는 녀석이 있나?”
“제가 눈이 좀 높은 편이라서요.”
“그러시겠지.”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수준을 바라진 않습니다. 몇몇 눈에 띄는 녀석들도 있고요.”
“그런데 내 하나 물어도 되나?”
외과장의 질문에 태수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십시오.”
“화이트엔젤이나 응급의료대에서는 원래 이런 식으로 하나?”
“무슨 말씀이신지요?”
“빠진 게 있는데, 일부러 넣지 않은 건지 궁금해서 말이야.”
“죄송합니다만, 어떤 부분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태수는 정중히 물었다.
그런 태수의 반응에 외과장도 신중함을 기했다.
정리된 차트를 들고 차분한 시선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곧 자기 생각이 맞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태수를 바라봤다.
시선을 마주한 순간 외과장의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병, 증상, 호전 사항, 악화 사항…… 철저할 정도로 잘 정리됐어. 보기도 편해. 그런데 하나가 없어.”
“…….”
“그 없는 걸 묻지. 장무용 환자는 어떤 분인가?”
외과장의 질문에 태수가 멈칫했다.
그리고 곧 눈빛이 흔들렸다.
장무용, 48세. 부신종양 중 원발성 알도스테론증을 앓고 있는 환자다. 부인인 보호자가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거기까지는 한 번에 떠올렸지만 그다음은 없었다.
성격이 어떤지, 어떤 대화에 호감을 느끼는지.
심지어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몰랐다.
‘이런.’
아무리 떠올려도 생각나지 않았다.
분명 아침저녁으로 찾아갔다. 가서 변화를 꼼꼼하게 관찰하며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그게 전부였다.
그 이상이 없었다.
흔들리는 태수의 눈빛은 쉽사리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때 외과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 들지.”
외과장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질책? 조언?
그것도 대화하는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그의 시선에 태수는 이미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우뚝 선 거목이었다.
뭔가 잊었다면?
힌트만 주면 된다.
그런 믿음이 확고했다.
그래서 그런지 외과장은 화두를 던졌단 것도 잊고 태평한 얼굴로 차의 맛과 향을 음미했다.
반면에 태수의 눈빛은 아직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엔 황석찬 회장의 목소리가 가득 울리고 있는 탓이다.
-지금 넌 환자를 볼 시야가 없어. 병만 쫓아 허덕거릴 테지.
초곡리 바닷가에서 들었던 말이다.
그 말이 꼭 맞아떨어졌다.
마치 이미 알고 있었단 듯이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이잠바크까지 다녀왔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한 여행이었다.
분명 성과가 있었고, 자신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뿐인 모양이다.
의사로서 자신은 아직 그 시간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태수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문답이 하나씩 떠올랐다.
의사란?
병을 고치는 사람.
그 병을 앓는 대상은?
환자.
병에 집중하느라 환자를 등한시했다는 건?
나무만 보느라 숲이 어떤지 신경도 쓰지 않았단 거다.
“음.”
좁아진 시야를 인지한 태수가 자책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자책을 한순간에 밀어내며 더욱 강렬한 생각이 번뜩거렸다.
늦지 않았다.
아직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모든 걸 제자리로 돌릴 수 있다.
차분히 시작하면 된다.
흔들리던 눈빛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마음속 꽉 조여진 뭔가가 풀어진 느낌이다.
어느새 눈빛을 단단하게 굳힌 태수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외과장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 숙였다.
“감사합니다.”
“갑자기 뭐가?”
“…….”
“싱거운 사람. 차를 들든가, 바쁘면 나가 보든가.”
흘리듯 말한 외과장은 다시 찻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차 한 잔을 음미하는 데 집중했다.
이 순간을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어찌 보면 축객령이다.
하지만 태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먹먹해져 왔다.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다.
그 말이 너무도 크고 강하게 와 닿았다.
꾸벅.
태수는 한 번 더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외과장실을 나섰다.
그 순간 외과장이 허탈하게 웃었다.
“허허. 나도 실천해야지.”
순간 외과장은 기억에 한 조각이 떠올랐다.
자신을 다그치던 한 노교수의 일갈.
방금 태수에게 전해준 조언이기도 했다.
‘아직 안 늦었겠지. 태수 저 녀석에게 트집거리야 피해야지.’
외과장이 중얼거리며 자리를 박찼다.
태수는 그길로 곧장 장무용 환자에게 향했다.
병실 안으로 들어가 병상 앞에 서자 장무용 환자와 보호자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아니, 이 시간에 어떻게…….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요. 차 한잔 얻어 마시려고 왔습니다.”
“차요?”
“안 될까요?”
태수가 환히 웃으며 반문하자 장무용 환자가 당황한 얼굴로 얼른 보호자를 재촉했다.
“아, 안 되기는요. 무슨 말씀을. 아, 앉으세요. 뭐 해? 차 내오고 과일도 좀 깎고.”
“네네. 그럴게요.”
보호자도 얼떨떨한 얼굴로 일어나 허둥지둥 움직였다.
그런 소란에도 태수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차가 준비되는 동안 태수는 보호자 침대에 걸터앉아 장무용 환자를 올려다봤다.
“이렇게 뵈니까 또 색다르네요.”
“그런데 바쁘지…… 않으십니까?”
“도망쳐 온 겁니다. 저 여기 있는지 아무도 몰라요.”
태수는 목소리를 낮추면서 슬쩍 병실 문을 힐끔거리기도 했다.
그런 넉살에 장무용 환자의 얼굴이 황당하다는 듯 변했다.
“아니, 누가 천하의 최 선생님을.”
“저희 교수님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그러시는 겁니다. 환자 앞에서만 순하시죠. 실제로는 동물의 왕국이라니까요.”
“도, 동물의 왕국이요?”
“사자, 호랑이, 악어, 또 송골매도 계시고……. 아, 별명 말입니다.”
태수가 혹시 모를 오해에 대비해 변명을 먼저 말한 순간이었다. 장무용 환자는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눌렀다.
“크흡, 흠흠. 아니,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사실인데요. 그리고 기왕 도망쳐 온 건데 장 선생님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싶었고요.”
“제, 제가 선생님이라니요.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장무용 환자가 질겁한 얼굴로 얼른 손사래를 쳤지만 태수는 여전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 아름답고 험한 세상을 하루라도 먼저 경험했으면 형, 누나 아닙니까. 한참 연배시니 당연히 선생님이죠.”
“이거 뭐, 나이 먹었다고 면박 주시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어린놈이 고민 상담하러 왔다고 생각해 주세요.”
태수는 눈을 찡긋거리며 넉살을 부렸다.
장무용 환자는 아직 그런 태수를 어려워했다.
그러나 태수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장무용 환자도 조금씩 경계가 풀리는지 어느새 미소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