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013
02016 2016화
거기에 중간중간 박아란의 내레이션이 들어갔다.
-환자의 상태가 급변했다. 예상치 못한 응급 상황. 당황할 틈도 없다. 살려야 한다. 환자가 살아야 한다. 그게 그들에겐 전부다.
짧고 간결한 말투가 오히려 가슴을 울렸다.
그리고 수술은 짤막짤막하게 핵심만 짚으며 이어졌다.
16시간짜리 수술이 30분으로 축약됐다.
그 속에 모든 걸 담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서 김영찬 PD의 편집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었다.
불과 30분 남짓한 방영 시간 동안 수술실에서 일어난 모든 희로애락이 담겨 있었다.
특히 태수와 정민수의 상행대동맥치환과 컴포짓 그래프트의 긴박감이 생생하게 전달됐다.
그리고 녹초가 되었던 초저체온 요법 수술의 처절함도 찡하게 와 닿았다.
수술 성공 판정 후 기뻐하는 모습도 이어졌다.
“아…….”
“후.”
좌우에 자리한 아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수술의 성공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화면으로 보니 가슴 졸인 모양이다.
그사이 어느새 화면이 바뀌었다.
병원을 나선 응급의료대는 동이 튼 거리를 걸어 해장국집으로 향했다.
박아란의 내레이션이 또 한 번 들려왔다.
-수술은 성공이다. 자축을 위해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들은 해장국집으로 향한다. 고된 하루를 해장국과 소주 한잔으로 달랜다.
마지막으로 응급의료대의 인터뷰가 또 한 번 이어졌다.
이번에는 길게 이어지지 않고 짧게 단답형으로 편집된 인터뷰였다.
자막으로 질문이 먼저 보였다.
-응급의료대의 미래는?
그 질문에 짤막한 답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박성민.
-변함없을 마음.
정민수.
-아픔을 기쁨으로.
그렇게 한 마디씩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태수의 얼굴이 비췄다.
-저희의 미래요? 출동하지 않는 날이 찾아오는 겁니다. 아무도 아프지 않을 그날. 이건 세상 모든 의료진들이 꿈꾸는 미래입니다.
태수의 인터뷰가 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며 사진처럼 캡처한 장면을 짜깁기한 영상이 방영됐다.
곧 모든 방송이 마무리되고 광고가 시작됐다.
그런데 집 안은 의외로 조용했다.
꽈악.
좌우에서 아이들이 태수의 손을 꼭 잡아 왔다.
태수가 의아한 얼굴로 번갈아 바라봤다.
아이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매번 저렇게 고생하시는 거예요?”
“자식들. 저건 특별한 경우잖아.”
“저희 수술할 때는요?”
“…….”
태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쉬웠다고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반대로 죽어라 힘들었다고도 말하지 못했다.
그저 침묵이 정답이다.
아이들도 대답을 꼭 듣고 싶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스윽.
태수의 팔에 머리를 기댄 아이들이 말했다.
“아프지 않을게요.”
“혹시 아프면 꼭 말씀드릴게요.”
아이들이 하는 말은 약속이 아닌 맹세에 가까웠다.
두 아이는 누구보다 방송 내용이 절절하게 와 닿았다.
그동안 태수가 어떤 고생을 하는지 모르고 있다가 알게 되어 더욱 미안하고 또 감사한 모양이었다.
태수는 그런 아이들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 우리 아프지 말자.”
다음 날 아침.
빠라밤.
휴대폰 소리에 눈을 뜬 태수가 발신자부터 확인했다.
아버지였다.
“어?”
놀란 태수가 얼른 일어나 전화부터 받았다.
“네, 아버지.”
“뭐 하냐?”
“아직 잘 시간이죠.”
태수가 얼떨떨하게 대답하자 아버지의 퉁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자라.”
“하실 말씀 있으신 거 아닙니까?”
“자라고.”
“아니, 말씀하세요.”
“아, 그 녀석. 자라니까. 잘못 누른 거야. 신경 쓰지 말고 자.”
뚝.
전화가 끊어졌다.
태수는 휴대폰을 바라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이런 통화는 처음이었기에 걱정이 앞섰다.
태수는 지체하지 않고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어머니.”
“아이고, 우리 의사 아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방금 아버지가 전화하셨는데, 그냥 끊으셔서요.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일은 무슨. 아니다. 마침 전화 잘했어. 네 아버지 좀 말려 봐.”
“일이 있는 건가요?”
태수는 어머니의 앞뒤가 다른 화법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개의치 않는지 바로 말했다.
“아침부터 평상에 왜 그렇게 앉아 계신지 모르겠다.”
“네?”
“그 좋아하는 담배를 그냥 물고만 있어. 오죽했으면 차라리 태우시라고 했을까. 어제 잠도 거의 못 주무시더만.”
“…….”
“아니야. 엄마가 다시 얘기해 볼게. 아, 그리고 방송 잘 봤어. 아이고, 우리 아들 고생 많이 해서 어째. 곧 좋아하는 반찬 보내 줄게.”
“네, 어머니. 쉬십시오.”
태수는 공손히 전화를 끊었다.
그런 태수의 머릿속에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졌다.
방송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이 일하는 모습을 보셨을 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쓰러워서 전화를 주신 모양이다.
이런 반응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담배를 태우지 않고 계신단 점이었다.
태수는 아버지가 꼭 금연하길 원하진 않았다. 평생 그걸로 스트레스를 풀어 왔는데 한 번에 끊으라는 건 억지였다.
다만 줄이라고 권할 뿐이었다.
그조차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아버지였지만 자진해서 줄이신다니 그만큼 좋은 소식이 없었다.
미소 띤 태수의 시선이 다시 휴대폰으로 향했다.
지금쯤이면 방송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느 정도는 나올 터였다.
하지만 태수는 휴대폰을 뒤집었다.
좋은 반응도 나쁜 반응도 지금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응급의료대가 이렇게 집중 조명된 걸로 만족했다.
이제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면 방송의 반응도 자연히 알게 될 터였다.
하지만 태수는 오후가 되자 알고 싶지 않아도 방송에 대한 반응을 알게 됐다.
하나의 문자 탓이다.
-방송 대박! 재방영 요청률 역대 최고!
김영찬 PD의 환희 가득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외에도 주말이라 등교하지 않은 아이들이 옆에서 재잘거렸다.
“우와. 전에 협죽도 때문에 죽을 뻔했던 아이들이 댓글 달았어. 부모님도 다셨는데?”
“이 아저씨는 너무했다. 방송용 자작극이라니. 어떻게 이런 말을 해?”
“그래도 반응이 진짜 좋은 거 같지 않아?”
“응. 삼촌, 삼촌은 궁금하지 않으세요?”
윤사라의 물음에 태수가 고개를 저었다.
“안 보려고.”
“사람들끼리 막 치고받고 싸우기도 하는데 재밌어요.”
“난 별로. 재미없을 거 같아.”
태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얼렁뚱땅 대답하고 말아 버렸다.
그런데 그때 휴대폰이 반짝였다.
“차관님?”
발신자를 확인함과 동시에 태수가 얼른 전화를 받았다.
태수가 말하기도 전에 엄수찬 차관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사고를 이렇게 치나?”
“네? 하하.”
“사위가 언질을 줬으니 그런가 보다 했지. 아니었으면 너무 놀라 기절했을지도 몰라.”
“무슨 말씀을요.”
태수가 슬쩍 넘어가려 했지만 엄수찬 차관은 순순하지 않았다.
“김성국 기자에게 무슨 얘기를 들었던 모양이지?”
“…….”
“그 친구 입이 무거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봐.”
“형님은 모르십니다. 제 독단입니다.”
“그렇겠지. 김성국 기자가 알고 있었다면 석간신문에 먼저 나갔을 테니까.”
“아마도요.”
태수가 무심결에 대답한 순간. 엄수찬 차관의 진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 팀장, 그런데 괜찮을까?”
“문제 될 건 없잖습니까.”
“아니, 김성국 기자가 모른다며. 잔소리 괜찮겠냐고.”
“아…… 맞다. 어제 전화한다고 하고 깜빡했네요.”
태수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반면 엄수찬 차관의 목소리는 밝아졌다.
“좌우간 이번 방송으로 이쪽 상황이 아주 재밌게 돌아갈 거 같아. 시청자들 반응이 너무 좋아서 말이지.”
“차관님이 조금이라도 편해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역시 그게 문제였나?”
“……출동을 언제까지 미룰 순 없는 거니까요.”
“말 돌리기는. 좌우간 내 말에 힘을 실어 줘서 고마워. 덕분에 주말도 없이 출근해야 할 입장이지만.”
“네?”
“이런 방송이 나갔는데 우리도 대책 회의를 해야지. 그럼 좋은 소식 들고 전화하도록 노력하지. 하하.”
엄수찬 차관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태수는 얼떨떨했다.
“이게 아닌데.”
주말을 반납해야 하는 상황을 원한 게 아니라 난감했다.
태수는 휴대폰을 놓지 않았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덜 아프단 속담을 몸소 체험할 작정이었다.
김성국 기자의 전화번호는 이미 액정에 채워 놨다.
통화 버튼만 누르면 될 일이다.
그런데 손가락이 쉽게 가지 않았다.
에라이.
꾹.
태수는 눈을 질끈 감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띠리릭.
통화 연결음이 몇 번 울린 후였다.
“흠흠. 전화 받았습니다.”
“접니다, 형님.”
“형님이라니요. 어디 전화 거신 겁니까?”
“아이, 형님.”
“누구신데 자꾸 저에게 형님이라고 하십니까?”
단단히 토라진 김성국 기자의 목소리에 태수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뭐.”
“먼저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태수의 사과에도 김성국 기자 목소리는 여전했다.
“고작 저 같은 기자 나부랭이한테 사과하려고 전화까지 주셨습니까, 최태수 팀장님?”
“형님.”
“왜 자꾸 형님을 찾으시는지요.”
“죄송하다니까요.”
태수가 재차 사과하자 김성국 기자의 퉁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하다면 끝이야?”
“제가 뭘 어쩔까요?”
“팬 사인회 한 번 하면 내가 생각해 볼게.”
“그럼 제가 당연히……. 네?”
놀란 태수의 물음에 김성국 기자의 목소리가 크게 변했다.
“우리 아파트 단지 아주머니들이 아주 난리야. 아침부터 네 형수 전화기에 불나고 있다고.”
“그게 무슨…….”
“애들 엄마가 너랑 친하다고 떠들고 다닌다고 했잖아. 새해에 인사까지 왔다고 반상회에서 자랑했나 봐.”
“아, 네. 자랑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이긴 하죠.”
“그게 문제였지. 어제 방송 끝나자마자 전화기 불나더라. 너 언제 집에 놀러 오냐고 아주 난리래.”
김성국 기자는 신이 난 목소리였다.
태수는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그렇게 됐습니까?”
“내가 동생 잘 사귄 덕분에 오늘 저녁은 갈비찜 먹을 예정이란 말이지.”
“그게 저한테 와야지, 왜 형님한테 갑니까?”
태수의 볼멘 소리에도 김성국 기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야, 그렇게 말하나? 내가 그동안 최 팀장에 대해 써 준 기사가 몇 갠데. 내 기사들 조회수가 올라가고 있다고.”
“네?”
태수가 황당한 얼굴로 묻자 김성국 기자도 어이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참. 역주행송은 들어 봤는데 역주행 기사는 나도 처음이야. 국장님이 전화하셨더라. 아마 특별 상여금 나갈 거 같다고.”
“이야, 그런 일이 있습니까?”
“나도 몰라. 나만 몰라? 다 몰라. 우리 신문사 사상 최초라더라고.”
“좋은 일이네요.”
“내가 하여간 동생 잘 둔 덕분에 별별 일을 다 겪어요. 섭섭한 거야 잠깐 있긴 했는데, 그건 나중에 인터뷰로 풀자고.”
“그건 약속드립니다.”
“아직 충선대에 있지? 조만간 갈게. 그럼 서로 바쁜데 이만 끊자고.”
그의 목소리로 통화가 끝났다.
일방적이었지만 섭섭해할 사이는 아니었다.
그보다 김성국 기자에게도 좋은 일이 일어났단 게 태수의 불편한 마음을 조금은 달래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