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22
00223 223화
이튿날.
동성종합병원의 비상사태는 준 비상사태로 전환됐다.
간밤에 입원한 환자의 수가 너무도 많았다.
수술한 환자들도 상당했기에 의료진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환자들을 돌보는 데 열중했다.
전문의들은 어제에 이어 거의 수술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레지던트들로 포화가 된 ICU(집중치료실) 외에도 몇 개 병실을 임시로 전환해 수술 직후의 환자들을 집중 케어 했다.
간호사들 또한 모든 근무조가 출근해 병원 내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교대로 근무하고, 수시로 환자들을 돌봤다.
김혁권을 포함한 간병인들마저도 고용된 환자만 돌보지 않고 주변까지 시야의 폭을 넓혀 일반 증상으로 입원한 환자들과 의료진의 다리 역할을 했다.
다른 의과도 바빴지만 특히나 외과가 바빴다.
가장 많은 환자를 수술하고,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태수는 외과 병동의 실질적인 책임자였기에 수술 어시스던트를 들어가지 않고 모든 환자를 폭 넓게 둘러보며 미진한 부분을 메웠다.
태수가 환자들을 둘러볼 때였다.
“선생님. 이거 좀.”
“이게 뭡니까?”
보호자가 건네는 묵직한 상자를 확인한 태수가 얼른 물었다.
보호자는 쑥스럽다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참외가 달아서요.”
“그럼 다른 분들하고 나눠 드셔야죠.”
“우리는 다 알아서 먹어요. 그러니까 이것 좀 나눠 드세요. 여기요.”
턱!
아예 손에 얹어주는 참외 상자를 태수는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이거 진짜 안 되는 데요.”
“에이.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혹시 누가 뭐라고 하면 데려오세요. 우리 아들 살려주신 선생님들인데요. 제가 멱살이라도 잡을 겁니다.”
“하하.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안 받을 수가 없네요.”
“그럼 앞으로도 잘 좀 부탁드립니다.”
꾸벅.
한참이나 연배인 보호자가 깊숙이 고개를 숙이자 태수도 얼떨결에 같이 고개 숙였다.
인사를 마친 뒤 보호자가 얼른 멀어지자 태수는 참외 상자를 내려다보며 자그마한 미소를 지었다.
“좋다.”
태수가 곧바로 참외 상자를 들고 간호사실로 향했다.
간호사실에 도착한 태수의 시선이 황당함으로 물들어 갔다.
간호사실 한 쪽에 쌓여 있는 각종 상자 때문이다.
“저, 저게 다 뭡니까?”
평상심을 항시 유지하려 노력하는 태수도 깜짝 놀랄 정도의 양이었다.
수간호사가 난감한 얼굴로 태수에게 하소연했다.
“다 보호자들이 가져다주신 거예요. 진짜 거부하기도 뭐하고요.”
“뭔데요?”
“과일도 있고 음료수, 과자. 간호사들 신으라고 스타킹도 상자로 보내주신 거 있죠?”
“이거 참.”
태수가 황당한 얼굴로 변하자 수간호사가 슬쩍 눈치를 봤다.
“선생님 이런 거 받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시죠.”
“네.”
“그럼 이걸 다 어쩌나.”
“어쩌기는 어쩝니까. 먹어야죠. 이것도 포함해서요.”
퉁.
태수가 참외 상자를 내려놓자 수간호사가 눈만 끔뻑거렸다.
“선생님도 받아오셨어요?”
“떠맡겨졌다고 봐야죠. 거절하면 욕먹을까 봐 어쩔 수 없이 받아왔습니다.”
“선생님도 별수 없으셨나 봐요.”
“그러게 말입니다.”
태수가 쓴 미소를 짓는 사이 수간호사의 얼굴에 또 하나의 걱정이 서렸다.
“과자나 음료수는 그렇다고 치고 과일들은 어떻게 하죠? 밥 안 먹고 과일만 먹어도 썩겠는데요.”
“음. 돌리죠.”
“돌리다니요?”
수간호사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태수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저희만 고생한 건 아니잖습니까. 응급실 쪽에도 보내고, 과장님이나 다른 선생님들에게도 한 상자씩 안겨드리고요. 간병인 분들에게도 성의 좀 보여주세요.”
“그래도 될까요? 다 성의인데.”
“썩혀서 버리는 게 더 죄송한 겁니다.”
“그건 그렇긴 한데요.”
“혹시 누가 뭐라고 하면 말씀하세요. 제가 가서 직접 말씀드릴 테니까요.”
태수는 그렇게 이 해프닝을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그건 태수의 생각이었다.
레지던트들은 달랐다.
각종 선물을 확인한 레지던트들은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바라봤다.
선물이 얼마의 가치를 가졌는지보다 어떤 마음으로 보내준 건지 가슴으로 와 닿은 터였다.
송민규가 레지던트들을 모아 놓고 한마디 했다.
“우리 개새끼는 되지 말자.”
“네?”
“이렇게 받아 쳐 먹고 입 씻으면 그게 개새끼 아니야?”
송민규의 눈빛이 새로운 열정으로 번뜩거렸다.
그건 송민규뿐이 아니었다.
다들 속에서 형용하지 못할 뿌듯함과 자부심이 피어났다.
직설적인 성격의 홍진만이 얼른 한마디 했다.
“저, 지금 환자들 순회하고 와도 됩니까?”
“같이 가겠습니다.”
“저도요.”
다른 레지던트들도 모두 동조했다.
송민규가 열정적인 레지던트들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내가 먼저야.”
“물론입니다.”
“가자.”
송민규가 앞서자 레지던트들이 그 뒤를 우르르 따랐다.
그 시간 이후로 환자들과 보호자들에게 한층 더 친근하게 다가가는 외과라는 소문이 퍼져 갔다.
그런 이야기를 정민수에게 전해들은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 녀석들이네.”
“나도 이런 효과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좀 의외기는 해.”
“사람이 그렇더라. 내가 100을 줬는데 상대가 하나밖에 안 돌려주면 참 섭섭해. 그런데 그 하나 속에 진심이 담겨 있으면 천 아니, 만을 돌려받은 거 보다 더 뿌듯하더라고.”
“알지. 그리고 그걸 아니까 우리가 잠 못 자고, 대충 먹어가면서도 이 가운을 계속 입고 있는 거잖아.”
정민수의 말에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이런 소식 들을 때마다 이 가운이 자랑스러워.”
태수는 괜스레 입고 있는 흰색 가운을 내려다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레지던트들이 스스로 자처해서 환자들을 더욱 많이 돌아보고 대화도 꾸준히 이어갔다.
그러는 만큼 개인 시간은 줄어들었다.
더불어 태수가 내어주는 숙제를 못할 때도 있었다.
허나 태수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단 한 마디도 야단치지 않았다.
의술은 말 그대로 의학 기술이다.
태수는 의술보다 인술이 앞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사였다.
그렇기에 혼을 내기보다는 격려를 해 줬다.
웃기는 건 그런 격려를 받을 때마다 레지던트들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욱 몰아쳐 갔다.
환자와 더욱 친밀해지는 만큼 자기의 의술을 더욱 발전시킬 욕심이 앞선 탓이다.
태수도 그런 레지던트들과 함께 자기 시간을 쪼개어 그들의 발전에 도움을 줬다.
그러다 보니 돌아서면 한 시간이 흘러 있을 정도로 바빴다.
식사마저도 의료진들끼리 서로서로 양해를 구해야 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식사를 마치고 간호사실에 도착한 태수가 시간을 확인하고 쓴 미소를 지었다.
“점심 먹었는데 두 시네.”
“너무 늦게 드셔서 괜찮으세요?”
수간호사의 걱정 어린 물음에 태수는 어깨를 들썩였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다들 잠도 거의 못 주무셨다는데.”
“간호사분들이 더 걱정입니다.”
“저희는 인원이 되니까 교대하면서 좀 쉬고 있어요. 의사선생님들이 문제지.”
수간호사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응급실에서 보였던 카리스마는 사라진 채 평소대로 참견 좋아하는 아줌마 스타일로 돌아왔다.
빙긋 미소를 지은 태수가 간호사실 뒤를 가리켰다.
“안 그래도 조금 쉴까 합니다.”
“그러세요. 다른 선생님들도 30분씩은 주무셨다는데요.”
“제가 자라고 했습니다. 저도 좀 자려고요.”
“호호. 그런 잔머리는 어디서 나오시는 건지.”
질책하는 말투와 달리 표정은 화사했다.
태수는 가볍게 인사를 마치고 의사휴게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안에는 송민규와 강선호가 TV 시청 중이었다.
문소리에 돌아본 송민규가 얼른 리모컨을 집으려 하자 태수가 막아섰다.
“계속 봐.”
“아닙니다.”
“쉴 때는 눈치 보지 마. 그리고 나도 좀 보자.”
태수의 말에 송민규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병원 밥이 맨날 그렇지 뭐.”
“얼른 안정을 찾아서, 맛있는 거라도 좀 먹으러 갔으면 좋겠습니다.”
송민규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강선호에게 물었다.
“강 선생은?”
“전 다 좋습니다.”
연수가 많이 차이 나는 선배들과의 대화였기에 딱딱한 감이 있었다.
태수가 편하게 하란다고 풀어질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휴게실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뭐 보고 있었어?”
“뉴스 보고 있었습니다.”
“뭐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
“맨날 안 좋은 소리죠. 그래도 세상 돌아가는 거 너무 모르면 환자들과 대화도 안 돼서 챙겨 보고 있습니다.”
송민규의 말에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의 환자들 연령층이 높다 보니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신경을 많이 썼다.
태수도 통 세상사에는 어두웠기에 뉴스 시청에 동참했다.
몇 가지 소식이 지나간 후였다.
앵커 오른쪽 상단에 대형사고 사진이 걸리고 뉴스 멘트가 흘러나왔다.
-충남 공주의 강변공원에서 대형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공주시에서 주관하는 힙합…….
이어지는 앵커의 말을 듣던 세 사람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였다.
그 이야기인 탓이다.
병원에서만 있었기에 실제로 얼마나 큰 사고였는지 아는 의사들이 없었다.
“볼륨 올려.”
“네.”
태수의 말에 강선호가 얼른 리모컨을 잡고 볼륨을 올렸다.
앵커의 멘트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3만여 명이 몰려든 강변공원의 대형 하수구가 무너지는 사고였습니다. 이 사고로 오백여 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오백여 명?”
송민규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태수도 마찬가지다.
예상했던 수보다 너무도 많았다.
외과에 입원한 환자만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실정이기에 약간의 오류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많은 숫자였다.
모두 멍한 얼굴로 변하는 사이에도 뉴스는 계속 진행됐다.
앵커가 앉아 있던 보도국 화면이 바뀌며 헬기를 타고 상공에서 촬영한 화면이 비췄다.
강변공원이 완전히 쑥대밭이 된 모습이다.
그리고 화면과 별개로 기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시는 대로 콘서트장이 예정된 이 장소는 아비규환을 방불케 합니다. 공주시는…….
각 기관의 안전에 대한 이야기가 보도됐지만 태수는 관심이 없었다.
1분이나 지났을까?
또 한 번 화면이 바뀌더니 눈에 너무도 익숙한 장소가 보였다.
동성종합병원 응급실 앞이었다.
기자가 응급실 입구를 등에 지고 보도하는 모습으로 변했다.
-이곳이 대다수의 부상자가 몰린 공주의 유일한 종합병원입니다. 이 곳 의료진은 비상사태까지 선포하며 한 명의 사망자를 제외한 모든 환자들을 살려내는 기적적인 결과를 이뤄냈습니다.
몇 마디 더 이야기한 후 인터뷰가 진행됐다.
먼저 병원장의 얼굴이 화면에 떠올랐다.
-우리 동성종합병원의 전 의료진이 모두 내 가족과 같이…….
조금은 형식적인 병원장의 인터뷰를 듣던 태수가 나지막이 한마디 했다.
“너무 딱딱하시네. 그냥 평소대로 하시지.”
“그럼 뭐라고 하셨을까요?”
“사람 죽어 가는데 살리고 봐야 할 거 아닙니까.”
태수의 대답에 송민규가 실소를 품었다.
“풋! 하긴 병원장님 성격이 그렇게 직설적이라는 이야기는 들은 거 같습니다.”
“화끈하게 결정해 주셔서 외부에서 도움 구하기도 편하기는 했어.”
“그 점은 참 멋지신 거 같습니다. 어? 저기 박완용 과장님 아니십니까?”
다음 인터뷰 주자에 대한 이야기다.
송민규의 말대로 커다란 화면에 박완용 과장의 차분한 얼굴이 보였다.
-공주에서는 이런 대형 사고를 경험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아니,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게 병원의 입장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에도 침착하게 행동한 응급실과 외과, 그리고 모든 병원의 의료진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박완용 과장의 이야기가 끝나자 기자가 질문하는 화면이 보였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의사는 누구입니까?
-누구라고 꼬집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굳이 꼽자면 무엇보다 초동조치에 있어서 신속함을 보였던 의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동조치라고 하시면 응급실 쪽 의사 분들 아닐까요?
-꼭 그렇지는 않지만 그들도 구슬땀 흘려가며 환자들을 돌본 건 사실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두루뭉술한 대답이다.
그 인터뷰에 송민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치프. 과장님 입장은 이해하지만 저렇게 말씀하시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이잖아.”
“저희는 둘째 치고 치프가 고생하신 거는요?”
“글쎄. 그냥 계속 보자고.”
태수는 흐리멍덩하게 대답하며 TV에 집중하는 척 했다.
하지만 내심 얼굴이라도 비췄으면 하는 바람은 어쩔 수 없었다.
유명해지고 싶어서?
그것도 중요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가족에게 자랑스러운 아들로 기억되고 싶은 욕심이 났을 뿐이다.
박완용 과장의 인터뷰가 끝난 후 마지막으로 파견 의료진의 대표로 김기훈 과장의 인터뷰가 방영됐다.
-저희 대전 한길병원 외과 의사들을 포함해 파견에 동참해 준 여러 병원의 의사들에게 또 한 번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동성종합병원의 외과 의사들에게 존경을 보내고 싶습니다. 하석준 과장을 비롯한 모든 의사들이 하나가 되어 환자만 생각하는 모습을 보니 이제 공주는 의료의 불모지가 아니라 선구자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김기훈 과장의 입에서도 결국 태수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병원의 커다란 일이 벌어졌는데 일개 레지던트를 입에 올리는 건 여러 가지 반향을 일으킬 일임에는 분명했다.
태수는 깨끗하게 미련을 버렸다.
아직은 때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