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490
02493 2493화
태수도 이곳이 라파엘종합병원의 내부가 아니었다면 믿지 못했을 일이다.
“끝내줍니다.”
“VVIP란 등급은 쉽게 매겨지는 게 아니니까요.”
“특히 이 병실에 계신 VVIP는 더 특별하고요.”
“맞습니다. 원내에서도 이런 경관과 편의 시설을 갖춘 병실은 10개도 되지 않습니다.”
“외관 구경은 잘했습니다. 이젠 볼 일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수가 부드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앞서 이들의 사정을 들은 후라서 더 이상 날선 목소리는 없었다.
베르테 병원장은 처음과 같이 정중하게 응대했다.
“들어가시죠.”
끼익.
그가 직접 문을 열어 주자 태수와 닥터 크리니코가 함께 들어갔다.
병실 내부도 외관만큼이나 화려했다.
하지만 태수는 더 이상 주변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고급 침대에 누운 40대 중반의 여성에게만 모든 시선을 돌렸다.
대부분의 서양 여인들이 그렇듯이 몸에 부종이 상당히 심해 얼굴이 부각되어 보였다.
그리고 봄이라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는데도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있었다. IV에는 여러 가지 약들이 투여 중이었고, ECG가 연결되어 있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해서인지 제세동기까지 가까운 곳에 자리했다.
그렇게 보호를 받고 있는 그녀의 안색은 창백했다.
그 외에 다른 특징은 목덜미는 물론 얼굴까지 곳곳에 퍼렇고 또 보랏빛 멍이 들어 있는 것이다.
호텔에 누워 있는 이자벨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렇게 눈으로 바로 파악할 수 있단 건 VWD가 상당히 진행됐단 의미였다.
태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흠.’
어제 보스만 부원장에게 구두로 들은 내용을 떠올려 봤다. 대부분 기억하고 있지만 모든 걸 기억할 순 없었다.
태수는 바로 베르테 병원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EMR을 제대로 살펴보며 현 상황과 대조해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의료진을 호출했으니 곧 올 겁니다.”
베르테 병원장의 말이 끝남과 동시였다. 일부러 완전히 닫지 않은 병실 문이 열리며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왔다.
꽤 젊어 보이는 흑인 의사였다.
그가 다가오자 베르테 병원장이 소개했다.
“이쪽은 닥터 파스코, 내과 전문의고 영어에 능통해 닥터 최가 불편하지 않도록 도와 드릴 겁니다.”
짧은 소개에 태수는 닥터 파스코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닥터 파스코가 뭐라고 덧붙여 말하려 한 순간 태수가 잘랐다.
“다른 얘기는 나중에. 우선 환자부터.”
“알겠습니다.”
“가시죠.”
태수는 지체 없이 환자에게 다가갔다.
그 뒤를 닥터 파스코가 따르고, 간호사가 준비해 온 의약품을 올린 카트를 끌고 바쁘게 다가왔다.
병실 내엔 환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몇 명의 보호자도 함께였다. 하지만 병원의 룰을 아는 이들인지 차분하고 침착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태수는 보호자들에게 가볍게 고개만 숙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 후 잠깐 사이 닥터 파스코에게 물었다.
“환자 이름은요?”
“엘라입니다. 나이는…….”
닥터 파스코는 빠르게 환자에 대한 정보를 전해 줬다.
태수가 왜 환자에 대한 정보를 모르는지에 대해선 묻지도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아니, 궁금해할 수가 없었다.
태수는 베르테 병원장이 초청한 NGO 기부 수술 책임자였다.
닥터 파스코로선 범접하지 못할 상대였다.
대답에 집중하는 게 당연했다.
반대로 태수는 닥터 파스코가 필요 이상의 호기심을 갖지 않아 고마웠다.
그래서 대화가 순탄하게 진행됐고, 또 그런 이유로 통역까지 겸한 닥터 파스코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닥터 파스코, 엘라에게…….”
“엘라가 말하기를…….”
태수가 물으면 닥터 파스코가 재빨리 엘라에게 전달, 다시 그 대답을 전해 줬다.
그런 문답이 끝을 모르고 계속 이어졌다.
시종일관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분위기가 좋은 편이었다.
환자를 대하는 태수의 얼굴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이미 태수의 눈엔 환자 외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태수가 이렇게 환자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이유도 분명히 있었다.
그건 닥터 크리니코가 함께인 탓이다.
닥터 크리니코는 베르테 병원장과 함께 보호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 주제는 역시 보호자들에게 낯선 의사인 태수에 대한 정보들이었다.
“NGO에서 닥터 최의 위치는…….”
닥터 크리니코는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만 전달했다.
그 활약상 중에는 NGO 내부에서 소문이 자자한 카슈미르, 네팔 대지진 현장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보호자들은 감탄의 눈빛이 가득했다.
“오오, 그런 분이…….”
보호자들은 태수의 유명세가 괜한 게 아니었단 반응을 보였다.
그런 그들과 달리 베르테 병원장의 표정은 어느새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스윽.
시선을 돌린 베르테 병원장의 눈에 환자를 대하는 태수가 가득 담겼다.
태수는 마치 놀러 나온 듯이 밝은 미소로 엘라를 대했다.
“……그랬는데, 그 이후에…….”
“호호.”
엘라의 얼굴에도 어느새 웃음이 그려져 있었다.
그들 가운데서 통역하는 닥터 파스코의 얼굴도 밝았다.
베르테 병원장은 그런 태수가 놀라웠다.
엘라는 분명 중증 VWD 환자다.
그건 이 특별 병실 내부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그리고 엘라는 장시간 통증이 이어져 상당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엘라의 미소는 베르테 병원장도 상당 시간 마주하지 못했다.
그런 시간들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처음 본 태수와의 대화로 미소 짓고 있었다.
그들을 향한 베르테 병원장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렇게 2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태수의 눈동자에는 불긋한 멍이 가득한데도 불구하고 미소 짓는 엘라가 담겨 있었다.
태수는 그런 엘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조만간 또 찾아뵙겠습니다.”
태수의 말을 닥터 파스코가 바로 전했다.
그렇게 전해 들은 엘라는 닥터 파스코가 아닌 태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땡큐, 땡큐 쏘 머치. 앤드…….”
엘라는 처음으로 영어로 인사했다.
이탈리아인들 특유의 억센 억양이 가득 느껴지는 발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발음적 문제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진심 어린 인사였다.
그 뒤로 이어지는 말들은 다시 이탈리아어로 들려왔다.
그걸 닥터 파스코가 통역해 줬다.
“오랜만에 실컷 웃고 또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고, 닥터 최는 행복 바이러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이러스요? 의사한테 바이러스는 반가운 친구가 아닌데요.”
“……엘라가 그러는데요, 나쁜 바이러스가 아닌 꼭 필요하고 모두가 공유해야 할 바이러스라고요.”
태수가 어깨를 들썩이며 엘라를 바라봤다.
그녀는 잔잔하게 미소를 그린 얼굴로 가볍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걸 본 태수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과분한 찬사 감사합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꾸벅.
태수는 한국식으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 인사를 마치자 엘라가 보내는 정겨운 배웅의 눈빛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야 태수는 몸을 돌렸다.
이젠 밖으로 나갈 차례였다.
그런데 태수 앞으로 기다리고 있던 보호자들이 다가왔다.
그들도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듯 이탈리아어로 뭐라 뭐라 말했다.
그림자처럼 옆에 선 닥터 파스코가 바로바로 통역해 줬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먼 곳까지 일부러 찾아와 줘서…….”
“음, 전해 주세요. 보호자들의 도움이…….”
태수는 보호자들의 역할이 중요함을 새삼스러울 정도로 강조했다.
강압적인 말투는 전혀 없었다.
상당히 진지한 대화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잠시 후.
태수는 큼지막한 인공 연못 근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따뜻한 차가 테이블에 놓여 있고, 주변엔 베르테 병원장과 닥터 크리니코가 자리하고 있었다.
원내 편의 시설 중 하나인 카페테리아라고 했다.
원체 부지가 넓다 보니 곳곳에 카페테리아를 운영해 음료와 간단한 식사를 판매한단 내용도 들었다.
인공 연못의 운치도 좋았고, 카페테리아의 분위기도 상당히 안정감을 줬다.
그렇게 모든 게 좋다고 느껴질 상황이었다.
그런 주변 분위기와 달리 태수의 표정은 상당히 굳어져 있었다.
마주한 베르테 병원장은 그런 태수가 의아한 표정이었다.
분명 병실에서 웃으며 나왔기에 지금 그 모습이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베르테 병원장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닥터 최, 실례지만 무슨 고민이 있으신지요?”
“…….”
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에 빠져 주변 모든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베르테 병원장도 눈치챘는지 더 말하지 않았다.
사실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런 내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 병실에서 닥터 크리니코를 통해 태수의 과거 행적에 대해 들은 탓이다.
내전 지역에서 장시간 머물었던 것도 대단한 일이다. 네팔 대지진 현장에도 그가 있었단 소식도 놀랄 일이다.
그런 모든 소식보다 제임스 박사를 수술한 유일한 의사란 점을 곱씹고 있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조용히 있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베르테 병원장은 그렇게 얌전히 기다렸다.
그런 반면 태수는 여전히 머릿속으로 생각을 이어 갔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태수의 분위기가 너무도 진지했다.
닥터 크리니코는 태수의 집중력에 놀라면서도 이해가 된단 듯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태수의 눈에 초점이 잡히더니 시선을 돌려 베르테 병원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선 엘라는 당장 수술할 수 없습니다.”
“음…… 아예 수술 시기를 놓친 겁니까?”
질문하는 베르테 병원장의 시선이 복잡했다.
태수는 의외로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럼…….”
“몇 가지 선행되어야 할 처치들이 있습니다. 그걸로 경과가 좋아진다면 그땐 수술할 수 있습니다.”
“오, 그렇군요.”
가능성이 있단 소리에 베르테 병원장은 내심 안도했다.
태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행히 제가 경험이 있어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래 주신다면 너무도 감사한 일이지요.”
“그럼 진행되어야 할 사항과 수술 가능한 기준점까지 적어 드리겠습니다.”
태수의 말이 끝남과 동시였다. 베르테 병원장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저, 적어 주시겠단 의미는…….”
“…….”
태수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베르테 병원장이 삼킨 말을 억지로 다시 꺼냈다.
“정말, 정말 그 수준까지 끌어올린 후에 연락 달란 말씀이십니까?”
“네.”
“아니, 닥터 최, 여기까지 오셔서 직접 환자도 보셨잖습니까.”
베르테 병원장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태수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전 기부 수술을 부탁받고 온 겁니다.”
“그야 저도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도…….”
“더 냉정하게 말씀드리자면 전 지금 휴가 중입니다.”
“흐음.”
베르테 병원장이 앓는 가슴을 묵직한 탄성으로 내뱉었다.
태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이런 제가 냉정하다고 말씀하진 말아 주십시오.”
“…….”
“저와 팀원들 모두, 이곳 밀라노에 오기 전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말 그대로 미친 듯이 일하고 왔습니다.”
“그러시겠죠.”
베르테 병원장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자 태수가 다음 말을 덧붙였다.
“물론 저희가 일전에 수술한 환자의 초청을 받아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 저변엔 저희들의 지친 심신을 달래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
“그런데 제가 팀원들에게 희생을 강요한다는 건 잘못된 거 아닙니까?”
태수는 지극히 이치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건 정확한 사실이기도 했다.
태수는 팀원들의 통솔자인 팀장이었다. 팀원들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모습을 누구도 뭐라 할 순 없었다.
그건 병원을 운영하는 입장인 베르테 병원장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긍할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