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713
02716 2716화
남들과 다른 화법으로 원하는 결과의 답을 듣는데, 그 성공률이 높은 편이었다.
태수도 이미 그 거미줄에 걸린 입장이라 순순히 답했다.
“한번 고민해 보겠습니다.”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니까.”
하석준의 말.
분명히 접대성 멘트였다.
그걸 잘 아는 태수가 퉁명스레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냥 부담 가지라고 하시는 게 제 마음이 더 편할 거 같습니다.”
“그럼 그러든가.”
“……네. 그럼 퇴원은 언젭니까?”
태수는 모든 마음을 툭 내려놓고 덤덤히 물었다.
그러자 하석준 팀장은 시원하게 답했다.
“편한 대로.”
“가끔 생각해보면, 팀장님이 제일 너무하시는 거 같습니다.”
“그럼 나에게 레지던트들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단 걸 보여 주지 말았어야지.”
하석준 팀장은 오히려 태수를 탓했다.
그 주장이 억지스럽다고 느껴지지 않는 건 태수가 산증인인 탓이다.
어깨를 들썩인 태수가 쓰게 미소 지었다.
“제가 예전부터 잘못한 거네요.”
“그래. 누구나 레지던트 시절이 있고, 그때 어떤 경험을 하는지에 따라 엄청난 의사로 성장할 수 있단 걸 보여 준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지.”
“……집에 가서 최대한 빨리 고민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태수가 먼저 꼬리를 내렸지만 하석준 팀장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난 사실을 말했지, 협박을 한 건 아니었어.”
“그 말씀이 더 무섭습니다. 일단 퇴원하고 집에서 편안하게 쉬다 보면 생각이 나겠죠.”
“편한 대로 해. 그리고 병원장님이 며칠 전에 결재한 내용은 알고 있지?”
하석준 팀장이 혹시나 한 표정으로 묻자 태수가 쓰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네. 결국 반년 휴직이더라고요. 전 휴직 신청서를 쓴 기억이 없는데 말입니다.”
“난 관여할 권한도 없는 일이니까 병원장님께 따지든가.”
하석준 팀장의 태연한 말투에 태수가 아예 포기했다.
“그럴 재주는 없고요. 듣자하니 병원장님하고 의과장님들이 많이 바쁘시다던데요.”
“당분간은 눈코 뜰 새 없으시겠지. 이런 사고는 원래 뒤처리가 더 오래 걸리니까.”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라 태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요. 좀 잠잠해지면 그때 나타나겠습니다.”
“당장 가운 입겠다고 억지 부리지 않아서 좋아.”
“아직 환자입니다. 그리고 긴장이 풀렸는지 쉽게 마음이 안 잡히네요.”
“그게 쉴 때가 된 거란 증거겠지. 뒤는 걱정 마. 이제 곧 박 팀장부터 하나둘씩 복귀할 테니까. 2차 수술은 좀 더 수월해지겠지.”
하석준 팀장이 대화를 적당히 마치려는 뉘앙스를 보였다.
태수도 같은 생각이라 차분하게 말했다.
“열심히 쉬고 더 건강해져서 돌아오겠습니다.”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거창하기는.”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손이 부족하면…….”
“손이 없으면 발도 있으니까 아예 관심 꺼.”
하석준 팀장이 딱 잘라 결론을 내려 버렸다.
태수도 지금은 그의 결정을 돌릴 생각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아무튼 말씀하신 건 곧 연락드리고, 좀 더 후에 뵐 거 같습니다.”
“대충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고, 병원 일은 아예 생각하지 마. 멀리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둘러보는 것도 필요하니까.”
“지금이 그때인 거 같네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태수가 씩씩하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어차피 돌아올 곳인지라 거추장스러운 인사는 양쪽 모두 사양이었다.
탁.
복도로 나온 태수는 휴대폰을 들어 화이트엔젤 전용 원무과로 전화를 걸었다.
“저 최태수입니다. 금일 퇴원이 결정됐습니다.”
“뭘 전화까지 주셨습니까. 그냥 옷 갈아입고 나가시면 됩니다.”
“당연히 연락드려야죠.”
“뭐, 병원비 내실 것도 아닌데요. 아무튼 전화 감사합니다. 푹 쉬고 돌아오십시오.”
원무과 직원이 밝게 응원하고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내린 태수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움직였다.
잠시 후.
태수는 오랜만에 평상복을 입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입고 보니 환자복이 더 편했다.
“시원한 게 좋았는데…….”
환자복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었다. 그러다 보니 오랜만에 속옷을 입은 느낌이 조금 어색하게 다가왔다.
곧 익숙해질 거라 크게 미련을 두진 않고 한 손으로 덤덤하게 짐을 정리했다.
한편, 병실을 가득 채운 선물 상자들은 레지던트 1년 차들이 도움을 주고 있었다.
주영수가 밤마다 차량 트렁크에 꽉꽉 싣고 집으로 가서 이 정도였다. 그냥 방치했으면 병실이 선물 상자로 꽉 찼을지도 모른다.
과장이 아닌 정확한 사실이었다.
짐 정리를 마친 태수가 레지던트들 중 양정한에게 다가가 한마디 했다.
“양 선생, 미안해. 팔이 이래서 고생만 시키네.”
“아닙니다. 제가 봐도 소중한 선물들이라서 힘들기보다 부럽습니다.”
“부러우면 지는 건데.”
태수가 농담을 건넸지만 양정한은 아직 여유롭게 받아칠 내공이 부족했다.
“언젠가 저도 팀장님처럼 갈 겁니다.”
“입원하려고?”
“입원은 요. 대신 10년 후에 이런 선물 받을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그것도 좋지. 좌우간 정리 좀 부탁할게.”
태수가 나갈 분위기로 말하자 양정한은 바로 이해했다.
“아까 말씀하신…… 다녀, 아니 볼일 마치고 바로 퇴원하시면 됩니다. 영수가 트럭 가지고 온다니까 잘 실어서 보내겠습니다.”
“그래. 부탁하고, 내가 복귀하면…… 해가 바뀌겠네. 좌우간 내년에 보자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겠습니다. 의학 공부는 물론이고, 사람 공부도요.”
그 뒷말을 들은 순간 태수가 진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그게 빠지면 섭섭하지.”
“절대 빼 놓지 않을 겁니다.”
“잘할 거야. 그럼 다들 좀 부탁하게.”
태수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먼저 병실을 나섰다.
자신에게 온 선물들이라 정리도 함께 하고 싶었지만 그게 아직은 쉽지 않았다.
빤히 지켜보기도 뭐하고, 같이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이라서 일부러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퇴원하기 전에 꼭 봐야 할 사람이 있어 바지런히 움직였다.
태수가 걸음을 멈춘 장소는 피부과 전용 병동의 어느 병실 앞이었다.
화이트엔젤 건물이 아닌 병동 건물 안이었다.
그간 화이트엔젤 밖으로 외출이 어려운 몸 상태라 찾아올 수 없었다.
그래서 퇴원하는 타이밍을 노려 찾아왔다.
오는 길에 준비한 커다란 과일 바구니를 보니 좀 더 든든한 느낌이었다.
사실 약간 피곤했지만 든든하게 속을 채워 견딜 만했다.
그리고 지금 서 있는 이 병실 안쪽에 있는 환자를 만나면 병원에서 더 만날 사람은 없었다.
태수는 우선 다시 입원한 환자 이름을 확인했다.
-김슬기.
맞게 찾아왔기에 더 지체하지 않고 노크부터 했다.
똑똑.
“네.”
안에서 김슬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옥상에서 소리치고 발악하던 소리는 아예 느껴지지 않았다.
태수도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선 태수는 유리창 난간에 옆으로 걸터앉은 김슬기를 발견했다.
위험?
그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이었다.
김슬기가 폴짝 내려와 얼른 태수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 반쪽은 여전히 거즈로 가려져 있지만, 다른 반쪽은 의외로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팀장님.”
“좀 늦었죠?”
“아니요. 입원하셨단 소식 들었어요. 그런데…….”
김슬기가 태수의 평상복 차림을 보면서 어떻게 물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태수는 당연히 시원하게 말했다.
“전 이제 환자 아닙니다. 슬기 씨만 환자네요.”
“벌써 퇴원해도 되세요?”
“벌써라니요. 제가 의산데도 병상 체질은 아닌가 봅니다. 지겨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태수가 넉살 좋게 지루한 시간을 표현하자 김슬기가 더욱 환하게 미소 지었다.
“말씀을 참 개성 있게 하세요.”
“좋게 말해서 개성이지만 웃어 주셔서 감사하고, 이건 여기 놓겠습니다.”
“어? 아니, 그걸 왜……. 그렇게 큰 걸……. 이러시면 제가 좀 그래요.”
김슬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간신히 말했다.
태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첫 병문안인데 빈손으로 올 순 없죠.”
“제가 그때 막 못되게 굴었는데……. 그래도 저 보러 와 주셔서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전혀 미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슬기 씨는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요.”
태수가 옥상에서 상황을 좀 더 정확하게 말했다.
그러자 김슬기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소리쳤던 기억은 나는데 정확하진 않아요. 선정이 언니가 계속 안아 줬단 건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요.”
“좋은 기억만 문제없으면 됩니다. 좋지 않은 기억은 얼른 털어 버려야죠.”
“…….”
김슬기가 가만히 바라보자 태수가 싱긋 미소 지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보시는지요?”
“……흐음, 흠.”
점점 숨소리가 커지더니 눈시울이 붉어져 갔다. 태수는 그 모습에 놀라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래요? 아파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흐음, 흐음……. 그때 팀장님이 잡아 주지 않았다면 전, 전…….”
김슬기는 그때의 감정도 다시 떠오르는지 목소리부터 갈라져 갔다.
그걸 본 태수가 차분하게 달랬다.
“지금 이렇게 반갑게 바라보고 있는데 그때가 무슨 상관입니까.”
“그래도요, 그래도……. 훌쩍.”
김슬기는 눈물을 흘리는 자신이 흉해 보이는지 얼른 닦았다.
태수는 그 모습에 더욱 미소 지었다.
“역시 우는 얼굴보다 웃는 얼굴이 더 예쁘십니다.”
“……고마워요. 정말 감사해요.”
“그냥 하는 말 아닙니다.”
태수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러나 김슬기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아니라…… 살게 해 주셔서 고맙다고요. 얼굴이 이렇게 다치고 나니까 전에는 몰랐던 걸 볼 수 있게 됐어요.”
“음, 어떤 건지 여쭤 봐도 될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좀 싸가지 없는 애였어요. 어려서부터 얼굴 예쁘단 소리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제가 예쁜 줄 알고 살았거든요.”
고백 같은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이 해맑았다.
과거에 연연하는 모습이 아니기에 태수도 웃으며 물었다.
“예쁘니까 예쁜 줄 알고 사는 게 잘못된 건 아니지 않나요?”
“그건 좋은데 엄청 콧대 높고 남자들에게 상처도 많이 주고, 못된 말도 많이 하고 그랬어요.”
“그건 좀 흥미로운 과거네요.”
“예식장 매니저로 일했는데, 거기에서 돈 많은 사람들끼리 결혼하는 걸 보니까 저도 어느새 그런 사람이 됐다고 착각하고 살았어요.”
소탈한 그녀의 반응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잘못을 떠나서 그럴 수 있습니다. 저도 매형이 카센터 하시는데, 제가 차 전문가처럼 얘기할 때가 있거든요.”
“그런 게 물든다고 하는 건가 봐요. 거기에 저도 흠뻑 물들어서 기고만장했어요.”
“그랬군요.”
“그런데 얼굴을 다쳤으니까…… 유일한 무기였으니까…… 엄청 충격을 받았던 거죠.”
“네. 그럴수 있죠.”
김슬기의 말에 태수는 옅게 미소 지었다. 그때 김슬기가 보인 반응으로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내용들인 탓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런 민감한 말들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단 점이었다.
태수가 물으려는 사이 김슬기가 먼저 말했다.
“병실에서 원장님이 거울을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지금의 저라고 하시면서요.”
“음.”
“처음엔 보기 싫었어요. 그런데 치료하는 과정을 안 보고 어떻게 스스로 달라지는지 알 수 있겠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보기 시작했고요.”
“그게 변화를 줬나요?”
태수가 묻자 김슬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치료를 받아야 되니까 일단 봤죠. 역시 보기 싫었는데 그래도 꾹 참고 봤어요. 그게 반복되니까 무뎌지더라고요.”
“상처에 대해서?”
“네. 지금은 그 정도인 거 같아요. 그냥 제 상처를 봐도 아무렇지도 않은 정도요.”
김슬기는 너무도 쉽게 말했다.
그런데 그녀가 생각하는 거만큼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정신적 상처를 충격요법으로 부딪치게 해서 무뎌지게 하는 치료법이 있다. 정신의학과에서 주로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성형외과는 얼굴을 다루다 보니 정신적인 문제가 동반된 환자도 많을 게 분명했다.
독학이든, 도움을 받았든 어쨌든 조기한 원장 나름대로 트라우마(정신적외상)에서 벗어나는 노하우를 익힌 모양이었다.
지금은 자신의 현재 모습에 무뎌진 정도였다.
그런데 수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