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749
02752 2752화
이내 대기실 문이 닫혔다.
그와 동시였다.
“에휴휴.”
태수와 정민수는 괜히 긴장했다가 풀어져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런 두 사람을 김혁권이 내려다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어째 아직도 선배란 사람의 행동 패턴을 몰라.”
“…….”
“그냥 쉬고 있어요. 은주 엄마, 갑시다. 여기 공원이 잘되어 있다던데, 성호랑 은주랑 바람 좀 쐬어야죠. 자, 이쪽입니다.”
김혁권은 엄예림을 안내하며 대기실을 나갔다.
탁.
또 한 번 대기실 문이 닫힌 순간이었다.
태수와 정민수는 허탈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봤다.
“앞으로 무조건 형수님부터 모셔.”
“형수님이 아니라 은주야.”
“어차피 함께잖아.”
“그건 그렇지. 젠장. 우린 뭐 한 거냐. 에휴.”
시작부터 기운이 쭉 빠진 태수와 정민수는 회복까지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았다.
잠시 후.
기운을 차린 태수와 정민수는 대회의장 맨 뒤에 서 있었다.
단상엔 박성민이 두 손에 잔뜩 힘을 주고 다부지게 발표를 이어 가는 중이었다.
-……그런 이유로 재난과 재해에 대한 대비로…….
박성민의 목소리는 맨 뒤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마이크를 통한 발표라지만 배에 힘을 주고 말하는 통에 스피커가 징징 울릴 정도였다.
태수와 정민수는 동시에 옅게 미소 지었다.
“역시 할 땐 하신다니까.”
“난 이제 선배가 앓는 척할 때마다 의심부터 된다고.”
“나도 그랬다니까. 그러니까 형수님하고 은주는 생각도 안 했지.”
“그보다 많긴 많네.”
정민수가 슬쩍 둘러보며 말했다.
말 그대로 빈자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단상 옆 스크린엔 박성민의 비장한 얼굴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단상 밑에선 여러 카메라가 촬영을 진행 중이었다.
그 모습을 쭉 둘러본 태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이내 대회의장 밖으로 나오자 뒤따라 나온 정민수가 물었다.
“더 안 봐?”
“선배 목소리 들어 보면 몰라?”
“하긴. 오늘 토론 참석자들도 자리에 있으니까 상관없긴 하지.”
정민수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표 이후 토론을 나눌 인물로는 브레드 김과 서영우, 도성민이 자리하고 있었다.
발표 주제는 재난과 재해 시 의사들의 행동 요령이었다.
당연히 박성민은 별도의 의료팀을 구성해 현장을 찾아가잔 입장으로 발표하는 중이었다.
반대 혹은 부적합하단 의견들이 속출할 거고, 저 세 사람이라면 충분한 현장 경험을 토대로 반박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걱정 없었다.
그렇게 태수와 정민수는 컨벤션 센터 현관 밖으로 나왔다.
툭 터진 하늘이 보이자 태수가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으아, 하늘 맑고 좋다.”
“이야, 진짜 오긴 많이 왔다.”
정민수는 다른 곳을 보며 감탄했다.
태수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컨벤션 센터의 다른 건물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토의가 주로 이뤄지는 장소가 이곳 컨벤션 센터고, 그 외의 건물들에선 각종 행사들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원래 심포지엄은 토의가 주된 일정이었다.
그러나 한국의사협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한 데다 세계의사협회에서도 지원한 덕에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다.
그건 시민들과 함께하는 행사들이었다.
NGO의 역사와 주요 활동, 한국 의학의 시작과 발전 등등 여러 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한 전시장이 꾸려졌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병원에 대한 공포를 지우기 위한 놀이시설도 준비되었다.
그 외엔 세계 여러 제약사와 의료기계 회사들이 미니 박람회를 진행 중이었다.
새롭게 변화하는 의료기계와 신약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그건 결국 비즈니스를 위한 박람회였다.
태수가 넓게 둘러보는 사이 정민수가 말했다.
“아침에 신문 보니까 NGO가 주관하는 행사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라더라.”
“게다가 그 행사를 주관하는 나라가 한국이고.”
“일정도 긴 편이라서 여행객들도 좀 온다던데? 브레드 김은 준비 기간이 짧다며 끙끙거렸는데 말이야.”
“이런 거 보면 우리나라의 저력이 정말 대단한 거 같아.”
태수의 말에 정민수가 슬쩍 덧붙여 말했다.
“이럴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그랜드 타워 화재를 그나마 잘 수습해서겠지.”
“진짜 잘한 걸까?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지만, 그땐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무감각해지진 않네.”
“그게 무감각해지려면 아마 저게 사라져야겠지.”
스윽.
정민수가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그 끝엔 그랜드 타워가 서 있었다.
너무 멀어 손바닥으로도 가려질 정도였다.
가만히 바라보던 태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 심포지엄에 참석한 의사들 일정 중에 저기를 둘러보는 것도 있다며?”
“그렇다나 봐. 우리는 쳐다도 보기 싫은데…….”
“하지만 비슷한 순간이 찾아온다면 도움은 되겠지.”
애써 답한 태수는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에게 본보기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존재 자체가 아픔이다.
아픔이 언제 지워질진 아무도 모른다. 그저 이젠 과거라 치부하며 주어진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게 최선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그때 태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빠라밤.
차분히 꺼내 든 태수는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얼른 받아 들었다.
“네, 이사장님, 최태수입니다.”
“밖으로 나와 있는 거지?”
정용철 이사장은 혹시나 싶었는지 조용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태수는 그가 안심할 수 있게 더 선명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잠깐 발표하는 걸 지켜보고 조금 전에 나왔습니다.”
“생중계로 보고 있는데, 박 팀장이 역시 말을 잘하는 거 같아. 그런데 원래 대본에도 저렇게 장황하게 구성했나?”
“그건…… 선배가 흥이 오른 모양입니다.”
태수의 반농담에 정용철 이사장의 밝은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하여간 우리 박 팀장을 누가 말려. 그런데 처음보다 더 자연스럽게 말하는 건 무슨 조화인지.”
“선배님은 자유를 드려야 날개도 커지시는 분이라서요.”
태수의 비유가 적절했는지 정용철 이사장이 크게 웃었다.
“하하! 그건 그렇지. 아차차, 전화한 건 다름이 아니라…… 오늘 전달식을 하려는데 참석할 건가 해서.”
“최신 방화 장비 말씀이십니까? 그걸 벌써요?”
“놀라기는. 내가 회장님을 모신 지가 얼만데. 이 정도는 사실 늦은 편이라고 봐야지.”
정용철 이사장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일견 당연한 듯이 말했지만 태수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부탁한 게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일주일 만에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최신 방화 장비들의 성능을 비교하고 거래 후, 지금은 손에 쥐고 있단 의미였다.
경악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정용철 이사장의 목소리는 태연하기만 했다.
놀라고 있을 때만은 아니었다.
얼른 정신을 차린 태수가 나지막이 물었다.
“어디 어디에 전달하는 겁니까?”
“이러면 안 되는데…… 우리도 팔이 안으로 굽어서 말이지. 우선 의정부하고 대전, 그리고 천안이야.”
“그렇게 많이 확보가 됐습니까?”
“전부는 아니지. 우리와 밀접한 소방서와 구조대에 우선 전달하고, 순차적으로 계속 공급할 예정이야. 그런데 지금 이걸 내가 전화로 말해야 하나?”
정용철 이사장이 조금 퉁명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차 한 태수는 얼른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직접 찾아봬야 하는데요.”
“그게 아니라 전달식은 어디로 갈 거냐고.”
“그거…… 그냥 저 없이 진행해 주시면 안 됩니까?”
“그럴 거 같긴 했는데, 왜 안 나타나는지 이유는 알려 줘야 회장님께 보고드리지.”
정용철 이사장은 괜히 석정현 회장을 들먹였다.
태수도 뻔히 알지만 순순히 따라야 할 일이기도 했다.
잠시 생각하던 태수가 돌연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데 굳이 얼굴 보고 악수하고, 그런 건 번거롭잖습니까.”
“허, 참.”
“아니면 제가 회장님께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럴 건 없고. 말하지 않아도 안다고 보고서에 적어 넣도록 할게.”
정용철 이사장의 뒤끝이 최대한 느껴지는 대답이었지만 태수는 가볍게 넘어갔다.
“그 정도가 최고인 거 같습니다.”
“아무튼 전달은 잘할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바쁘겠지만 잠깐 여유도 가지면서 기력도 챙기고.”
“감사합니다.”
“그런 인사 받자고 하는 말이 아니잖아. 좌우간 난 슬슬 움직여야 돼서, 나중에 또 전화하지.”
뚝.
전화가 끊어지자 태수도 휴대폰을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정민수가 진하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결국 전달식은 패스야?”
“생색낼 일도 아닌데 쫓아갈 거 뭐 있어.”
“그건 또 그렇지. 그보다 최신 방화 장비라. 조금씩이라도 좋아지고 있으니까 트라우마가 지워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될 거야. 꼭 그렇게 돼야지.”
태수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정민수도 똑같이 행동했다.
그날 밤.
거실 소파에 자리한 태수는 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태수는 피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 태수의 시선이 향한 곳엔 술 파티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주최자야 뻔했다.
호랑이도 제 말은 알아듣는다고, 박성민이 불쑥 일어나 스스로 양손을 붙잡고 가볍게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캄사합니다. 박성민의 첫 스피치를 이렇게 축하해 주시는 여러분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 아름다운 밤이에요!”
“와아!”
이미 벌겋게 취한 팀원들이 두 손을 높여 환영했다.
그러자 기분이 업 된 박성민이 얼른 술병을 들며 소리쳤다.
“오늘도 파뤼 타임! 내가 쏜다, 끝까지 쏜다! 마셔! 다들 어깨춤 출 시간도 없이 꺾어 보자고요!”
“휘익! 팀장님, 최고!”
“멋지다! 섹시하다!”
환호성에 응답하듯 박성민은 팀원들에게 일일이 술을 따랐다.
“아이고, 우리 서 선생님, 아까 답변이 아니라 달변이셨습니다.”
“박 팀장도 고생 많았어요.”
“저야 뭐, 우리 사랑스러운 레지던트들이 차려 준 밥상에 슬쩍 젓가락만 올렸을 뿐이지요. 아차차, 우리 예쁜이들 따라 줘야지!”
박성민의 수선에 집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반면 태수는?
“에휴.”
한숨이 앞섰다.
철저히 준비한 박성민의 자축 파티는 아직 쌓여 있는 술병만큼이나 오래 지속될 조짐이 보였다.
아예 포기한 태수의 시선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향했다.
그 상대는 주영수의 위태위태한 모습이었다.
이젠 성인이라고 한 자리 톡톡히 차지하고 있었다.
가끔 태수와 가볍게 맥주 한잔하기도 했지만, 주당들 사이에서 버텨 낼지 걱정이 됐다.
그런 태수의 옆이 꿀렁거렸다.
풀썩.
“캡틴, 한 잔 안 해?”
브레드 김이 빨간 얼굴로 빙글빙글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러나 태수는 웃기만 할 기분이 아니었다.
“전 신경 쓰지 말고 드세요.”
“왜, 다들 기분 좋게 한 잔씩들 하는데. 발표도 안 했으면 축하는 해 줘야지.”
“아까 보셨잖습니까. 저녁 식사 자리에 불려가서 밥을 먹긴 개뿔, 토론장에서 끝내지 못한 얘기 나누느라 입이 다 아픕니다.”
“오늘 그렇게 달렸으면 됐지. 이틀 정도는 우리 발표는 없으니까 여유를 갖자고.”
“절대 동감이지만, 이걸 쉰다고 말하긴 억지 아닙니까.”
태수는 여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러자 브레드 김이 슬쩍 멀쩡한 어깨를 감싸며 가볍게 당겼다.
“집이야 파티 끝나고 싹 치우고 갈 거니까, 그냥 기분 낼 때 내자고.”
“그렇다고 하고요. 그런데 제임스는 바쁘신 모양이죠?”
태수의 물음에 브레드 김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1년 중에 유일하게 한가한 시간이시잖아. 아는 사람들도 만나고, 좀 쉬기도 하신다고 하시더라고.”
“해가 갈수록 활동을 힘들어하시네요.”
“그…… 그런 경향이 없다면 거짓말이지. 쯧.”
마음이 불편해졌는지 브레드 김이 술을 대번에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태수는 아차 한 얼굴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술맛 떨어지게 했네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다들 쉬쉬하긴 하지만 모르는 것도 아니고. 파견 나가는 것도 슬슬 멈추셔야 할 텐데.”
“그럼 교육 쪽으로 선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태수의 물음에 브레드 김은 가만히 생각하다 어깨를 들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