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050
03054 3054화
“무슨 뜻인지 알았고, 병원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할게.”
“병원의 장점이요?”
“눈과 귀가 어디든 존재하잖아.”
“아…… 그것도 이점이 되겠네요.”
“바람 타고 들려오는 소문까지 막을 수 없을 뿐이지.”
공우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정도를 분명히 지키겠다고 선언한 그의 말을 태수는 신뢰했다.
“환자,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꽉 붙들어 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휴대폰은 꼭 들고 있으라고.”
“당연하죠. 그럼 실례합니다. 김 선생도 수고.”
태수는 기운차게 인사하고 ICU를 나섰다.
조금 서두르는 발걸음이었다.
지금은 흐르는 시간과 계속 눈치 싸움을 해야 했다.
그렇게 복도로 나와 진료실을 향해 가던 중이었다.
태수의 뇌리에 방금 본 김아름의 얼굴이 잠시 스쳤다.
평소와 같이 대답하는 듯했지만 눈빛은 깊은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태수는 순간 쓴 미소를 지었다.
김아름은 예전 인턴 시절에 이미 태수와 정민수의 과거에 대해 대부분 알고 있었다.
그땐 이런 순간이 찾아올 줄 몰랐다.
사실 최근까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때 김아름은 그런 일이 있어서 지금 이렇게 만났다며 좋아했었다.
그건 그때 입장이었다.
지금은 정민수와 부부가 된 후라 와 닿는 마음이 180도 달라졌다.
김아름이 느끼는 분노의 크기가 바로 정민수에 대한 사랑이다.
알지만 태수는 조금 마음이 불편했다.
‘그때 말하지 말걸 그랬나.’
이제 와서 후회해도 늦었단 걸 아는데도 미련이란 녀석이 한 번씩 돌아보게 했다.
그 미련에 연연해 봐야 달라질 건 없다.
그걸 알기에 후회와 미련을 털어 냈다.
걸어가던 태수가 이번엔 쓴 미소를 지었다.
“이런 건 좀 부럽네.”
씁쓸한 기분은 진료실로 향하는 길에 모두 던져 버렸다.
끼익.
진료실에 다시 들어선 태수는 모두를 향해 호탕하게 말했다.
“엡시디는 예상보다 회복 경과가 좋고, 역시 우리 예상대로 엄청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두 가지 추측이 맞아떨어졌단 소식에 모두가 기뻐했다.
환호성이 가라앉자 태수가 차가운 미소를 뿌리며 이어서 물었다.
“언제 움직일지는 몰라도, 우리가 먼저 준비는 끝내야죠?”
“옳소!”
“그런 이유로…… 이번에도 죽어 봅시다.”
태수가 비장하게 말한 순간 화답하던 이들이 움찔거렸다.
“이제 시작인데…….”
“우리 일정도 있는데…….”
“죽어 보자면…….”
도와줄 순 있지만 올인 하기에는 조금 애매했다.
그런 그들의 입장과 똑같은 태수라 모를 리 없었다.
“시간 되고, 체력 되는 대로 도와 달라는 겁니다. 억지와 무리는 절대 사양입니다.”
“그러면 충분한 준비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홍진만이 소심하게 손을 들며 말했다.
태수는 바로 그를 향해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그게 뭐 어쨌는데……. 참고 자료는 말 그대로 자료일 뿐이야. 뭔 말인지 몰라?”
“아니요. 압니다. 무조건 환자가 우선입니다. 그건 당연한 겁니다.”
“그 소중한 걸 종이 쪼가리하고 비교하지 말자. 우리가 욕하는 놈들보다 더 못한 짓을 할 필욘 없잖아.”
“그건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홍진만이 재빨리 고개를 내저으며 강력하게 부정했다. 다른 레지던트나 인턴들, 간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보고야 태수도 무거운 분위기를 거뒀다.
뭐든 계기가 있어야 능률이 오르는 법이다.
그 생각 그대로 모두를 크게 둘러보며 희망찬 약속을 하나 건넸다.
“여기 계신 분들, 자료 조사 다 끝나면…… 그날은 제가 쏩니다.”
“오오!”
“그것도 시작부터 소고기, 물론 한우로!”
태수가 확실한 공략을 건 순간이었다.
고기, 그것도 소고기란 소리에 모두의 두 눈이 뒤집어졌다.
“우오오! 열심히 소고기 하자!”
“한우, 한우!”
타다닥!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두 손이 바로 움직였다.
그런데 다시 조사를 이어 가면서도 입에선 ‘소고기’란 단어가 계속 흘러나왔다.
“소고기, 소고기…….”
눈에선 소고기를 향한 열망의 광채가 번뜩거렸다.
정말 무서울 정도의 집착이었다.
그 집착만큼 속도와 능률이 수직 상승했다.
먼저 공략을 제시한 태수였지만 섬뜩한 집착을 보이자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까지 못 먹고 살지 않았다.
그래도 타인이 사 주는 고기란 항상 특별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래, 실컷 사 줄게.”
그날 저녁.
집 뒷마당에 태수의 차가 멈춰 섰다.
덜컥.
운전석에서 내린 태수는 뒷좌석 문을 열고 자그마한 종이 상자를 꺼내 들었다.
약간 묵직한 느낌의 종이 상자 속엔 복사용지가 한가득이었다.
그걸 슬쩍 내려다본 태수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스마트한 시대라며.”
말만 스마트했다.
왜 이런 자료들은 죄다 인쇄부터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걸 모두 검토하고 취합할 누군가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 누군가는 태수가 유일하진 않았다.
정민수도 비슷한 양을 챙겨 들고 집으로 향했다. 그 사실이 지금 태수에게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앞마당 쪽으로 걸어갔다.
아이들이 잘 놀고 있는지 집 안에 환한 형광등이 비춰지고 있었다.
조카들 볼 생각에 벌써 미소가 지어졌다.
태수가 앞마당에 당도했을 즈음이었다.
“닥터 최.”
영어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옆집에서 들려왔지만 제임스와 스미스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게 의아한 태수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당 한쪽에서 바비큐 파티가 한창이었다. 제임스와 스미스가 보였고, 서강재가 함께하고 있었다.
조카들도 초대받았는지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피부색과 머리카락색이 제각각인 외국인들이었다.
“누구……. 아!”
눈을 가늘게 뜨던 태수가 아차한 얼굴로 변했다.
미국에서 군수송기를 통해 급파된 의료진들이었다.
그들을 깜빡하고 있었다.
태수가 자책할 틈도 없이 반가운 얼굴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심포지엄 중 떠난 제임스의 수술팀 일원인 닥터 조나단이었다.
유쾌한 얼굴로 손까지 흔들면서 크게 부르기까지 했다.
“최!”
“조나단!”
태수는 종이 상자를 데크에 내려놓고 얼른 거리를 좁혔다.
급속도로 가까워진 두 사람은 손부터 맞잡았다.
“최, 이렇게 한국까지 왔는데 안 반겨 주면 되겠어?”
“조나단이 인솔자였습니까?”
“아직 그 정도로 나이 먹진 않았어. 그리고 난 비행기가 출발할 때까지 목적지를 전혀 몰랐다고.”
닥터 조나단의 얼굴에 억울함이 가득했다.
그 짓궂은 미소는 여전했다.
그런데 조금 달라진 점이 있어 태수가 슬쩍 언급했다.
“혈색이 좋아지셨네요. 몸무게도 늘어난 거 같고요.”
“하하, 역시 그렇지? 그때에 비해서 엄청 살이 불어나긴 했어.”
“지금이 더 보기 좋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걸 아는지 조나단의 얼굴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고마워. 아직 식사 전이지? 가자.”
“제가 초대를 해야 되는데…….”
“그러게 말이야. 어떻게 한국에 온 내가 닥터 최를 안내하는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난 거냐고. 하하.”
말만 투정이었지, 유쾌한 웃음이 가득했다.
그와 함께 걸어간 태수는 급파된 의료진들과 만났다.
역시 아는 얼굴이 대부분이었다.
워싱턴과 뉴욕에서 소집된 이들이라 당연한 일이었다.
“닥터 홈즈, 반갑습니다.”
“닥터 최가 있는데 응급이라고 우리를 부르는 멍청한 인간들이 아직도 있는 현실이 슬퍼. 그래도 이건 닥터 최가 갚아야 할 빚이야.”
“하하, 그럼요……. 어? 닥터 빈센트!”
“와우, 한국에 오고 24시간 만에 닥터 최를 만나다니. 박사님들보다 더 만나기 어려운 의사가 되어 있는 줄 몰랐다고.”
닥터 빈센트라 불린 흑인 남자는 하얀 이가 더 도드라질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그들 외에 다른 의료진들과도 인사했다.
그리고 태수는 식사를 겸해서 그들과 잠깐 대화를 나눴다.
주된 주제는 역시 이번 엡시디 차관의 수술이었다.
“국무부 녀석들은 도대체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 응급에 있어서 닥터 최를 믿지 못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거기다 그 장소가 희망병원이야. 심포지엄에서 그렇게 이슈가 된 그 병원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허탈감부터 들었다고.”
“아침에 다 같이 엡시디 차관에게 다녀왔어……. 보기에 어땠냐고? 그걸 말해 뭐해.”
그 외에도 여러 말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그들이 초점을 맞춘 상대는 단연코 한 사람 최태수란 인물이었다.
그들은 태수를 만날 때마다 항상 하는 말이 있었다.
“왜 닥터 최의 실력이 자꾸 저평가 되는 거지? 그것도 응급 환자 문제로 우리를 호출했다는 건 환자에 대한 모독이야.”
그 부분에 있어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특히 닥터 조나단은 자기 일처럼 흥분했다.
“국무부 녀석들 머리엔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거야. 무턱대고 비상소집을 할 게 아니라 전화해서 물어보는 게 순서가 맞잖아!”
“너무 흥분했어요.”
“흥분할 만하지! 쓸데없는 데 돈 버리고 시간 버렸잖아. 미국이 뭐든 최고란 마음가짐이 나쁜 건 아니지만, 응급 의료만큼은 아니라고.”
“…….”
“미국 유수의 병원들이 인정하는 닥터 최를 몰라도 이렇게까지 모르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닥터 조나단은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한참이나 더 투덜거렸다.
옆 테이블에 자리한 제임스와 스미스는 그런 닥터 조나단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다.
특히 스미스가 슬쩍 제임스를 놀리기도 했다.
“조나단이 오랜만에 자네를 만나서 기분이 많이 좋은 모양이야.”
“그랬으면 내 옆에 있었겠지.”
“그야 물론 그렇지만, 닥터 최에게 관심이 쏠렸는데 자네 표정이 한결 좋아 보이는 건 왜 그런 거지?”
“그러는 자네는 다른 줄 아나? ……이상한 걸로 싸우지 말고 술이나 마시자고.”
쨍.
와인 잔을 가볍게 부딪친 제임스는 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그 잠깐 사이 시선이 태수에게 향했다. 태수 주변에 모여 있는 의료진들 모습에 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표현 방법이 조금 다르지만 그건 스미스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조카들은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우와, 다들 삼촌하고 친한가 봐.”
“삼촌 진짜 멋지다. 그런데 사라야, 아까 잠깐 병원 다녀왔잖아. 뭐 들은 거 없어?”
“저분들 미국에서 진짜 유명한 분들이래. 진료비도 비싸고, 예약도 몇 개월 전에 해야 볼 수 있을 정도래.”
윤사라가 들은 소문을 전해 줬다.
그때 오늘은 조카들의 통역을 담당하게 된 서강재가 덧붙여 말했다.
“내가 장담하는데, 저 대단한 의사들이 출발 전에 태수 소식을 들었다면 말이야.”
“네, 들었다면요?”
“절대 한국에 안 왔어.”
“왜요?”
“지금 얘기하고 있……. 아, 영어로 대화 중이지. 대충 요약하면…….”
서강재는 영어로 오가는 대화를 조카들에게 축약해 전달했다.
조카들 두 눈은 더욱 크게 떠졌다.
거기다 미리 태수에게 간단 걸 알았더라면 비행기를 돌렸을 거란 소리까지 들었을 땐 정신이 하나도 없는 표정이 되었다.
통역하는 서강재의 전달엔 과장도 없었고, 누락도 없었다.
그런데 정작 서강재의 표정은 약간 복잡했다.
동기라서 자랑스럽다.
반대로 동기라서 부러웠다.
쫓고 쫓기는 경쟁 사이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스미스와 제임스의 수행 비서로 지낸 지 반년 가까이 됐다.
한국뿐 아니라 함께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내, 외과 구분 없이 다방면으로 보고 또 배웠다.
세계 최고의 의사들을 가장 가까이서 수행하는 장점이었다.
하지만 이론과 실전은 달랐다.
현역을 떠난 제임스와 스미스는 이론적인 부분에 치중해 알려 줬다.
그런데 태수는 이론과 실전, 2마리 토끼를 모두 쥐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그런 의사가 드물지만 전혀 없진 않았다.
그들 속에서도 태수가 특별한 건 젊다는 점이었다. 젊다는 건 이후로도 더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열려 있단 의미와 같았다.
이건 서강재의 개인 생각이 아니었다.
제임스와 스미스가 보증하는 평가였다.
그리고 의사들 중에서도 한 번쯤 들어 봤을 법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써전들이 입을 모아 똑같이 평가했다.
그런데도, 태수가 저평가 받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젊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또 한국인이란 이유도 배제할 수 없었다.
서강재는 같은 의사고, 또 친구라서 그런 태수의 저평가가 더욱 안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