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130
03134 3134화
에반겔로스는 고민하기보다 단칼에 승낙했다.
“오해하지 않겠습니다.”
그 답을 들은 태수는 지금 당장 떠오른 문제점부터 말했다.
“흠, 응급의료대를 운영하기 위해선 사실 엄청난 비용이 듭니다.”
“압니다. 더구나 현재 그리스 상황이 여유롭지 않은 건 사실이죠.”
“그게…… 좀 걸리네요.”
태수는 아무리 전제를 깔았다고 해도 돈 문제가 걸렸다. 당연히 조심스럽게 말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에반겔로스는 의외로 소탈하게 답했다.
“사이먼 기자와도 말했지만 곧 구제 금융에서 벗어날 겁니다.”
“그때가 되면…….”
“넉넉하게 기다릴 생각은 없습니다. 설사 부족하더라도 우선 시작부터 해야 점점 나아질 거 아닙니까?”
“음.”
태수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 쉽게 말하지 못했다.
그럴수록 에반겔로스는 더욱 강단 좋게 말했다.
“그리스인들에겐 돈보다 중요한 자긍심이 있습니다.”
“참, 그 말씀을 들으니까 귀가 쏠리네요.”
“네?”
“우리 한국인들도 그렇거든요. 돈이 없다고 자존심까지 내려놓지 않습니다.”
사실이고 항간에 떠도는 말이다.
‘우리가 돈이 없지, 배짱이 없냐?’
그만큼 자존심과 자긍심 높은 한민족이다.
그리스도 그런 강인한 부분은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에 대해 에반겔로스가 확고하게 한마디 거들었다.
“실은 아침부터 예산을 확보 중입니다.”
어떻게든 밀어붙이겠단 의미였다.
고집과 뚝심이 느껴졌다.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 장치를 만드는 데 적극 나선단 뜻이다.
태수가 계속 아니라고 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어렵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몰랐습니다.”
“사실인걸요. 당장 응급 환자가 발생하면 어떤 의사가 대처할 겁니까?”
“CS응급처치법이 모든 병원에 비치되어 있습니다.”
그가 믿는 구석으로 내민 카드에 태수의 기세가 순간 꺾였다.
“그건 감사하네요.”
“별말씀을.”
“하지만 그래도 어려운 건 변함없습니다.”
태수가 다시 반전을 걸자 에반겔로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 안 된다고 하시는 겁니까?”
“지금 바로 헬기 레펠 할 의사를 어디서 구하실 겁니까. 그리고 책과 실전은 엄연히 다릅니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씀이십니까?”
에반겔로스는 내세운 모든 대처가 막히자 안색부터 어둡게 변했다.
그때 태수가 대안을 제시했다.
“한국에 전화해 보세요.”
“네?”
“외교 쪽으로 움직이시라고요. 저도 응급의료대의 윗선에 장관님 뜻을 미리 전해 놓을 테니까요.”
“그런 방법이…….”
에반겔로스가 눈치챈 듯하자 태수가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문제는 제가 혼자 결정할 수 없어서 멀리 돌아가야 할 거 같습니다.”
“아니요. 아닙니다. 돌아가도 확실한 게 좋죠.”
“그것도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걸 확실하게 해내는 건 저희들 몫입니다.”
에반겔로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배짱과 강단은 확실히 대단했다.
저녁 무렵.
에반겔로스는 조금 전에 돌아갔다.
저녁 식사까지 같이 하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30분?
3시간도 넘었다.
응급의료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순수한 사담들이었다.
그저 멀리서만 바라봤던 서로가 한 발짝 더 다가선 시간이었다.
사실 태수의 눈에 비친 에반겔로스는 그리스에 사는 지인이다.
그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엄수찬 장관에게는 그의 뜻을 전해야 했다.
시차상 한국은 이제 점심시간이 지났을 터였다.
태수는 지체하지 않고 전화했다.
뚜루루.
“최 팀장?”
“네. 장관님, 노을이 예쁜 저녁입니다.”
“여긴 해가 쨍쨍해.”
“아, 저 멀리 신전에 걸친 해가 진짜 예쁜데 이 느낌을 공유할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
태수는 넉살을 가득 부렸다.
그리스에 온 후로 몇 번 전화를 했기에 이럴 수 있었다.
그런 태수가 괘씸한지 엄수찬 장관이 강하게 뒤끝을 부렸다.
“응급의료대 전원을 당장 소집해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제가 잘못했습니다. 긴급 소집령은 참아 주십시오.”
“그러게 왜 기분 좋게 밥 먹은 사람을 건드리고 그러나. 아니지, 그냥 전화한 걸 아닐 거야. 그렇지?”
엄수찬 장관이 뭔가 느낌을 받은 듯했다.
태수는 그게 더 의아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까 아침에 사위가 이름도 모르는 길거리를 헤매고 있다고 하소연하더라고.”
간단한 설명이었지만 태수는 바로 알아들었다.
“그럼 짐작하시는 게 무리가 아니네요.”
“에반겔로스가 무슨 말을 했나? 혹시 그리스에 귀화하란 소리는 아니겠지?”
“그런 말은 꺼낸 적도 없으니까 걱정 접으셔도 됩니다.”
“그럼?”
“응급의료대 만들고 싶답니다. 그래서…….”
태수는 간단하면서도 요점을 빼놓지 않고 말했다.
곧 태수의 보고가 마무리되어 갔다.
“……그렇게라도 진행할 거라고 합니다.”
“최 팀장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거 같나?”
“전 현장직이라서요. 머리 쓰는 일이 영 어렵고 불편합니다.”
태수가 은근히 빠져나가려 했지만 엄수찬 장관은 빈틈없이 막아섰다.
“그 현장에서 직접 영업하면서 느낀 점이 있을 거 아니야.”
“제가 영업직이었습니까?”
“만능이지. 그래서 생각한 건?”
엄수찬 장관은 맡겨 둔 생각을 내달란 듯 당당하게 요구했다.
태수를 알기에 이렇게 몰아치는 거였다.
그건 태수도 인정했다.
이제 와 발을 빼기엔 너무 보여 준 모습이 많았다.
괜히 심력 소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간단하게 말했다.
“팀원들을 차출해서 그리스에 파견을 보내는 건 어떨까요?”
“음, 계속해 봐.”
“제가 외교적인 건 잘 모르지만…….”
태수가 단서를 달려 했지만 엄수찬 차관은 그조차도 막아섰다.
“관심이 없는 거지, 모르는 게 아닌 걸 내가 모를까 봐?”
“흠흠! 아무튼 귀동냥으로 들은 게 있는데…….”
태수는 사이먼 기자와 에반겔로스가 나눈 대화를 엄수찬 장관에게 전했다.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엄수찬 장관을 믿기에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었다.
“……그렇답니다.”
“그리스의 악재가 곧 끝난다라……. 그럼 그 전에 빚을 좀 지어 줘야지. 자긍심 높은 사람은 어려울 때 도와준 이웃을 잊지 않으니까.”
그가 어느 정도 결심을 굳힌 듯하자 태수가 슬쩍 물었다.
“이 정도면 출장 잘 온 거 아닙니까?”
“……괜히 엉뚱한 데 숟가락 얹지 말고 내려.”
“제가 영업한 거라면서요.”
“그건 사실이지만, 그 영업을 위해서 날아간 건 아니잖아. 그건 분명히 하자고.”
“저 이번엔 합법적으로 나왔는데요.”
태수가 아무리 억울해해도 엄수찬 장관은 마주 응수했다.
“이번에도 그냥 나갔으면 다시 못 들어오는 거지.”
“국제적 미아를 만드시겠다고요? 그런 말씀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때 내 속 타들어간 거 다 치유하려면 아직 멀었어.”
“……제 잘못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유능한 죄도 죄야.”
엄수찬 장관의 대답이 굳건했다.
그렇다고 날선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두 사람만 통하는 농담 중이었다.
그런 가벼운 분위기도 잠시였고, 태수는 조금 묵직하게 말했다.
“응급의료대가 한 번쯤 자극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 점은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쪽에서 곧 의사를 타진해 올 거 같으니까 나도 좀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어.”
“평온한 오후를 방해해 죄송합니다.”
“아니야. 내 실적 올라가는 일인데 기쁘게 뛰어야지. 후후. 그럼 영업은 그만하고 편히 쉬다가 오도록 해.”
뚝.
자연스럽게 전화가 끊어졌다.
그런데 태수는 뭔가 살짝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후후? 그 웃음이 심상치 않은데……. 몰라. 귀찮아.”
벌렁.
태수는 그냥 침대에 누웠다.
난데없이 머리를 썼더니 모든 생각이 귀찮아졌다.
살짝 잠이 들까 싶던 순간이었다.
띠릭, 벌컥!
객실 문이 격하게 열리며 정민수가 거칠게 들어왔다.
“야야, 태수야, 최태수!”
“나 안 죽었거든?”
부스스 눈을 뜬 태수가 흘겨봤다.
그런 태수의 눈빛도 뒤로한 채 정민수가 다급하게 말했다.
“째려볼 시간 없어.”
“왜 없어?”
“우리 내일 핀란드 가야 돼!”
너무도 엉뚱한 소리에 태수가 저쪽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피곤하면 누워.”
“진짜야. 세미나 주제 발표도 해야 된다고!”
“민수야, 왜 그래, 아프면 병원에……. 아, 내가 진찰해 줄까?”
“나 진지하거든!”
정민수가 버럭 소리치자 태수는 더 크게 응수했다.
“인마,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를 너 같으면 믿겠냐!”
“내가 괜한 소리를 할까!”
“넌 그럴 놈이야!”
“뭐? 이 자식이!”
둘이 난데없이 으르렁거릴 때였다.
텅!
객실 문이 덜 닫혔는지 다시 다급하게 열렸다.
그리고 이번엔 김혁권과 송현미 간호사가 나란히 달려와 물었다.
“세미나는 또 뭔 소립니까?”
“우리 진짜 핀란드 가는 거 맞아요?”
두 사람의 반응을 봄과 동시였다.
태수는 정민수에게 바로 사과부터 했다.
“미안.”
“진짜 못 믿었던 건 아니지?”
정민수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물었다.
태수는?
스윽.
천천히 시선을 돌려 송현미 간호사에게 물었다.
“……내일 떠난다고요?”
“내일 아침에 떠나서 내일 저녁에 주제 발표한대요. 아니, 모르셨어요?”
“전혀요. 그런데 그건 누가 말한 겁니까?”
태수의 질문과 동시였다.
객실 문 쪽에서 뜬금없이 입으로 만들어 낸 효과음이 들려왔다.
“빠밤. 누가 말해 줬냐고 물으시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 그 소문을 퍼트린 장본인은 바로 이 위대한 치프 박성민이란 말씀.”
“저희 진짜 갑니까?”
태수가 진심으로 물었다.
그 순간 박성민이 찡긋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했다.
“짐 싸자.”
다음 날 아침.
태수와 팀원들은 공항 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다들 얼떨떨한 분위기였다.
“새벽에 일어나서…….”
“카테리아나한테 인사만 하고…….”
“바로 4시간 달려서 아테네 공항?”
“아직 우리 한 끼도 못 먹었어요.”
한 마디씩 하며 지금 심정을 강하게 내뱉던 중이었다.
이기준이 조용히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매번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겁니까?”
그 말에 모두가 격하게 동감했다.
“어떤 일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사전 통보 좀 해 줬으면 좋겠어요.”
“이젠 트렁크 싸는 데 달인이 된 거 같아요.”
“난 아예 출동용 트렁크를 만들어 놨다니까.”
한 마디가 순식간에 열 마디가 됐다.
그때 태수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번엔 세미나 주최측에서 연락이 왔다잖습니까. 대신에 며칠은 거기서 쉬었다가 귀국할 거고요.”
“당연히 쉬어야지. 비즈니스 좌석이 이코노미로 바뀌었는데.”
“그야…….”
태수가 뭐라고 말하기 직전 정민수가 흘겨보며 먼저 말했다.
“저기 티켓팅 대신해 주는 이소클라스 얼굴 못 봤냐? 카테리아나 병원비는 걱정 말라고, 그러니까 비즈니스 타고 가시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걸 부득불 우기고 또 우겨서 결국 이코노미로 바꿨네?”
유병태가 말하자 그 뒤를 도성민이 이어 갔다.
“우리는 졸지에 구겨져서 가게 생겼고.”
“최 팀장 하는 일이 그렇지, 뭐.”
이기준이 또 마침표를 찍어 줬다.
그렇게 한껏 불만을 표하는 듯했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툴툴거리던 모두가 동시에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들 중 대표로 박성민이 말했다.
“우리 태수가 가끔 이렇게 대견하고 또 인자하며……. 에, 또…….”
“비행기 시간도 촉박한데 대충 끝냅시다.”
“그래요. 아무튼 그렇다고……. 어? 그러고 보니까 아저씨.”
박성민이 방금 도움을 준 김혁권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