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200
03204 3204화
“……젠장. 아무튼 그래서?”
“지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아직 이해 못한 모양이네.”
태수는 쓰게 웃었지만 이기준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그럼 알아듣게 말해.”
“연성의 이기준이 아니라고.”
“…….”
“연성에서 차경석 눈치 보고 조마조마해하던 그 이기준은 세상에 없어.”
태수가 묵직하게 조언했다.
그랬다.
이기준이 불안해하는 건 차경석 병원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그건 이기준의 탓이라고 볼 수 없었다.
오랜 시간 연성대학병원에서 근무하며 알게 모르게 스며든 세뇌와 같았다.
병원장은 병원의 절대자다.
당시 평의사였던 이기준은 차경석과 비교하면 코끼리 앞의 개미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머릿속에 자리 잡은 개념이 아직도 유지되는 모양이었다.
반면, 태수에게 차경석 병원장이란 그저 귀찮은 존재였다.
의사 같지도 않은 의사?
태수의 눈엔 그저 빈대, 벼룩과 동급이었다.
이기준과는 정반대였다.
그건 태수가 정신적으로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태수는 연성병원에서 인턴 때 일한 게 전부였다.
차경석 병원장의 얼굴은 알지만, 말 한마디 나눠 본 적 없었다.
처음 대화한 게 박성민의 결혼식장이었다.
그런 태수에게 차경석 병원장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기준도 태수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정말 한 대 강하게 얻어맞은 듯 머릿속이 멍한 표정이었다.
그건 잠깐이었다.
곧 이기준의 떨림이 멈췄다.
이어서 입술이 일자로 꽉 다물어지고 표정이 삭막할 정도로 차갑게 변했다.
“그래. 난…… 희망병원 수술팀장 이기준이지.”
“이제 자아성찰을 하면 어쩌자는 거야?”
“입 다물어.”
냉담한 그 반응에 태수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 좀 너답다.”
“……간다.”
끼익.
이기준이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태수가 얼른 한 소리 했다.
“술 퍼마시고 내일 지각하면 죽는다.”
“내가 너냐?”
차갑게 쏘아붙인 이기준이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텅!
태수는 어느새 미소 짓고 있었다.
“자식.”
내일 아침 밝은 얼굴로 나타날 이기준의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잠시 후.
태수는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도 미소 가득한 얼굴이다.
그런데 그 미소의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무임승차도 정도껏이다.
“그럼 이제 표 값을 받아 볼까?”
조금 차가운 미소 그대로 휴대폰을 조작했다.
그렇게 찾은 건 나진현 한국의사협회장의 전화번호였다.
태수는 느긋한 손짓으로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
몇 번 신호음이 들리더니 곧 전화가 연결됐다.
그런데 나진현 협회장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먼저였다.
“최 팀장, 내가 회의 중이라 끝나고 전화하지.”
“……알겠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럼.”
뚝.
통보를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휴대폰을 내린 태수의 얼굴에 쓴 미소가 진하게 걸렸다.
“회의라……. 중요하지.”
말만 그랬다.
이상하게 썩 믿음이 가지 않았다.
시간을 벌려는 느낌이었다.
물론 증거는 없다.
막연한 짐작이 전부였다.
생각하던 태수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따가 알게 되겠지.”
조급할 이유가 없었다.
스윽.
자리에서 일어난 태수는 내일 수술이 예약된 환자를 떠올리며 진료실을 나갔다.
그리고 1시간 정도가 지난 후였다.
끼익.
진료실 문이 열리더니 태수가 휴대폰을 귀에 대며 들어왔다.
방금 통화가 시작됐는지 상대의 안부부터 물었다.
“협회장님,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별고 없으셨죠?”
“덕분에. 그보다 아깐 실례했어.”
나진현 협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깐 당혹감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한층 차분해져 있었다.
태수는 그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좀 더 느긋하고 여유롭게 응대했다.
“제가 타이밍을 잘못 맞춘 겁니다. 그보다 회의는 잘 끝나셨습니까?”
“다행히도. 그런데 오랜만에 이렇게 목소리를 듣는 거 같아.”
“하하, 이거 죄송합니다. 제가 한번 연락을 드린다고 생각만 하고 이제야 연락을 드립니다.”
태수가 웃으며 사과하자 나진현 협회장도 가볍게 응했다.
“무슨 소리. 최 팀장 바빴던 걸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내가 모를까.”
“부끄럽습니다.”
“그 엄청난 업적들을 그렇게 평가절하하면 되나. 그건 안 될 말이야.”
“하하, 이거 참.”
태수가 멋쩍게 답했다.
그때 신기하게도 나진현 협회장이 먼저 선수 쳤다.
“이번 감사단 일정 때문에 전화한 건가?”
그의 목소리에서 확신이 느껴졌다.
태수는 그 순간 직감했다.
회의 내용이 자신과의 통화 내용이었던 모양이다.
느낌이 그런 거 같았다.
그런데 그게 진짜라고 하니 황당했다.
‘하여간 잔머리는.’
왜 다들 이럴 때만 필사적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먼저 전화를 하고 또 직접적으로 물어 왔다.
그건 아마 이미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뒀단 의미일 터였다.
태수는 쓴 미소를 지었다.
머리싸움이 싫은데 자꾸 하자고 한다.
그렇다고 그쪽 계획대로 따라 줄 생각도 없었다.
태수는 바로 결심했다.
짧고, 굵게.
자질구레한 대화도 생략하고 싶었다.
그 결심 그대로 입을 열었다.
“저희에게 어떤 이득이 돌아올까요?”
“여전히 직설적이야.”
“화끈한 삶을 항상 꿈꾸고 있습니다.”
태수의 짓궂은 대답을 나진현 협회장이 너스레를 떨며 받아쳤다.
“최 팀장은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은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저도 욕심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도 다 같이 잘되면 좋은 거 아닌가?”
“노력한 결과에 대한 보상이 똑같으면 아무도 노력하지 않겠죠.”
태수가 핵심을 바로 건드렸다.
나진현 협회장도 예측 범위였는지 바로 질문이 들려왔다.
“원하는 게 있나?”
“저희 병원 뒤에 기초공사 시작됐단 소식 들으셨을 겁니다.”
“음, 희망마을이라고?”
역시 그도 알고 있었다.
아마 한국의 주요 도시에 자리한 대형병원 혹은 대학병원까지 알려졌을 터다.
희망병원의 의료진들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그리고 어느 단체, 어느 소속이든 호사가는 존재했다.
거기다 희망병원은 전국적으로 예의 주시하는 병원이었다.
당연히 소문이 빨리 돌 수밖에 없었다.
태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네. 1차로 전원주택 100채가 동시에 지어질 겁니다.”
“석 회장님 통이 확실히 크긴 하신 모양이야.”
“저도 통이 크다고 생각하는데, 나란히 걸어 보면 항상 뱁새가 됩니다.”
태수가 은근히 넉살을 부렸다.
굳이 딱딱하게 경계하며 대화할 이유가 없던 탓이다.
그건 나진현 협회장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석 회장님은 천성이 사업가야. 황새가 걸어가면 그냥 바라만 봐. 만년 뱁새인 의사는 따라가 봐야 병만 얻어.”
“안 그래도 찢어질까 조심하고 또 조심합니다.”
“그래. 건강 잘 챙기고 있다니 다행이야.”
그가 약간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화가 통한단 느낌을 받는 모양이었다.
태수도 이쯤 됐으니 원하는 걸 시원하게 밝혔다.
“그런데 건강을 모니터 하려니까 ECG가 부족한 거 같습니다.”
“음, 그럼 협회에서 환자들 건강을 위해 기증해야지.”
“호흡곤란도 가끔 오고요.”
“……숨 쉬는 건 참 중요하지. 혹시 또 있나?”
“AED는 비치해 뒀으면 합니다.”
태수가 술술 말하자 나진현 협회장의 목소리가 뚱하게 변했다.
“협회 재정 거덜 내려고?”
“원하는 걸 말하라고 하셔서요.”
“흠.”
“예산이 좀 그런가요? 그럼 그냥 숨 막혀 죽죠, 뭐.”
태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 속엔 확실한 계산이 담겨 있었다.
기브 앤 테이크.
어떤 거래에도 손익을 구분하는 건 필수였다.
그걸 직감했는지 나진현 협회장이 외려 만류했다.
“숨 쉬게 해 준다고 했잖아. 혹시 또 있는 건 아니겠지?”
“그 이상 바라면 도둑놈이죠.”
“……그래. 그런 생각도 한다니까 다행이야.”
황당함이 가득한 대답이었다.
태수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전 이제 협회장님을 반갑게 뵐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내 입장은 생각 안 해 주는 건가?”
“혹시 저한테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부탁 하나 맡겨 놓도록 하지.”
언제라도 부탁하면 한 가지를 들어 달란 의미다.
태수는 순간 에반갤로스가 떠올랐다.
“아, 제가 약속은 함부로 하지 않는 주의라서요.”
“된통 당했나?”
“그 약속 때문에 그리스까지 날아갔습니다.”
“그런 비하인드가 있었나 보네. 난 무조건 들어 달란 게 아니야. 최 팀장이 판단해서 들어줄 수 있으면 들어주면 돼.”
나진현 협회장이 단서를 하나 붙였다.
곱씹어 보면 태수에게 나쁠 게 전혀 없는 조건이었다.
게다가 상당한 의료기기를 요구했는데 순탄한 수락도 의아했다.
그 모든 걸 더해 보니 한 가지 결론을 찾아낼 수 있었다.
‘끈 달기라.’
태수, 아니 희망병원과 척지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의 계산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세계의사협회장을 움직이는 의사라면 등 돌려 봐야 스스로 피곤했다.
그때 생각하던 태수의 눈이 순간적으로 가늘어졌다.
혹시나 하고 있던 추측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단 생각 탓이었다.
지금껏 호탕한 대화를 했다.
그걸 바탕 삼아 태수가 생각한 걸 바로 물었다.
“혹시 내일 연성대학 이사회 발표와 뭔가 연관이 있으십니까?”
“……최 팀장도 소식이 빠른 모양이야.”
“음, 그렇군요.”
서로 두루뭉술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정도로도 충분히 앞뒤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때 나진현 협회장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국제적인 손님이 도착하기 전에 치울 건 치워 놓아야지 않나?”
“저희야 감사한 일이죠.”
“우리 쪽도 마찬가지야.”
나진현 협회장은 소탈하게 말했다.
그 말은 연성대 의대 출신들이 협회에서 어깨 좀 펴고 다녔단 소리와 같았다.
역시 사람이 많이 모이면 패가 나뉘는 모양이다.
태수는 알아들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뭔지 몰라도 서로 좋은 일이면 된 거 같습니다.”
“그게 중요한 거겠지. 이번 손님 다녀가면 서로 위로하고 격려는 한번 해야 하지 않을까?”
“전화 주십시오. 지갑 놓고 몸만 달려가겠습니다.”
태수가 넉살 좋게 답하자 나진현 협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 말 괜찮네. 내가 써먹을 곳이 마땅치는 않지만 말이야.”
“안타깝네요.”
“시간을 막을 순 없으니까.”
“그건 불가능하죠. 그럼 오늘 통화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후에 연락 주십시오.”
태수는 적당한 선에서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스윽.
휴대폰을 내린 태수가 진하게 미소 지었다.
“깔끔하고 개운하고, 얼마나 좋아.”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는 사회가 아름다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