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283
Chapter 051화.
사루비아를 보호하려는 게 아니었다.
모두의 반응을 보고 슬쩍 사루비아를 뒤로 빼는 거였다. 거부하지 말고 받으란 의미가 가득 담겨 있었다.
행동으로도 충분히 뜻이 전달될 수 있었다.
태수는 돌려주려는 마음을 바로 접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들에게 하나 씩 나눠줬다.
정민수에게 가장 큰 옷을 주면 되는 거였고, 다른 세 사람은 사이즈가 엇비슷했다.
양손으로 펼치니 마치 탐스런 머릿결이 찰랑거리는 듯 했다.
거기에 가볍기까지 했다.
그렇게 고급 소재로 만든 옷은 바로 조끼였다.
태수는 바로 위에 걸쳤다.
스윽.
입는 순간 따스함부터 달랐다.
거기다 얇으니 위에 가운을 걸쳐도 활동에 불편함이 없을 거 같았다.
약간 맞지 않는 부분은 적당히 수선하면 문제없었다.
다가올 겨울에 딱 맞는 선물이다.
“최고다. 최고야.”
태수는 잔잔하게 중얼거렸다.
그사이 정민수와 브레드 김, 김혁권도 조끼를 입었다.
다들 감탄의 말부터 내뱉었다.
“와, 이거 끝내준다.”
“실크? 그 레벨이 아니야.”
“어후후, 이게 얼마짜리야. 내가 살아생전에 이 귀한 걸 입어보다니.”
김혁권은 손으로 연실 쓸며 감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사이 태수는 사루비아를 안아든 카르하반에게 다가갔다.
척.
도착과 동시에 태수는 사루비아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루비아가 빤히 바라보더니 곧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양손을 활짝 펴 태수의 품으로 옮겨왔다.
태수는 따스한 손길로 사루비아를 진하게 안았다.
그런 태수의 품을 느끼는지 사루비아의 얼굴에 긴장이 풀어지며 울음이 걸렸다.
“흐윽.”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태수는 좀 더 강하게 사루비아를 끌어안았다.
“…….”
여전히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마음을 다해 소중히 안고 있는 게 전부였다.
곧 들썩이던 사루비아의 몸이 안정을 찾아갔다.
진정된 걸 온몸으로 느낀 태수가 가볍게 사루비아와 거리를 벌려 시선을 마주했다.
울음 가득한 사루비아의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가득했다.
태수는 그 미소 속에서 설핏 사비의 얼굴을 봤다.
항상 보여줬던 그 천진난만한 미소였다.
스윽.
태수의 입꼬리가 움직이더니 그 미소를 따라했다.
그 미소는 사비를 향한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어린 소녀, 사루비아를 향하고 있었다.
잠시 후.
철수 준비를 마친 PKO 트럭들과 지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르릉.
점점 마을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프 뒷좌석에 자리한 태수가 뒤를 힐끔거렸다.
마을 사람들이 광장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은 지금까지 방문한 모든 마을과 같았다.
이잠바크, 사하드, 네팔 ABC의 마을들.0
똑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고마움과 감격은 매번 더해졌다.
이번에도 자신들은 부족했다.
그 순간엔 최선을 다했다지만 돌아서면 이렇게 해일 같은 거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꽈악.
태수는 남몰래 주먹을 쥐었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항상 떠나는 순간 밀려오는 후회가 씁쓸했다.
그때 옆에 자리한 제임스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들이 받은 건 선물이 아니야. 저들의 마음이고 고마움이지.”
“…….”
“그건 아무에게나 주지 않아, 또 아무나 받을 수 없어. 자네들의 노력과 열정이 저들에게 닿아야 가능한 일이니까.”
“…….”
태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때 제임스의 한마디가 더 들려왔다.
“그게 진짜 의술이야. 와보길 잘했어. 정말 잘했어.”
마지막 말은 잔잔히 곱씹어 읊조렸다.
태수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하러 온 게 아니었다.
그때 그 마음에 변화가 있는지 보러 온 거였다.
다름없단 걸 이렇게 확인했으니 제임스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가득했다.
마쿠트를 떠난 지 몇 시간 후.
PKO 군용트럭 행렬은 길고 긴 산길을 벗어나 평지를 달리고 있었다.
그 트럭들 사이에 유일하게 지프가 보였다.
지프는 샘 분대장이 운전 중이었고, 조수석은 비어 있었다.
대신 뒷자리에 두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태수와 제임스의 얼굴이었다.
정민수와 김혁권, 브레드 김은 각자 다른 트럭으로 흩어졌다. 제임스와 함께 복귀하는 게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지프 속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특히 태수는 상기 된 얼굴로 제임스에게 그간 자신의 행적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사하드에서 일정을 마치고 복귀…….”
“음. 그래. 그랬군.”
제임스는 간간히 추임새를 넣으며 호응했다.
태수는 그저 있었던 사실만 말하지 않았다.
그 여정 속에서 무엇을 경험했고, 또 무엇을 느꼈는지도 숨기지 않고 내뱉었다.
“그때 닥터 슈미트가 해준 말들이…….”
“그래. 수술에 주인은 없는 거지.”
“사실 오하메드 환자 응급 때도 써먹었습니다.”
그 소리에 제임스가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반응이 어땠나?”
“한 마디에 다 끝났죠.”
“후후, 그랬군.”
제임스는 태수의 길고 긴 얘기를 끝까지 경청해줬다.
그러다 반대로 제임스가 태수에게 조언을 해줄 때도 있었다.
“카르하반이라고, 그런 입장이라면 그걸 무조건 억지라고 보긴 어렵지.”
“저도 나중에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땐 눈앞에 그의 행동에 너무 화가났거든요.”
“사람은 자기 눈으로 보는 세상밖에 몰라.”
묵직한 한마디에 태수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점점 절감합니다. 저마다 사연이 있고, 또 제가 감히 상상 못할 세상이 있다는 걸요.”
“의기소침할 건 없어.”
“그게 쉽게 털어지지 않네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나.”
제임스가 격언에 비유했지만 태수는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다른 세상을 보게 될 거야.”
“네. 맞습니다.”
태수가 차분히 대답하자 제임스가 부드러운 얼굴로 덧붙여 말했다.
“그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돼.”
“흐음. 어떻게요?”
“어디에 자신을 짜 맞추지 않도록 해. 하나에만 집중하면 다른 걸 볼 수 없으니까.”
제임스의 조언을 듣자 태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한때는 편협한 삶을 살았던 사람의 말이니까 믿어도 돼.”
제임스는 덤덤하게 스스로의 과거를 흘렸다.
그러나 태수는 가볍게 듣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닥터 제임스.”
“나도 내 시선이 좁고 얕았단 걸 깨달은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어.”
“…….”
태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때 제임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재차 입을 열었다.
“NGO에 오고야 내가 살아온 삶이 전부가 아니란 걸 알게 됐으니까.”
“그러셨군요.”
“그런데 닥터 최는 내가 왜 NGO에 왔는지 아나?”
제임스가 뜬금없이 물었다.
태수는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그걸 내가 어떻게……. 윽.’
그 순간 태수의 머릿속 한쪽이 욱신거렸다.
툭.
뭔가 막혔던 둑이 무너지는 느낌도 받았다.
동시에 태수 머릿속에 낯선 기억들이 파르륵 떠올랐다.
그 사진은 젊은 시절의 카프레네와 제임스부터 시작됐다.
기억일까?
아니, 추억인가?
아니다.
이건 그들이 함께한 과거이자 살아온 삶의 파편들이었다.
풋풋한 두 사람이 대학교 캠퍼스에서 처음 만난 날.
웃고, 싸우고, 고주망태가 된 모습들.
카프레네의 결혼식, 제임스의 결혼식.
각자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들과 그 아이들이 자라며 공유하는 일상의 행복들.
또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모습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수백, 수천 개의 사진들이 순식간에 머리를 꽉 채웠다.
그건 잠깐이었다.
순식간에 모여든 사진이 흩어졌다.
그리고 한 장의 사진만 남았다.
미국의 어느 무덤 앞에서 오열하는 제임스 모습이었다.
그런 제임스 뒤에 카프레네와 카프레네 부인이 침통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무덤에 쓰인 이름은?
– 제임스 jr.
‘jr’은 주니어, 대체로 첫째 아이에게 이름을 물려준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제임스의 분신이자 가장 사랑하는 아이란 뜻도 있었다.
그 이름을 떠올림과 동시였다.
“주니어. 흡.”
희미하게 중얼거리던 태수가 스스로 놀라 입을 꽉 닫았다.
그와 동시였다.
찌릿.
제임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훈훈했던 지프 속 분위기가 급격히 냉랭해졌다.
제임스는 바로 태수에게 물었다.
“방금 뭐라고 그랬나?”
“제가요?”
철렁.
태수는 심장이 순간 방광까지 뚝 떨어졌다.
순간 눈앞이 껌껌해졌다.
이건 또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한단 말인가.
태수는 암담해졌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 아닌 탓이다.
‘진짜 왜 이러냐.’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듯 제임스와 함께 있으면 꼭 한 번씩 이런 일이 생긴다.
카프레네와 가장 오랫동안 친분을 다졌던 사이라 그런 모양이다.
그렇다고 사실을 말할 순 없었다.
막상 뭐라고 말할 건가.
– 카프레네가 세상을 떠나며 저에게 지식과 기억을 선물로 주고 갔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태수는 바로 모든 게 하얀 병원으로 끌려갈 게 분명했다.
특히 제임스는 요주의 대상이다.
그는 지금껏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을 불신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말할 수가 없었다.
이 문제는 제임스를 신뢰하는 거와 별개다.
오히려 신뢰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 이 문제를 숨겨야 했다.
지금 태수가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 제임스지만 카프레네에 대해서 숨겨온 이유도 같았다
태수 머릿속이 온통 헝클어져 있을 때였다.
제임스가 예리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래. 닥터 최가 방금 뭐라고 중얼거렸어.”
“전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야. 한국식 발음이라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무슨 ‘어.’라고했어.”
제임스가 말한 순간 태수는 속이 뒤집어졌다.
‘젠장. 귀도 밝아.’
이럴 땐 그의 창창한 청력이 원망스러웠다.
어쩔 수 없다.
태수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우기기 작전이다.
태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하, 하. 잘못 들으신 게 아닐까요?”
“지금껏 대화하고 있었는데, 그 말만 잘못 들었다?”
“여기 저와 닥터 제임스만 있는 것도 아니고요.”
태수는 괜히 운전 중인 샘 분대장을 걸고넘어졌다.
‘미안합니다.’
속으로는 두 손 모아 빌었다.
하지만 자신부터 이 위기의 순간을 넘겨야 했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절체절명의 위기에 태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그러나 그런 뻔한 수에 넘어갈 제임스가 아니란 게 문제였다.
제임스는 확실히 철저한 성격이다.
태수가 빠져나갈 구멍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그는 태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목소리를 좀 더 크게 냈다.
“샘 분대장.”
“썰, 박사님.”
“혹시 뭐라고 혼잣말 했나?”
제임스는 분명 샘 분대장에게 물었다.
하지만 시선은 계속 태수를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