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513
Chapter 281화.
“그렇지. 어쩌면 나란 존재가 이 세상에 조금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던 거 같습니다.”
“그래. 여기 모두가 한 번 쯤은 느꼈을 거라고 봐.”
말을 마친 제임스의 시선 끝엔 김혁권이 있었다.
역시 그를 향한 말이었다.
김혁권이 달라지고 있음을 제임스가 말로 풀어낸 거였다.
그제야 김혁권도 눈치 챘다.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이봐요. 늙다리 아저씨. 적당히 합시다.”
“난 지금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왜 그러지?”
“그게 어떻게…….”
“혹시 내 말에 어디 거슬리는 부분이라도 있나?”
제임스는 지극히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김혁권은 더 말해 봐야 손해가 될 거라고 판단했는지 아예 시선을 돌려버렸다.
“칫.”
김혁권의 완패였다.
태수와 정민수는 놀란 눈으로 제임스를 향해 엄지를 내밀었다.
‘따봉.’
‘킹왕짱.’
소리 내어 말했다가 공연히 화가 밀려올까봐 입만 뻐끔거렸다.
제임스는 가볍게 분위기를 바꾸며 다시금 권했다.
“다들 가운을 제대로 봐야지 않나?”
“제대로요? 그럼.”
사르륵.
태수는 곱게 접힌 가운을 널찍하게 펼쳤다.
하얀 가운이 길게 펼쳐져야 되는데.
중간이 싹둑 잘린 듯이 짧았다.
“독특하네요.”
가운을 향한 시선 가득 흥미를 보였다.
그런데 김혁권은 이때다 싶었는지 바로 투덜거렸다.
“원단 값 얼마나 한다고 이걸 아껴?”
“기성품을 이렇게 재단하는 게 더 번거롭습니다.”
태수는 이치적으로 짚어서 말하자 김혁권이 뚱하게 반발했다.
“그럼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다고요?”
“이래야 레펠할 때 거추장스럽지 않으니까요.”
“뭐 그런……. 음.”
김혁권은 뭐라고 하려다가 멈칫했다.
기존 가운과 다르게 주머니가 많고, 모두 똑딱이가 달려 있었다.
확실히 편의성과 활동성을 강조한 디자인이었다.
그 사이 태수는 다른 걸 주목하고 있었다.
양쪽 가슴에 새겨진 NGO와 PKO마크였다.
“아.”
태수가 자그맣게 감탄을 흘렸다.
정민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렇게 두 개 다 달아도 돼?”
그 대답은 제임스가 해줬다.
“NGO 소속이고 PKO의 보호를 받는단 의미야.”
“엇, 네.”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자네들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 일대는 쑥대밭이 되겠지.”
“헙.”
정민수는 크게 놀랐다.
그런 의미는 생각도 못한 모양이다.
제임스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추가로 설명했다.
“위험지역에 날아가야 할 일들이 많을 거야.”
“첫 출동부터 그렇긴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 대비책도 없이 보낼까.”
“감사합니다. 그럼 이건…….”
스윽.
정민수가 궁금한 표정으로 NGO마크 아래에 새겨진 스펠링을 가리켰다.
– H. M. T.
의미를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약자였다.
그런데 태수는 그 약자에 대해 아는지 풀어서 말했다.
“헬기 메디컬 팀.”
“어?”
“헬기의료팀. 우리 팀 공식 이름이 된 거 같아.”
태수의 설명에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름이란 직설적이면서 뜻이 분명한 게 좋으니까.”
“그럼요. 단순해야죠.”
가운을 힘껏 붙든 태수가 진하게 미소를 그려 보였다.
애초부터 명칭은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정식으로 발족한 팀이란 점에서 더 감동하고 있었다.
정민수도, 김혁권도 같은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제임스가 묵직 하게 말했다.
“의료팀 구성원이 세 명인 경우는 사실 NGO에서도 처음이야.”
“초라하죠.”
“거기다 전문의가 한 명도 없는 경우는 이례적이지.”
“파격일 겁니다.”
태수가 답하자 제임스도 바로 덧붙여 말했다.
“그 만큼 아직 시험적인 요소가 많단 의미일 거야.”
“그럴 겁니다.”
모두 짐작하고 있는 내용들이었다.
그럼에도 팀으로 승인 받은 건 제임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을 게 분명했다.
제임스가 자세한 말을 삼가는데 굳이 캘 생각은 없었다.
다들 경청하자 제임스가 덧붙여 말했다.
“존재가치는 스스로 증명하도록.”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나에게 포부만 보여 봐야 아무 소용없어.”
“명심하겠습니다.”
태수와 정민수는 단단함을 넘어 절실하게 답했다.
분명 응급환자들에게 필요한 팀이다.
그 이면에는 자신들을 위한 팀이란 의미가 깔려 있었다.
두 사람의 비장한 대답이 울린 후였다.
제임스는 흡족한 얼굴로 딱딱해진 분위기를 달랬다.
“자자, 이제 그런 얘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그럼 좀 편안하게 있어도 됩니까?”
닥터 이작손이 눈치 빠르게 묻자 제임스는 손을 내밀어 권했다.
“얼마든지.”
“감사합니다.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닥터 최. 레펠 배우는 게 어려워?”
닥터 이작손은 얼른 태수에게 궁금한 걸 물었다.
그 순간 태수와 정민수의 얼굴이 바로 퍼렇게 질리며 손사래를 쳤다.
휙휙.
“으으, 절대 비추.”
“우리 사이 멀어질까봐 두렵습니다.”
너무도 격한 반응에 닥터 이작손이 오히려 당황했다.
“그럴 정도야?”
“말도 마십시오. 그러니까…….”
태수가 나서서 자세한 교육 과정에 대해 차근히 설명했다.
처음에는 심드렁하게 듣던 제임스 수술팀원들의 표정이 점점 황당함으로 물들어갔다.
“격투는 왜?”
“사격도 했다잖아요.”
“팀 훈련이 아니라 입대한 거였어?”
상상을 뛰어넘는 훈련과 악독한 스케줄이었다.
듣기만 해도 질리는 지 질문이 점점 다른 쪽으로 바뀌어갔다.
“크흠. 화상 환자는 어떤 상태였던 거야?”
“처음에는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가…….”
“음. 그 정도 화상이었다니…….”
“파둠에서 배웠던 화상치료법과 관련 케이스들을 엮어서…….”
태수는 닥터 오즈마와 닥터 이작손과 주로 대화를 나눴다.
아무래도 극심한 화상 환자 케이스라 외과와 마취통증과에서 관심을 보였다.
반면 정민수는 닥터 조나단과 닥터 막스밀리언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정민수는 이렇게 자신이 한 처치를 설명하는 게 오랜만인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벽돌이, 짱돌 말고요. 진짜 벽돌이 여기에 빡.”
“저런.”
“그걸 뽑았는데 피가 콸콸콸.”
“그건 당연한 거고.”
“크흠. 그래서 닥터 최도 없이 버티기에 들어갔는데…….”
민망함은 슬쩍 뒤로한 정민수가 자신이 응급처치한 내용을 그대로 설명했다.
그러나 정민수가 무용담을 늘어놓는 시간이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 설명하며 자신이 부족했던 부분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시간이었다.
닥터 조나단과 닥터 막스밀리언도 야전치료에 상당한 경험이 있는 터라 하나 씩 짚어줬다.
“그럴 때는 말이야, 우선…….”
“이번엔 운이 좋은 경우야. 버티는 건 한계가 있어. 그러니까…….”
두 의사의 설명이 전보다 더 자세해졌다.
그건 정민수의 태도 변화 탓이었다.
소극적일 땐 우물쭈물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화에 의미와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니 의사소통이 유연하게 이어질 수가 없었다.
지금은 핵심을 정확히, 분명하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듣는 입장에서 이해가 쉬우니 피드백도 빠르게 내어줄 수 있었다.
의사들의 분위기는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이어졌다.
반면 김혁권과 간호사들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그렇게 따뜻하지 않았다.
캐서린 간호사가 눈을 흘기며 나무랐다.
“그래서 미스터 김은 뭐 했냐고요.”
“잘 했어요.”
“도대체 뭘요.”
“보조를요. 잘 했으니까 잘 끝났겠지.”
대답은 하지만 상당히 무심한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하얀 가운을 보고 또 보고,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잠시도 쉬지 않았다.
처음으로 지급받은 하얀 가운과 그 의미가 마음에 쏙든 모양이었다.
거기에 집중하고 있어 대답이 시큰둥한 거였다.
김혁권의 무성의한 대답이 계속될수록 캐서린과 루미에 간호사의 눈빛이 점점 낮게 가라앉았다.
그러던 중 루미에 간호사가 독기서린 눈빛으로 불렀다.
“미스터 김.”
“또 왜요.”
“오랜만에 우리 간호사의 역할과 추구해야 할 길에 대해서 얘기해 볼까요?”
그 소리에 가운을 보고 있던 김혁권이 멈칫했다.
순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했다.
쏙.
가운을 재빨리 내리고 그녀들을 제대로 마주했다.
“크흠. 어디서부터 말씀드리면 됩니까?”
“처음부터 끝까지요.”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어제 오전 우리는…….”
김혁권은 마치 브리핑을 하듯이 시간대별로 딱딱 끊어서 일목요연한 설명을 이어갔다.
물리적으로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그러나 그 외적으로 무척이나 살벌했다.
양쪽에서 들려오던 서라운드 잔소리는 당해본 사람만 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정답이다.
김혁권은 귀찮음 따윈 저리 던져버렸다.
이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탈탈 털어 모든 과정을 설명했다.
그러나 간호사들도 듣는 거로 만족하지 않았다.
처음 잘못 끼워진 단추 탓인지 차가운 눈빛과 말투는 달라지지 않았다.
“미스터 김. 간호사가 그렇게 하면 돼요?”
“무슨…….”
“그럴 때는 닥터 옆으로 먼저가서…….”
“난 애초에 간호사가 아니라니까, 또 그러네.”
김혁권이 계속 되는 지적에 결국 날카롭게 반발했다.
그 순간 캐서린과 루미에 간호사의 눈빛이 똑같이 예리하게 빛났다.
“뭐라고요?”
“열심히 듣겠다고요. 빨리 말해요.”
김혁권은 얼른 꼬리를 내리고 다시 경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괜히 목을 빳뺏빳하게 들고 있다가 부러질지도 모른 탓이다.
한편 제임스는 시끌시끌한 장내를 둘러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게 사람 사는 맛이지.’
의료진이 라고 매일, 매 순간 환자와 처절하게 죽음과 싸우는 게 삶의 전부가 아니다.
때론 이렇게 소탈한 모습으로 대화하는 시간도 삶의 일부였다.
무슨 일이든 한 박자 쉬어야 더 힘이 나는 법이었다.
제임스는 모두가 즐겁게 어울리는 모습을 보며 오래전 자신을 잠시 그려보기도 했다.
그런 과거 속엔 언제나 카프레네가 함께였다.
이런 순간일수록 그가 그리웠다.
‘우리는 더하면 더 했을 거야. 그렇지?’
속으로 잔잔히 물었다.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괘념치 않았다.
젊은 시절, 치열하게 의견을 나누고 또 대립하던 그 순간들을 추억하는 거로 만족했다.
며칠 후.
투두두.
카슈미르 상공 높이 하얀 헬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PKO의 마크가 크게 새겨져 있고, 그 옆에 NGO마크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그 독특한 특징대로 헬기의료팀에게 배정된 중형 헬기였다.
북쪽으로 날아가는 지금이 두 번째 출동이었다.
투다다.
곧 헬멧 속에서 오스틴 기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브리핑하겠습니다. 현재 우리가 향하는 위치는 잠무와 아지드의 경계지역입니다.
“네. 경계지역이요.”
– 말노이라고 하는 도시에서 대규모 시가전이 벌어졌고, 1시간 전에 인도군이 승리했다고 합니다.
“시가전이요?”
태수는 물론 정민수와 김혁권의 표정이 싹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