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577
Chapter 346화.
치직.
바로 편지봉투를 뜯고 내용을 눈에 담았다.
– 친애하는 닥터 최에게.
너무도 무난한 시작과 안부가 줄줄 이어졌다.
흔한 내용이라도 스펠링 하나 흘리지 않고 꼼꼼하게 눈에 담았다.
그 만큼 특별한 순간이었다.
중간쯤 읽어 내려가니 눈길을 사로잡는 내용이 있었다.
– 기억은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집에 가보고, 부모님도 봤지만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했을 정도로요.
태수는 그 점을 안타까워했다.
“조금만 일찍 발견됐더라면.”
과거를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지만 미련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생각에 태수의 표정이 쓰게 변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어?”
다음 내용이 더 놀라웠다.
– 여긴 스웨덴의 풍경 좋은 마을입니다. 과거와 전혀 상관이 없는 장소입니다. 저는 여기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태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림치료?
그것도 방법이긴 하지만 도와줄 상담사가 있어야 한다.
상담사와 함께인 건가?
여러 생각이 오갔다.
그런데 다음 내용은 태수의 예상을 철저하게 빗나갔다.
– 제 그림 속에 한 가지가 없단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이정표입니다.
도로를 그려도, 뻔히 이정표가 보여도 그리지 않는 저를 발견하고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태수는 스스로 했던 말이 서서히 떠올랐다.
“그래. 인생에 이정표가 없긴하지.”
얽매이지 말란 뜻으로 한 말이었다.
그걸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에 대한 편지 내용이 이어졌다.
–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고 아무렇게 사는 건 아니더군요. 이상하게도 저는 그 속에서 평온함을 느낍니다.
태수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억지를 쓸 필요는 없지.”
그렇다고 꼭 그게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다양성을 의미할 따름이었다.
몇 줄의 편지가 더 이어지더니 마지막에 다다랐다.
– 잃어버린 긴 시간보다 지금 살아가는 오늘에 소중함을 느낍니다.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살려주신 닥터 최에게 매일 감사합니다.
태수는 마지막 문구를 곱씹었다.
“매일 감사하다라……. 저도요.”
이렇게 편지를 보내준 마음이 너무도 고마웠다.
리베리오의 편지를 잘 갈무리한 후였다.
이젠 정말 힌두어 편지 밖에 없었다.
내용까지 힌두어면 조금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물론 김혁권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지만 어떤 내용인지 모르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음……. 그래. 일단 작고 귀여운 너부터 보자.”
스윽.
여러 편지들 가운데 하나를 쑥 골랐다.
그리고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천천히 열어봤다.
편지 봉투 안쪽 면이 편지지로 되어 있는 독특한 모양이었다.
조심스럽게 모두 열자 커다란 글씨로 한 문장이 삐뚤빼뚤하게 적혀 있었다.
– I LOVE DR, CHOI.
그게 전부였다.
“누, 누구지?”
갑작스러운 사랑고백에 태수는 살짝 당황했다.
아이가 보낸 거 같은데, 여러 아이들을 치료하고 수술했던 터라 딱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뭐, 나도 사랑해. 땡큐.”
편지에 대고 사랑 고백을 받아줬다.
누군지 몰라도, 짧은 한 문장이라도 상관없었다.
편지를 딱 열었을 때 가슴 가득 느껴졌던 진심으로도 충분했다.
그 후로도 태수는 편지를 하나 씩 열어봤다.
의외로 내용물은 영어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모두가 반가웠지만 그래도 의외라고 생각되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오하메드, 이 아저씨가 편지를 보내셨네?”
첫 CABG수술 환자다.
북새통인 의료캠프 한가운데서 만났던 그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
다행히 편지 내용은 아찔하지 않았다.
“아내분하고 퇴원 후에……. 운동을 자주하신다고. 좋죠. 아저씨 심장은 적당히 괴롭혀야 좋습니다.”
태수는 오하메드의 은근한 자기 자랑이 담긴 편지 내용에 잔잔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또 반가운 이름이 보였다.
살레나.
파둠시에서 심낭압전을 앓았던 응급환자였다.
그녀는 영어 공부에 매진한단 약속을 성실히 지킨 모양이다.
아이처럼 또박또박 작성된 편지는 너무도 정갈했다.
그 내용은 태수를 더 미소 짓게 했다.
“영어 교사를 하시라니까, 애들하고 같이 수업을 들으시면 어쩝니까……. 그래요. 따님도 분명히 같이 공부할 겁니다.”
태수는 살레나가 원하는 소망이 이뤄지고 있다고 믿었다.
또 살레나를 통해 육체적인 건강 만큼이나 정신적인 건강이 중요하단 걸 다시 상기시키기기도 했다.
태수는 그 후로도 여러 편지를 확인했다.
의외로 다양한 마을에서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것도 10통이 넘었다.
어떤 편지는 마을의 대소사가 모두 적혀 있었다.
또 어떤 편지는 짧고 굵은 핵심만 담겨 있었다.
그렇듯 편지도 보내는 사람의 성격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모든 편지를 확인한 후였다.
깔끔하게 정리한 태수는 잠시 가슴에 포겠다.
내가 살아온 흔적?
그런 건방진 생각 따윈 없었다.
스르륵.
차분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잊지 않고 이렇게 편지를 보내준 이들을 떠올렸다.
그저 그들뿐이 아니라 자신의 손을 거쳐 간 모든 환자들을 꺼내봤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최고의 퇴원 선물이네요.”
읊조린 후 천천히 눈을 떴다.
한층 깊어진 눈빛으로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가슴이 꽉 차다 못해 터질 거 같았다.
이건 그저 편지가 아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지친 태수를 일으켜줄 원동력이었다.
잠시 후.
태수의 옷차림이 바뀌었다.
환자복을 벗고 일상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락.
가운이 빠지면 섭섭했다.
하얀 가운을 가볍게 풀썩거린 태수가 한 손에 들린 편지들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너무 적어.”
더 많은 편지를 받고 싶은 욕심이 스스로를 자극했다.
이렇게 열망만 할 때가 아니었다.
행동에 옮기면 될 일이다.
“슬슬 움직여 볼까?”
드륵.
병실 문을 열었다.
그 순간 환자 최태수는 사라지고, 다시 닥터 최태수로 돌아왔다.
퇴원한 태수는 가장 먼저 제임스를 찾아가기로 했다.
본부 건물을 나서자 거대한 의료캠프가 펼쳐졌다.
병실 창밖으로 매일 보던 풍경이다.
그러나 지금은 느낌부터가 너무도 달랐다.
“옷이 사람을 이렇게 다르게 하나?”
감투에 따라 사람이 달라진다고 했다.
명예에 집착하지 않는 태수라 신경쓰지 않던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말이 너무도 크게 와 닿았다.
환자복을 입고 있을 땐 그저 하나의 풍경이었다.
반대로 가운을 걸친 지금은 의료캠프 전역에 자리하고 있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드르륵.
“비켜!”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거기 뭐해. 빨리 이동하라니까!”
스트레쳐카가 오가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뛰어다니고.
보호자들이 전전긍긍하는 모습들까지.
환자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움직임들이 가득했다.
다급하고 번잡한 모습들이 곳곳에서 교차하고 있었다.
그 속에 흐르는 긴장감은 절망적이지 않았다.
희망이 전제로 깔려 있었다.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긍정적인 긴장감이 분명했다.
두근, 두근.
태수도 동화 되는지 점점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그리고 이 순간 자신이 살아있음을 강하게 느꼈다.
그때였다.
“닥터 최, 옆으로!”
그르릉!
외침과 함께 움직임이 느껴졌다.
옆을 보니 닥터 쿠엔틴이 다급한 표정으로 스트레쳐카를 밀며 다가오고 있었다.
본 순간 본능적으로 감이 왔다.
신경외과와 관련한 응급환자일 터였다.
끼익!
태수는 재빨리 현관문을 활짝 열어 신속히 지나갈 길을 만들어줬다.
“꾸띠!”
“쌈바!”
닥터 쿠엔턴은 특유의 화법으로 답하며 지나쳐갔다.
그르릉!
그게 끝이었다.
항상 여유를 보여주는 닥터 쿠엔틴의 모습과 사뭇 달랐다.
함께 이동하는 의료진들 표정도 심각하기 이를 데 없었다.
태수의 시선이 그들 뒷모습으로 향했다.
꿈틀꿈틀.
손가락이 움찔거린다.
두 다리도 힘이 들어갔다.
온몸에서 신호를 보내지만 태수는 그들을 쫓아가지 않았다.
‘내가 낄 자리가 아니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의지와 상관없이 반응했다.
또 가슴 속이 후끈해졌다.
응급환자.
그 존재를 떠올리는 거로도 이토록 태수를 뜨겁게 했다.
‘빨리 움직이자.’
타다닥!
태수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서 제임스에게 인사하고 환자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아파보니 생명의 존귀함이 더 뼈저리게 와 닿았다.
잠시 후.
태수는 제임스의 의료 텐트 속 응접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늘 그렇듯 테이블 한쪽에는 여러 서류철이 쌓여 있었다.
태수는 서류철엔 시선도 두지 않았다.
테이블 밑에서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는 손길이 더 분주했다.
‘도착한지 10분이나 지났네.’
그 사이 태수는 제임스와 인사를 했고, 또 마음이 활활 타오르는 심정까지 모두 풀어놨다.
그런데 반대편에 자리해야 할 제임스가 보이지 않았다.
저쪽에서 음료수 두 개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내 가까워진 제임스가 음료수를 권했다.
“우선 마시고, 열 좀 삭이도록.”
“인사만 드리러 온 겁니다.”
“지금 내 성의를 밀어내는 건가?”
제임스가 반대편에 자리하며 물었다.
그저 흘리는 말투 속에도 무게감이 가득했다.
순간 태수는 머리에 찬물이 쫙 쏟아진 느낌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덕분에 제임스를 너무 편하게만 대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아닙니다. 마시겠습니다.”
“그렇게까지 경직될 거 없어.”
“그런 거 아닙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탈칵.
태수는 좀 더 차분하게 인사하고 음료수 마개를 열었다.
그제야 제임스도 음료수를 들었다.
크게 한 모금씩 마신 후였다.
탁.
음료수를 내린 태수는 의료 텐트 입구를 힐끔거렸다.
뜨거운 가슴을 품고 앉아 있으려니 곤욕이었다.
당장 일어나고 싶지만 상대가 제임스라 그런 무례를 할 수가 없어 답답했다.
그때 제임스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화를 할 땐 상대를 보는 게 옳아.”
“크흠. 네.”
“닥터 최가 왜 그러는지 모르지 않아. 그런데도 내가 왜 이렇게 붙들고 있는지 아나?”
제임스는 느긋하게 물어왔다.
그제야 제임스를 바라본 태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솔직히 얼른 가서 활개치라고 하셨을 거 같습니다.”
“그건 닥터 최가 머릿속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제임스야. 마주하고 있는 진짜 제임스와는 다른 존재지.”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겁니까?”
“더 고민해 봐.”
제임스는 여전히 느긋한 목소리로 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