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439
00442 442화
“서울에서 여기까지 내려오는 게 그리 쉽지 않을 거 같은데.”
“서울이 뭐가 좋아. 의사들 넘치지, 공기 탁하지.”
“그건 또 그렇지.”
“그리고 레지던트들에게도 비번을 줄 정도면 전문의 대접은 오죽 좋겠어?”
서강재가 묻자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병원에 비해서 대우가 좋은 건 사실이야.”
“우리가 이렇게 고민하고 있다고 떨거지라고는 생각하지 마. 각 의과 레지던트들 중에서 그래도 실력 좋다는 소리는 듣고 있으니까.”
“그럼 다른 병원으로 무난하게 갈 수 있을 거 같은데.”
“방금도 말했지만 갈 수는 있어도 미래가 없어. 여긴 뭔가 비전이 있을 거 같은데.”
서강재의 말에 태수의 눈빛이 살짝 날카롭게 변했다.
“어설픈 자리 얻기라면 깨끗이 접어. 여긴 전쟁터야.”
“그렇게 듣진 말고.”
“다른 병원도 마찬가지겠지만 여기도 치열해. 특히나 신속대응센터는 내부적으로도 끊임없이 발전해야 살아남을 수 있어.”
태수의 말에 정민수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건 동성종합병원도 마찬가지야.”
“젠장.”
서강재의 인상이 구겨질 무렵, 태수가 호기롭게 한마디 했다.
“그럼 한번 말아 봐.”
태수가 불쑥 빈 잔을 내밀었다.
서강재와 동기들이 얼마나 갑갑하면 그렇게 말했을까.
서강재는 얼른 소주와 맥주를 적절하게 섞었다.
“자, 내가 아주 제대로 말았어. 그럼 마셔 볼까?”
“잠깐.”
태수가 만류하자 다들 멈칫했다.
그중 서강재가 넉살 좋은 얼굴로 말했다.
“또 말아 줄 테니까 일단 마시자.”
“그게 아니라 사실 신속대응센터와 동성종합병원에서는 계속 전문의를 영입 중이야.”
“그래?”
서강재는 물론 박현덕과 이천동의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태수는 그에 대해서 몇 마디를 더 했다.
“특히나 신속대응센터는 아직 팀이 모두 구성되지 않았어.”
“지금까지?”
“영입 기준이 까다로우니까. 전문의들은 더욱더.”
태수의 말에 동기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때 정민수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동성종합병원도 전문의가 부족한 입장이라 자리는 많아.”
“그렇구나.”
“그래도 아무나 들이지 않아. 대우를 해 주는 만큼 환자에게 최선을 다할 의사들만 신중하게 영입하니까.”
정민수의 말에 서강재가 슬쩍 물었다.
“그 기준은 뭔데?”
“위에서 판단하는 거지. 우리 같은 레지던트가 뭘 알겠어.”
“그건 또 그렇지.”
서강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민수는 태수의 입지에 대해선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환자를 위한 병원이다.
개인적인 친분으로 의사를 선별하려고 만든 병원이 아니었다.
정민수의 생각을 태수도 직감했는지 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했다.
“확실한 건 대우는 한국에서 최고일 거야. 그만큼 힘든 것도 한국에서 최고고.”
“우리가 우리만 편하게 의사 생활 하려고 고민하는 건 아니잖아.”
“…….”
“정교수까지 가려면 의술만 필요한 게 아니니까 하는 이야기지.”
서강재의 말이 뭔지 태수는 바로 알아들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일단 우리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게.”
“그렇게 해.”
태수도 그렇게 대답을 마무리 지었다.
확답을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태수나 정민수가 추천을 한다면 훨씬 유리했다.
다만 그 선택이 동기들과 병원, 환자를 위해서 옳은 일인지 아직 확신할수 없다.
그래도 바람이 있다면 같이 일하고 싶었다.
인턴 시절에 같이 생활해 봐서 지금 눈앞에 있는 세 사람이 얼마나 성실한지 알고 있기에 그런 마음이 더욱 강했다.
그때였다.
정민수가 너무 가라앉은 분위기를 털어 버렸다.
“이거 기분 좋은 술자리에 폭탄이라도 떨어졌냐. 분위기가 왜 이래? 자자, 그런 이야기는 전문의 취득한 후에 해도 늦지 않아.”
“그건 또 그렇지. 당장 내일 전문의 취득할 것도 아닌데.”
“그럼 뭐 해. 마셔야지!”
“마시자!”
오랜만에 뭉친 동기들이었기에 억지로라도 분위기를 끌어올리려 노력했다.
시간이 흘러 깊은 밤이 찾아왔다.
태수와 정민수, 그리고 동기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유성 거리를 걸었다.
비틀비틀.
간만에 신나게 마셨는지 다들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 보였다.
편의점이 보이자 이천동이 얼른 어깨동무를 풀며 꼬인 혀를 힘들게 놀렸다.
“끄윽, 잠깐 있어. 숙취 해소 음료 한잔씩 때려야지.”
“그래야지! 그거 한잔 마셔 줘야지!”
모두가 동의하자 이천동이 커다란 덩치를 휘적거리며 편의점으로 향했다.
다들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풀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속이 진짜 터지겠네.”
“말도 마. 나 올라오려는 거 억지로…… 참고 있으니까.”
“더러운 새끼. 저리 꺼져!”
다들 투덕거리는 사이였다.
태수가 주변을 둘러봤다.
거나하게 취해서 그런지 사물이 2개, 혹은 3개로 나뉘어 보였다.
“푸우, 취한다.”
비틀거리던 태수의 등에 무언가가 닿았다.
턱.
태수는 뭔지 확인할 정신도 없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행스럽게도 영업이 끝난 점포 앞이었다.
동기들은 휘청휘청거리며 태수를 놀리기 시작했다.
“쟤 주저앉았네.”
“주당인 척은 다 하더니, 앞으로 이 정민수 님에게 까불지 말라, 이거야.”
장난스럽게 놀려 대는 정민수도 태수 못지않았다.
휘청이는 발걸음.
누가 봐도 곤드레만드레 취한 모습이다.
그때 이천동이 커다란 덩치로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여기 한 잔씩들 받으시고.”
“이것도 짠해야 해?”
“기왕 마시는 건데 마지막까지 치얼스 해야지.”
“그건 또 그렇지. 야야, 태수 뻗었으니까 우리가 가자.”
다들 한 소리씩 하며 태수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천동이 내미는 숙취 음료를 받아 든 태수가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한잔할까?”
“그럴까?”
쨍.
숙취 음료까지도 부딪친 후에야 입가로 가져가는 모습이다.
그러던 동기들이 하나둘씩 태수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기 시작했다.
억지로 버티고 있었던지 앉는 모습이 거칠었다.
“에그그.”
“아이고, 취한다.”
“여긴 별도 보이네. 인공위성인가?”
“큭큭.”
그리 웃기는 말도 아닌데 이상하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실없이 모두가 웃었다.
함께 웃던 태수가 문득 동기들의 얼굴을 한 명씩 바라봤다.
의사가 된 후로 이렇게 술을 마셨던 날이 있었나?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진탕 마셔 본 적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아무런 걱정 없이 한잔 나눌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이 이렇게 즐거운지 미처 느끼지도 못하고 살아왔다.
태수가 반쯤 풀린 눈으로 대로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툭 내뱉었다.
“그동안 참 치열하게 살았나 봐.”
“…….”
“이런 게 왜 이렇게 좋냐.”
태수의 말에 처음에는 의아하게 바라보던 동기들의 표정이 서서히 부드럽게 변해 갔다.
맞는 말이다.
의대 졸업후 항상 긴장 속에 살아왔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기에 마음 편히 잠드는 날이 별로 없었다.
이렇게 아무런 생각 없이 좋은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게 얼마 만일까.
이런 날 실컷 마시지 않으면 언제 또 마시겠는가.
수중에 돈은?
충분했다.
태수는 결심을 굳히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동기들을 내려다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오늘 한번 마실 수 있을 때까지 마셔 보자.”
“그렇지! 숙취 해소 음료 마셨으면 또 취할 때까지 마셔야지!”
“내가 쏜다. 아주 끝까지! 확실하게!”
“하하, 좋았어. 태수 주머니 털러 가자.”
다들 같은 생각인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면서도 웃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한 몸처럼 어깨동무를 하고 다시 걸어갔다.
밤은 아직 길고, 술집은 무수히 많았다.
다음 날.
“으으윽.”
태수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억지로 눈을 떴다.
의식과 동시에 속을 갉아먹는 듯한 숙취부터 느껴졌다.
게다가 머리까지 띵했다.
“으음.”
억지로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사르륵.
몸에서 부드럽게 밀려 내려가는 건 고급 이불이었다.
그걸 확인한 태수가 멈칫했다.
여기가?
기억이 없었다.
머리 아픈 것도 잊고 태수가 얼른 주변을 둘러봤다.
바로 옆에 서강재와 정민수가 서로 반대로 누워서 상대의 발을 끌어안고 있다.
박현덕과 이천동은 바닥에 널브러지듯이 잠든 모습이다.
동기들을 확인한 태수는 방 안부터 다시 둘러봤다.
인테리어가 그리 낯설지 않았다.
넓게 펼쳐진 거실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수가 눈을 끔뻑거렸다.
역시 어디서 많이 본 장소다.
깨질 듯한 머리를 좀 더 굴려 본 그는 곧 이곳이 어디인지 기억해 냈다.
“호텔이네.”
미국에서 돌아온 후 잠깐 머물렀던 호텔이 분명했다.
어젯밤 일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때였다.
북북.
배를 거칠게 긁으며 산발을 한 정민수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태수야, 너 괜찮냐?”
“멀쩡해 보이냐?”
“아니, 전혀. 그나저나 여기 어디냐? 되게 비싸 보이는데.”
“기억 안 나?”
태수가 묻자 정민수가 골똘히 생각하다 머리를 부여잡았다.
“으으, 갑자기 생각하려니까 머리가 깨질 거 같아.”
“나도 그런데 넌 오죽하겠냐.”
“그보다 여기가 어디냐니까.”
귀찮은 듯한 정민수의 말투에 태수가 친절하게 이야기했다.
“호텔.”
“이야, 우리 대단하다. 그렇게 퍼마시고 호텔 잡을 생각을 한 거 보면.”
“그 호텔.”
“이름도 특이하네. 그 호텔. 요기 앞에는 저 호텔도 있는 거 아니야?”
정민수가 어이없다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러나 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던 정민수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미소가 서서히 지워진 정민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 호텔이라면 설마……?”
“고객님, 3박 중에 1박을 사용하셨습니다.”
태수가 확인 사살을 해 주자 정민수의 표정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변했다.
“무, 무슨 소리야. 그걸 내가 왜…….”
“진짜 기억 안 나? 5차 끝나고 네가 그랬잖아. 어차피 퍼져 잘 거라도 좋은 곳에서 자자고.”
“그그그, 그랬나?”
“내가 아끼라고 했는데 네가 억지로 끌고 왔어. 프런트에서 방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도 지르셨고.”
태수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질수록 정민수도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동시에 안 그래도 안 좋은 안색이 점점 흙빛으로 변해 갔다.
“말도 안 돼. 내가 이걸 얼마나 아끼면서 결전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가 그래서 다른 데 가자고 했잖아.”
“야, 인마! 다리를 부러뜨려서 응급실로 보내더라도 말렸어야지.”
정민수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하소연하자 태수가 다가가 어깨를 다독였다.
“아직 2박 남았잖아.”
“그래도, 그래도 이건 말도 안 돼.”
“동기들이랑 뜻 깊은 밤을 보냈는데 너무 매정하게 굴지 마.”
“젠장. 이제 와 물릴 수도 없고. 미치겠네.”
벅벅.
정민수가 인상을 구기면서도 웃었다.
그도 동기와의 술자리가 즐거웠던 모양이다.
“민수야.”
“왜?”
“좋지?”
“좋긴 개뿔이 좋냐? 해장이나 하자.”
정민수가 얼른 말을 돌렸다.
뒤에서 바라보던 태수가 빙그레 웃을뿐이다.
1시간 후.
태수와 정민수, 그리고 동기들이 유성버스터미널에 서 있었다.
숙취가 어느 정도 해소됐는지 다들 푸석푸석한 얼굴에 조금은 윤기가 돌았다. 승차권을 각자 손에 든 동기들이 태수를 향해 미안한 표정을 보였다.
“어제도 돈 엄청 썼는데, 오늘 해장국도 사고 표까지 끊어 주냐?”
“줄라면 홀딱 벗고 주라는 태수님의 말씀이시다.”
“부담스럽다야.”
서강재가 쓴 미소를 짓자 태수가 말했다.
“그럼 나중에 내가 올라가면 똑같이 해 주면 되겠네.”
“물론 그렇게 하지. 언제든 올라오면 서울의 밤 문화를 제대로 보여 줄게.”
“그럼 빈손으로 올라간다.”
“당연하지. 꼭 주머니 텅텅 비워서 와라. 민수 너도.”
서강재의 말에 정민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빈손으로 가야지.”
“그래. 그 피 같은 숙박권을 과감하게 써 줘서 고맙고.”
“으으, 갑자기 속 쓰려 온다. 얼른 꺼져 버려.”
정민수는 거친 말투와 다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렇게 몇 마디 더 나누자 버스 출발 시간이 가까워졌다.
꽈악.
서로 손이 부서지도록 강하게 악수를 나눴다.
“간다.”
“가라.”
“어제 말했던 건 좀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할게.”
“편한 대로.”
태수는 대답한 후 서강재와 박현덕, 이천동과 한 번씩 눈을 마주했다.
다들 나름 의미 있는 대전 방문이었는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탑승한 버스가 떠나갔다.
태수와 정민수는 버스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