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440
00443 443화
정민수가 문득 태수에게 물었다.
“쟤들이 이쪽으로 올까?”
“오면 좋지.”
“쉽진 않을 텐데.”
“적응은 알아서 해야지.”
태수의 말에 정민수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가끔 말하는 거 보면 참 얼음이 형님으로 모실만큼 냉정하단 말이야.”
“환자가 정으로 나으면 얼마나 좋겠냐.”
“그건 그렇지. 그래도 왔으면 좋겠다. 여기까지 내려온 걸 보면 아예 생각이 없는 거 같지도 않고 말이야.”
“시간이 흐르면 알게 되겠지. 우리도 슬슬 가자.”
태수가 먼저 몸을 움직이자 옆에 따라붙은 정민수가 물었다.
“그런데 어디 갈까?”
“가 보면 알지.”
“그래. 둘 다 비번인데 걱정할 게 뭐 있어. 자유 시간인데 말이야. 어디든지 발길 닿는 곳으로 한번 가 보자고.”
정민수가 빙글거리며 말하자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태수와 정민수는 오랜만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유성을 돌아다녔다.
비번이 끝난 후 태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신속대응센터는 언제나 환자들이 밀려들었고, 다들 열성적으로 환자들을 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경상자 전담팀 레지던트 중 한 명인 이석현이 태수를 찾아왔다.
“치…… 아니, 선배님.”
“환자?”
태수가 반응하자 이석현이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환자 때문이긴 한데요, 그게 좀 상황이 이상해서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선 강석찬 선생님께서 선배님을 모셔 오라고 했습니다.”
“우선이라니?”
태수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지만 이석현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직접 보시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데요.”
“그래. 일단 가자.”
“이쪽으로.”
이석현이 직접 안내했다.
뒤를 따르는 태수는 여전이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응급실 앞쪽에 집중된 경상자 전담팀 구역에 들어섰다.
딱히 장소를 구분 짓는 건 아니지만 1차로 환자를 받아 기본적인 확인을 해야 했기에 앞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뒤쪽 중상자 전담팀 구역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병상과 환자가 확실히 많았다.
“아이고, 여기 좀 봐 달라니까요. 아파 죽겠다니까!”
“끄으응.”
피를 흘리는 경상자들도 있었고, 복통이나 두통을 호소하는 환자도 보였다.
그리고 그들을 케어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 환자는 sutura(봉합)해야겠어.”
“바로 준비할게요.”
“여기 antidiarrheal(지사제) 좀 부탁합니다.”
“가요!”
바쁜 의료인들을 뒤로하고 태수와 이석현은 걸음을 계속 옮겼다.
태수가 이석현에게 나지막이 한마디 했다.
“힘들겠다.”
“저희야 약 처방하고 꿰매는 게 전부인데요. 진짜 힘든 건 중상자 전담팀에서 다 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우리는 하루에 두세 번 수술하는 게 전부야. 이렇게 많이 돌보진 않잖아.”
“그 수술 강도가 보통이어야 말이죠. 그리고 환자들을 계속 보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웬만한 증세는 구분하게 됐습니다.”
동성종합병원에 있을 때보다 한결 성숙해진 이석현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착실하게 공부하는 모양이네.”
“그럼요. 저에게는 목표가 있으니까요.”
“뭔데?”
“1팀으로 가는 거요. 그리고 선배님이 전문의 되시면 제가 어시스던트하는 겁니다.”
이석현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밀려드는 환자에 치이기만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목표가 있다면 성장이 그만큼 빠를 건 확실했다.
그 목표가 자신이라는 게 조금은 멋쩍었다.
“나보다 더 뛰어난 의사가 되어야지.”
“일단 어시스던트부터 하고요. 나중에는 모르지만요.”
“자식.”
태수는 호기를 보이는 이석현을 대견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처음 동성종합병원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어딘지 모르게 의욕이 없어 보였다.
1년 차라서 의욕이 충만할 텐데도 실 끊어진 연처럼 중심을 잡지 못했다.
그런데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런 모습은 아예 사라졌다.
이젠 어디 가서 의사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해도 될 것 같았다.
힘든 수련이었을 텐데도 묵묵히 여기까지 따라와 주고, 스스로 목표를 세운 이석현이 기특했다.
“꼭 1팀으로 와라.”
“네! 갈 겁니다. 그러니까 기다려 주십시오.”
“얼마든지.”
태수와 이석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대화하며 걷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석현이 동성종합병원 외과에서 이쪽으로 건너온 강석찬에게 다가섰다.
“데려왔습니다.”
“수고했어. 저쪽 세 번째 병상 환자 CT 좀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이석현은 씩씩하게 대답하고 멀어져 갔다.
그사이 강석찬이 태수 앞에 섰다.
“이거 같은 건물에 있는데도 오랜만에 보는 거 같아.”
“제가 찾아왔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서로 정신없는 처지에 무슨. 그보다 다른 게 아니고, 혹시 최영덕 환자라고 기억하나?”
강석찬이 묻자 태수는 잠시 머리를 굴려 봤다.
이내 그 이름과 매칭되는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검사비 때문에 잠시 입씨름을 했던 환자다.
“네. 만성췌장염 초기로 별다른 문제 없어서 귀가시켰던 환자입니다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 그 환자는 아니고 지인인 거 같아. 통증이 있다고 찾아왔는데 아무리 내가 살펴봐도 별다른 문제가 없는 거 같아서 말이야.”
“그렇습니까?”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석찬은 그런 태수에게 이어서 말했다.
“귀가시키려고 했는데 계속 아프다고만 하다가 최영덕 환자를 들먹이더라고. EMR을 보니까 최 선생 이름이 있어서 불렀어.”
“그러셨군요.”
“아무래도 그냥 CT 한번 찍어 보려는 거 같은 느낌도 들어서 말이야. 검사비가 저렴하다고 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어서.”
“어떻게 할까요?”
태수가 묻자 강석찬이 생각하더니 쓴 미소를 지었다.
“미안한데 좀 맡아 주겠어? 우리 쪽에서 계속 신경 쓸 여력이 부족해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저희 쪽으로 모시고 가서 살펴보겠습니다.”
“이런 일로 1팀을 부르는 게 좀 그러네. 언제 응급 수술 터질지도 모르는데.”
“아직은 특별한 환자 없으니까 괜찮습니다.”
“그럼 좀 부탁할게. 환자는 저쪽에 있어.”
강석찬이 부드러운 얼굴로 차트를 건네고 멀어져 갔다.
태수는 반대로 돌아서 환자에게로 향했다.
빠르게 차트를 훑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복통으로 내원.
촉진상 특별한 이상은 없다고 판단.
이렇게 적혀 있었다.
태수는 어깨를 들썩이며 환자 앞에 도착했다.
60대쯤 되어 보였다.
까칠한 피부나 옷차림 등을 보았을 때 넉넉한 형편은 아닌 것 같았다.
태수를 힐끔 확인한 환자가 얼른 앓는 소리를 냈다.
“아이고, 죽겠다.”
배를 붙들고 신음을 토하는 모습이다.
태수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먼저 이름부터 확인했다.
“조승현 환자분이시죠?”
“아그그, 그런데요.”
“안녕하십니까. 외과 최태수라고 합니다.”
태수가 소개를 하자 환자의 눈빛이 살짝 반짝였다.
그것도 잠시일 뿐, 다시금 앓는 소리를 냈다.
“아고고, 최 씨한테 이야기 들었던 그 의사분이시네.”
“최영덕 환자분 말씀이시죠? 그분은 건강하신가요?”
“내가 지금 그 사람 건강 이야기하게 생겼어요? 아프다니까. 아이고, 배야.”
조승현은 계속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이상했다.
‘cold sweating(식은땀)도 없고, pain(통증)을 호소하는 데 비해 의식 레벨도 무척이나 좋고.’
눈으로 확인되는 것만 봐도 아픔이 와 닿지 않았다.
그래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단 병상을 안쪽으로 옮기겠습니다.”
“아프다니까요. 어딜 가요. 됐으니까 빨리 CT나 찍어 보자고요.”
“몇 가지만 더 확인하면 됩니다. 이송부터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태수가 높이 손을 들자 힘 좋은 남자 간호사들이 얼른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1팀으로요.”
“모시겠습니다.”
그르릉.
남자 간호사들이 곧장 스트레쳐카를 옮기기 시작했다.
스트레쳐카 위에 누운 조승현은 계속 앓는 소리만 냈다.
“아이고, 아이고.”
그 뒤를 따르며 계속 지켜보던 태수의 눈빛에 작은 이채가 서렸다.
조승현은 곧 1팀 전담 구역에 도착했다.
태수의 옆으로 조현정 간호사가 다가섰다.
태수가 바로 부탁했다.
“바이탈부터 확인해 주세요. 경상자 전담팀에서 확인한 지 시간이 좀 지나서요.”
“네. 환자분, 체온부터 잴게요.”
조현정 간호사가 다가서자 조승현이 외려 신경질을 냈다.
“진짜 아프다고. 검사부터 좀 하자니까.”
“이거부터 하셔야 돼요. 잠깐이면 끝나니까 가만히 계세요.”
조현정 간호사는 동성종합병원 응급실에서 단련되었기에 환자의 투정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내 확인을 마친 조현정 간호사가 의아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리고 태수에게 아주 조용히 물었다.
“저 환자…… 아니, 환자 맞아요?”
“왜요?”
“체온, 맥박, 혈압, 모두 정상이에요. 혈압하고 맥박은 평균치보다 오히려 높고요.”
그 말에 태수는 확신했다.
강석찬의 예상대로 꾀병이다.
저렴한 검사비 때문에 CT를 찍어 보려 온 모양이다.
최영덕 환자를 들먹인 것도 의료진들이 다른 가격을 부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태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
신속대응센터의 검사비가 저렴한 건 분명 환자의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 대상은 환자여야 했다.
멀쩡한 사람을 저렴하게 검사해 주기 위해서 책정해 놓은 가격이 아니란 뜻이다.
그렇다고 조상현 환자, 아니 조상현에게 악의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계속 눈치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아픈 척을 하는 게 스스로도 즐겁진 않은 모양이다.
그럼에도 이러는 이유가 뭘까?
넉넉하지 않은 행색이다.
종합검진을 받을 나이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저러는 것도 이해가 됐다.
CT를 촬영하면 혹시 모를 병에 대해서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 터였다.
‘어떻게 한다?’
태수는 좀 더 고민하다 이내 결론을 내렸다.
‘혹시 모르잖아.’
바로 조상현에게 다가선 태수가 청진기를 귀에 걸며 말했다.
“아픈 부분을 잠깐만 확인하겠습니다.”
“뭘 또 확인을…….”
“검사를 받으시려면 확인이 되어야 합니다.”
태수가 딱 잘라 말하자 조상현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니까 빨리 끝냅시다.”
“잠깐이면 됩니다.”
태수는 부드럽게 이야기하며 청진기로 복부 전체를 확인했다.
‘소화가 조금 안 좋네. 다른 장기는 나쁘지 않은 거 같고.’
태수는 뻔히 알면서도 슬쩍 말을 건넸다.
“혹시 윗배가 꼬집듯이 아프고, 더부룩하지 않으십니까.”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이고.”
“그럼 CT를 촬영하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저기, 그 가격은…….”
환자가 조심스럽게 묻자 태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3만 원입니다.”
“그럼 빠, 빨리 합시다. 아파 죽겠어요.”
환자는 언제 조심스러웠냐는 듯이 얼른 배를 잡고 앓는 척을 했다.
그런 모습에 쓴 미소를 지은 태수가 배정환을 불렀다.
“배 선생, 이 환자분 CT 촬영 부탁해.”
“알겠습니다. 검사실로 모실게요.”
배정환이 남자 간호사들과 스트레쳐카를 검사실로 이동시켰다.
태수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박성민이 다가와 태수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옆에서 쭉 지켜봤는데, 이건 아니지. 그보다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저렇게 순탄하게 검사실로 보냈어?”
“아프다잖습니까.”
“최 선생이 지금 내 눈깔을 해태 눈깔로 보는 것도 아니고, 지켜봤다니까. 저 정도면 사기지, 사기. 어떻게 다른 것도 아니고 의사한테 아픈 걸로 공갈을 칠 수가 있냐고.”
박성민이 툴툴거렸지만 태수는 덤덤하게 말했다.
“오죽하면 저럴까 하는 생각도 됩니다.”
“뭘 오죽하면 저래? 오죽헌이야? 아주 까만 대나무같이 속도 시꺼먼 양반 같은데.”
“신사임당님하고 율곡 선생님이 그 말 들으면 섭섭하시겠습니다.”
태수의 말에 박성민은 여전히 퉁명하게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