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441
00444 444화
“그 양반들이 섭섭한 건 내 귀에 안 들리니까 상관없는데, 저 야매 환자는 우리 일에 지장을 주니까 문제라고.”
“옷차림 보니까 어려운 분 같던데요.”
“그게 다 거짓말일지도 몰라. 원래 있는 놈들이 더해요. 막말로 병원 딱 나서는데 외제차가 기다릴지 누가 아냐고. 우리 최 선생은 참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외제차면 어떻고 대형차면 어떻습니까. 혹시 진짜 병이 발견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면 오히려 더 좋은 거고요.”
태수의 말을 들은 박성민은 기가 찼다.
“나도 모르겠다. 너 알아서 하세요.”
“깔끔하게 마무리 짓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그런데 난 저런 환자들은 좀 반대일세. 아무리 자기 몸 상태를 알고 싶어도 그렇지. 우리 병원 장점을 이용하려는 건 영 기분이 찝찝하고 떨떠름하고 그러네.”
박성민은 끝까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투덜거리며 멀어져 갔다.
그러나 태수는 자그마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잠시 후, 조상현이 도착하고 EMR에 검사 결과가 떠올랐다.
태수가 차분한 얼굴로 확인했다.
물론 병변이 발견되진 않았다.
태수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러고 난 후 조상현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냥 소화가 좀 안 되시는 거 같네요.”
“아, 그래요? 혹시 뭐 조그만 이상이라도 없나요?”
“간은 조금 안 좋네요. 약주를 좀 덜 드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태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계속 시선을 마주하던 조상현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왠지 모를 죄책감이 깃든 얼굴이다.
태수는 개의치 않고 이어서 말했다.
“이제 귀가하셔도 될 거 같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저기…….”
“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태수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바라보자 조상현이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가 볼게요.”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태수는 깊숙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 모습에 조상현은 멈칫하더니 조금은 빠른 발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아프다고 찾아왔던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속도다.
그도 확인을 했으니 뻔뻔하게 더 버티고 있긴 힘들었던 모양이다.
태수는 그런 모습도 신경 쓰지 않았다.
병이 없으면 그걸로 만족했다.
다시 일과를 이어 가던 중이었다.
응급실 전체에 방송이 울려 퍼졌다.
따라라란.
-원내에 계신 브레드 김 선생님, 최태수 선생님, 1팀장실로 속히 가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
방송 내용에 태수가 힐끔 스피커를 쳐다봤다.
‘팀장님이?’
무슨 일로 호출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팀장실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는 사이 저쪽에서 브레드 김이 다가왔다.
“닥터 최, 갑자기 무슨 호출이야?”
“잘 모르겠습니다. 그보다 쉬시던 중이신 것 같은데요.”
“그건 상관없는데 무슨 일인지가 더 궁금하네. 일단 가자고.”
브레드 김과 태수는 나란히 팀장실로 향했다.
이내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다.
팀장실은 그리 크지 않았다.
전용 책상과 책장 하나, 자그마한 응접 소파가 전부였다.
브레드 김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호출 받고 왔습니다.”
“일단 앉으세요. 최 선생도.”
자리를 권하는 하석준 팀장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태수와 브레드 김은 더더욱 의아한 얼굴로 우선 소파에 앉았다.
하석준 팀장이 조금은 무거운 얼굴로 첫 마디를 꺼냈다.
“김 선생님, 하나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hepatoma terminal stage(간암 말기) 환자를 hemorrhoid(치질) 수술 하신 경험이 있습니까?”
“네?”
브레드 김이 황당한 얼굴로 바라봤다.
말기 암인데 치질 수술?
팔이 부러졌는데 손바닥에 박힌 가시를 걱정하는 것과 같았다.
그건 태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대화 중이었기에 섣부르게 끼어들진 않았다.
그래도 황당한 건 매한가지였다.
두 사람의 반응을 본 하석준 팀장도 쓴 미소를 지었다.
“두 분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이고요.”
“그런데 그걸 왜 물으십니까?”
“그런 환자가 찾아왔었습니다. 팀장실에서 상담해서 응급실에서는 아마 모를 겁니다.”
하석준 팀장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 응급실에 있었는데 그런 환자가 들어왔다는 걸 들은 기억이 없던 탓이다.
브레드 김이 하석준 팀장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서울로 보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서울 대학병원에서 입원 중이었답니다. 암이 많이 진행되어 병원에서 치료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요?”
“환자는 치질로 인한 고통 때문에 병원에 몇 번 찾아갔답니다. 수술해 달라고 말입니다.”
하석준 팀장의 이야기에 브레드 김은 고개를 저었다.
“누가 그걸 수술해 주겠습니까.”
“안 그래도 그쪽에서도 그랬다고 하더군요.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니까 그냥 진통제로 버티면서 좀 더 사시는 게 좋겠다고요.”
“저라도 그랬겠습니다.”
브레드 김도 동조했다.
환자의 생명을 중시하기에 무모한 수술을 받는 걸 당연히 반대했다.
하석준 팀장은 그 뒤의 이야기를 이었다.
“하지만 환자는 아닌 모양입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좋으니까 수술 좀 해 달라고 했지만 끝내 거절당했답니다. 다른 병원을 몇 군데 돌아다녀 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고요.”
“많이 심합니까?”
“제가 직접 봤는데 hemorrhoid(치핵)이 많이 빠져나와 있더군요.”
“음.”
브레드 김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태수가 물었다.
“그런데 저희 병원은 어떻게 온 겁니까? 대전에도 병원들이 많은데요.”
“그건 최 선생 때문이야.”
“저요?”
“한참 전에 신문에 난 기사를 아들이 본 모양이야. 그 아들도 아버지의 고통을 더 지켜볼 수 없어서 어렵게 모시고 온 모양이고.”
하석준 팀장의 말에 태수가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기사를 어떻게 보셨기에…….”
“정말 환자를 위하는 의사라면 당연히 수술해 주지 않겠냐고 막무가내로 말하더라고.”
“그건 아닙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일부러 최 선생과 대면시키지 않았어. 두 분을 따로 불러서 이야기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고.”
하석준 팀장의 말이 끝나자 이번에는 브레드 김이 물었다.
“그래서 팀장님은 저희가 수술하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정확하게는 두 분이 상의하셔서 결정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음.”
“최 선생과 김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그대로 진행하려고 이렇게 따로 뵙자고 한 겁니다.”
하석준 팀장의 말에 브레드 김이 잠시 생각하다 질문했다.
“서울 종합병원에서는 환자 생명이 얼마나 남았다고 했답니까?”
“그건 모른다고 했답니다. 당장 한 달이 될 수도 있고 1년이 될 수도 있다고만 했다네요.”
“하긴 암이라도 당장 내일 죽는 건 아니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석준 팀장이 묻자 브레드 김이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일단 저희 둘이 따로 이야기를 좀 해 봐야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아마도 수술하지 않겠다고 결론은 나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차트를 살펴보면서 방법을 강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두 분이 충분히 상의하시고 알려 주십시오. 거부하시면 제가 두 분 일에 피해 없도록 잘 마무리 지을 테니까요.”
하석준 팀장의 말은 거기서 끝이었다.
팀장실을 나선 태수와 브레드 김은 휴게실에 자리했다.
환자에 대한 임시 차트를 받아 온 상태다.
태수와 브레드 김이 임시 차트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역시나 말기 암이다.
그리고 환자가 원하는 건 치질 수술.
마취가 안 될 위험도 있다.
진통제 또한 점점 강도가 강한 약으로 바뀌고 있어서 환자가 고통을 이겨 낼 수 있을지도 장담하기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수술 도중 대출혈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거기까지 생각을 한 후였다.
브레드 김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건 수술할 수 없어. 이미 암이 상당히 전이된 상태잖아. 치질 수술 하다 수술대에서 그대로 세상과 이별하는 수도 있어.”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이건 거부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차라리 진통제를 아주 강한 걸로 처방하는 게 어떨까요. 고통이라도 적게 느끼면서 가족들과 최대한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태수의 의견을 들은 브레드 김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그게 낫겠어. 정 고통스러우면 내원해서 morphine(모르핀)을 주사하더라도 말이지.”
“그게 좋겠습니다.”
“그래. 치질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암하고는 비교할 수 없어. 아니, 비교해서는 안 돼. 이건 내가 직접 팀장님에게 이야기하도록 할게.”
브레드 김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가 어떤 고통을 느낄지는 솔직히 경험해 보지 않아 모른다.
하지만 암과 치질.
그건 브레드 김의 말처럼 단순 비교 해서는 안 된다.
하나는 분명하다.
고통은 어떤 병이든 똑같다.
그 다음날.
신속대응센터에서 일하는 의사들이 늘 그랬듯이 수술실에서 태수와 브레드 김이 나란히 걸어 나왔다.
이번도 꽤나 힘든 수술이었는지 두 사람 얼굴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의료 폐기물 수거함 앞에 도착한 브레드 김이 마스크와 헤어캡을 벗어 던지며 맥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4시간짜리 수술이었지?”
“네.”
“어째 하면 할수록 수술 강도가 점점 높아지는 거 같아. 이젠 한 번 수술하고 나면 상당히 지치네.”
“그러게 말입니다.”
태수가 진심으로 동조하자 브레드 김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NGO에서 다루기 힘든 케이스도 상당히 있고 말이야.”
“거긴 총상이나 자상 환자가 대부분이니까요.”
“그건 그렇지. 닥터 최 덕분에 좋은 기회를 얻는 거 같기도 하고.”
브레드 김의 말에 태수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괜한 병원에 불러들여서 원망하시는 건 아니고요?”
“가끔 하지. 하하.”
“하하.”
기운 빠진 웃음이 두 사람에게서 흘러나왔다.
그것도 잠시였다.
브레드 김이 미소를 지우며 진심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고마운 점도 많아. 생활도 아주 편안하고 환자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병원 시스템도 너무 마음에 들어.”
“그건 제가 아니라 이사장님께 인사하셔야죠.”
“날 부른 건 닥터 최야. 이사장이야 속마음이 있었고.”
“…….”
태수가 침묵하자 브레드 김이 이어서 말했다.
“이사장이 날 좋은 의도로 이용하는 거니까 별다른 불만은 없어.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많은 게 달라졌겠지만 말이야.”
“그렇겠죠.”
“그저 막연히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소문만 들었는데, 이렇게 직접 피부로 느껴 보니까 같은 피가 통하는 나라가 맞는 거 같아.”
“그럼요.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이 있는 나라 아닙니까.”
태수의 말에 브레드 김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이라는 게 정말 무섭더라고. 좌우간 이런 기회를 준 건 닥터 최니까, 난 닥터 최에게만 고마워할 거야.”
“저야말로 이렇게 같이할 수 있어서 항상 행복합니다.”
“부려 먹기도 좋고.”
“그럼요. 얼마나 좋은데요. 하하.”
“하여간. 하하.”
두 사람의 얼굴에 또 한 번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란히 휴게실로 향했다.
컨퍼런스할 자료도 정리해야 하고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 했다.
두 사람이 휴게실에 거의 도착할 즈음이었다.
타다다닥.
뒤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태수와 브레드 김이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함은선 간호사가 두 사람을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잠시만요!”
그녀의 부름에 태수와 브레드 김이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