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463
00466 466화
“그건 속이 없는 게 아니라 순박한 거지.”
“너무 순박해서 지금 문제가 되고 있다고. 상당히 위험한 수술이라서 서울로 가라고 했나 봐. 서울 수술비나 입원비가 좀 비싸냐.”
“그건 그렇지.”
“돈은 없고 와이프 수술을 미룰 수도 없고. 그놈 속이 문드러지는 모양이야. 태수야, 방법 없냐? 넌 의사니까 잘 알 거 아니야.”
이동훈의 목소리에서 간절함이 엿보였다.
태수에게도 그렇지만 이동훈에게도 특별한 친구다.
송준호가 남에게 해 끼친 적 없이 살았다는 건 태수도 장담할 수 있다.
법 없어도 잘 살아갈 친구다.
그 사정을 외면할 순 없었다.
태수가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벌컥!
휴게실 문이 다급하게 열리더니 1팀으로 옮겨 온 홍진만이 들어왔다.
“김 선생님, 치프, 응급입니다!”
응급이라는 소리에 잠들어 있던 브레드 김이 두 눈을 번쩍 떴다.
“젠장. 좀 쉬나 했는데. 닥터 최, 뭐 해?”
브레드 김이 태수에게 눈짓하고 부리나케 휴게실을 벗어났다.
태수도 더 통화할 수 없었다.
“동훈아, 응급 터져서 가 봐야 되니까 일단 끊자. 준호한테는 내가 오늘 중으로 전화할게.”
“인마, 태수야.”
“미안하다.”
사과와 함께 일방적으로 통화를 마친 태수도 휴게실을 뛰쳐나갔다.
송준호의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놓인 환자를 외면할 수도 없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1팀은 퇴근을 할 수 있었다.
도성민을 포함한 레지던트들과 함께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태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중이었다.
숙소 근처에 도착하자 자그맣게 꾸며 놓은 공원이 보였다.
평소에는 피곤함에 지나치기 바빴던 장소이기도 했다.
이내 결정을 내린 태수가 도성민에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
“이 시간에 어딜 가려고?”
“전화 좀.”
태수는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도성민과 레지던트들에게서 멀어졌다.
공원에 도착한 태수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피곤함으로 몸이 축축 늘어졌지만 송준호의 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여유롭게 전화할 시간이 지금밖에 없었다.
태수는 차분한 마음으로 송준호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아니, 찾을 필요도 없었다.
머리가 아니라 손이 송준호의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대로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누르면 그만이다.
잠시 기다리자 송준호의 얼떨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수?”
“잘 사냐?”
“태수야!”
송준호의 목소리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태수 또한 오랜만에 들어도 어제 들었던 것 같은 살가움에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신혼인데 깨는 잘 볶고 있어?”
“깨는 무슨.”
“왜 이래? 여기까지 고소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데.”
“하하. 그보다 넌 어떻게 지내고 있어? 얼마 전에 동훈이 만나서 네 얘기 엄청 많이 했는데.”
송준호는 아내 얘기가 나오자 슬쩍 화제를 돌리려 했다.
태수는 일단 모르는 척하며 이야기를 받았다.
“그랬어?”
“그랬다니까. 진짜 네가 잘돼서 얼마나 기쁜 줄 아냐? 우리 그날 네 얘기만 하면서 소주 2병씩 깠다니까.”
“그동안 연락 안 해서 섭섭하지는 않고?”
태수가 슬쩍 떠봤지만 송준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응대했다.
“섭섭하기는. 의사가 얼마나 바쁘겠어. 내가 먼저 연락했어야 했는데 이렇게 연락을 주니까 내가 더 고맙지.”
“고맙기는. 그보다 배는 안 아파?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던데 말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 친구 잘되는데 내가 왜 배가 아파.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지만 너는 무조건 잘돼야 해. 아니, 잘됐으니까 이 형은 여한이 없다.”
송준호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가득 느껴졌다.
언제나 똑같은 친구의 목소리가 태수의 마음을 더욱 푸근하게 했다.
그러나 반가움은 이쯤에서 접고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다.
태수는 목소리부터 차분하게 바꾼 후 물었다.
“와이프가 아프다며.”
“어? 아, 아니야. 아프기는. 어디서 그런 이상한 소리를 들은 거야?”
“동훈이.”
“…….”
태수가 짧게 대답하자 순간 송준호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중한 병이라면 시간을 끌 일이 아니다.
생면부지의 남의 생명을 위해서도 사투를 벌이는 태수인데, 소중한 친구의 부인이라면 더더욱 서둘러야 했다.
여전히 송준호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지만 태수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앞뒤 자르고 핵심만 얘기하자. 무슨 병이야?”
“태수야.”
“내 이름하고 같은 병명은 의학사전에도 없어.”
태수가 양보 없이 몰아쳤지만 송준호는 쉽게 얘기하지 않았다.
“동훈이가 무슨 얘기를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솔직히 너한테 이런 소식까지 들려준 게 창피하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 니가 의사라면, 내가 와이프 아픈 거 숨기고 있으면 넌 어떻겠어?”
“그걸 왜 숨겨. 내가 쫓아가서라도 알아내야지.”
“그럼 지금 갈까?”
태수가 바로 말꼬리를 잡고 역으로 찌르자 송준호의 목소리에 움찔한 기색이 느껴졌다.
“이 시간에 어디를…….”
“말 안 하면 택시 탄다.”
“…….”
“끊는다. 이따가 보자.”
태수가 정말 통화를 마치려 할 때였다.
다급한 송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 태수야!”
“왜?”
“아이 참, 동훈이는 왜 너한테 전화를 해서.”
“그래서 어디가 아프냐고.”
태수는 물러서지 않고 다그쳐 물었다.
누구보다 친한 친구였기에 이렇게 다그칠 수 있었다.
“음, 그러니까…… 후우.”
한숨까지 쉬며 몇 번이나 망설이던 송준호가 결국 입을 열었다.
“괴사성 근막염이라고…….”
그 얘기를 듣는 순간 태수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괴사성 근막염.
근막이나 피하조직에 세균이 침투해 썩어 들어가는 병이다.
태수는 얼른 물었다.
“아니, 어쩌다가?”
“소일거리 한다고 집에서 봉제 인형을 만들었어. 실수로 재봉틀 바늘을 떨어뜨려서 무릎 위를 찔렸는데 소독만 했었대.”
“통증은 없었고?”
“진통제만 먹으면서 버텼나 봐. 그런데 그게 점점 심해져서 골반까지…….”
송준호는 말꼬리를 흐렸다.
얘기를 듣는 사이 태수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무릎에서 시작된 괴사성 근막염이 허벅지도 아니고 골반까지 진행되었다면?
이건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다.
송준호가 몰랐다는 게 솔직히 화가 났다.
“인마!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아니, 그게…….”
“그사이에 관계 한 번도 안 했어? 신혼인데 밤새 그냥 놔뒀을 리는 없잖아!”
“어느 날부터 힘들다고, 미안하다고 해서 그냥…….”
송준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태수는 순간 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송준호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게 화근이 된 모양이다.
그런데도 수술비와 입원비 걱정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송준호가 갑갑했다.
아니, 충분히 그럴 녀석이었기에 이제야 소식을 물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솔직히 그렇게 될 때까지 참은 송준호의 부인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무릎에서 골반까지 진행된 괴사성 근막염이라면 지체할 시간이 없다.
하루하루가 지옥같이 느껴질 터였다.
병이 조금만 더 퍼지면 결혼 생활에 치명적인 결과가 나올지도 몰랐다.
이렇게 한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태수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전화할 테니까 휴대폰 손에 쥐고 있어.”
“어?”
“꼭 쥐고 있어. 알았지!”
“아, 알았어.”
송준호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를 끝으로 태수는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곧장 하석준 팀장에게 전화했다.
“퇴근한 거 아니었나? 혹시 응급이야?”
“팀장님, 실은…….”
태수는 얼른 사정을 얘기했다.
“……그런데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모든 얘기를 마친 태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없이 듣고 있던 하석준 팀장이 심각한 목소리를 냈다.
“그렇게 necrotizing fasciitis(괴사성 근막염)이 진행될 때까지 어떻게 참았다는 거야?”
“죄송합니다.”
“이건 최 선생이 사과할 일이 아니잖아. 근처 병원이라도 가서 당장 수술 받아야지!”
“벼농사밖에 모르는 친구입니다. 수술비와 입원비를 지불할 자신이 없는 모양입니다. 어디 가서 돈 빌릴 주변머리도 없고요.”
태수의 말을 듣고 있던 하석준 팀장이 조금은 어이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나?”
“순박한 녀석입니다. 개인적으로 너무 고마운 친구이기도 하고요. 아니, 모든 비용을 제가 내겠습니다. 신속대응센터로 데려와도 되겠습니까?”
“무슨 소리야? 신속대응센터가 최 선생 아는 사람들 데려오려고 만든 곳이야?”
순간 하석준 팀장의 목소리가 따끔하게 울렸다.
태수는 그 순간 멈칫했다.
당연히 허락해 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거부하는 목소리가 태수의 귓전을 계속 맴돌았다.
“팀장님, 이건…….”
“딴소리하지 말고 주소부터 불러.”
“주소라니요?”
“그 친구 집 주소 말이야. 동성에 전화해서 바로 병원 구급차 보내라고 할 테니까.”
하석준 팀장이 재촉하듯 묻자 태수는 순간 정신이 없었다.
“방금 신속대응센터는 안 된다고…….”
“신속대응센터는 응급 환자 전용인 거 몰라? 괴사성 근막염 환자라면 당연히 동성으로 보내야지.”
“…….”
“그보다 그 친구 집 주소부터 불러 보라니까.”
하석준 팀장의 다그침이 계속되는 동안 태수는 가슴이 뭉클했다.
“감사합니다.”
“인사는 나중에 하라고. 급한 일부터 해결해야 하니까.”
“바로 보내겠습니다.”
“아, 그리고 최 선생은 동성으로 가. 내일 하루 그쪽으로 파견 나간 걸로 할 테니까 수술까지 마친 후에 복귀하도록 해. 그럼 뒷일은 나중에 듣지.”
하석준 팀장이 더 서둘렀다.
태수도 얼른 송준호의 집 주소를 문자로 보냈다.
그 후 태수는 택시에 올라 곧바로 동성종합병원으로 향했다.
동성종합병원에 도착한 태수는 응급실에 들어갔다.
전과 구조나 시설이 변한 건 없다.
달라진 건 응급실 시스템이었다.
신속대응센터와 똑같은 시스템으로 운영된다는 걸 태수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신속대응센터 응급실에 비해 조금은 한가하다는 점이었다.
“어? 최 선생.”
“어머, 선생님.”
대부분의 의료진이 지나가는 태수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태수도 반가운 마음이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고개만 숙이며 몸을 움직였다.
태수가 응급실 깊숙한 곳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이거 귀하신 몸께서 어쩐 일이야?”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는 건 정민수였다.
비번 후에 처음 만나는 것이기에 태수도 반가웠다.
하지만 반가움을 표현할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못한 게 아쉬웠다.
“갑자기 전화해서 놀랐지?”
“엄청 놀랐지. 친구 와이프가 아프다니, 내 친구는 아니지만 참 기분이 그렇다.”
“그보다 수술실 여유 있지?”
태수가 본론을 묻자 정민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부 수술 중이야?”
“아니.”
“자식이, 답답하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태수가 살짝 짜증을 내려 하자 정민수가 손짓했다.
“일단 이쪽으로.”
돌아서는 정민수의 모습에 태수는 눈빛을 굳히며 뒤따랐다.
이내 정민수가 도착한 곳은 응급실 한쪽에 있는 빈 스트레쳐카였다.
그걸 보고 태수가 물었다.
“이따가 여기에 누이면 되는 거야?”
“일단 이거부터 받아.”
정민수가 건네는 건 작게 접힌 천이었다.
그걸 펼쳐 본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수면 안대잖아.”
“쓰고 누워.”
“…….”
“팀장님이 오더를 내리셨어. 강제적으로라도 너 재우라고. 하루 종일 수술해서 피곤할 텐데 그 몸으로 또 무슨 수술을 하냐고 말이야.”
정민수의 말에 태수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민수야, 미안한데…….”
“솔직히 팀장님 말씀이 옳다고 본다. 구급차가 도착할 때까지 4시간 정도 걸려. 그 전까지라도 좀 쉬라고.”
“내가 지금 잠이 오겠냐?”
“그러니까 준비한 거잖아. 선잠을 자든 쪽잠을 자든 일단 좀 자. 아, 어서!”
정민수가 태수의 어깨를 강하게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