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500
00503 503화
태수는 눈을 비볐다.
중간중간 성장 과정을 사진으로 전송받아 봤지만 이렇게 실물로 보는 건 1년 만인 탓이다.
“쟤, 쟤가 수현이야?”
“못 알아보겠지? 엄청 컸어.”
“우와.”
태수는 진심 어린 감탄을 터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태수는 얼른 다가가 조카를 번쩍 안아 들었다.
또랑또랑한 눈빛과 통통한 볼살을 보니 절로 뽀뽀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쪽쪽!
허락도 구하지 않고 몇 번이나 뽀뽀를 한 후에야 태수가 물었다.
“수현아, 외삼촌이야. 이 삼촌 기억해?”
“너는 태어난 지 며칠 안 된 것도 기억하니? 똘똘한 애가 어떻게 조카만 안으면 바보가 되는지.”
누나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그런 면박도 지금 태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조카의 맑은 눈빛만 한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조카가 슬쩍 손을 들어 태수의 볼을 쓸었다.
“꺄아!”
그리고 터지는 웃음.
태수는 그 모습에 온 정신이 홀라당 날아가 버렸다.
“널 어쩌면 좋니.”
조카를 끌어안고 볼과 볼을 비비는 태수의 얼굴이 너무도 행복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누나가 외려 황당해했다.
“수현이가 왜 저러지? 진짜 낯 많이 가리는데.”
“1년 전에 봤잖아.”
“그러니까 어떻게 애가 그걸 기억하겠냐고.”
“원래 사랑하는 사이는 다 통하는 거야.”
태수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닭살 돋는 멘트를 스스럼없이 날렸다.
웃기는 건 조카도 그런 태수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니, 오히려 태수가 안아 주는 걸 너무도 즐겼다.
누나는 그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그래. 니네끼리 살아라.”
“나도 그러고 싶은데, 참 방법이 없네.”
태수는 여전히 조카를 끌어안은 채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후로도 태수는 계속 조카를 안고 있었다.
심지어 누나가 한 상 차려 준 밥을 먹을 때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도 함께였다.
오랜만에 힘든 육아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즐기는지 누나는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누나는 태수가 준비한 선물들을 살피며 깜짝 놀랐다.
“이 신발하고 옷은 또 어디서 샀어? 진짜 예쁘다.”
“조금 클 수도 있어. 아기들은 작은 것보다는 큰 게 낫다고 해서.”
“크면 두고 입고 신으면 되지. 전에 선물해 준 것도 다 그렇게 했잖아.”
“그럼 다행이고. 다행이지요? 그렇죠?”
태수가 조카를 두 손으로 번쩍 들고 물었다.
“까르륵.”
조카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누나는 그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렇게 좋을까.”
“그럼 좋지. 내가 외삼촌이에요, 외삼촌.”
“가끔 기분 좋으면 말도 하니까 잘 구슬려 봐.”
“진짜? 진짜 우리 수현이 말할 수 있어요? 삼촌 해 봐. 삼촌.”
태수는 조카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몇 번이나 보챘다.
그러나 조카는 그저 웃기만 했다.
태수의 노력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수현아, 삼촌.”
그 모습을 보던 누나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6시간을 보채니. 애가 더 지치겠다.”
“한마디만 해 주면 되는데 안 하잖아. 수현아, 삼촌이라고 해 보라니까.”
“하기 싫은가 보지. 애 좀 그만 보채라니까.”
“에휴.”
태수는 누나의 잔소리를 듣고야 포기했다.
그렇게 노력했건만 안 되는 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철컥.
현관문 소리와 동시에 매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처남 왔어?”
“빠빠.”
조카의 입에서 대뜸 소리가 터져 나오자 태수가 황당한 얼굴로 바라봤다.
“야, 너 너무하는 거 아니야?”
“빠빠.”
조카가 같은 말만 반복하자 누나가 옆에서 놀렸다.
“아무리 삼촌이 좋아도 아빠만은 못한가 보다.”
“에휴, 얼굴 안 보인 내가 죄인이지.”
태수는 누나에게 조카를 건네고 바로 매형에게 다가갔다.
전보다 안색이 더 좋지 않았다. 푸석푸석한 피부를 보니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것 같았다.
그래도 태수를 보고 환하게 웃어 주는 그 미소가 좋았다.
태수도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다녀오셨어요?”
“어? 어, 그래. 어째 처남의 그 인사는 변하지를 않아.”
얼떨떨한 매형의 인사에도 태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사람이 일관성 있고 좋잖습니까.”
“그러게 말이야. 일단 옷 좀 갈아입고 이야기하자고.”
매형은 태수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인 후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식구들 모두 저녁 식사를 위해 식탁에 둘러앉았다.
조카를 품에 안은 누나가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매형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처남이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결국 안 됐다는 거지?”
“네. 배신감이 뼈에 사무치네요.”
“실망하지 말고 많이 먹어. 많이 먹고 힘내야 또 실망하지.”
“매우 감사합니다.”
태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두런두런 나누기 시작한 이야기는 식사가 끝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차를 마시던 중 누나가 물었다.
“너, 이번에는 좀 시간이 있는 거야?”
“내일 저녁에 가려고.”
“어머, 어떻게 그렇게 시간을 많이 뺐어?”
“휴가 중이야.”
태수의 말에 누나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병원 휴가는 겨울이야?”
“아니. 전문의 합격 포상 휴가라고 해야 맞겠지?”
“아, 전문의 합격했구나……. 뭐?”
누나의 두 눈이 급격히 크게 떠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동공까지 격하게 흔들리는 게 보일 정도였다.
그건 누나뿐만이 아니라 매형도 마찬가지였다.
“처, 처남, 그러니까 지금…….”
“네. 좀 됐는데, 좌우간 합격했습니다.”
“아! 축하해. 이거 이렇게 말로만 할 일이 아니잖아. 이거 참. 여보, 귀띔이라고 좀 해 줬어야 내가 케이크라도 사 오지.”
매형이 타박하자 누나가 더 난리였다.
“전 쟤랑 6시간 동안 같이 있었는데도 지금 처음 들은 이야기거든요. 태수야, 너 어떻게 한마디도 안 했니?”
“지금 이야기하잖아.”
“그 중요한 이야기를 어떻게……. 잠깐만, 엄마한테 먼저 전화를…….”
“알고 계셔. 집에 들렀다가 이쪽으로 온 거거든.”
태수의 말에 누나는 더욱 황당해했다.
“엄마는 어쩜 나한테 한마디도 안 하실 수가 있어?”
“내가 누나한테 말씀하시지 말라고 했거든. 기왕이면 내 입으로 말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그럼 빨리 이야기했어야지.”
“지금 이야기하잖아.”
태수가 너무도 덤덤하게 말하자 누나는 힘이 쭉 빠진 얼굴이었다.
“그래. 축하한다, 축하해.”
“고마워.”
“어떻게 저렇게 무심할 수가 있어. 저런 녀석이 내 동생이라니.”
누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어이없어 했다.
매형은 그런 누나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두 사람 모두 잠깐만 기다려 봐.”
“왜요?”
“글쎄, 기다리라니까.”
매형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두꺼운 옷을 손에 쥐고 집을 나갔다.
케이크를 사러 간 모양이다.
태수와 누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매형은 변하는 게 없어.”
“그래서 매력적인 거 같지 않아?”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콩깍지가 안 벗겨졌네.”
“평생 걸려도 안 벗겨질걸? 억울하면 너도 결혼하든가.”
누나는 태수를 슬쩍 놀리며 미소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수는 매형이 부리나케 사온 케이크로 조촐한 축하를 받았다.
태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이 순간이 행복했다.
축하의 다음 순서로 태수와 매형이 집을 나섰다.
두툼한 옷을 걸친 태수와 매형은 집 근처에 있는 포장마차에 도착했다.
매형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사는 거니까 먹고 싶은 거 다 주문해.”
“그럼 염치 불구하고 주문하겠습니다.”
“그래, 얼마든지.”
매형이 권하자 태수는 바로 주문했다.
“여기 소주 하나하고요, 꼼장어랑 어묵탕 주세요.”
“그걸로 되겠어?”
“원래 안주보다 술 아닙니까. 술을 끝장나게 마실 거니까 걱정 마세요.”
태수가 찡긋거리자 매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술과 안주가 차려진 후 술이 몇 배가 돌았다.
술이 약한 매형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참 매형으로서 해 준 게 없어서 미안해.”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의과 시절부터 엄청 고생했잖아. 내가 용돈이라도 두둑하게 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게 계속 마음에 걸리고 그러네.”
“아닙니다. 누나가 행복한 걸 보고 있으면 제가 얼마나 기쁜데요. 수현이도 너무 예쁘게 자라고 있고요.”
“그거야 내가 가장이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거고.”
매형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지만 태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요즘 철없는 아빠가 얼마나 많은데요. 매형은 정말 가장으로서 제 롤모델입니다.”
“뭘 그렇게까지.”
“진짜예요. 그런 의미에서 한 잔.”
“그래그래. 나도 한 잔 따라 줘야지.”
태수의 잔을 받은 매형도 바로 따라 줬다.
조금 더 술을 마신 후였다.
매형의 얼굴이 완전히 빨갛게 달아올랐다.
더 마시면 취할 것 같았다.
태수는 그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 자리를 마련한 게 아니었다.
기회를 엿본 태수는 때가 되자 작전을 시작했다.
“매형.”
태수가 부르는 소리에 매형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갑자기 왜 불러?”
“뜬금없지만 진심으로 궁금해서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회사 생활에 만족하십니까?”
태수의 물음에 매형의 얼굴이 씁쓸하게 변했다.
“솔직히 회사에 만족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나? 내 식구들을 조금이라도 안정적으로 살게 하려고 다니는 거지.”
“그럼 저도 솔직히 여쭤 보겠습니다. 적성에 맞으십니까?”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전 진지합니다.”
태수가 굳은 눈빛으로 묻자 매형의 표정도 착 가라앉았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달라지는 게 뭐가 있겠어. 처남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가장이 되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
“내가 결정하는 하나의 일이 우리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항상 생각해야 하니까.”
쭉!
대답을 마친 매형이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태수는 빈 잔을 다시 채우며 차분하게 물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매형, 전에 자동차 정비에 관심이 많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고등학교 때 정비사 자격증도 취득하셨을 정도로요.”
“있긴 하지. 그래도 뭐, 이젠 그냥 가끔 상상이나 하는 정도야.”
“만약 현실이 된다면요?”
“그것도 생각해 봤는데, 당장 생활비도 빡빡한데 다른 걸 시작하기는 힘들지.”
매형의 속 이야기를 들은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태수가 아직 가정을 꾸리지는 않았지만 매형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로 이야기를 끝낼 생각은 없었다.
태수는 다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매형, 제가 한 번만 건방진 소리 해도 되겠습니까?”
“처남 이야기라면 언제든지 경청해야지.”
“매형의 인생에 있어서 2년만 투자하십시오. 딱 2년입니다.”
태수의 말에 매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일단 이거부터 받으세요.”
태수는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받아 들어 펼치니 전화번호가 하나 적혀 있었다.
매형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게 뭔데?”
“한국에서 알아주는 자동차 정비 명인의 전화번호입니다.”
“이런 분 전화번호를 처남이 어떻게…….”
“아는 분을 통해서 어렵게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딱 한 번 통화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할 이유도 없고요, 가르쳐 줄 수 있느냐고만 물었습니다.”
“…….”
태수가 잠깐 말을 끊었지만 매형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대답이 없자 태수가 말을 이었다.
“대가리가 깨질 각오가 되었으면 오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그동안 지켜본 매형은 절대 회사 체질이 아닙니다. 좋은 손기술을 계속 썩히는 것도 싫고요.”
“처남, 이렇게까지 해 준 건 고마운데, 처남도 알다시피…….”
매형이 차분하게 말하는 사이였다.
태수는 주머니에서 통장 하나를 꺼내 매형에게 건넸다.
“이것부터 봐 주세요.”
“이건 또 뭔데?”
“일단 보세요.”
“……헉!”
통장 잔액을 확인한 매형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2억.
어마어마한 숫자에 절로 헛숨이 들이켜질 정도였다.
태수는 그런 매형을 향해 할 말을 이어 갔다.
“2년 후에 찾을 수 있는 돈입니다. 알아보니까 그 정도면 쓸만한 카센터는 차릴 수 있다고 하고요.”
“이, 이걸 어떻게…….”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요. 그보다 매형,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통장의 숫자를 바라보는 매형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다.
사실 그 돈은 태수가 지금까지 살뜰하게 모아 둔 것이다.
조금 부족한 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
태수가 굳이 대학가에 원룸을 얻은 건 군대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돈을 사용하지 않기 위함이다.
오늘 이 자리는 즉흥적으로 마련된 것이 아니다. 태수가 몇 년 동안 벼르고 별러 오늘에서야 성사된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