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602
00605 605화
등골이 살짝 떨리는지 태수를 향해 빠르게 말했다.
“못 들은 걸로 하지. 교수님 눈에 보이기 전에 이제 그 손 좀 놓아주지 그래.”
“선배님.”
“선배라고 생각한다면 서로 그만 곤란하자고. 김 선생도 뒷일을 감당하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빨리 결정해야 할 거야.”
이석민의 경고가 더욱 살벌해졌다.
그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무마시키고 싶어 했다.
태수를 위해?
턱도 없었다.
박종혁 교수의 심기를 불쾌하게 하고 싶지 않은 눈치다.
태수도 김용석도 모두 알고 있었다.
저 멀리서 다가오기 시작한 박종혁 교수가 서서히 접근하고 있다.
박종혁 교수가 이 상황을 보게 된다면?
태수 자신은 아무 상관 없다. 하지만 김용석의 미래가 불투명해질 수도 있다.
교수급 인사라면 레지던트의 처분 정도는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걸 이미 연성대학병원에서부터 뼈저리게 느낀 바였다.
그런 더러운 꼴을 후배에게 경험시키고 싶진 않았다.
그 생각에 꽉 쥐고 있던 김용석의 옷깃을 서서히 놓기 시작했다.
김용석이 움찔하며 태수를 바라봤다.
시선을 마주한 태수는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피하는 건 아니야.”
“네?”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
김용석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석민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 난 후에야 박종혁 교수가 도착했다.
“무슨 일인데……. 최 선생이 여긴 어쩐 일인가?”
인자한 표정이지만 목소리가 썩 경쾌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태수도 마주 받아칠 생각은 없었다.
태수가 막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이석민이 바로 중간에 끼어들었다.
“잠시 산책 중이었나 봅니다.”
“그렇군.”
“이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이석민이 빠르게 상황을 무마시키려 했다.
박종혁 교수도 눈치가 있다.
뭔가 일이 있지만 큰일은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러나 태수를 향한 시선은 거두지 않았다.
“아무리 이곳이 보건소 땅이라고 해도 이렇게 뒤까지 들어오는 건 좀 삼갔으면 좋겠어. 서로 지킬 건 지켜야 후에 난처한 일이 생기지 않을 거 아닌가.”
“…….”
“그럼 이제 오후 진료 시간이니까 진료 시작해야지. 우리도, 최 선생도.”
좋게 말했지만 결국 돌아가란 의미였다.
할 말을 마쳤는지 박종혁 교수가 돌아서려 할 때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태수가 조용히 불렀다.
“교수님.”
“음?”
“이렇게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여기에 들어온 건 다름이 아니옵고.”
태수가 잠시 말을 끊자 박종혁 교수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이유가 있다는 뜻 같은데.”
“아, 아닙니다, 교수님. 최 선생도 참.”
이석민이 얼른 태수에게 눈짓하며 상황을 무마시키려 했다.
하지만 태수는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실은 김용석 선생 때문입니다.”
“김 선생이라. 혹시 무슨 실례라도 했나?”
“그게 아니라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멀리서 지켜봤는데 영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거 같아서 말입니다.”
태수가 최대한 부드럽게 이야기했지만 박종혁 교수의 얼굴은 바로 굳어졌다.
“좋지 않다는 게 무슨 소리인가?”
“그러니까…….”
태수는 자신이 파악한 김용석의 병세를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들은 박종혁 교수는 김용석을 바라봤다.
태수의 말대로 얼굴이 벌겠다.
김용석에게 다가간 박종혁 교수가 뚫어 볼 듯한 눈빛으로 나지막이 물었다.
“몸이 많이 좋지 않은가?”
“아닙니다.”
“잠시.”
박종혁 교수는 바로 김용석의 이마를 짚었다.
“아, 아니, 괜찮은데요.”
“내 손길이 느껴지나?”
“네, 물론입니다. 물론이고말고요.”
김용석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젠장.”
반면, 난처해하던 이석민은 태수를 째려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태수는 그 눈빛을 받으면서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사이 간단하게 상태를 파악한 박종혁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열이 상당한 거 같은데. 이런 몸 상태면 진작 말을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멀쩡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우리 병원 이미지는 어떻게 되겠나. 뻔히 열이 있는데도 노동력을 착취하는 병원으로 보이지 않을까. 적어도 최 선생의 눈에 말이야.”
“그, 그게…….”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박종혁 교수의 말에 김용석은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박종혁 교수는 그런 김용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며 말했다.
“오늘은 더 움직일 생각 하지 말고 숙소로 들어가서 방 데우고 따뜻하게 쉬어. 이건 내 오더야.”
“교수님.”
“그렇게 하라니까.”
“……네.”
김용석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러고 난 후 박종혁 교수의 시선이 태수에게로 향했다.
“최 선생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오늘 최 선생 산책이 우리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시간이었던 거 같아.”
어딘지 모르게 비꼬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태수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교수님, 김 선생은 단순히 감기에 걸린 게 아닙니다.”
“이마에 손을 대 보니까 감각도 멀쩡하고, 공간인지능력도 그렇게 하락하지 않았던데.”
“지금은 병세가 진행 중이라 감각이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태수가 심각하게 말하자 박종혁 교수의 인자한 얼굴이 조금 딱딱하게 변했다.
“그럼 최 선생이 생각하는 병이 뭔가?”
“척수 농양이 의심됩니다.”
“의심하는 근거를 뒷받침해 줄 무언가가 있나? 단순이 오락가락하는 증세를 증거라고 말한다면 심히 불쾌할 거 같아.”
박종혁 교수의 목소리가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결국 증명할 검사 결과를 내밀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시진과 촉진 등으로 판단한 결과다.
당연히 손에 쥐어진 어떤 검사 결과도 없었다.
그렇다고 물러날 순 없었다.
태수가 살펴본 김용석의 상태는 상당히 심각했다.
어쩔 수 없이 뻔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전에 같은 증세를 겪은 환자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일전이라고 한다면 혹시 카슈미르인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박종혁 교수가 진심으로 감탄하자 태수가 멈칫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대화를 나눈 박종혁 교수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탓이다.
이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기도 하나?
어쩌면 생각보다 일이 더 잘 풀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박종혁 교수의 말에 태수가 가지고 있던 기대는 산산이 조각났다.
“벌써 몇 년이 지난 환자의 병력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다니. 정말 대단한 의사가 아니냔 말이야.”
“…….”
“최 선생은 자기 기억력을 상당히 자신하는 모양이야.”
박종혁 교수의 눈빛에 불쾌함이 떠올라 있었다.
이번 일을 통해 억지로 지워 냈던 그 일에 대한 감정까지도 되살아난 모양이다.
태수도 슬슬 기분이 나빠져 갔다.
하지만 참았다.
이유는 한 가지.
김용석의 본원 복귀에 대한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게 박종혁 교수인 탓이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만.”
“말과 다르게 눈빛은 전혀 죄송하지 않아. 외려 내가 틀렸다는 걸 다시 따지고 싶은 눈빛이지. 아닌가?”
“…….”
“아무래도 정곡을 찌른 모양이야. 하지만 최 선생, 30년에 가까운 내 의사 생활을 송두리째 뒤흔들 정도로 자네가 잘난 의사인지부터 생각해 봐.”
박종혁 교수는 불쾌함을 드러냄과 동시에 인자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눈빛에는 태수를 향한 경멸이 가득했다.
태수는 그런 박종혁 교수와는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걸 알았다.
지지고 볶고 싸우는 것도 미운 정이라도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박종혁 교수에게는 그런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차가워진 태수는 미소를 지운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도록 해.”
“그런데 가기 전에 김 선생에게 제가 경험한 조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태수가 일부러 먼저 선을 그었다.
그의 조건이 썩 나쁘지 않았는지 박종혁 교수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거까지 만류하진 않지. 하지만 쓸데없는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도움이 될 이야깁니다.”
끄덕.
박종혁 교수가 고개만 끄덕여 허락했다.
하지만 눈빛은 태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허튼소리를 한다면 결과가 좋지 않을 거라 경고하는 느낌이다.
태수가 거기에 흔들릴 이유는 없었다.
중요한 건 김용석의 병세일 뿐이다.
태연하게 시선을 돌린 태수는 김용석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김 선생, 누구나 의사가 될 수 있고, 누구나 환자가 될 수 있어.”
“…….”
“그럼 오늘은 푹 쉬라고.”
태수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김용석은 현명한 레지던트다. 그렇기에 지금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만약 알아듣지 못했다면?
솔직히 뒷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태수는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걸 모두 해 줬다.
판단과 결정은 김용석의 몫이었다.
태수가 떠나간 후였다.
이석민이 얼른 박종혁 교수에게 바짝 다가섰다.
“애송이가 어디서 나선답니까. 불쾌하셨겠지만 털어 버리십시오. 제가 앞으로는 접근도 못하게 하겠습니다.”
“이 선생.”
“네, 교수님, 말씀하십시오.”
이석민이 몸을 낮추고 실실거리며 대답했다.
그때 박종혁 교수의 사나운 눈빛이 이석민에게 꽂혔다.
“레지던트들을 어떻게 관리하는 거지?”
“그, 그게…….”
“어떻게 최 선생이 먼저 나서게 만들었냐는 말이야.”
“죄송합니다.”
이석민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박종혁 교수는 기분이 풀리지 않는지 사납게 몰아쳤다.
“내가 이런 꼴이나 당해야 하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앞으로 똑똑히 지켜보겠어.”
“…….”
이석민은 대답도 못하고 긴장하고 있었다.
박종혁 교수는 외과 교수이면서 충효종합병원에서 영향력이 상당한 인물이다.
그런 상대에게 찍혔으니 앞날이 걱정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했다.
괜스레 뻣뻣하게 굳은 김용석에게 날카로운 눈빛 화살이 날아갔다.
김용석은 바짝 굳어서 시선조차 돌리지 못했다.
그때, 박종혁 교수가 김용석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김 선생은 내가 말한 대로 오늘은 돌아가서 쉬어.”
“교, 교수님.”
“왜,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으로 소문내고 싶나?”
“아닙니다!”
김용석이 질색하며 대답했다.
그제야 박종혁 교수가 천천히 몸을 돌리며 말했다.
“제 몸 관리도 못하는 의사가 무슨 환자를 진료하겠다고.”
박종혁 교수는 마지막으로 감정 없는 눈빛으로 김용석을 흘겨보고는 멀어져 갔다.
이석민은 얼른 자기 앞날을 위해 그 옆에 바짝 따라붙었다.
홀로 남은 김용석은 허탈했다.
박종혁 교수에게 찍힌 이상 앞으로 펼쳐질 험난한 병원 생활이 머릿속에 훤히 그려졌다.
이런 상황을 만든 태수가 솔직히 원망스러웠다.
그냥 쉬면 된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만들어서 자신을 난처하게 했는지 따지고 싶을 정도였다.
“하아.”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진료소로는 들어가지도 못할 상황이다.
어쩔 수 없이 숙소로 가야 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김용석이 돌아섰다.
그리고 한 걸음 옮긴 순간이다.
텅.
쌓여 있는 상자에 어깨를 부딪쳤다.
그런데.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분명히 상자에 부딪혀서 몸이 휘청거렸다.
그런데도 감각이 없다니.
놀란 김용석이 얼른 주먹을 쥐어 봤다.
주먹이 쥐어지는 시늉은 할 수 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힘을 주라는 뇌의 명령이 떨어졌지만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어어?”
당황한 김용석은 허둥지둥 계속 팔을 움직였다.
몇 번이나 시도하고야 제 감각이 돌아왔다.
그 순간이었다.
태수의 진지한 눈빛이 머릿속에 오버랩됐다.
-누구나 의사가 될 수 있고, 누구나 환자가 될 수 있어.
상투적인 조언이라고 생각했다.
난 의사니까 누구보다 내 상태를 잘 알아.
자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생각이 지금 이 순간 산산조각 났다.
태수가 진중하게 자신을 살폈을 때가 다시금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