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636
00639 639화
사람은 누구나 망각의 동물이다.
한동안 초곡리에서 화제거리였던 조홍찬에 대한 이야기가 하루 하루 지나면서 서서히 잦아들었다.
보이지도 않는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다보니 질린 탓도 있었다.
태수도 어느새 일상으로 돌아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선착장까지 조깅을 다시 시작했다.
외과의사에게 기본 덕목은 체력이다.
수술을 위해 체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깨달았던 탓인지 전보다 훨씬 운동강도가 올라간 건 당연했다.
“훅훅.”
당연히 힘은 들었지만 보람도 함께라 견딜만 했다.
물론 늘 몸만 혹사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오후에는 한가한 틈을 이용해 낚시도 즐겼다.
긴장과 이완.
신체리듬을 늘 최상으로 이끄는 간단하지만 중요한 비법이다.
그사이 이선정 간호사와 조서영은 각자의 공부에 바빴다.
언제 있을지 모를 환자를 위해 다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맞는 장면이다.
환자는 늘 예고없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적어도 의료진이라면 기본적인 준비가 필요했다.
그렇게 여유로운 시간이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오늘도 태수는 낚싯대를 바다에 드리우고 자그마한 노트를 펼쳐 들었다.
카프레네와 제임스의 임상 기록들을 따로 정리해 놓은 노트였다.
어느 순간 태수의 등 뒤로 자그마한 그림자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미 노트에 푹 빠진 태수는 누가 다가오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다가온 그림자는 이내 태수의 등을 살짝 밀었다.
“왁!”
그 소리에 태수가 움찔했다.
“누구…… 어?”
얼른 뒤돌아 상대를 확인한 태수는 크게 놀랐다.
차윤재였다.
태수는 한순간 못 알아볼 뻔했다.
병원에서 비쩍 말랐던 그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전체적으로 살이 많이 올랐고, 거칠었던 피부도 윤기를 많이 되찾았다.
무엇보다 흐리멍덩한 눈빛이 사라지고 또랑또랑하고 아직 아이들 특유의 장난기가 가득했다.
놀란 태수가 어느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차윤재를 불렀다.
“윤재야.”
“선생님!”
차윤재는 거의 날듯이 다가와 태수를 부둥켜안았다.
아직 또래보다 왜소한 윤재를 태수는 몸을 낮춰 같이 끌어안았다.
잠시 서로의 온기를 나눈 두 사람은 이내 눈을 마주쳤다.
태수가 먼저 궁금한 걸 물었다.
“내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
“저기 예쁜 누나가 알려 줬어요.”
“엄마는?”
“저기 있어요.”
차윤재가 가리킨 방향은 역시나 보건소였다.
태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서 물었다.
“그보다 언제 퇴원했어?”
“어제요.”
“축하해. 고생했다.”
“그리고…….”
차윤재가 잠깐 망설이자 태수는 부드러운 미소로 물었다.
“무슨 일인데, 비밀이야?”
“그건 아니고요.”
“그럼 다 말해도 돼.”
태수가 구슬리자 차윤재가 슬쩍 주변을 돌아보며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태수의 귀에 바짝 다가와 자그맣게 속삭였다.
“이제 똥 쌀 때도 안 아파요.”
“정말?”
끄덕끄덕.
차윤재가 귀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듣던 태수 눈이 번쩍했다.
항문에 고통이 없다는 건 장이 제대로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스스로의 한계에 도전했던 수술에 대한 성과가 이렇게 눈앞에 나타났다.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온 차윤재가 그 증거다.
이젠 이 어린아이에게 더 이상 고통은 없을 터였다.
어떤 의사가 기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태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차윤재를 꽉 끌어안았다.
“고맙다, 나아 줘서.”
그렇게 태수는 차윤재를 한참 동안이나 끌어안았다.
더 이상은 필요없었다.
그저 스킨십 하나면 충분했다.
며칠후.
인생이란 녀석이 늘 그렇듯이 기쁨이 있으면 그 옆에는 아쉬움도 있기 마련이다. 조서영이 조심스레 태수 옆으로 다가와 주춤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서울로 가요.”
“복학하나?”
태수가 묻자 조서영이 힘들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 잘 할수 있지?”
“여기 기억을 떠올리면 못할 일이 없어요.”
“그럼 됐어. 조만간 송별회라도 하자고.”
태수가 흔쾌하게 웃음을 보였다.
드디어 다음날.
그동안 함께했던 조서영이 의대 복학 준비를 위해 서울로 가야 할 때가 됐다.
어제 조서영의 식구들과 함께 송별 파티도 했기에 오늘은 홀가분하게 떠나가면 됐다.
그러나 미련이라는 게 발목을 잡는지 조서영은 쉽게 떠나지 못했다.
그건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보건소 현관 근처에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가 조서영과 마주 섰다.
조서영은 복잡한 눈빛으로 보건소를 크게 둘러봤다. 살짝 눈가에 맺힌 이슬을 털어 낸 그녀가 억지로 밝게 웃었다.
“막상 간다니까 아쉬운 게 너무 많은 거 같아요.”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요.”
이선정 간호사가 다가가 조서영을 가볍게 안았다. 그러자 참고 있던 눈물이 터졌는지 조서영의 얼굴을 타고 흘렀다.
“흑흑. 고마워요. 진짜 간호사님께 많이 배웠어요.”
“나도 도움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야단친 거는 마음에 담아 두지 말고.”
“그것만 생각나는 게 문제예요. 엉엉.”
조서영의 울음 섞인 말에 이선정 간호사가 움찔하다 다시 등을 다독였다.
“어떻게 말하는 것도 배우는 건지. 안 그래요, 선생님?”
“전 또 왜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세요.”
이선정 간호사는 태수를 한 번 흘겨보고는 조서영을 계속 위로했다.
태수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잠시 지나자 이선정 간호사와 조서영의 격한 포옹이 끝났다.
조서영도 격한 감정이 많이 가라앉았는지 울음을 그쳤다. 코와 볼이 빨갛게 상기되었지만 그래도 미모를 가리진 못했다.
조서영이 이선정 간호사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저, 이제 진짜 가 볼게요.”
“그래요.”
“다음에, 혹시 다음에 진짜 의사가 되면 그때 간호사님이랑 일하고 싶은데, 연락드려도 돼요?”
그 말에 여태껏 담담했던 이선정 간호사의 코끝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때 봐서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가요.”
“연락드릴게요.”
“앞으로 한참 후의 일인데 벌써부터 말해 뭐해요. 얼른 가라니까.”
이선정 간호사는 톡톡 쏘는 말투와 달리 점차 두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조서영이 그런 이선정 간호사에게 조용히 말했다.
“꼭 뵈어요.”
“진짜 말 많네. 나 들어가서 할 일이 있으니까 먼저 들어갈게요. 뭐 평생 못 볼 사이처럼 왜 이러나 몰라.”
이선정 간호사는 끝내 짜증을 내고 돌아섰다.
그리고 준비실로 향하는 사이 소매로 눈을 지그시 누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태수가 조서영에게 말했다.
“강해 보여도 속은 누구보다 여린 분이야.”
“저도 잘 알아요. 그래서 너무 감사하고 죄송하고요.”
“그럼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의사가 되라고.”
“선생님처럼요?”
조서영의 질문에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날 목표로 하면 허무할 거야. 너무 쉽게 따라잡을 수 있으니까.”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여태껏 봐 온 의사 중에 가장 훌륭한 분이니까요.”
“헤어지는 마당에 새삼스레 웬 금칠이야.”
태수가 멋쩍어 할 때였다.
조서영이 그런 태수를 잠시 바라보다 나지막이 불렀다.
“선배…… 아니, 오빠.”
“왜?”
“좋아해도 돼요?”
뜬금없는 조서영의 말이었지만 태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도 너 좋아하니까.”
“진짜요?”
“그럼. 친구 동생으로서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지.”
태수가 대답하자 조서영의 눈빛에 작은 실망감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서면 안 될 것 같은 표정이다.
어느새 눈빛을 다잡은 조서영이 다시 태수에게 말했다.
“우리 오빠 동생이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제가 오빠를 좋아하면 안 되나요?”
“인간적으로?”
“남자로서요.”
조서영은 용기를 쥐어짜고 있는지 어느새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여자로서 먼저 이야기하는 게 쉽지 않을 터였다.
태수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대강 파악했다.
그때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카슈미르에서 수도 없이 겪었던 일이다.
“서영아, 물에 빠진 여자를 남자가 구조한 이야기 종종 들어 봤지?”
“네.”
“그럼 그 사람들 중에서 결혼한 사람들 이야기는 얼마나 들어 봤어?”
“…….”
조서영이 침묵하자 태수는 차분하게 말했다.
“네가 만약 나한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아마도 네 병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그건 아니에요.”
“네 말대로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면 4년 후에 보자. 그 후에도 같은 감정이라면 그때 한 번 생각해 보자.”
“진짜죠?”
“약속할게.”
태수가 손가락을 내밀자 조서영은 바로 걸었다.
그를 바라보는 조서영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단단히 각오한 모양이다.
그건 조서영의 각오일 뿐이다.
태수는 그저 덤덤한 시선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순간의 감정.
아직 태수는 조서영의 마음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위기속에 피어난 인연.
차분하게 머리를 정리하면 순간적인 감정에 치우친 터라 언제 변할지 모른다.
자신은 모르지만 진솔한 속마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은 한 살이라도 나이가 많은 태수가 조금 더 냉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야기가 끝난 후 태수와 조서영, 그리고 잠깐 몸을 피한 이선정 간호사도 함께 보건소 현관을 나섰다.
그 앞에는 조영규가 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조영규가 태수에게 다가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내 동생 돌봐 줘서 고마워.”
“어째 서영이 가면 다시는 안 올 거처럼 이야기한다?”
“그건 아니지. 이건 그냥 인사잖아.”
“어제 늦게까지 들은 인사니까 하는 말이야.”
태수가 찡긋거리자 조영규가 멋쩍은 표정으로 변했다.
“그냥 그렇다고.”
“그건 그렇고, 내일 서울에 데려다주고 올 거라고?”
“어. 자취방도 다 잡아 놨으니까 짐 좀 실어다 주고 오려고.”
“다녀오면 들러. 우리끼리 조촐하게 한잔해야지.”
태수의 제안에 조영규가 반색하며 대답했다.
“안주는 내가 사 올게.”
“그럼 좋지. 자, 우리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 짓고.”
일부러 말을 끊은 태수는 조서영에게 돌아섰다.
“고생했다. 서울 가면 연락할게.”
“네, 오빠. 꼭 연락 주세요.”
“수고했어.”
태수는 가볍게 조서영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남녀를 떠난 순수한 포옹이었기에 이상하게 보는 시선은 없었다.
그 후로 이선정 간호사와도 한 번 더 인사를 한 후에야 조서영은 조영규와 함께 차에 올랐다.
부웅.
조영규의 차가 보건소 정문으로 향했다.
태수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이선정 간호사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그냥 잠깐 혼자 있고 싶어서요.”
“그럼 천천히 들어오세요. 정리하고 있을게요.”
이선정 간호사도 조서영을 떠나보낸 아쉬움이 큰지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이젠 태수 혼자 남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조서영이 한 말이 맴돌고 있었다.
솔직히 전에는 아니었지만 이젠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다.
자기 일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면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 여자가 자신을 좋아해 준다는데.
매정하게 말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병신.”
나지막이 뇌까린 태수의 얼굴에 떨떠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상한 건 기분이 그리 나쁘지않단 점이다.
“나 혹시 고자 아냐?”
조서영이 떠나간 후로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진료하고 가끔 왕진도 갔다.
어쩌다가 삼척종합병원에서 수술 요청이 들어와서 용돈을 좀 벌기도 했고.
그 외에는 출동중에 부상당한 119 구급대 대원들을 치료하고, 술도 한잔하며 친분을 쌓는 일 정도였다.
그 이상의 일도, 그 이하의 일도 없었다.
태수가 그동안 열심히 한 탓인지 초곡리 마을엔 그리 위급한 환자가 사라졌다.
그저 간단한 외상이나 고질병 정도?
그 이상은 없었다.
덕분에 할 일이 많은 것 같아도 막상 하루하루 따져 보면 정말 별거 없이 흘러가는 시간들이었다.
그렇다고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바쁜 시간이 지나고 찾아온 한가함이다.
이런 여유가 약간은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