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88
00089 89화
태수는 바로 펼쳐들고 살폈다.
영어로만 이뤄진 소견서다.
필체를 보아하니 한국에서 어설프게 영어 연습한 필체가 아니다.
태수가 여러 전문의들의 필체를 해석하며 나름대로 판단한 일이었다.
그보다 태수는 우선 영어로 된 소견서부터 자세히 살폈다.
-physiological disorder(생리 장애) 증상과 더불어 hyposexuality(성욕감퇴), intense pain(격통) 소견을 보여 우선 리도카인을…….
빠르게 읽어 내린 태수는 결론만 정리했다.
-심한 복통을 느껴 배를 국소마취제로 마취했다.
30대 초반의 여자환자이고 고통을 호소하기 전부터 생리도 불규칙하고, 성욕도 감퇴한 상황이었다.
보호자 말에 의하면 최근 몇 개월 사이 몸무게가 급속도로 불어났다.
순간 태수의 시선이 환자에게로 향했다.
30대 초반 얼굴이라고 보기에 믿기 힘들 정도로 늙어보였다. 게다가 급격히 체중이 증가한 증거로 살이 군데군데 텄다.
외모보다 걱정되는 게 비대해진 몸의 변화일 정도였다.
국소마취제를 투여했는데도 신음이 흘러나올 정도로 고통을 느낀다면 확실하게 문제가 있다.
태수는 빠르게 카프레네의 임상경험부터 찾아봤다.
한 번 경험했던 병이나 그와 비슷한 증세를 가진 병들은 바로 떠올릴 수 있지만 다루지 못한 병에 있어서는 아직 도움을 빌려야 했다.
곧 카프레네의 지식 속에서 비슷한 임상사례를 찾아냈다.
‘쿠싱 증후군.’
가장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병이다.
부신(adrenal gland. 콩팥위샘, 양쪽 콩팥 위에 위치한 내분비기관.)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더 이상 검사를 진행하지 않는 한 태수도 그 이상은 확신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베이스캠프라고 해도 각 의료진들마다 X-RAY 나 CT를 촬영할 장비는 없다.
그런 이유로 의사의 경험이 환자 완치률과 밀접한 연관을 보였다.
태수는 임상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다.
카프레네의 임상경험으로 그 부족함을 메우고 있지만 그것도 검사 내용이 있을 때 확신할 수 있었지, 아직 미숙하다.
우선 환자의 고통부터 덜어줘야 했다.
마침 다가온 간호사가 보이자 태수에게 물었다.
“혹시 부피바카인(bupivacaine, 국소마취제의 일종으로 리도카인보다 4배 정도 강한 마취효과를 발휘함)있습니까?”
“음. 본 거 같은데, 그리 많진 않아요.”
“조금씩 반응을 보면서 투여해 주시고, 만약 3분 내에 효과가 없으면 투여중이라도 중지해 주세요.”
“그 다음에는 요?”
간호사가 다급하게 묻자 태수가 대답했다.
“그 전에 올 겁니다. 박사님 수술실에 계십니까?”
“아니요. 오전 수술은 모두 끝나서 쉬고 계세요.”
“알겠습니다. 바로 조치해 주세요.”
“네!”
뒤에서 들리는 간호사의 외침을 뒤로하고 태수는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가운데 위치한 텐트 안으로 들어간 태수는 박종혁 박사의 방으로 향했다.
천막으로 문을 대신한 터라 노크보다 목소리를 냈다.
“박사님. 저 최태수입니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진 후에야 태수가 천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방보다 좀 더 크고 넓은 방이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기에 태수는 테이블에 앉아 차를 즐기는 박종혁 박사 앞으로 다급하게 다가갔다.
“박사님. 쿠싱 증후군이 의심되는 환자가 왔습니다.”
“쿠싱 증후군?”
“네. 우선 몸무게가…….”
태수는 자신이 파악한 것과 자원봉사자에게 전달받은 소견서까지 제시하며 상황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박종혁 박사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증상은 비슷한 거 같으니까 우선 내과1팀으로 보내.”
“네?”
“부신에 문제가 생겼는데 그걸 왜 외과에서 치료를 하나?”
외려 박종혁 박사가 묻자 태수가 빠르게 대답했다.
“환자가 intense pain을 겪고 있다면 tumor(종양)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럼 내과적 치료보다 수술이 급하다고 배웠습니다.”
“누구한테 배웠는데?”
“카프레네 박사님입니다.”
이제 이런 변명은 순탄하게 나왔다.
그런데 박종혁 박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죽은 카프레네 박사가 자네 꿈에 나타나기라도 했나?”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임상사례집을 보고 연구한 모양인데. 내 기억에는 내과로 빨리 트랜스퍼하라고 되어 있을 텐데. 아닌가?”
박종혁 박사의 말도 틀리진 않다.
카프레네의 지식 속에도 분명 트랜스퍼하라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그건 이 경우와 전혀 달랐다.
“초기에 발견됐을 경우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알면 됐으니까 내과 쪽으로 돌리도록.”
“저 환자는 초기가 아니라…….”
태수가 말하는 사이 박종혁 박사가 끼어들어 질문했다.
“초기가 아니라는 증거가 있나?”
“그건.”
태수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어떤 물증도 없다.
격통을 느낀다고 병이 상당히 진행됐을 거란 추측은 말이 되지 않았다.
“intense pain 때문에 당황한 모양인데. 이건 명심해. 의사 마음이 급하면 환자 생명도 급해지는 법이야.”
“그건 압니다.”
“그렇다면 내 말뜻도 알아들었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박종혁 박사가 눈빛으로 그만 가보라는 듯이 바라봤다.
태수는 잠시 생각했다.
이대로 물러나면 내과로 트랜스퍼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누구의 책임인지는 관심 없다. 고통을 당하는 환자가 빨리 안정을 찾는 게 태수에게는 급선무다.
태수는 그런 이유로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요청을 했다.
“그럼 트랜스퍼하기 전에 환자 상태를 한 번 봐 주십시오.”
“내가 직접?”
“정말 트랜스퍼할 상황인지 한 번만 확인 부탁드리는 겁니다.”
태수가 정중하게 말했지만 박종혁 박사 얼굴에는 불쾌함이 떠올랐다.
“만약 내 소견이 맞는다면, 내 티타임을 방해한 죄가 클 텐데. 괜찮나?”
“네.”
“그럼 가 볼까?”
박종혁 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방을 나섰다.
끌고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억지로 자신을 만류하며 뒤를 따랐다.
진료 전용 텐트에 도착하자 태수가 박종혁 박사를 이끌었다.
“이쪽입니다.”
태수는 바로 환자 앞으로 안내했다.
주변에 있던 간호사와 자원봉사자들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비켜섰다.
그들 사이로 보이는 환자는 지친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간호사들이 수건으로 땀을 닦아줬는지 식은땀도 사라진 상태였다.
박종혁 박사는 환자를 내려다보더니 멈칫했다.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는 걸 받은 모양있다.
내색하지 않은 박종혁 박사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환자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음.”
확인을 마친 박종혁 박사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더욱 심하게 병이 진행된 상태 때문이다.
결국 태수의 말이 옳다는 뜻이다.
순간 박종혁 박사의 눈빛에 갈등이 스쳤다.
지방출신 레지던트도 간파한 병을 대형종합병원의 고위직에 있는 자신은 부정했다.
인정하자니 찝찝한 느낌이 먼저였다.
태수와 한 이야기는 자신의 방 안에서 진행됐다. 다른 사람이 못 들었다고 하더라도 태수는 알고 있었다.
만약 태수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한다면 어떻게 소문이 번져갈지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이럴 때 약한 모습을 보이면 자신의 권위가 떨어진다.
자신이 보긴 환자 생명이 위급한 상태는 아직 아니다.
내과로 보낸후 다시 헬프요청이 온 다음 처리에도 늦지않다.
머릿속으로 혼자 생각을 마친 박종혁 박사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과로 트랜스퍼 하도록.”
“박사님.”
“내 말 안 들리나?”
박종혁 박사의 나지막한 물음에 태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뻔히 알면서도 아니라고 우기는 모습.
환자를 위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순간 폭발하려는 찰나였다.
“알겠습니다. 자, 바로 이동합시다.”
어느새 나타난 이기준이 빠르게 트랜스퍼를 진행했다.
더불어 이기준은 태수의 옷깃까지 잡아끌었다.
이미 화가 난 태수가 낮게 말했다.
“놔.”
“내가 전에도 말했을 텐데, 너로 인해 피해볼 생각 없다고.”
“…….”
“일단 가자.”
이기준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움직였다.
내과1팀에 환자를 옮긴 후 태수와 이기준이 나란히 걸어 외과3팀 텐트로 향했다.
두 사람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 상태였다.
내과1팀을 총괄하고 있는 나이 지긋한 의사에게 호된 말을 들은 탓이다.
-도대체 환자가 이 지경이 되도록 수술을 안 하고 뭐 했어? 아니야. 니들한테 무슨 이야기를 해? 이 일은 내가 직접 따질 테니까 그렇게 알아!
아직도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표정이 복잡한 건 비단 그 윽박지름 때문이 아니었다.
태수는 더는 외과3팀에 자신이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다는 확신이 섰다.
한국과 동떨어진 카슈미르라면 편견이 없을 줄 알았다.
허나 결국 여기도 위계질서가 우선이었다.
박종혁 박사는 권위적이었다. 의술도 권위적인지는 솔직히 보지 않아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허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의 의견은 아예 듣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부정하고 할 일을 남에게 떠밀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수술실은 구경도 못 해봤다.
편애하는 이기준이 있는 한 들어간다고 해도 그 기회가 극히 적을 게 분명했다.
이기준에 대한 불만은 없다.
다만 편협한 박종혁 박사에게 질렸을 뿐이다.
그때 태수의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자원봉사자의 말이었다.
-PKO 북쪽에 파견나간 의료인들이 있다.
그 말인 즉 이곳이 아니라도 의료행위를 이어갈 수 있단 뜻이다.
자세한 건 돌아가는 대로 알아봐야할 거 같았다.
태수가 생각하는 사이 이기준이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알았어?”
“공부한 증상이었어.”
“역시 내 기대를 실망시켜주지 않아.”
이기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태수는 지금은 그 미소가 그리 반갑지 않았다.
“그렇게 같이 웃어줄 기분은 아니다.”
“아마 돌아가면 그 인간이 한바탕 난리를 피우겠지.”
“그렇겠지?”
“수술실에서 겪어보니까 쉽게 흥분하고 쉽게 좋아하는 스타일이야.”
이기준의 말에 태수가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피곤하겠다.”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미래를 위해서는 조금 참아야겠지.”
“그것도 방법이니까.”
태수가 인정하자 이기준이 이어서 말했다.
“가서 무슨 말을 듣더라도 반응하지 마.”
“왜?”
“나한테까지 불똥 튀잖아. 그러면 난 내 계획이 곤란해지거든.”
이기준은 자신의 실익부터 챙겼다.
그런 성격이었기에 태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주의를 시켜주는 게 동기로써 예의라는 건 알았다.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수틀리면 들이치겠다고?”
“욕먹고 기분 좋은 사람은 없잖아.”
“제발 나 없는 자리에서 해줘.”
“알아서 피해.”
태수는 피식 미소를 지은 후 텐트를 향해 계속 움직였다.
참고 안 참고의 문제가 아니다.
박종혁 박사가 만약 잘못을 떠넘긴다면 태수도 곱게 당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랐다.
박종혁 박사는 태수를 보고도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말 그대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할 정도였다.
태수가 담당한 환자도 이기준이나 브레드 김에게 묻고, 태수가 옆에 있어도 굳이 다른 의료인을 찾아 지시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태수는 덤덤했다.
아니, 어이가 없다는 표현이 옳았다.
옹졸한 박사.
오히려 태수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로 태수는 스스로 일을 찾아 묵묵히 해냈다.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선생님!”
다급한 목소리에 태수가 빠르게 돌아봤다.
스크레쳐카 한 대가 빛살과 같이 다가왔다.
“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환자의 비명에 태수는 반사적으로 상태부터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