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969
00972 972화
바쁜 상황에 조금이라도 일이 쉽게 풀려 가자 석재봉 부원장의 표정도 밝아졌다.
“일단 저랑 같이 가시죠. 반장님도 같이 설명을 들으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럽시다. 얼른 가요. 그, 그리고 최 선생님.”
반장이 어색하게 불렀지만 태수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아까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사람이 급하면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내가 진짜 죽을죄를 지었으니까 나한테 욕하시고, 조 씨는 잘 좀 부탁드립니다. 내가 진짜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지…….”
거칠게 살아 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애절한 표정도 함께였다.
태수는 반장과 조일훈의 사이를 정확하게 모른다.
다만 그 마음만큼은 태수에게 절절하게 와 닿았다.
태수는 계속 애걸복걸하는 반장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무사히 수술이 끝날 수 있게 빌어 주십시오.”
“그거야 하죠. 내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꼭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어서 가 보세요.”
태수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반장은 어렵사리 몸을 움직였다.
보호자도 반장도 석재봉 부원장을 따라가면서 계속 태수를 향해 몸을 굽실거렸다.
그 모습이 절대 비굴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남편의, 동료의 수술이 잘되길 간절히 바라는 모습으로 보일 뿐이었다.
상황이 부드럽게 흘러가자 긴장하고 있던 레지던트들도 조금은 안심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때 석재봉 부원장은 병실을 나서기 직전에 레지던트들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최 선생 말이 곧 내 말이니까 절대 실수 없도록.”
“네, 알겠습니다.”
“최 선생.”
짧게 태수를 부른 석재봉 부원장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걸 맡긴단 의미다.
태수도 마주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그제야 석재봉 부원장과 보호자, 반장이 차례로 병실을 나갔다.
그 직후 태수가 레지던트들에게 오더를 내렸다.
“우선 환자부터 수술실로 옮깁니다. 수술실에는 휘플술식으로 수술을 진행한다고 말씀해 주시고, 그에 따른 철저한 준비도 부탁합니다.”
태수의 말에 레지던트들이 크게 놀랐다.
휘플술식이라면…….
“아…….”
“시간 많습니까?”
태수가 나지막이 묻자 레지던트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였다.
송명준은 곧바로 간호사실과 연결된 비상 버튼을 눌렀다.
“조일훈 환자 수술 들어갑니다. 애들부터 보내 주세요!”
그사이 다른 레지던트들은 병상 자체를 이동할 준비를 시작했다.
“고정 장치 풀었고, IV는 이상 없고…….”
그렇게 모두가 정신없는 사이였다.
우르르.
레지던트들이 병실 문을 통해 빠르게 들어왔다.
“달라붙어!”
“병실 나갈 때까지는 천천히. 야, 이 새끼야! 니가 길을 막고 있으면 어떻게 해! 저리 꺼져!”
의사들끼리 대화라 그런지 거친 말투가 여과 없이 흘러나왔다.
레지던트들이 바쁘게 움직인 덕분에 조일훈이 누운 병상은 곧장 병실을 나갔다.
그때 뒤따라 나가려던 태수가 병실 한쪽에 서 있는 박 과장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마치 남의 일처럼 방관하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석재봉 부원장에게 했던 이야기들이 귀에 거슬렸다.
상황이 좋지 않아 그냥 넘어갈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수술실로 이동한 환자가 수술 준비를 마치려면 약간의 여유 시간이 있었다.
마침 병실에는 둘만 남은 상태였다.
그 생각에 태수가 속으로 자신을 탓했다.
‘이놈의 성질머리.’
결국 인내하지 못한 그는 박 과장에게 다가가 말했다.
좋게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이미 감정이 상한 탓인지 말투가 알아서 비꼬아졌다.
“참 먹고살기 힘들죠. 마음에 없는 소리도 하셔야 하고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원장님께 아까 하신 말씀들이요.”
“알아듣기 쉽게 말씀해 주시죠.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잘 못 알아듣겠습니다만.”
박 과장은 뻔히 짐작하면서도 뻣뻣하게 대답했다.
태수는 애써 억눌렀던 마음까지도 완전히 틀어졌다. 그와 동시에 한쪽 입꼬리가 살짝 비틀어졌다.
이젠 좋게 이야기할 이유가 없었다.
“문제를 삼겠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 말씀이 상당히 귀에 거슬려서 말입니다.”
“제가 틀린 말을 한 건 없는 거 같은데요.”
“오프인 의사가 술을 마시는 게 문제가 됩니까? 아니면 수술할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없단 걸 인정하고 바로 대체할 의사를 데려온 게 문제가 됩니까?”
“아무리 쉬는 날이라지만 부원장님께서는 돌발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채 음주를 하셨고, 저희 입장에서는 집도의가 바뀌는 데 대한 사전 통보도 받지 못했으니까 당연히 문제가 되는 거 아닙니까?”
박 과장의 당당한 말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태수는 그런 박 과장을 바라보며 의아하게 물었다.
“상황이 악화된 걸 연락받으신 후 바로 대처하신 부분은요?”
“그 전에 이미 대비를 하고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모두 부원장님 잘못이다?”
태수가 날카롭게 묻자 박 과장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는 상황이 모두 제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는데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보니까 건물을 철거하면서 현장 안전 수칙을 아주 철저히 지키신 모양이죠? 사고를 대비하셨을 테니까요.”
“무, 물론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인명 사고가 났을까요? 현장 조사 한번 제대로 해 달라고 할까요?”
태수가 나지막이 경고하자 그제야 박 과장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이 상황과 무관한 이야기를 하시네요.”
“정말 무관할까요?”
태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 상황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역시 사고 그 자체였다.
만약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았다면?
태수도 짧지 않은 병원 생활에서 익히 짐작했다.
그 까다로운 안전 수칙을 모두 지켜 가면서 건물을 철거하기란 현실적으로 힘든 부분이 많았다.
태수가 예측한 게 맞는지 박 과장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갔다.
그때 태수가 나지막이 이어서 말했다.
“딴죽을 걸고 싶으면 거세요. 저 또한 부원장님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냥 넘어가진 않을 테니까요.”
“…….”
박 과장이 멈칫하자 가까이 다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렇게 회사 입장 생각하셔서 얼마나 받는지는 모르지만, 정작 본인이 아프면 회사에서 뭘 어떻게 해 줄지 한 번쯤은 생각해 보세요.”
“무슨 말씀을…….”
“진짜 심한 말 하기 전에 조용히 하세요. 일차적 책임을 떠넘길 잔머리부터 굴리지 마시고요.”
태수가 낮게 으르렁거리자 박 과장은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며 태수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조일훈 환자는 제가 어떻게든 수술 성공시킵니다. 그래야 회사에서 부원장님을 문제 삼지 않고 철저하게 보상해 줄 수밖에 없으니까요.”
“…….”
박 과장이 입을 다물고 있던 중이다.
“석 선생님은 댁 같은 분에게 막말 들을 일 없었습니다.”
“뭐라고요?”
“한번 가 봅시다. 과연 당신 회사에서 제대로 안전수칙대로 했는지.”
“……”
박 과장이 움찔하자 태수가 결정타를 먹였다.
“수술이 끝나면 보고서에 써놓겠습니다. 보아하니 안전책임자 같은데 변명거리 잘 만들어 두십시오.”
“아니, 선생님 그게 아니고.”
“그럼 수술이 있어서 이만.”
휙.
돌아선 태수의 눈빛이 사납게 빛났다.
뒤엔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박 과장이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태수는 깔끔하게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최 선생님. 잠깐만.”
“됐습니다. 인생 똑바로 사십시오.”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태수 말에 박 과장이 그대로 굳었다.
태수는 그길로 수술장을 찾아가 수술복으로 갈아입는 것까지 빠르게 끝마쳤다.
혼자 움직였지만 거침이 없었다.
초행길도 아니다.
이곳 정희의료원에서 수술한 경험이 있기에 내부 구조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었다.
준비를 모두 마친 태수는 수술 대기실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정희의료원은 수술 대기실이 여러 개 있다는 게 특징이었다.
각 수술실마다 수술 대기실이 따로 있어 다른 의료진들과 마주할 일이 없었다.
지금은 흥분이 가시지 않아 혼자 있는 게 좋았다.
그만큼 태수는 박 과장의 일로 화가 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 마음을 안고 수술실에 들어갈 순 없었다.
소파에 자리한 태수는 차분하게 스스로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정희의료원 외과 레지던트들은 빙 둘러서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태수와의 수술이다. 그 어시스던트를 들어가기 위해 치열한 눈싸움 중이었다.
“선배, 양보하시죠.”
“김 선생이 나설 자리가 아니야.”
“후배를 위해 양보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만 눈 내리고 서둘러 검사실이나 들어가지. 너하고 너, 오후에 내가 시킨 일이 있을 텐데.”
그 외에도 여러 레지던트들이 지목을 당했다.
레지던트 4년 차들이 경력으로 압박하자 3년 차 이하는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각자 일터로 향했다.
이제 남은 건 똑같은 4년 차들이라 찍어 누를 명목이 없었다.
당연히 훨씬 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내가 치프니까 들어갈게.”
“치프니까 과장님 커버해야지. 그럼 내가…….”
“어디서 어영부영 넘어가려고 그래? 니들은 어제 수술 했으니까 당연히 푹 쉰 내가 들어가야지.”
“넌 조금 있으면 최 박사님 수술 들어가야 되잖아.”
“간단한 수술이야. 애들한테 넘겨도 되니까 내가 들어간다고.”
다들 한마디씩 건네며 상대를 어시스던트 후보에서 끌어내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레지던트들은 1년 차부터 동고동락한 사이란 것도 잊은 듯이 노려봤다.
외과 4년 차 레지던트들이 태수의 어시스던트 자리를 두고 신경을 곤두세울 때였다.
태수가 정희의료원에 들어왔단 소문이 다른 의과 의료진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졌다.
특히 레지던트들이 눈빛을 반짝였다.
“최태수 선생님이 우리 병원에 오셨다고?”
“그렇다니까. 아까 부원장님하고 외과 병동으로 가는 걸 내가 똑똑히 봤다니까.”
“예전에도 왔었는데, 이번에 온 건 무슨 이유지?”
다들 궁금한 대목이다.
“보건의 끝날 시즌이잖아. 혹시 우리 병원으로 오는 건 아닐까?”
“그럼 외과는 물론이고 우리 흉부외과에서도 배울 점이 많겠지. 그리고 조금 잊혔지만 스타 의사를 초빙하는 거니까 병원 인지도도 올라가고.”
“당연히 환자들도 늘어나겠고. 젠장, 그건 좀 마음에 안 드는데. 그래도 최 선생님이랑 같이 수술하면 콩고물이 얼마나 떨어질까.”
흉부외과 레지던트들은 태수의 등장에 엄청난 기대심리를 보였다.
반면, 전문의들은 다른 의미로 모여들었다.
“최태수라. 부원장님을 등에 업고 여기에 들어온다면?”
“상당히 귀찮아지겠지. 낙하산이라 군기 잡기도 힘들 거 같고.”
“실력은 좋은데 뻣뻣하다는 소문이 많던데 말이야.”
“전에 신속대응센터에서 산부인과장 목 날린 사건 알잖아. 그거도 치프 때. 그 생각 하면 득보다 실이 더 많을 거 같기도 하고.”
“난 차라리 들어왔으면 싶은데. 1년 전 사건을 들먹이면서 홍보하면 효과는 죽이니까 말이야. 덕분에 우리 가치가 올라가면 더 좋지.”
전문의들은 좀 더 세속적인 부분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그렇게 의사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의견을 나누는 사이, 또 다른 곳도 분주했다.
정희의료원장의 집무실에 예순쯤으로 보이는 원장과 전문 인재영입팀장이 자리해 있었다.
원장이 먼저 말했다.
“듣자 하니 부원장이 최태수를 데려왔다고.”
“저도 이야기 들었습니다.”
“부원장이 자기 아버지를 배신할 리는 없고.”
“어제 입원한 조일훈이란 환자 수술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프인 부원장이 반주를 몇 잔 마셔서…….”
인재영입팀장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자신의 귀를 병원 곳곳에 심어 놓아서 그런지 소식이 확실히 빨랐다.
원장은 그런 인재영입팀장의 말을 신용했다.
“그런 이유라면 부원장이 부를 만했겠어.”
“저도 그 대처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최소한 저희 의료원의 이미지를 깎아먹을 상황은 피했으니까요.”
“그건 최 선생 수술의 결과가 나와야 더 확실해지는 거고. 그보다 성패와 상관없이 최 선생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인데 말이야.”
원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인재영입팀장도 똑같은 미소를 지었다.
“기회가 왔으면 잡아야죠.”
“잘해보게.”
“믿어 주신 만큼 좋은 조건으로 준비해서 꽉 잡아채 보도록 하겠습니다.”
“파격적이라도 좋으니까 크게 배팅해. 최태수 하나만 물고 들어오는 게 아니야. 그 주변에 쟁쟁한 명의들도 꿸 수 있는 기회라고.”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절대 실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인재영입팀장의 눈빛이 강하게 번뜩였다.
그런 인재영입팀장을 바라보는 원장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