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slayer's Class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37
137화
“이야기의 은자?”
왕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머니께 들었던 적이 있어요. 테베아의 서쪽, 델포아와 맞닿아 있는 곳에 위치한 우로보로스 산에 수백 년을 살아온 이야기의 은자가 있다고요.”
“수백 년이라니. 리치입니까?”
“아니에요. 마법의 극의를 깨닫고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현자라고 들었어요.”
“현자라…….”
너무 전설 속 이야기 같아서 잘 믿겨지지가 않았다.
그때 왕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이 얘기를 로라에게도 한 적이 있어요.”
“어머니께 말입니까?”
“예. 로라는 이레귤러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듣고 은자를 찾으러 갔었죠.”
“그런 전설 속 이야기만 듣고 은자를 찾으러 갔다니 어머니도 무모한 면이 있었군요.”
“찾았으니 완전히 무모하다고만 볼 수는 없지 않겠어요?”
“네?”
아리나 왕녀가 당시를 떠올리듯 고개를 살짝 들고 먼 곳을 보며 말했다.
“테베아로 떠났던 로라가 현자를 만나고 와서 저에게 이야기를 해 줬어요. 정확히 어떤 내용을 들었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그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지식을 갖고 있는 건 맞는다고 했어요.”
“어머니가 진짜로 현자를 만났다니. 놀랍군요.”
“이레귤러에 대한 로라의 궁금증을 풀어 줄 정도라면 성유물에 대한 내용도 분명 알고 있을 거예요.”
지크는 왕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어머니께서 현자의 위치가 우로보로스 산 어디에 있는지도 말해 주셨습니까.”
왕녀가 고개를 저었다.
“거의 한 달 동안 산을 헤매고 있었는데 갑자기 앞이 환해지더니 은자가 머물고 있던 곳의 길이 열렸다고 했어요.”
지크는 왕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그거 포탈인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자신이 숲의 은자라고 불리는 전생의 스승을 만났을 때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었다.
‘이야기의 은자라는 사람 혹시……?’
지크는 가슴에 차오르는 불안감을 겨우 가라앉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우로보로스 산으로 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은자를 찾으시려고요?”
“마족들이 성유물을 찾고 있다면 제국과 아벨 측에서도 이를 돕고 있을 겁니다. 미리 정보를 선점해서 성유물이 그쪽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막아야 해요.”
전생에서 아벨이 힘을 가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직접 겪었던 지크로서는 최대한 이를 막고 싶었다.
그는 잠깐의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떠날 채비를 했다. 리암과 펠릭스는 아가멤논 성에 머물게 하며 시스터 클로네에게 훈련을 받도록 시켰다.
“으어어. 주군! 저도 차라리 같이 산에 갈래요!”
시스터 클로네에게 얻어맞으며 끌려가는 펠릭스를 두고 지크는 곧장 테베아 쪽으로 향했다.
* * *
“기사 나으리. 저쪽이 우로보로스 산입니다요.”
미케네에서 가도를 통해 테베아로 향한 지크는 얻어 탄 마차 주인에게 값을 지불하고 우로보로스 산 근처에서 내렸다.
지크는 저 멀리까지 봉우리가 솟아 있는 우로보로스 산을 보며 고민을 했다.
‘테베아와 델포아를 사이에 두고 아르고스까지 이어져 있는 큰 산인데 이걸 일일이 다 뒤져 볼 수도 없고.’
상당히 막막한 상황이었지만 지크는 한 가지 믿는 구석이 있었다.
높은 확률로 이야기의 은자가 과거 지크가 속했던 조직의 일원일 거라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로보로스 산에 들어서고 몇 시간 뒤, 지크는 그 확신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역시, 하이랜더의 표식이군.’
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놓인 바위의 배치 순서, 나무의 위치 등 하이랜더들만 알 수 있는 미묘한 표식이 곳곳에 만들어져 있었다.
지크는 표식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의 은자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쁨과 동시에 전생처럼 다시 하이랜더와의 접점이 생겼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번 삶에서는 하이랜더와 엮이고 싶지 않았건만.’
하이랜더로서의 삶은 지크의 전생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그 시절을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전생의 스승과 했던 하이랜더로서의 맹약을 스스로 어겼다는 죄책감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지크는 마음을 추스르고 하이랜더의 표식을 따라 우로보로스 산을 올랐다.
표식이 가리키는 곳에 이르면 이야기의 은자에게로 향하는 포탈이 있을 터였다.
* * *
하루가 걸려 지크는 겨우 표식의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쪽인가.”
지크는 용안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숲 한가운데 꼿꼿하게 서 있는 나무 하나를 발견했다.
‘저게 솟대로군.’
포탈의 힘을 집중시키는 솟대는 그 지역 하이랜더의 영역을 표시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크는 천천히 솟대 앞에 섰다.
그러고는 손을 내밀었다.
우우우우웅!
잠시 후, 솟대에서 파동이 흘러나왔다.
지크는 익숙한 느낌에 숨을 참고 눈을 감았다.
번쩍하는 빛과 함께 솟대 앞에 서 있던 지크의 모습이 사라졌다.
잠시 뒤 지크가 눈을 뜨자 우로보로스 숲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대나무숲?”
중앙대륙에서는 보기 어려운 대나무가 오솔길 양쪽으로 빽빽하게 들어 서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대나무 잎들이 여유로운 풍취를 자아냈다.
지크는 천천히 오솔길을 올라갔다.
위쪽에 대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오두막 한 채가 있었다.
지크는 대나무 오두막을 보며 전생의 스승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는 대나무 오두막이 아니라 나무 위에 지어진 나무집이었지만.’
그는 천천히 대나무집에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그가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지크는 슬며시 대나무 문을 열어 봤다.
‘응?’
한 남자가 대나무로 만들어진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흠냐흠냐.”
이십 대로 보이는 젊은 남자는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낮잠을 즐기는 듯했다.
‘저 사람이 이야기의 은자?’
현자라고 하길래 은빛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대마법사의 이미지를 떠올렸었는데,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지크는 전생의 스승을 떠올렸다.
‘하긴 스승의 외모에 비하면 저 정도는 양반이지.’
은자를 깨울까 생각하며 다가가던 지크는 혹시라도 성격이 괴팍한 마법사일 수도 있으니 일단 일어나기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은자가 깨어난 건 그로부터 몇 시간 후였다.
“흠냐냐냐냐! 아이고 달게 잤다.”
기지개를 쭉 펴고 침상에서 일어난 은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슬렁 어슬렁 탁자로 가서 대나무 컵에 담겨 있던 물을 쭉 마셨다.
“크으, 시원하다.”
지크는 그 모습을 대나무 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지켜봤다.
은자가 지크를 발견한 건 그로부터 10분이나 흐른 뒤였다.
“너, 너 뭐냐?”
세수를 하러 가려다가 의자에 앉아 있는 지크를 발견한 은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언제 저를 알아보시나 했습니다.”
은자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지크를 보며 물었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어?”
“20여 년 전 은자님을 방문한 로라 아가멤논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지크의 말에 은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을 떠올렸다.
“20년 전이라. 어디 보자. 어떤 이야기였더라. 아, 그 아가씨인가. 막무가내였던 힐러 아가씨.”
“맞는 것 같군요. 저는 그 힐러의 아들입니다.”
“응? 그 어린 아가씨가 벌써 이런 아들을 낳았다고?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은자는 새삼스럽다는 듯 지크를 바라봤다.
지크는 은자를 보며 말했다.
“은자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그 말에 은자가 혀를 차며 말했다.
“아니, 그때 힐러 아가씨도 그러더니 내가 무슨 질문만 하면 답을 턱턱 내는 기계인 줄 알아? 내가 아무리 이야기의 은자라도…….”
“세상의 모든 지식은 물론 감춰진 지식까지도 모두 알고 있는 현자라 하시던데요.”
그 말에 은자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누, 누가 그래? 흠흠, 그때 그 아가씨가 그러던?”
“그렇게 전해 들었습니다.”
은자는 아까와 달리 조금 온화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크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손짓했다.
그는 집 앞에 설치해 둔 대나무 평상 위에 앉더니 품에서 부채를 꺼내 살살 흔들었다.
“나 원 참. 궁금한 거 있다고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은 그때 그 아가씨랑 너뿐이다.”
“보통은 어떤 이유로 옵니까.”
“여길 찾아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드문 경우긴 한데 예전에는 가끔 왕들이 찾아올 때가 있었지. 나한테 예언을 해 달라는 놈들도 있었고. 현자랑 예언가를 구분도 못 하는 놈들이 태반이라니까.”
“예언가라는 게 진짜 있습니까.”
“드물긴 하지만 있긴 하지. 예언이라기보다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단편적으로 예상해 보고 수만 가지의 경우의 수 중에 가장 확률이 높은 걸 예상하는 것에 가까운 거지만 말이야. 설명하자면 그게 상당히 복잡해. 본다고 해서 그 상황이 꼭 일어난다고 확정할 수도 없고. 그 부분을 확정하는 순간 새로운 변수가 생겨서 다시 상황의 갈라짐이…… 아무튼 그렇다.”
현자의 이미지와 상당히 다르기는 했지만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건 사실인 듯했다.
지크가 은자에게 물었다.
“성유물에 대해 여쭙고자 찾아왔습니다.”
“엥? 성유물?”
“예. 성유물에 대해 아십니까.”
그 말에 은자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망설이듯 중얼거렸다.
“성유물이라…… 으음.”
그가 부채를 접고 지크를 보며 말했다.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지크 드레이커입니다.”
“지크 드레이커. 드레이커. 흐음.”
지크의 이름을 들은 은자가 부채를 다시 펼쳐 들고는 지크의 이름을 썼다.
그러고는 다시 부채를 접었다가 폈다.
은자는 부채의 뒷면을 지크에게 내밀었다.
뒷면에는 크로노스어로 ‘마수(魔獸) 십(十)’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뭡니까.”
“마수를 열 마리 잡아 와야 한다는 소리지.”
“마수를요?”
“그럼 대답을 그냥 공짜로 들을 수 있을 줄 알았어? 질문에 비하면 저렴하게 나온 거야.”
지크는 대답의 대가로 마수를 잡아 오라 한 은자를 보며 새삼스럽게 그가 하이랜더의 일원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이랜더들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맹약에 따라 세상의 이면에서 마수를 사냥하며 세계의 균형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한다.
지크의 스승이었던 숲의 은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생의 지크는 숲의 은자에게 목숨을 구원받고 중단전을 전수받는 대가로 하이랜더의 맹약을 했다.
하지만 그는 그 맹약을 어기고 스승의 영역에서 도망쳐 나와 북부에 있는 히모나스로 갔다.
지크의 먼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차가운 북풍을 맞으며 성 위에서 검을 쥐고 두꺼운 늑대 가죽을 두른 여인.
‘지크 머레이. 나를 도와줘. 북부에는 그대가 필요해.’
순간 지크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더 기억을 깨웠다가는 지금이라도 당장 히모나스로 달려갈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정신 차려라, 지크 드레이커.’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은자에게 물었다.
“마수 열 마리면 되는 겁니까.”
아무렇지 않게 묻는 지크를 보고 은자가 오히려 놀랐다.
“응? 너 마수가 뭔지는 알고 있니.”
“예. 우로보로스 산에도 마수가 있습니까?”
“마수가 없었다면 내가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지.”
보통의 하이랜더들은 영역이 없이 떠돌며 마수들을 사냥한다.
하지만 강력한 힘을 지닌 하이랜더들은 마수가 주로 출몰하는 지역에 자신의 영역을 만든다.
지크의 스승인 숲의 은자는 가장 오래된 하이랜더이자 가장 강한 이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금역인 잊혀진 자들의 숲에 자신의 영역을 만들었다.
이야기의 은자 역시 비슷한 경우인 듯싶었다.
지크는 은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마수가 있는 곳의 위치를 물어봤다.
은자는 지크에게 마수가 출몰하는 지역으로 포탈을 열어 줬다.
그가 포탈을 타고 사라지자, 은자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어휴, 한 마리나 제대로 잡을 수 있을지 몰라.”
자신에게 찾아오는 이들은 대부분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는 특출난 자들이었다.
왕이 될 운명을 가진 자나, 용력을 발휘하는 전사들, 혹은 진리의 이면을 바라본 마법사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 은자가 낸 시험을 통과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시험을 통과하면 온전한 답을 내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답을 아예 주지 않거나, 답의 일부만 알려 줄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정한 게 아니라 카르마 때문이니까 어쩔 수 없지이. 그래도 열 마리는 좀 심했나.”
은자는 여유롭게 평상에 누워 뒹굴거렸다.
그리고 한 시간 뒤. 지크로부터 포탈을 열어 달라는 신호가 왔다.
“응? 벌써 포기한 건가. 의외네. 그래도 좀 끈기가 있어 보였는데.”
은자는 부채를 휘둘러 포탈을 열어 줬다.
쿵!
포탈이 열리자마자 흉측한 생김새의 마수 머리 열 개가 툭 떨어졌다.
지크는 별달리 다친 곳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자는 그런 지크를 보고 입을 쩍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