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173
173
믿음
설법을 마친 이단자가 사라졌다. 헐벗고 다니던 구원교도들은 창피함이란 걸 깨달았는지 서로 몸을 숨기며 조심조심 흩어졌다. 음란한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단심문관장 키아나는 이단자와 함께 사라졌다.
이성철은 그 광경을 모두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본의는 아니었다.
“구천구백구십팔. 구천구백구십구. 일만!”
기어이 에이네가 만 개를 다 채울 때까지 기다린 독한 인간 때문이었다.
팔굽혀펴기 만 개를 끝낸 에이네가 연어처럼 펄떡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등 위에서 꿀잠 중인 현이 넘어지길 바라서였지만, 현은 당연하다는 듯 허공에서 몸을 틀어 착지했다.
일어난 현은 시간을 봤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에이네의 신체 능력이라면 훨씬 빨리 끝나 있어야 했다.
“땡땡이쳤냐?”
에이네의 이빨이 아드득 갈렸다. 땡땡이쳤다. 이 재수 없는 놈이 언제까지 위에서 안 내려오고 버티는지 보기 위해서. 보다보다 잠까지 들자 참다못해 남은 숫자를 빠르게 끝낸 거였다.
현에게 덤비지 못하는 에이네는 그저 현을 노려보기만 했다.
“…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애들도 아니고.”
평소에도 있는 싸움이지만 오늘은 유독 오래 가는 것 같아 이성철이 한마디 했다. 쉽게 기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에이네를 보고 현이 한 발 물러섰다.
“나중에 소원 하나 들어줄 테니까 여기까지 하자.”
“소원?”
에이네의 표정이 풀렸다. 그리고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진짜 들어주는 거지? 나중에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빼기 없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좋아. 이거 위성 카메라로 녹화됐으니까 발뺌할 생각 하지 마.”
“그래.”
현에게 확답을 얻은 에이네는 으흐흐, 으으흐, 연신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현은 이거 실수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지간한 말로는 안 풀릴 것 같아서 질렀는데, 실수했나.’
살짝 무서워지는 현이었다. 에이네라면 현에게 기계화 보병 실험의 실험체가 되라고 할 수도 있었다. 현이 할 수 있는 일이며, 거부하지도 못하는 일.
살짝 경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던 이성철이 적당한 순간에 물었다.
“그래서, 남자의 능력은 뭐지?”
“묘슈한, 그 트롤 유령이랑 비슷해. 그놈은 인식을 바꾸는 거라면 이놈은 다른 걸 바꾸는데… 그게 뭔지가 미묘해.”
“직접 당하고도 모르는 건가?”
현에게 던져지고, 권능에 당하던 순간이 플래시백 됐다. 에이네가 다시 폭발했다.
“야! 아니면 네가 당해보던가! 당해보지도 않은 놈이, 대뇌생리학도 모르는 놈이 뭘 알아! 네가 당해보고 한 번에 알아내면 인정한다. 내가 무능하다고 인정한다고!”
“알았다.”
“어?”
“내가 직접 당해보겠다고 했다.”
이성철의 당당함에 얼빠진 건 에이네였다. 이성철은 이럴 때 한 발 뒤로 빼는 놈이었다. 에이네가 이성철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뭐지?”
“어디 다쳤나 해서. 뭐 잘못 주워 먹은 거 아니지? 독에 중독돼서 정신이 반쯤 나갔다던가.”
“나는 멀쩡하다.”
“그럼 죽을 때가 됐나.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던데.”
“한 번쯤 당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성철도 그냥 한 말은 아니었다. 묘슈한과 세르카, 두 경우 모두 시전자의 의지로 권능을 푸는 게 가능했다. 확답을 내리긴 표본의 숫자가 적지만, 그래도 이성철은 이번에도 권능의 해제가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니라도 괜찮다. 대책 몇 개는 마련해뒀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내 뇌의 정보를 복사할 수 있나?”
“가능은 한데, 추천은 안 해. 회귀자라면 대충 이유는 알지?”
“안다.”
일요일 정오에 뇌의 정보를 복사해 화요일 정오에 자신에게 덮어씌우면, 일요일 정오 이후부터 화요일 정오 이전까지 48시간의 기억이 사라진다. 정보를 입력받은 사람 입장에선 일요일 정오에서 화요일 정오로 자신이 시간을 이동한 것처럼 느끼게 된다.
이틀이면 양호한 편이다. 그게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고, 십 년이 되면?
잃어버린 시간은 누구도 찾아주지 않는다. 그런 극단적인 경우까지 가지 않아도, 중요한 단서가 이성철의 기억과 함께 사라질 수도 있었다. 얻었던 깨달음이 사라진다거나.
“그래도 하겠다고?”
이성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을 감수한다. 그것도 정신의 위험을. 예전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회귀자로서 그는 자신의 목숨보다 정신, 기억을 우선할 필요가 있다.
몸은 죽으면 회복되지만, 파괴된 정신은 회복되지 않는다.
시즈, 세이브 로드 능력자. 사후 10년이 넘어서도 위원회의 기록 보관소에 자료가 남아 있는 희대의 사기 능력을 가진 사람. 특이한 능력을 가진 만큼 그의 생전 기록도 자세했다.
그가 망가진 이유는 기억, 정신 때문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정신계 권능에 몸을 던지는 건 무모한 짓이다. 하지만 이성철은 그게 필요하다고 느꼈다. 오랜 경험에서 나온 직관이었다. 구체적인 이유는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해야만 한다는 막연한 직감. 대부분 사람은 인식하지도 못하고 지나갈 무의식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이 직관대로 행동함으로써 이성철은 범인은 도달할 수 없는 레벨과 경지에 도달했다.
이건 그에게도 도전이었다. 도전, 다회차 회귀자가 되며 잊었던 단어가 슬그머니 마음에 떠올랐다.
표정 없는 이성철의 표정이 그의 결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에이네는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손 줘봐.”
따끔한 느낌과 함께 혈관에 위화감이 느껴졌고, 위화감은 바로 사라졌다. 대신 머리에 미미한 두통이 생겼다.
“앞으로 5분 후를 포인트로 기억이 저장될 거야. 최후의 안드로이드에게 쓰이는 나노 머신이 사람에게 쓰인 건 최초니까 영광으로 생각해.”
“그거 든든하군.”
빈말이 아니었다. 과학의 신자들이 사용하는 보통 나노 머신도 마법에 가까운 성능을 보여준다. 그보다 수 단계, 수십 단계는 발전했을 최후의 안드로이드용 나노 머신의 성능은 역사가 말해준다.
미래에도 잊히지 않는 최후의 안드로이드라는 이름이 그 증명이다.
“위치 정보는?”
“좌표 찍었으니 알아서 해.”
이성철이 양자폰을 보았다. 에이네와 현이 놀고 있던 중에도 이성철은 할 일을 했다. 남자에게 소형 추적기를 하나 붙여두었는데, 그걸 어떻게 알고 에이네가 좌표를 먼저 찍어온 것이다. 최후의 안드로이드가 근처에 있는 기기의 정보를 모르면 그게 더 말이 안 되긴 했다.
“혹시 모르니 폰을 켜두고 가지. 먼저 가보겠다.”
남자의 능력이 즉각 효과를 보이는 종류라는 건 확인했다. 남자는 가진 마력도 많지 않았다. 기습적으로 들이닥치면 권능으로 시간을 벌어보려 할 확률이 높았다. 본신의 힘이 약하고 권능만 가진 재앙의 신자들의 공통점이었다.
권능밖에 믿을 게 없는 그들에게는 살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지만, 그만큼 뻔해 읽기도 쉬웠다.
이성철이 스크롤을 찢었다.
스크롤에서 마력이 뿜어졌다. 시야가 일그러졌다. 뭔가 잘못됐다. 공간이동에 이런 절차는 없다. 스크롤을 찢고 마법이 발동되면 찰나에 목적지로 이동한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도 감을 수 없었다.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이성철은 눈에 힘을 줬다. 일그러지던 공간이 점차 검은색으로 변했다. 시야가 검은색으로 가득 찼다.
검은 공간 너머로 희미하게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여자라는 것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음영이었다. 쪼개지는 세상에서 여인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한 발 내디딜 결심이 섰네?”
여인의 음성은 따스했다. 듣고 있으면 안심이 되는 목소리였다. 이성철은 입을 열려고 했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있어 몸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느끼는 거였다. 이성철은 마력을 움직였다. 생각의 속도로 움직이는 마력이라면 의사를 전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아가던 마력은 일그러진 공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공간 너머의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직접 대화할 날은 오늘이 아니야.”
일그러졌던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성철도 목표로 했던 장소에 도착했다.
‘시간의 성녀…….’
공간이동에 간섭하고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 중에 그와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면 달리 없었다. 시간의 성녀와의 만남에 이성철은 회귀자답지 않은 실수를 저질렀다.
그가 공간이동 좌표로 지정한 건 남자의 앞 3m 지점이었고, 바로 눈앞에 남자가 있었다. 이성철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남자의 입이 열렸다.
“폭력은 좋지 않습니다.”
말로 발동하는 종류의 권능이다. 그게 이성철이 알아낸 전부였다. 그의 의식이 아래로 꺼졌다.
***
현의 양자폰에선 남자의 설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폭력은 나쁘다, 원한은 원한만을 낳는다, 같은 개똥철학이었지만, 듣는 사람은 이미 홀려 있었다.
“뭐야?”
에이네가 말했다. 이성철이 스크롤을 찢고 남자가 입을 열기까지 정확히 2.44초의 시간이 있었다. 이성철의 실력이면 검으로 세 번 쑤시고 마법으로 시체까지 태우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세뇌를 당하는 게 목적이라 했으니 진짜 남자를 죽이진 않았겠지만, 입도 뻥긋하지 않는 건 편집증적인 회귀자답지 않았다.
“나중에 본인한테 물어보면 되겠지. 나노 머신의 작동은?”
“원거리에선 안 돼. 내가 직접 접촉해야해.”
“성가신 일이 벌어지기 전에 가볼까.”
현과 에이네는 좌표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장소로 이동했다. 바로 앞으로 이동해 남자를 제압할 수도 있었지만, 변수가 너무 많았다. 불확실한 남자의 권능부터 그가 데려갔다는 키아나를 포함한 이단심문관들, 그리고 이성철.
무력이 강한 이들만 데려간 이유야 뻔했다. 남자도 눈이 있다면 자신의 무력이 약하다는 걸 아니 호위로 쓰고 있겠지.
남자를 제압해도 호위들이 어떤 일을 벌일지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들 중 재앙의 신자가 있다면 일은 몇 배로 복잡해진다.
현과 에이네는 외곽부터 천천히 제압해나가길 택했다.
남자는 수백에 달하는 사람을 호위로 가지고 있었다. 정면에서 깨부수지 못할 병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면에서 싸웠다면 성가셨을 전력이었다. 그러나 외곽부터 깎아 들어가니 힘도 쓰지 못하고 모두 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이성철이 나타났다.
“이 앞은 지나가지 못한다.”
“누군 흑역사를 지우지 못해 안달인데, 저건 흑역사를 만들고 있네.”
세뇌당한 이성철은 에이네에게 닿자마자 깔끔하게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성철이 머리를 흔들며 얼굴을 찌푸렸다.
“왜? 어디 안 좋아?”
에이네가 물었다. 세팅을 바꾸긴 했지만, 최후의 안드로이드용 나노 머신을 사람에게 사용한 건 처음이었고, 그걸로 뇌를 백업한 것도 처음이었다. 예기치 못한 부작용도 있을 수 있었다.
“아니, 몸은 괜찮다. 잃어버린 기억도 없는 것 같고.”
이성철은 바로 원래대로 돌아왔다. 중요한 걸 잊은 기분이 들었는데, 기억의 공백이 가져오는 현상이려니 넘어갔다. 잃어버린 시간은 두 시간. 그 안에 회귀자로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일이 지나갔을 것 같지는 않았다.
“권능에 당한 감상은?”
“뭣도 없다. 기억이 사라졌으니까.”
“사로잡을 걸 그랬나.”
아쉬운 듯한 에이네의 말을 이성철이 부정했다.
“아니, 판단은 현명했다. 내가 목숨을 걸고 싸웠다면 그냥은 넘어가지 않았을 테니까.”
“그거 좀 자존심 상하는데.”
마치 둘이서 하나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한다는 투가 아닌가.
이성철이 말했다.
“내가 동귀어진할 생각이었다면 아마 죽음과 이어지는 문을 열었을 거다.”
“미친놈. 그건 또 어떻게 아는 거야.”
현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죽음과 이어지는 문. 환계에 있는 죽음의 신자들이 머무는 영역과 이어지는 문을 말하는 은어로, 문 안에 얼마나 많은 언데드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 번 열린 죽음과 이어지는 문은 복수의 사도나 죽음의 성인이 아니면 닫지 못한다. 리치부터 좀비까지 무수한 종류의 언데드가 무한히 나와 사방을 초토화시킨다. 그게 죽음과 이어지는 문이었다.
죽음과 이어지는 문을 여는 방법은 현도 몰랐다.
이성철은 현의 물음에 짧게 답했다.
“회귀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