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236
236
점占
검신은 꿈틀거리는 기분 나쁜 물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때도 놀랐지만, 가까이서 보니 더 비현실적이다.
대륙의 판에 숨은 지네는, 몸통 옆으로 뻗은 다리 하나가 과장 안 보태고 산처럼 컸다.
주술로 억눌려 있던 지네는 주술이 약해지며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묶여 있던 것에 반발이라도 하듯 지네의 몸부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거세졌다.
검신은 하늘에 있을 윌리엄을 떠올렸다. 세계는 위원회를 중심으로 뭉치고 있다. 위원회를 구심점으로 뭉치는 게 아니다. 모두가 적을 처리하기 위해 행동했고, 그 방향이, 그 적이 바로 위원회다.
위원회에는 만들어진 것과 만들어질 예정인 것까지 수천만의 오크 사이보그병이 준비되어 있다. 하지만 오크 사이보그병은 강하면서도 약하다. 사이보그의 약점인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긴 했지만, 그건 마력 간섭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수천만의 사이보그병은 소수를 상대로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지만, 진짜 대규모 전쟁에서는 다양성에서 밀려 힘을 쓸 수 없다. 검신이 대규모 전투라 칭할만한 전투는 그리 흔하지 않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 일어나는 게 그 대규모 전투다.
화력을 아무리 퍼부어도 싸움의 끝을 결정짓는 것은 보병이다. 그건 지구나 근원 세계나 다르지 않았다.
위원회는, 파도처럼 밀려올 적병을 막지 못한다.
패배가 거의 확실시되는 싸움에서 윌리엄은 검신을, 싸움의 판도를 뒤집을 수 있을지 모르는 자신을 여기로 보냈다.
확실한 건 여기서 힘을 쓰면 검신은 전쟁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할 거라는 거였다. 어쩌면 전쟁이 벌어질 때 검신은 그 자리에 없을지도 몰랐다.
윌리엄이 검신에게 한 주문은 검신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힘을 다해 죽어도 주검은 저희가 회수할 테니 마음껏 날뛰셔도 됩니다.”
“누구냐.”
검신에게 검이 겨눠진 인간이 식은땀을 흘렸다. 검신의 검은 수십 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는데, 코끝에서 검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피도 방울방울 맺혔다.
흔한 가죽옷을 걸친 남자가 손을 들어 적의가 없음을 나타냈다.
“동물 친구에게 들으셨을 겁니다. 성녀님은 당신들이 죽는 걸 바라지 않으십니다.”
시간과 연관된 동물 친구, 샬롯을 말하는 거였다.
“그래서 한다는 게, 시체나 수거하는 건가?”
“정확히는 회생 불가 상태의, 빈사 상태의 몸이라고 해야 할까요.”
“시간의 성녀는 네크로맨시라도 익힌 모양이군.”
“글쎄요. 죽은 동물을 살리시는 건 몇 번 봤는데, 사람은 모르겠습니다.”
“볼일은 그게 끝인가?”
검신은 시간의 사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눈을 뗀 바로 그 순간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 팔로 베기에는 조금 버거워 보이는군요.”
티는 내지 않았지만, 검신은 내심 놀랐다. 남자의 움직임에는 시작과 끝이 없었다. 공간을 이동한 흔적도 없이 옆에 나타났다.
“네가 상관할 일인가?”
“제법 그렇습니다. 저놈 때문에 올해 농사를 망쳐서요.”
“농사?”
거짓 유무를 살피려는 듯 검신이 남자의 몸을 살폈다. 적당히 탄 피부, 손에 상처와 물집이 있지만, 무기를 수련해 생긴 것들은 아니다.
“재앙의 신자라고 모두 싸움만 해야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는 전투력 낮기로 유명한 시간의 사도입니다.”
개소리. 검신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검신이 있는 곳은 땅속, 그것도 대륙의 판이라 불리는 깊은 땅이었다. 열기와 지질의 압력에 다이아몬드도 녹아내리는 땅이다.
약한 사람은 여기까지 오는 것도 불가능하고, 와서 버틸 수도 없다.
검신이 검을 들었다. 시간의 사도가 신경 쓰이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위기는 오히려 그에게 힘이 된다.
멋에 살고 멋에 죽는다. 아이의 치기와도 같은 결심이지만, 그게 검신의 정신력과 만나면 힘을 가지는 믿음이 된다. 일생일대의 일격을 앞두고, 혹은 휘두른 직후 기습을 당한다. 검신 기준으로는 아주 ‘멋진’ 이벤트다.
팔을 자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동료를 위해 검사의 생명인 팔을 자르고, 정적들에게 내부 분열을 일으켰다. 이 또한 ‘멋진’ 일이었고, 팔이 잘린 검신의 검기는 약해지지 않고 반대로 강해졌다.
윌리엄에게 말한 대로 검신의 검술은 이미 검을 요구하는 단계를 넘었다. 검을 휘두름에 있어 중요한 건 팔의 유무보다는 검을 휘두르는 마음이다.
검신은 목표를 포착했다. 한눈에 담기엔 너무 큰 표적이다. 그래서 검신은 표적을 마음에 담았다. 하려고 하자 그의 마음에 대륙을 감싸고 있는 지네가 나타났다.
지네와 비교하면 검신은 너무 작았다. 그가 들고 있는 검도 너무 작았다. 산을 베고 바다를 가르는 검이지만, 그걸로는 저 지네를 가를 수 없다.
검신이 마음에 검을 만들었다. 대륙조차 가를 수 있는 거대한 검이 그의 마음에 생겨났다. 심상을 만드는 것만으로 검신의 이마에 땀이 흘렀다.
이만한 크기의 심검을 만드는 건 검신도 처음이었다.
검이 완성됐다. 형체가 없는 검이지만 검은 분명 그 자리에 있었다.
검신의 손에 들린 검이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맞춰 심상의 검도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검이 구불구불한 지네의 몸을 유려하게 갈랐다.
검신의 검도 그와 같은 검로를 그리며 움직였다.
같은 사도들 사이에서 농부라 불리는 남자는 사람의 인체가 이리도 아름답게 움직일 수 있음을 100년이 넘는 인생 속에서 처음 알았다. 검신의 검은 아주 느렸다. 그러나 눈 한번 깜빡일 시간 동안 하나의 검로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시간의 사도인 그도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한 움직임이었다.
검신의 검에 홀려 있던 남자는, 마찬가지로 홀린 듯 검의 끝이 향한 방향, 지네의 등으로 눈을 돌렸다.
지네의 등이 천천히 갈라졌다. 균일한 모양의 상처는 대륙의 판을 감고 있는 지네의 몸 정중앙을 지나고 있었고, 그렇게 조금의 오차도 없이 지네의 몸을 이등분했다.
검신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모자라는군.’
지네를 자르는 것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 근원은 자르지 못했다.
저 지네는 언데드다. 몸이 잘린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지네의 거구가 꿈틀거렸다. 산만한 다리가 수만 개다. 지네가 다리를 꿈틀거리자 둔중한 울림이 땅 전체에 퍼졌다. 우르르, 판이 진동했다. 지네가 몸부림칠 기미가 보였다.
남자가 검신을 살폈다. 검신은 눈에 띌 정도로 지쳐 있었다. 당연했다. 위원회가 건재할 때도 마땅한 방법이 없어 방치되던 지네다. 그런 지네를 일검에 반으로 갈랐다.
근원 세계가 망할 때까지 두고두고 화자될 위업이다. 남자는 검신이 생명력과 마력을 모두 소모해 죽거나, 최소한 한동안 행동 불능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검신의 모습을 보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듯했다.
지네의 내부는 암석 같은 빛깔이었다. 베인 부분이 스르르 저절로 달라붙고 있었다.
그냥 언데드도 몸이 잘린 정도로는 안 죽는다. 하물며 저건 수만 년을 존재해온 언데드. 시간만 있다면 상처를 회복하고 난동을 부리기 시작할 것이다.
남자는 검신이 남긴 결을 봤다. 그리고 검신이 남긴 검결을 따라 권능을 사용했다.
시간과 공간은 하나. 이론상이라면, 시간의 재앙은 공간 또한 다룰 수 있다. 그러나 그게 가능한 사람은 적다. 권능 사용에 상상과 체계적인 믿음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자신의 권능에 대해 아는 게 많을수록 권능을 더 잘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시공간의 개념에 대해 깨우친 시간의 신자는 매우 드물었다. 시공간을 이해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과학에서도 관련 분야의 지식을 얻은 자들 정도고, 무공처럼 몸으로 익힌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다.
그러나 가끔 공간을 다루는 데 타고난 시간의 신자가 등장하고는 한다. 그리고 공간을 직접 다루는 시간의 신자의 전투력은, 그 권능이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초월자를 긴장시킨다.
남자가 결을 찢었다. 달라붙어 가던 지네의 몸이 괴물에게 뜯어 먹힌 것처럼 이빨 자국을 남기며 사라졌다. 공간의 이빨은 지네는 물론 지네 근처의 땅까지 파먹었다.
검신이 남긴 결을 따라 이빨 자국이 길게 남았다.
공간째로 뜯긴 상처는 언데드도 쉽게 복구할 수 없다. 지네의 포효가 마력이 되어 퍼졌다. 지네의 몸부림에 땅이 들썩이며 판에 난 구멍이 쩍쩍 갈라졌다.
한동안 몸부림치던 지네가 움직임을 멈췄다. 대신 지네의 자기 복구 속도가 빨라졌다.
“농사를 지었다고?”
“직업에 귀천을 따지는 건 좋지 않습니다. 저 모습을 보니 회복까지 한 달은 걸리겠군요. 귀중한 시간 아닙니까?”
“부정은 못하겠군.”
주섬주섬 검신이 아공간 스크롤을 꺼냈다. 왼손으로 스크롤을 잡고, 스크롤의 반대쪽을 입으로 가져가는 검신의 동작은 상당히 힘겨워 보였다.
여기는 지저. 지상처럼 움직이고 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에도 막대한 마력이 필요한 장소였다. 검신의 마력은 자기 몸을 보호할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검기를 써서 스크롤을 자를 수도 없었다.
검신이 이빨로 스크롤을 찢었다. 그의 시선은 마지막까지 시간의 사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시간의 성녀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군.’
샬롯에게 한 명령도 그렇고, 저 시간의 사도도 그렇고. 위원회 사람들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 건 알겠는데,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는 불명이었다.
한 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
이성철은 꿈에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다. 소환된 사람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이성철은 근원 세계에 와서 정상적인 꿈을 꾼 적이 없었다. 꿈은 언제나 공포, 절망, 그리움, 우울과 같은 감정을 동반했다.
이성철의 경우 특히 더했다. 그는 다회차 회귀자였고, 그가 겪은 참사들의 횟수도 다른 사람들의 배였다. 회차가 늘어날수록, 강해질수록 위기에 빠질 일이 적다? 근원 세계에는 해당하는 일이 아니었다.
지구 최강이 암살당하고 위원회가 사라지고 바벨이 붕괴하는 세상이다.
사람의 목숨은 이 세계에서 너무 가벼웠고, 꿈은 외면하고 싶은 가벼움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신경도 쓰지 않던 꿈에 대해 이성철이 새삼 생각하는 이유는, 눈앞의 장면에서 오는 기시감 때문이었다.
회귀에 필요한 정보를 잊지 않기 위해 기억력을 높여주는 비법까지 가지고 있는 그는 기억하고 싶은 장면을 허공에 떠도는 먼지까지 머리에 새겨 넣는다.
이렇게 특징적인 장소가 있다면 분명 기억에 넣어뒀을 텐데도 이성철은 이 장소를 몰랐다.
그러나 어쩐지 연상되는 장소는 있었다.
한 달 넘게 이어진 꿈, 얼굴도 보이지 않는, 어머니라 생각되는 여자와 시장길을 걷는 꿈.
무작정 끌려온 장소, 아무것도 없는 벽에선 꿈에서 맡았던 시장의 냄새가 났다.
길의 끝에서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내심 이렇지 않을까 생각했기에 놀라지도 않았다.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들어가시죠. 성녀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나도 가야 하나?”
“가셔도 되고 안 가셔도 됩니다.”
메시스의 은근히 사람의 속을 긁는 말에 아키아가 홧김에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성철이 그 손목을 다시 잡았다.
“내가 열지.”
아키아의 손을 힘으로 떼어내고, 이성철은 점집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외견과 마찬가지로, 내부 역시 그의 기억과 같은 모습이었다.
상품이 진열된 진열대, 어둠을 밀어내는 약한 전구와 상품을 비추는 촛불.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또 다른 방으로 이어지는 문.
이성철은 그 문을 열었다.
문 너머의 광경 역시 꿈과 다르지 않았다.
어둠 속에 달랑 있는 탁자 하나와 불빛은 탁자 위의 촛불 하나. 탁자 중앙에 있는 수정 구슬과 탁자 앞에 앉아 있는 여인.
목에 걸고 있는 시간의 회랑이 뜨거웠다.
“근원 세계가 근원 세계했군.”
넋두리하는 이성철에게 여인이 말을 걸었다.
“어떤 점을 봐드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