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255
255
세 번째 프롤로그
프로만의 함정에 빠진 에이네는 혀를 차며 날아오는 벌레들을 쳐냈다.
초월자들이 정령과 과학을 상대로 천지를 갈아엎는 싸움을 벌였다.
광기가 사람을 덮친다.
폭주한 시간이 반복된다.
마법의 만능성이 사람을 향한다.
본능이 죽이라 소리친다.
죽음이 도처에 만연한다.
싸움은 끝나지 않고.
역병이 바람을 탄다.
문명은 퇴보하고.
세계는 수호자를 잃었다.
과학은 이미 설 자리가 없다.
마가 창궐하는 세상이.
되감겼다.
***
회귀는 한순간에 이뤄진다. 죽어 눈을 감았다가 뜨면, 앞에는 튜토리얼 교관인 오크가 기다리고 있다. 이성철에게 회귀는 그런 것이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심장을 관통한 시곗바늘로 몸 안에 있는 것들이 빨려 들어가는 듯하더니, 이내 시곗바늘에서 몸으로 여러 가지가 역류해 들어왔다. 그건 시간의 성녀가 미처 전해주지 못한 정보였다.
-다른 회차와 다르게 이번 회귀는 돌아갈 시간을 스스로 고를 수 있다.
반가운 소리였다. 매번 튜토리얼부터 시작해 기연 수집과 수련을 반복하는 게 지겹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리고 시간의 성녀의 말대로라면, 이번 회귀에는 운명에 막혀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난다.
의도치 않은 나비 효과는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두 명 정도. 함께 기억을 가지고 회귀시켜 줄 수 있다.
굳이 두 명을 지정한 점에서 누굴 고르라는 건지는 뻔했다. 이성철은 고민할 것도 없이 현과 에이네를 골랐다. 이건 몇 번을 고민해도 번복의 여지가 없었다.
시간의 성녀의 마지막 당부는 다소 의미심장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이 일어나고,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도 일어난다. 그리고 이미 상상하지 못했던 일은 일어났다.
앞으로도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날 거라는 암시일까, 아니면 사건은 이미 일어났으니 괜찮을 거라는 위로인가.
깊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이 시간도 무한하지는 않았다.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과거 어느 시간으로 돌아갈지 선택해야 할 때다.
‘튜토리얼은 논외.’
변수가 너무 많다. 현에게 들은 대로라면, 튜토리얼 시작 시점에 에이네는 아직 캡슐에 갇혀 움직이지도 못하는 처지다.
‘밈이 나타나기 전?’
이라고 해도 너무 광범위하고, 밈이 언제부터 활동을 시작했는지 모른다. 엘로렌의 태도로 봤을 때, 튜토리얼 시점에서도 밈은 활동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세계정세도 고려해야 한다. 위원회가 막장으로 치달은 후로 회귀한다면 여러 행동에 제약이 생길 거다. 위원회를 아무리 욕해도, 위원회가 있었기에 두 개의 재앙을 거치고도 근원 세계가 나름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었다는 건 사실이다.
‘프로만 리슈타인도 고려 대상이군.’
프로만 리슈타인이 일으킨 좀비 사태는 모든 사태를 급진적으로 바꿔놓았다. 좀비를 이용한 테러로 수많은 기업과 국가가 무너졌고, 대량의 사망자가 나오며 범죄율이 치솟았다.
에이네가 말하길 과학의 계산으로 근원 세계 인구 1할이 증발한 사태. 그마저도 분석에서 나온 수치이며 정확히 몇 명이 죽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조건을 맞춰가니 점점 윤곽이 드러난다.
위원회가 아직 제 기능을 하고 있으며, 좀비 사태가 일어나기 전이며, 기연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될 기반이 어느 정도 잡혔을 때로.
마지막으로.
‘이왕이면 세 명이 함께 있을 때가 설명하기 편하겠지.’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순간으로.
그건 회귀자의 직감이었다. 어쩌면 이때를 위해 시간의 성녀는 그를 본능의 성인과 만나게 한 걸지도 몰랐다.
이성철의 직관은 그의 기억에서 회귀하기 가장 적절한 시간을 찾아냈다.
목적지를 정하는 것과 동시에 허락된 시간이 다 되었다.
‘다섯 번째 삶 이후에 영원한 편안을 얻을 것이다.’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가운데, 이성철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이 산산이 부서지는 걸 보았다.
초월자. 이 세계의 법칙에서 벗어난 자. 그리고 불가와 도가에서는 그들을 두고 이리 말하기도 한다.
-고결한 정신으로 영혼의 굴레마저 벗어던진 각자(覺者).
초월자가 됨은 곧 영원한 안식의 약속인지라. 삶의 다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네.
역행하는 시간 속에서 이성철은 정신을 잃었다.
***
전신을 찌르는 불쾌감과 함께 이성철이 눈을 떴다. 몸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었고, 뒤에는 방금 빠져나온 것처럼 보이는 구멍이 있었다.
‘… 이런 일도 있었지.’
회귀 시점을 직접 정하긴 했지만, 몇 분 몇 초까지 구체적으로 지정하진 않았다. 이왕이면 몇 분 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이성철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불타 사라진 숲과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쓰러져 있는 우라누스… 마신의 사도가 보였고, 호르스와 양팔이 붙어 있는 검신도 있었다.
우라누스의 상처에 포션을 들이붓고 있던 현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이성철을 노려봤다. 가공할 살기에 검신이 검에 손을 가져갈 정도였다.
“너냐?”
이성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은 이성철의 반응을 보고는 길게 한숨을 쉬고, 다시 우라누스의 상처에 포션을 부었다.
“제길, 근원 세계가 근원 세계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현이 투덜거리며 포션을 마저 부었다. 그리고 각성제를 꺼내 들이켰다. 처음 한 회귀의 감상은… 아주 엿 같았다.
호르몬 분비로 인한 흥분이 싸늘하게 식었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게 이런 걸까. 단련한 육체와 쌓아둔 마력을 모두 잃었다. 필사의 각오도 식었다.
한 손으로 포션을 잡고, 현은 각성제부터 꺼내 마셨다. 몸 상태는 과거로 돌렸으면서 정신 상태는 그대로였다. 강화한 믿음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우라누스의 얼굴을 본 건 몇 번 안 되기에 회귀한 시점을 알아내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무의 일주일. 리센과 거래해 에이네가 마법을 배우는 조건을 대가로 쓰레기 청소의 미끼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달이 사라진 걸 봐선 이미 전부 끝난 후겠고.
‘다음에 있었던 일이…….’
회귀자도 아닌 현에게는 사소한 일을 모두 기억하는 습관도, 인과 관계를 본능적으로 파악하는 직감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너지! 이런 짓을 할 놈이 너밖에 더 있겠어!”
이날, 에이네가 서럽게 울며 이성철의 멱살을 흔드는 일은 없었다.
에이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이성철이 목을 부여잡고 헛기침했다. 회귀한 그의 몸은 에이네의 악력을 버틸 정도로 튼튼하지 않았다.
“대체 왜! 말이라도 해주고 하면 안 됐냐! 꼭 그렇게 말도 없이 내 노력을 허공에 날렸어야 했냐!”
꺼이꺼이 에이네가 땅을 쳤다. 사정을 모르는 현과 이성철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알뜰살뜰 아껴가며 어떻게 만들었는데 써보지도 못했어!”
절규에 가까운 외침에 비로소 둘은 뭐가 잘못됐는지 알았다. 에이네의 아공간 주머니 안에는 만들고 한 번도 쓰지 않은 무기들이 가득 있었다. 비장의 무기라며 꼭꼭 숨겨두고, 신줏단지 모시듯 모시던 무기들이었다.
이성철이 회귀하며 그 무기들도 모두 사라졌다. 한 번도 써보지 못한 새 무기들이.
억울함에 벌떡 일어난 에이네가 다시 이성철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갚아! 마력으로 갚으라고! 내 최종 병기가! 조금만 더 하면 완성이었는데!”
호르스와 검신이 현의 눈치를 보았다.
“전화, 안 받냐?”
“그렇군.”
검신이 아까부터 울리던 양자폰을 꺼냈고, 방금 왔던 문자가 생각난 호르스도 폰을 꺼냈다.
검신과 호르스를 보며 현은 고민에 빠졌다.
‘이제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회귀자라는 건, 생각 이상으로 골치 아픈 일이었다.
***
북대륙, 천마가 거하는 성이 사라졌다. 마력 폭주에 성이 가루가 되었고, 여파로 성벽이 무너졌다.
공터가 된 자리에서 천마가 숨을 몰아쉬었다. 주변을 둘러본 그녀는 빠르게 호흡을 안정시키고는 가장 익숙한 이름을 찾았다.
“어령. 우라누스.”
어령이 날아와 천마 앞에 무릎 꿇었다. 천마의 눈썹이 반달로 휘어졌다. 그녀가 부른 건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눈치 빠른 어령이 땅에 머리를 처박았다.
“우라누스는 지존의 명령으로 일주일 전 떠났사옵니다.”
“무슨 명령으로?”
“김우현, 그자와 관련된 것으로만 알고 있사옵니다.”
천마는 한동안 침묵했다. 어령은 천마의 용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침묵했다. 다만, 몸을 좀 더 웅크렸다. 부디 천마의 변덕이 자신에게 닿지 않기를 빌며.
“가봐도 좋다.”
“성은 어떻게 할까요?”
“다시 지… 아니, 필요 됐다.”
어령이 묻기도 전에 천마는 사라졌다.
실시간으로 위원회에 그 소식이 들어갔고, 위원회는 1급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천마의 위치 파악에 나섰다.
***
깨어난 로드가 사태를 파악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30분 남짓이었다. 단 30분 만에 드래곤 로드는 회귀라는 전대미문의 사태의 전말을 상당 부분 파악했다.
로드라 불리는 드래곤이 황금빛 육신을 일으켰다. 지난 세월은 그에게서 이름을 가져갔고, 이제 그에게는 로드라는 이름밖에 남지 않았다.
로드가 하늘을 바라봤다.
그가 깨어난 것과 같은 시간에 다른 재앙의 성인들도 이상 행동을 보였으며, 같은 현상이 몇몇 재앙의 사도들에게서도 관측되었다.
회귀에 대해 짐작 가는 구석은 있지만, 확신은 없다. 그가 확신하는 건, 다른 재앙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회귀했다는 것.
니르겐트라에게서 징조가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뤼필에게서도 징조가 나타난 것으로 미루어 회귀를 겪은 건 이 순간, 이 시간에 재앙의 영혼을 소지 중인 자들로 한정되는 듯했다.
‘최악이군.’
그게 맞다면 큰 문제가 두 가지 발생한다.
하나. 밈의 일당들, 최소한 유일한 밈의 신자는 회귀했을 가능성이 높다.
둘. 현시점에서 재앙이 아닌 이선이 회귀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세계는 밈에 대응할 가장 큰 패를 잃었다.
로드의 표정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곧 그 표정은 굳은 결의로 바뀌었다.
계획이 파기된 밈의 신자의 다음 수를, 그는 읽을 수 없었다. 다시금 이선을 데려와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시간, 본능, 죽음, 투신, 역병, 조율, 과학, 마신.
그와 함께 회귀했을 다른 재앙들의 행동을 모두 읽어내는 건 도저히 무리였고, 다가올 난세에서 의무를 다할 수 있다고 로드 자신도 확신하지 못했다.
로드가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세계의 끝을, 세상과 진리를 연결하는 통로를 부수기 시작했다.
천마가 사라졌고, 세계의 끝이 부서졌다.
회귀한 재앙의 신자들이 사태를 파악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계가 준동하는 역동의 시기, 곤륜 구석의 산간에 지어진 집의 마루에서 한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눈을 비비며 일어난 남자는 옆에 있던 술병을 잡고 꺾었다. 텅 빈 술병에서 술 몇 방울이 떨어졌다.
“제기랄! 내 이럴 줄 알았지!”
몽이 술병을 던지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