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254
254
종장, 그리고 서장.
초월자들이 동작을 멈췄다. 현이 그들 사이로 내려섰다. 현을 보고도 초월자들의 적의는 줄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적의는 현을 향했다.
“이래야 근원 세계지.”
현은 그걸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프라그하는 말했다. 전쟁에서 이긴 순간 바로 교주 척살에 들어갈 거라고.
그리고 현은 지금 검신의 앞에 있으며, 동시에 교주의 시체를 등지고 있다.
현이 흰색 연기가 피어오르는 부적을 들고 있는 프라그하를 보았다.
“영혼 봉인, 그걸로 교주의 영혼을 봉하고 끝낼 건 당연히 아니지?”
“교주의 희생은 의외였지만, 달라지는 건 없어.”
현이 근원 세계가 어떤 곳인지 알 듯, 저들도 근원 세계가 어떤 곳인지 안다. 영혼을 봉인했다고 교주 같은 자를 막았다고 안심하는 놈은 초월자가 되기도 전에 뒤통수 맞고 죽는다. 교주의 영혼을 봉인하는 건 기초 공사에 불과하다.
일단 교주를 봉인해두고, 그의 힘의 기반이 되는 구원교 자체를 세상에서 지워버릴 것이다.
학살 정도는 얼마든지 방관할 수 있다.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잡히지 않은 근원 세계에서 학살은 일상이었고, 현은 많은 학살을 보아 넘겨왔다.
하지만, 살아야 할 사람이 죽는 걸 방관한 적은 없다.
‘정정, 학살당하는 걸 방관한 적은 없다.’
죽은 사람이라 말하기에는, 그간 방치한 죽음들의 숫자가 뻔뻔하도록 많다.
현은 마력으로 뇌혈관에 심어둔 각성제 캡슐을 터뜨렸다. 미량의 각성제라도, 뇌에 직접 퍼지면 효과는 확실하다.
믿음의 스위치를 바꾸며, 현은 현 상황을 재인식했다.
싸움이 끝났고, 평화가 코앞이다. 그러나 여기 다시 불필요한 학살을 일으키려는 자들이 있다.
살 놈과 죽을 놈이 뒤바뀐다. 현의 믿음이 향하는 방향 또한 뒤바뀐다.
바닥났던 마력이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고작 마력이 회복되는 것 가지곤 여기서 도망칠 수도 없다.
‘백의 주술.’
이매망량의 왕에게 받았던 500년 분량의 백을, 수명을 해방한다.
‘마스터키.’
윌리엄을 죽이고 빼앗은 과학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한다. 전장에서 물러나던 달과 전함이 하늘로 복귀한다.
AI로 연산된 계획적인 싸움이 아니다. 모든 걸 내버린 과학의 화력이 다시금 연합군을 겨눴다.
‘정령신.’
천마신공 최고의 경지가 현의 몸에서 펼쳐졌다.
“죽을 건데?”
교주의 혼은 이미 몸을 떠났다. 영혼 봉인의 부적을 갈무리한 프라그하가 부적을 한 다발 꺼냈다. 옷 역할을 하던 부적걸이가 휑해지며 그녀도 반쯤 헐벗은 상태가 됐다.
“죽더라도. 지킬 건 지켜야지.”
하늘이 정령으로 뒤덮였고, 세 체의 정령이 현을 감싸듯 모습을 드러냈다.
***
이성철은 남자가 낯익은 얼굴들을 묶어 데려오는 걸 보았다. 사슬에 묶인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바깥에서 그들에게 간섭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사슬이 안과 밖의 시간을 완전히 나누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점점 사람이 늘어가는 걸 보며 이성철은 입술을 물어뜯었다. 기다리라는 말만 듣고 시간의 성녀에게 방치되고 얼마나 지났을까? 이 공간에선 모든 종류의 시계가 작동하지 않아 시간을 확인할 수도 없었다.
시간의 흐름을 모른다는 것만으로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신경질적으로 변한다. 이성철은 자신을 냉정하다 말하고 싶었지만, 극한 상황에서의 대처는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러니 초조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할 뿐이었다.
그 노력도 가슴에 구멍이 뚫린 윌리엄이 사슬에 묶인 채 한 곳에 놓여지고, 이어 다 죽어가면서까지 검을 놓지 않고 있는 검신이 들어왔을 때 깨졌다.
그는 몸에 사슬을 감고 있는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지?”
“놔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냐고 했다.”
“세 번 말하지 않겠다. 놔라.”
남자가 몸에 두른 사슬이 치렁거리며 울었다. 이성철이 마력을 끌어올려다.
쿠구구. 두 사람의 기세에 공간이 흔들렸다.
“그만. 난 싸워도 된다고는 안 했어.”
시간의 성녀가 걸어오며 말했다. 이성철과 남자가 거리를 벌렸다. 뒤로 점프한 남자가 그대로 허공에 녹아들었다.
“이건 뭐하는 짓이지?”
“운명이라는 단어에 대해 얼마나 알아?”
“모른다.”
현과 운명으로 묶인 적도 있고, 기억의 바다에서 필연이 무엇인지도 경험했지만, 여전히 이성철은 시간과 운명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 심오한, 다른 말로 지랄 같은 규칙은 이성철의 머리로 깨닫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운명, 운명의 장난에 죽은 시간의 화신이 최후의 힘을 짜내 세상에 새긴 진리의 하나. 그리고 바벨, 광기, 밈도 세상에 진리를 새겼지. 그것들과 운명의 차이가 뭐게?”
“모른다. 그럴싸한 대답이라도 기대했나?”
이성철의 차가운 태도에도 시간의 성녀는 개의치 않았다.
“추측이라도 좋아. 너는 그 답을 알고 있어. 몸으로 깨우치고 있지.”
침묵, 그리고 확신 없는 대답이 이어졌다.
“개념적 차이?”
“정답이긴 한데, 너무 광범위해.”
이성철은 벙어리가 됐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짚이는 부분이 없었다.
“힌트도 없이 답하긴 너무 어려웠나.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야. 정답은, 진리로 새겨지기 이전부터 그것이 진리로 존재했느냐.”
“바벨 이전에도 언어는 있었고, 광기 이전에도 광기는 있었다.”
“하지만, 존재가 진리를 나타내주진 않지. 언어의 존재가 바벨을 증명해주지 못하고, 광기의 존재가 진리로서의 광기를 증명해주지는 않아. 언어, 바벨, 밈. 이것들은 형이하의 개념을 형이상화해 진리에 새긴 거야. 이제 좀 감이 잡혀?”
“시간은, 시간 이전부터 존재해왔군.”
시간, 여러 가지로 정의 내릴 수 있지만, 그 모든 정의가 부정하지 않는 게 하나 있다.
시간은 ‘시간’이라는 단어가 생기기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탄생을 문명과 함께하는 언어와 밈, 그리고 사고하는 존재와 함께 탄생한 광기와는 다르다.
사람들이 시간을 부름이란, 우주 탄생 때부터 고고하던 연결성을 이르는 것이다. 사람이, 지성체가 시간을 칭하기 시작한 건 시간이 있고부터 십억 단위의 시간이 지난 후다.
태초에 빛이 있었고, 빛과 시간은 함께했다.
그 빛으로부터 언어를 사용하는 지성체가 태어나고 나서야 시간은 시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언어는, 광기는, 밈은 태어나고 사라질 수 있지만, 시간은 숨지도, 사라지지도 않아. 시간을 발아래 둔다는 능력자들도 그들이 시간 속에 있다는 건 변하지 않지.”
“시간이 다른 재앙과 다르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지?”
“태생부터 만들어진 피조물인 다른 진리와 이미 존재하는 시간을 손보기만 한 운명은 그 기반부터가 달라. 운명은 바꿀 수 없다는 말이 도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야.”
만들어진 진리들은 특별하다. 그것들은 세계에 색다른 법칙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것들의 한계는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다. 만들었다는 것은, 똑같이 부술 수도 있다.
시간은 아니다. 우주의 탄생과 역사를 함께해 온 그것은 부술 수도, 없앨 수도 없다.
과학은 시간의 상대성을 말할지 모르지만, 절대로 멈추지 않는 시간의 관찰은 시간의 화신이 시간 위에 올린 운명이라는 이름의 물결을 피할 수 없는 이유만을 더해준다.
“운명이 더럽게 세다는 건 알겠군.”
“맞아. 시간이 흐르기에 운명은 강하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도, 운명이란 장애물은 이미 그 흐름의 앞을 가로막고 있어. 이게 바로 몇 번을 반복해도 네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이유야.”
이미 너무 많은 운명이 정해졌기에,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바꿀 수 있는 미래는 정해져 있다. 장애물을 피해 강을 타고 내려가다 보니 갈 수 있는 길이 몇 개 남지 않은 것과 같다.
지나갈 수 있는 갈림길은 정해져 있고, 갈림길을 하나 지날 때마다 운명이라는 장애물이 다른 미래로의 길을, 가능성을 막아버린다. 회귀자 이성철은, 정해진 큰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미 그는 필연의 안에 있다.
그게 바로 시간의 화신이 ‘시간’에 부여한 저주이자 진리인 운명이다.
시간을 거스르는 자들에게 끝끝내 패하고 만 시간의 화신이 내리는 저주. 시간을 거스르는 자들을 위한 족쇄다.
“그러기엔, 이번 회차는 지난 회차들과는 지나치게 다르다.”
“장애물로 막혀 있다고 그 길을 지나지 못하는 건 아니지. 그냥 길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해. 아니, 드디어 바른길에 들어왔다고 할까? 그런 표정하지 마. 그렇다고 그 길이 의미 없었다는 말은 아니니까.”
이성철은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얼굴 근육이 잔뜩 굳어 있었다. 마력을 흘려 근육을 풀어주는 이성철에게 시간의 성녀가 다시 말했다.
“내가 죽는다고 다시 이 길로 들어온다는 보장은 없다는 거군.”
“정상적인 방법이라면 그렇지. 하지만 이번 죽음은 지난 죽음과 모든 게 다를 거야.”
시간의 성녀는 금지된 장난의 치기 전의 악동처럼 미소 지었다.
“시간을 죽이는 방법이 뭔지 알아?”
***
수만 년 전의 과거. 세 번째 재앙이던 시간의 화신은 죽었다. 시간 그 자체나 다름없던 화신이 죽은 것이다.
“재앙을 물리쳤다. 입에 담기는 쉽지만, 시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듣기엔 기가 찬 말이지. 시간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존재를 죽이는 방법, 상상이나 가?”
시간의 성녀는 이성철을 데리고 시간의 통로에 올라탔다. 그녀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성철도 몰랐다. 그저 시간의 성녀의 뒤꽁무니만 쫓았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모든 게 불타 사라진 숲이었다. 시간의 성녀는 아직 불씨가 살아있는 잿더미 위를 걸었다.
“시간의 화신은 어떻게 죽은 거지?”
“너 같은 사람들의 손에. 시간을 다루는 게 시간 하나였다면 시간의 재앙은 무적이었겠지만, 그렇게 둘 근원 세계가 아니니까.”
시간의 성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뒷모습은 그 이상은 묻지 말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발을 멈췄다.
시간의 성녀가 하늘로 손을 뻗었다. 이곳은 진리와 가장 가까운 장소. 운명과 가장 가까운 장소.
세계의 끝이 무너지고 남은 잔해. 사람이 진리와 이어졌었다는 흔적.
“운명이라는 이름의 장애물을 치워버릴 거야. 막혀있던 가능성을 열고, 한시적이지만 세계의 가능성을 해방한다. 네가 상상하던 과거가 기다릴 거야. 미래의 지식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세계. 하지만 명심해. 가능성의 해방이라는 건, 운명이라는 이름에 억눌려 왔던 다른 것들도 풀려남을 의미하니까. 가령, 나비 효과 같은 것들.”
시간을 나타내는 상징물들이 시간의 성녀 뒤에 허상으로 나타났다. 그녀의 작은 몸에서 폭발하듯 펼쳐진 상징물들이 거대한 나무처럼 우뚝 섰다. 시간의 나무는 꼭대기가 보이지 않았다.
묶여 있던 시간이 풀려난다. 시간의 화신이 죽고 처음 있는 일이다. 시간의 성녀는 권능을 뻗어 진리를 더듬었다.
다른 것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우주에서 가장 커다란 진리인 시간. 그 일부가 보였다.
점이란 미래를 보는 것만이 아니다. 미래를 읽고 과거에서 배워 슬기롭게 현재를 살아가기 위한 도구. 오랜 세월에 빛바랬지만, 그녀가 추구하던 점은 분명 그런 것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시간을 해방한다.
자, 세계여. 여몄던 옷고름을 풀어라. 시간아, 적나라한 알몸을 내게 보여라.
시간의 성녀가 운명을 걷어냈다.
그녀가 이성철에게 시곗바늘을 던졌다. 손잡이도 있고 날도 서 있는, 아주 날카로운 시곗바늘이었다.
“뭘 해야 할지는 알겠지? 가, 꼬마야. 네 마지막 삶을 향해.”
“난 꼬마도 아니고, 마지막을 향해 가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내 진짜 삶을 찾는다.”
점괘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열린 미래가 이 앞에 있다. 운명에서 벗어난 인생이 그를 기다린다.
이성철이 단검으로 심장을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