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927
927화 관련 있다
다음 날.
이번에도 몇 명의 병사들이 죽음의 기운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대장로는 그들을 죽이는 대신 편지를 한 통 적어 건네주었다.
그리고 해가 지고 다시 죽음의 세계로 넘어가게 되면 윤제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다시 아침이 찾아오고.
돌아온 병사들을 통해 대장로의 편지를 받아본 윤제는 또다시 크게 분노했다.
‘영제가 죽었으나 대영 신조는 결코 혼란에 빠지지 않았소. 얼마 전에 태자로 책봉된 대제희는 신하들과 여러 세력의 지지를 받아 등극을 앞두고 있소.
윤제, 당신이 무엇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이오. 만약 이 기회를 놓친다면 앞으로는 영영 그 어떠한 것도 시도조차 해 볼 수 없을 것이오.
환해를 통해 이 거대한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겠소. 다만, 몇 가지 조건이 있소.
첫째, 만법지서의 열쇠를 주시오.
둘째, 환해의 그 어떤 곳에도 손을 대선 안 되오. 우린 그저 길만 잠시 빌려주는 것일 뿐…….’
대장로는 꽤 많은 조건을 내걸었으나, 윤제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대장로의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엇보다 환해는 단 한 번도 탐해본 적조차 없다.
그가 원하는 건 애초에 환해에 없었으니까.
어느덧 기억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었고, 심지어 이성마저도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더 이상 많은 걸 고민하고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가장 중요한 생각은 오직 둘뿐.
복수와 국가 재건뿐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오직 대영에서만 이룰 수 있다.
대제가 공석인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승산 따위는 더 이상 살필 여유조차 없었다.
* * *
가희의 등극 대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진양은 홀로 저택 마당에 앉아있었다.
그의 몸에선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따금 한 번씩 빈틈을 보이는 듯하다가도, 또다시 완벽하게 철통 수비를 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같은 시각, 돼지는 문밖에서 한참 동안 진양을 훔쳐보고 있었다.
녀석의 눈동자는 심하게 떨려오고 있었다.
“아이고, 내 심장이야. 심상치 않은 자인 건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몇 개나 되는 경전을 익힌 거야? 게다가 이 수상한 기운은 분명 보천선전이잖아.”
몰래 진양을 훔쳐보던 돼지는 탕을 끓이는 일은 뒤로한 채 이곳에서 진양을 지키기로 했다.
물론 아무 이유 없이 지켜주려는 건 아니었다.
탕을 끓여서 봉인을 해제하는 것보단 진양이 봉호도군이 되는 것을 기다렸다가 봉인을 풀어달라고 하는 게 훨씬 더 빠를 것 같았기 때문에 남아서 지키기로 한 것이다.
어쨌든 돼지 녀석은 목을 쭉 내민 채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이곳을 지키기 시작했다.
그때, 진양의 머리에서 한 줄기의 하얀 빛이 튀어나왔다.
찬란한 빛은 금빛 문양이 새겨진 백옥 신문으로 변했다.
삼 척 남짓 되는 신문에서 현묘한 천음선악(天音仙樂)이 흘러나왔다.
듣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큰 깨달음을 얻을 것 같은 그런 소리였다.
한편 흘러나온 빛은 수천 개의 작은 문양으로 바뀌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백옥 신문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백옥 신문의 좌측 문에 오래된 기운이 가득한 고대의 글자가 나타난 것이다.
‘선(仙)’
이어서 진양이 천천히 눈을 떴다.
백옥 신문에 떠오른 글자를 확인한 진양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금세 다시 어두워졌다.
“겨우 잔본에 불과한데도 이 정도라니!”
진양은 마침내 보천선전 입문에 성공했다.
게다가 다행히도 백옥 신문은 더 이상 강화되지도 않았다.
다만, 무언가 새로운 힘이 하나 더 생겼다.
상당히 강력한 힘이었다.
조용히 계산을 하던 진양은 이내 한숨과 함께 생각을 날려버렸다.
계산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개방에 필요한 시간이 증가한 것이다.
‘나도 모르겠다. 일단 이렇게 하기로 한 이상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보천선전에 입문하기 무섭게 곧바로 효과가 나타났다.
진양은 흑옥 신문이 너무 강하여 열 수 없다는 단점을 역으로 이용하여 보천선전을 사용해 보았고, 곧바로 개방 난이도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게다가 보천선전이 강해질수록 그 난이도도 훨씬 더 많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건 흑옥 신문 자체를 약하게 만들어 목적에 달성했다고 보긴 어려웠다.
솔직히 진양 자신조차도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 역시도 잔본을 자신의 도기에 스며들게 하여 이러한 목적을 이룬 것뿐.
보천선전 잔본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양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도로 향했다.
이제 하루 뒤면 등극 대전이 열린다.
오늘 딱 맞춰서 보천선전 입문에 성공한 건 온전히 운이 좋았을 뿐이다.
* * *
신임 대제 등극 대전을 위해 특별히 새로운 제단이 설치되었다.
궁성 남쪽에 있는 곳으로, 이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었다.
사방에 흩어져있던 관리들이 모두 이도로 몰려들었다.
뿐만 아니라 각 세력을 대표하는 자들도 전부 참석했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추후에 크게 밉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올 만한 사람들은 전부 다 미리 도착을 하여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한편, 진양은 장포를 입은 채 엄숙한 표정으로 장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직접 돌아다니며 아무 문제가 없는지 점검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위의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어서 끝없이 이어진 긴 복도의 형상이 흐릿하게 눈앞에 나타났다.
진양은 발걸음을 멈추며 동술을 발동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진양이 입을 열었다.
“대장로님, 당신이 몰래 황실 묘지로 숨어든 사실을 위 대인께 말씀드리지 않은 건 오직 대영의 안정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진심으로 대영 신조와 척이라도 지시겠다는 겁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양의 몸에서 강력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잔잔한 호수에 물결이 일어나듯 기운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유명무실한 신문 고수의 기운이었다.
그때, 복도 기둥 뒤에서 머리가 새하얗게 새어버린 구부정한 노인이 걸어 나왔다.
“진 대인, 접니다.”
진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어서 재빨리 기운을 다시 거둬들이며 포권을 취했다.
“어르신이셨군요.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그는 줄곧 영제의 곁을 지켜온 태감이었다.
오랜 시간 대제의 곁을 지킨 사람답게 내시들 중에서도 감히 그에게 대항하거나 불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그를 만나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출 정도였다.
그가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까지 그가 직접 손을 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영제를 섬겼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시지요.”
“괜찮습니다. 다만, 오늘은 다른 일로 이미 많이 지친 상태라는 점에 대해선 미리 양해를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양이 포권을 취했다.
태감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진양의 주위는 여전히 안개가 짙게 깔린 것처럼 모호했다.
눈앞에 보이는 긴 통로에는 태감이 서 있었기 때문에 뒤를 볼 수가 없었다.
“수만 년 이래 단 한 번도 이토록 짧은 시간 내에 태자에서 대제로 등극했던 일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여인이 대제가 되는 일은 더더욱 말이지요. 이는 음양의 조화를 완전히 뒤집는 일로…….”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감히 한 말씀 드리자면 이런 식으로 음과 양의 조화를 가르는 건 이미 상고 시대 이후로 완전히 사라진 줄로 알고 있습니다만…….”
태감은 고개를 들며 진양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이 진양의 한마디에 완전히 뒤섞여버렸다.
왠지 모르게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진양의 머리통을 한 대 갈겨주고 싶은 심정마저 들었다.
하지만 진양은 그런 태감의 생각을 아는 듯 모르는 듯 태연하게 물었다.
“아직 더 물으실 게 남아있으십니까?”
태감은 한참의 침묵 뒤에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진 대인을 오랫동안 살펴보았었습니다. 과거 대제희 전하께서 함정에서 나와 목숨을 건지시고, 또 현재의 위치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진 대인의 공이 컸던 것으로 압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황권 다툼이라는 것이 본래 이런 것이니까요.
다만, 한 가지만 묻고 싶습니다. 폐하께서 붕어하신 일이 진 대인과 관련이 있습니까?”
태감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진양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진양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당연히 관련 있죠.”
진양이 대답하자마자 태감의 눈에선 금방이라도 불이 뿜어져 나올 기세였다.
하지만 진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뿐만 아니죠. 저 외에도 모든 사람과도 관련되어 있죠. 감히 말씀드리건대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어르신께서는 태자와 조왕, 주왕을 포함한 모든 방해꾼들을 몰아내고 대제희 전하를 태자로 만든 게 제 음모일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폐하의 일까지도 말이죠.
하지만 대황 전체를 통틀어 감히 폐하께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물며 음모 따위로 폐하를 시해하는 게 가능할 리 있겠습니까? 다만, 폐하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종적을 감추셨습니다. 심지어 윤제까지 대놓고 활보하고 다니는 마당인데. 이렇게 되면 폐하께선 이미 오래전부터 대황을 떠나셨다는 뜻이 되겠죠.
전하께서 오늘의 자리에 오르게 되신 것은 확실히 제 공이 큽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저도 인정합니다. 허나 한 가지 간과하고 계신 사실이 있습니다. 이 세계는 결국 주먹이 센 사람이 곧 법이라는 점입니다. 게다가 어르신께선 전하의 천부적인 자질, 능력, 그 외에 많은 요소들을 전부 배제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결국 무엇보다 중요한 건 현재 대제의 자리를 이어받기에 가장 적합한 건 오직 전하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 짧은 시간 내에 이러한 목적을 이룬 유일한 사람이 전하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많은 이들이 전하를 지지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고, 외부인들이 감히 불필요한 참견을 하거나 방해를 하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설령 제가 음모를 꾸민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만한 실력을 갖췄다는 가정 하에나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실력을 갖췄다고 해도 감히 폐하를 시해하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생각하고 계신 대로 이 모든 일은 저와 전하가 함께 한 일입니다. 폐하의 본존과 제군법신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린 것. 제가 계획하고, 전하께서 실행으로 옮긴 덕에 가능했던 것이죠.”
여기까지 말을 마친 진양은 조용히 태감의 눈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