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92
92화
우수분임
“준철 씨!”
발표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최고였어요. 진짜 수고 많았어요!”
신소희가 흥분을 주체 못 하며 말을 걸어왔다.
칸 위원장의 날렵한 질문까지 잘 받아치지 않았나.
짧은 발표였지만 가장 돋보이는 발표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모두 다 같이 한 거죠, 뭐.”
“그래도 준철 씨 없었다면 꿈도 못 꿨어요.”
신소희가 호들갑스레 말하자 옆에 있던 분임들도 가세했다.
“그분 질문 진짜 무섭더라고요. 자기 논문 인용한 게 비위 맞추려 한지 알고 공격적으로 질문했잖아.”
“진짜 십년감수했어요.”
“그래도 준철 씨 덕분에 잘 넘어갔어요. 준철 씨가 웹튜브 수사팀이었다는 거 내가 왜 잊고 있었지.”
신소희는 아직도 여운이 가시지 않는지 목소리 톤이 높았다.
준철도 흐뭇하게 웃었다.
“다 우리가 잘한 거죠. 칸 위원장의 박사 논문, 교수 재직 시절 논문 다 찾아 준 게 여러분들인데.”
“근데…… 우리 이번에 만회한 거 맞겠죠? 확실히 칸 위원장 반응은 좋아 보였는데.”
“당연하죠. 본인 입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다른 국장들 얼굴도 심상치 않았어요. 우리 확실히 만회한 것 같아요.”
비단 칸뿐이었겠는가.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이 흥미롭게 지켜본 발표였다. 준철이 경험담까지 넣어 규제 근거를 댔을 땐 곳곳에서 작은 탄성이 들렸다.
분명 지난번 분임토론을 다 만회한 발표였으리라.
숙소에 다시 도착했을 땐 준철도 다리에 힘이 풀렸다. 다사다난했던 하루이지 않나.
꼭 미국 대통령 앞에서 발표를 한 것 같은 기분이다.
“다들 쉬세요. 이제 남은 일정은 없다 하니 공부 그만 시킬 거예요.”
“그러게요. 모두 고생하셨어요!”
그렇게 모두 돌아갈 때, 신소희가 다가왔다.
“준철 씨 바로 안 들어갈 거죠?”
“예…… 카페에서 시간 좀 죽이다 가려고요.”
“아이고- 왜 하필 그 재수탱이랑 룸메가 돼서.”
“여러 의미에서 운명인가 봐요.”
준철이 어깨를 으쓱하자 그녀가 웃었다.
“참 사람이 참 간사한 것 같네요. 막상 입소할 땐 그냥 무사히 나가는 게 목적이었는데 이젠 나도 좀 욕심이 나요.”
“우수분임이요?”
“네. 혹시 준철 씨도?”
“저는 그냥 망신 안 당하고 끝내서 좋은데요.”
신소희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참 알면 알수록 모르겠는 사람이네요.”
“네?”
“사실 편견이 좀 있었거든요. 올해의 공정인상 탈 정도면 이번 발표에 사활을 걸 거라는. 알잖아요. 다들 상대평가인 거 안 순간부터 예민해진 거.”
준철도 공감했다.
1차 분임토론 이후 살벌해진 분위기.
입소할 때 툴툴거리던 사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자발적으로 공부를 했다. 지하 카페가 스터디카페가 될 정도로.
“전 사실 진급 욕심이 없어서…….”
“세상에 자기 입으로 진급 욕심 있다고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근데 준철 씨 말은 진심인 것 같네요.”
그녀가 준철의 어깨를 툭 쳤다.
“괜히 얄밉다. 자기는 욕심도 없는데 상도 타고, 사건도 잘 해결되고 그런다는 거 아녜요.”
준철이 쿡 웃었다.
“근데 우리 남은 연수 땐 뭐 하죠? 아직 3일 남은 걸로 아는데.”
“현장 답사한대요. 경주 유적지 돌아다니면서 자유시간 줄 거라는데 사실상 노는 거죠.”
“자유시간이군요…… 근데 이미 수학여행 때 많이 와 봤는데…….”
“그래도 이게 어디예요 공부 안 시킨다는데.”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아무튼 어려운 발표 맡아 줘서 너무 고마웠어요.”
“네. 신 팀장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아무리 재수탱이가 미워도 너무 늦게 들어가지 마요. 감기 걸릴라.”
“네, 감사합니다.”
신소희는 묘한 여운을 남기며 숙소로 돌아갔다.
***
그래도 양심은 있는 놈들이다.
간담회가 끝난 뒤부턴 지옥 연수의 일정이 많이 너그러워졌으니.
이튿날부턴 현장 답사가 시작되었는데 사실상 자유시간이었다.
고등학교 때 숱하게 봐 왔던 불국사는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였다. 문화유산 답사도 좋지만, 과거의 추억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어 감회가 새로웠다.
-다음은 한국에서 최초로 시행된 반독점법 규제의 현장입니다. 이곳이 통일신라 시대의 경시(京市)거든요. 지금으로 따지면 시장.
“네.”
-근데 흉년에 귀족들이 곡식을 매점매석해서 폐해가 많았어요. 그러던 게 선덕왕 4년. 큰 기근이 들었을 때 전국적으로 매점매석을 금하고, 구휼 정책을 폈습니다. 따지고 보면
독과점과 담합을 규제한 거죠.
그게 한국 역사 문헌에 나와 있는 최초의 반독점법 규제라고 한다.
갖다 붙이는 거 하나는 예술이다.
-공식 일정은 여기까지입니다. 아마 옛날 생각 많이 나고 감회가 새로울 겁니다. 자유롭게 시내 관광하시고 집합 시간까지 모여 주세요.
“네-!”
“간사님. 혹시 시내 돌아다녀도 되나요?”
-물론이죠. 집합 시간만 지켜 주세요.
자유시간의 가장 좋은 점은 술도 마실 수 있다는 거다.
사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다 혼기가 꽉 찬 사람들 아닌가? 경쟁 관계에서 다시 동료로 돌아오니 살랑살랑한 분위기가 꽃 피웠다.
“저기- 적당히 돌아보고 술이나 한잔하실래요?”
“원래 진짜 해외 연수 가면 이곳저곳 많이 돌아본다는데.”
“아, 그래요. 우리끼리 뒤풀이 한번 합시다.”
낯간지러운 대화가 들려올 때, 분임들이 준철을 찾았다.
“마침 여기 있었네. 준철 씨. 우리 불국사 앞에서 기념사진 한 번 찍어요.”
“맞아요, 선배님. 마지막 발표 너무 수고했어요.”
분임들은 긴장이 풀렸는지 한껏 상기된 얼굴이었다.
“사진 좋죠. 찍어 달라고 할까요?”
“네-!”
그렇게 불국사 앞에서 한 방.
신라 최대의 유통시장이자 민심의 바로미터로 꼽혔던 경시에서도 한 방.
경주 산골에서도 한 방.
“우리 이거 먹으러 가 볼래요? 이게 경주에서 제일 유명한 갈비래요.”
“좋죠.”
버지니아의 시원한 해변, 훌리건, 햄버거 같은 건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익숙한 경주에서 노니니 다시금 수학여행을 온 것 같았다. 다른 의미로 기분이 환기되었다.
“우리 기념품도 하나 사 가죠.”
“네.”
그렇게 뿔뿔이 흩어질 때, 신소희가 말했다.
“저기 보니까 면세상품도 팔더라고요. 핸드백이나 클러치 같은. 준철 씨 필요 없어요?”
“저는 괜찮아요. 가방 들고 다녀서.”
“아니 뭐 사 뒀다가 여자 친구 주고 그럴 수도 있죠.”
“……없어서.”
“아, 그렇구나.”
그녀는 피식 웃으며 준철의 손을 끌었다.
“그럼 우리 분임들 저녁에 시내 나와 볼래요? 경주 야시장이 아주 볼거리가 많대요. 내가 하나 기념품으로 하나 사 줄게요.”
***
현장 답사까지 마치자 어느새 해단식이 다가왔다.
긴장이 반쯤 풀렸던 연수자들도 오늘만큼은 사뭇 긴장한 얼굴이었다.
이번 연수의 대미를 장식할 우수분임 발표가 바로 오늘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받을까……?”
“6조 아니야? 칸 위원장이 제일 흥미롭게 봤던 거 같은데.”
“에이 그래도 6조는 분임토론 때 너무 깨졌잖아.”
“맞아. 내 생각엔 구 팀장네 같은데? 그쪽도 칸 위원장 반응 나쁘지 않았어. 분임토론도 압승이었고.”
분임토론 때 깨졌던 6조의 드라마틱한 반전이냐, 아니면 안정적이었던 구 팀장네의 수상이냐.
사람들은 오늘 수상자가 누구일지 쑥덕공론을 펼쳤다.
“말해 뭣해. 이건 무조건 우리가 받아.”
“솔직히 우리도 칸 위원장 반응 나쁘지 않았어. 수업 때 참여도 우수했고.”
반면에 이미 자신들의 수상할 확신하는 이도 있었다.
“막말로 저것들이 타면 그게 교육이냐?”
“맞아. 아주 칸 위원장 스토킹을 했더라. 논문 다 뒤져 가지고 이쁨 한번 받아 보려고.”
“속 보이는 새끼들. 누군 그 짓 할 줄 몰라서 안 했나.”
그들은 6조를 째려보며 혀를 찼다.
구 팀장은 오늘따라 유난히 더 친밀해 보이는 신소희와 준철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놈들에게 망신을 한 번 당했으니, 오늘에서라도 그 굴욕을 갚아 주고 싶었다.
-지금부터 해단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해단식이 시작되었고, 모두들 긴장한 얼굴로 착석했다.
특별히 오늘 이 자리는 새로 부임한 최철호 공정위원장이 참석한 자리였다. 우수분임에게는 그와 칸 위원장 명의의 상패가 주어질 예정이었기에.
최 위원장은 단상에 올라 연수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기대와 많이 다른 연수였을 텐데, 여러분 모두 훌륭한 자세를 보여 주었습니다. 공정위를 대표해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어려운 자리에서 모두가 다 자기 역할을 해 주었다. 내색하진 않아도 정말 기특하고 대견한 팀장들이다.
최 위원장의 치하가 끝났을 땐 드디어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다.
-아울러 특별히 수고해 준 분임에게 공정위원장, 연방거래위원장의 감사패를 전달드리겠습니다.
우수분임을 발표하겠단 얘기.
그는 조금의 뜸도 들이지 않고 바로 발표했다.
-6조입니다.
수상자가 발표되자 곳곳에서 박수가 나왔다.
결국 6조의 드라마틱한 승리구나.
구 팀장네가 수상 못 한 게 의외였지만 그래도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칸 위원장이 특별히 인상적이었다고 언급할 정도의 발표였으니.
모두가 축하 박수를 칠 때 구 팀장은 세상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상으로 나와 주십쇼.
준철은 단상으로 나가며 구 팀장의 얼굴을 살폈다.
개의치 않은 척하지만 이미 불만 가득한 얼굴. 자신들이 탈 거라고 확신하던 게 분명하다.
그 모습을 보자 묘한 쾌감이 들었다.
그때 당한 걸 이렇게 갚아 주는구나.
6조는 감격에 젖은 얼굴로 위원장님과 악수를 나눴다.
“이준철 팀장?”
“아, 예.”
“훌륭한 발표해 줘서 고마워. 빅테크 강력 규제안은 나도 흥미로웠어. 특히나 칸 위원장이 인상적이었다 하더군.”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위원장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두들겼다.
“마지막으로 청렴인 선서와 함께 연수를 마치겠습니다. 6조 대표자 나와 주십쇼.”
준철은 연수자들을 대표해 청렴인 선서장을 들었다.
입소식 때 대표였던 구 팀장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선서.
“선서. 나는 자랑스런 공정인으로서 규제에…….”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해외 연수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