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me of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285
284화 패배(4)
-Chai : GG.
이 짧은 채팅이 화면에 떴을 때, 경기장은 파란에 휩싸였다.
“우와!”
“진짜 이겼어!”
“박영호 완전 미쳤어!”
32강전에서는 이신까지 꺾었을 정도로 무서운 기량을 뽐내던 도전자.
그런 차이가 아직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한 채 무대에서 퇴장하는 순간이었다.
-두 선수 모두 멋진 경기력이었습니다. 1세트, 2세트, 3세트 모두 빼놓을 수가 없는 명경기였습니다!
-예, 아주 치열한 승부였지만 모든 승부마다 박영호 선수가 조금씩 앞섰습니다. 그 결과는 3 대 0! 철벽괴물 박영호가 오늘 아주 제대로 사고를 쳤네요.
-차이 선수는 정말 아쉽겠습니다. 오늘 보인 경기력이 형편없었냐 하면 그건 절대로 아니거든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쩔 수 없습니다. 우승을 노리고 여기까지 달려왔고, 실제로 그에 걸맞은 실력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차이 선수의 여정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차이는 키보드와 마우스 등을 챙기고 쓸쓸히 무대를 떠났다.
복도에 들어서니 무대의 쩌렁쩌렁한 환호성이 멀게 느껴진다.
‘끝났다.’
줄곧 동경했던 선생님과의 대결.
그리고 우승.
꿈꿔왔던 영광들이 한순간에 하룻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렸다.
선수대기실 앞에 이르렀을 때, 이미 이신과 박진수는 밖에 나와 있었다.
“가자.”
“네.”
차이는 이신의 뒤를 따랐다. 함께 걸으며 박진수가 어깨를 툭툭 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별반 말이 없었는데, 차이를 배려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무슨 말을 해줘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신은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할지 몰라서 내심 당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니 차이는 까닭 없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박진수.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였다고…….”
차이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변명할 수가 없어요. 오늘은 제 100%였어요. 그런데도 졌어요.”
“내가 보기에도 오늘 너 좋았다. 경기 끝나고 관객들 함성 지르는 것 들었지?”
“네, 다들 아주 좋아서 죽겠던데요.”
차이는 한숨을 쉬며 투덜거린다.
“아주 난리였지. 그 정도로 오늘 경기 대단했어. 전략이나 판단이나 잘못한 게 없는데, 박영호가 너무 잘했다.”
“선생님은 제가 왜 진 것 같으세요?”
차이가 물었다.
이신의 대단은 간단했다.
“기본기.”
“기본기요?”
“순간순간에 나타나는 컨트롤에서 차이가 갈렸어. 그 정도 반응 속도로 흑안개를 펼치면, 인류가 이기기 힘들지.”
오늘 박영호가 보여준 피지컬은 장양과 견주어도 될 것 같았다.
거기에 상식을 초월한 판단력.
차이가 굳건하게 방어 태세를 갖춰놓은 곳으로 박영호는 그대로 뛰어들었다.
장양이었다면 계산상 뚫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박영호는 그렇게 했고, 해냈다.
어째서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때때로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최고가 된다.
그렇게 박영호는 차이를 꺾고 결승에 올라와 이신의 도전자가 되었다.
“지금쯤 승자 인터뷰하고 있겠죠?”
차이가 물었다.
“그럴걸.”
“보고 싶어요. 박영호 선수가 뭐라고 말하는지요.”
“그걸 뭐 하러 봐? 보지 마.”
박진수가 핀잔을 했다.
하지만 차이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경기 생중계에 접속했다.
결승 진출자인 박영호가 승자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캐스터 이병철이 물었다.
-박영호 선수, 오늘 놀라운 플레이를 보여주었는데요, 승리의 비결이 뭐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적극적으로 승부에 나섰던 것이 주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컨디션이 아주 좋았습니다.
-1년 만에 다시 결승 진출을 하게 되셨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무패 결승 진출이죠? 이신 선수 이후로 그런 일을 해낸 선수는 박영호 선수가 처음인데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랬다.
박영호는 단 한 세트도 지지 않고서 결승에 진출하게 되었다.
괴물전 스페셜리스트라 불리는 존과의 16강전.
꾸준한 기량을 자랑하는 쌍성전자의 주전 남궁민재와의 8강전.
그리고 4강에서는 강력한 우승후보로 손꼽혔던 차이까지!
박영호의 개인리그 무패행진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엄청난 활약이었다.
-아주 기쁘고…….
박영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을 하다가 말았다.
잠시 후, 계속 말을 이었다.
-이제 제가 역대 최고의 도전자라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와아아아아!!”
“박영호! 박영호! 박영호!”
그 한 마디에 함성이 쏟아졌다.
“이제 제가 e스포츠 역사상 가장 강한 프로게이머였다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개인리그 프로모션 영상에서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군 이신의 한마디.
박영호는 그 유명한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그럴 자격이 있었다.
2020년 전반기 개인리그 우승자이며, 무패 결승 진출까지 달성!
이신을 한 번 패배시키기도 했던 차이까지 3-0으로 완파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실로 가공할 기세였다.
지금의 박영호는 아주 확실하게, 지금껏 신의 권좌에 도전했던 선수들 중 최고의 도전자였다.
그렇게 인터뷰가 끝났다.
-이렇게 이신 선수와 우승을 놓고 겨룰 상대는 박영호 선수로 낙점되었습니다.
-이신 선수와 차이 선수의 사제전도 기대를 모았습니다만, 또 요즘 가장 핫한 매치가 바로 신영전 아닙니까?
신영전이란 이신과 박영호의 매치를 뜻했다.
두 사람이 붙었다 하면 언제나 명경기가 나왔기 때문에 결승전의 흥행은 보장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려 차이 선수까지 3 대 0으로 꺾고서 결승 진출을 한 철벽괴물 박영호 선수! 이신 말고는 내 상대가 없다고 선언하는 듯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그래봤자 결국 이신이 이기고 우승하지 않겠느냐 뭐 그런 분위기가 보통이었습니다만, 이제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늘 그렇듯이 신이 이기겠지 하는 그런 안일한 속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의 박영호 선수는 기세가 오를 대로 올랐거든요!
“꺼.”
이신이 툭 내뱉었다.
차이는 영상을 종료하고 스마트폰을 힘없이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말이 없었다.
의연하게 패배를 받아들이고 패인을 묻던 차이.
그러나 아직 어린 차이였다.
우승이라는 목표를 위해 뼈를 깎는 훈련을 해왔던 열정 넘치는 소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피부에 와 닿기 시작하는 패배라는 좌절감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괜찮아, 질 때도 있는 거야.”
박진수는 그런 차이를 다독였다.
“너무 괴로워요.”
“당연히 괴롭지. 근데 뭐 어때?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거지. 지면 울다가도 이기면 웃고, 그러면 되는 거야.”
“다음에 다시 기회가 있겠죠?”
“당연하지. 그저 게임일 뿐이야. 졌으면 다음에 또 도전해서 이기면 되는 거야. 그래서 게임이 재미있는 거지. 넌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이야. 누가 데뷔 첫해에 우승하고 주구장창 이기기만 할 수 있겠어?”
“저기 있잖아요.”
차이는 불만스럽게 보조석 쪽을 가리켰다.
거기에 데뷔 첫해에 개인리그와 월드 SC 그랑프리를 무패 우승하고 지금까지 다전제 대결에서 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박진수.
그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궁색하게 대답했다.
“쟨 그냥 미친놈이고. 대신 성격에 장애가 있잖아.”
그 말에 차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고 있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왔다.
2021년 전반기 개인리그, 4강전 2경기.
스코어 3-0.
차이는 4강에서 탈락했다.
***
Kaiser VS Runner.
이신과 박영호의 결승전 대결이 성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차이도 이신의 제자로서 유명인사이긴 했지만, 세계 e스포츠계에서 은메달리스트인 박영호만큼의 인지도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을 촬영하면서 붙었던 명경기가 자막과 함께 전 세계 팬들에게 팔린 탓에 박영호는 이신의 맞수로 적합하다고 세계 팬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도전자!
그러한 타이틀이 세계 각국의 e스포츠 뉴스를 장식하면서, 한국의 국내 개인리그 결승전이 세계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계권을 가진 올도어는 부사장 지수민의 주도로 결승전 유료 생중계를 전 세계 팬들이 볼 수 있게 조치를 취했다.
바로 중국과 미국으로부터 해설진을 고용한 것.
영어와 중국어로 된 해설을 따로 결재해서 볼 수 있게 한 조치였다.
영미권과 중국어권의 e스포츠 팬을 노린 것인데, 특히나 중국과 미국은 현재 이신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져 있었다.
이신이 중국 진출에 대한 여지를 보이는 바람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중국 팬들이 이신을 데려오라고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당연히 중국의 수많은 프로팀이 이신을 영입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는 기세였다.
그러자 화가 난 쪽은 바로 미국.
현존하는 가장 큰 e스포츠 시장은 미국이었으나, 중국이 엄청난 시장 규모와 자금으로 따라잡는 실정.
그런 판에 e스포츠의 상징인 이신이 중국으로 가버린다면 그 상징성은 단지 선수 하나의 문제 정도가 아니었다.
때문에 중국에 갈 바에는 우리에게 오라며 엄청난 이적료와 연봉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아무튼 올도어는 이신으로 인해 세계의 이목이 한국에 집중된 기회를 아주 제대로 활용하겠다는 의지가 뚜렷했다.
영어와 중국어로 결승전을 중계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세계 팬들이 환호했다.
한편 4강전 2경기가 치러진 다음 날, 이신과 박영호는 협회의 부름을 받았다.
결승전 홍보를 위한 촬영과 경기 전 인터뷰를 위해서였다.
“아 쫌, 따로 찍고서 같은 눈높이로 붙이면 안 돼요? 이게 뭐야 이게!”
고성방가 하듯이 투정을 부리는 사람은 바로 박영호.
왜냐하면 포토그래퍼가 서로 마주보는 콘셉트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노려보자, 키의 차이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이신이 우월하게 박영호를 내려다본 형태가 되었다.
외모까지 감안하면 이미 싸우기 전에 진 모양새였다.
“이 양반이 지금 날 오만하게 내려다보잖아요. 싸우지도 않았는데 이미 내가 져 있어?! 나 이렇게는 못 찍어! 안 해, 안 해.”
박영호는 다 필요 없다는 듯이 손을 마구 휘저었다.
촬영장의 스태프들이 다들 입을 가리며 킥킥거리는 가운데, 포토그래퍼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발판을 드릴 테니까…….”
“컨셉이 개그예요?”
“아, 아뇨, 물론 사진은 상반신만 나와서…….”
“그냥 제가 마음에 안 들죠? 차이가 이기고 올라왔으면 둘 다 잘생겨서 그림 참 좋았을 텐데 이 새낀 뭔가 싶은 거죠?”
“아유, 그런 말씀을……!”
드립을 치며 촬영장을 웃음바다로 만드는 박영호.
사진 촬영을 하는 모습도 결승전 프로모션 영상에 활용되기 때문에 박영호가 일부러 재미있는 장면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사진 촬영을 마친 뒤에는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어제 나 어땠어?”
박영호가 옆에서 물었다.
“잘하더라.”
“어때, 형은 날 이길 수 있겠어?”
슬쩍 도발을 날렸다. 하지만,
“어.”
이신은 덤덤히 대꾸했다. 1초의 고민도 없이 튀어나온 대답이라 박영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